베트남 3 - 중국 남한군의 침략을 물리치고 응오 왕조가 세워져 독립국이 되다!
기원전 7세기 경에 남중국에서 백월족의 락비엣 (駱越) 이 남하해서는 북베트남 홍감 삼각주 퐁쩌우에
"반랑국 (文郞國)" 을 세웠는데.... 진 (秦) 나라가 통일전쟁을 하는 과정에서 중국 남부에서 남하한
백월족의 한 무리가 어우비엣 (甌越) 을 세운후 기원전 258년 반랑국을 침공해 “어우락” 을 세웁니다.
진(秦) 나라가 진승과 오광의 반란으로 혼란스러워지자 조타(趙佗 찌에우다) 는 남해군을 장악한후 계림군과
상군을 합병해 나라 이름을 남비엣 (南越 Nam Viet), 수도를 번우(광저우) 에 정하고 왕위에
오른후 어우락을 침략해 쟈오찌(交趾) 와 끄우쩐(九眞) 2개 현을 설치하니 5개 군에 영토는 만리에 달했습니다.
한무제는 기원전 111년에 누선장군 양복과 백전노장 노박덕을 보내 남월을 멸망시킨후 남쪽으로 진격해 2 군을 점령
하니 베트남은 한나라 관리의 가혹한 수탈과 지도자 살해에 분노한 쭝자매가 반란을 일으켜 베트남을 장악했으나
내란에서 최종 승리해서 후한을 건국한 광무제는 마원 장군에게 3만 정에병을 주어 반란(독립운동?) 을 진압합니다.
패한 쭝자매는 메링으로 물러나 1년간 사투를 벌이다가 홍강 강물에 투신했지만 여자 장수인 도즈엉은 은예안으로
후퇴해 진지를 구축해 끝까지 싸웠고, 퐁티찡은 한팔로는 아기를 안고 다른 손으로는 칼을 들고 싸웠으며 밧난
공주는 큰 공을 세운후 적의 수급을 받아 남편 묘소앞에 놓고 제사를 지낸후 자결했고 레전은 마이동에서 전사합니다.
그후 후한(동한) 이 망하고 베트남은 강남지역에 들어선 손권의 오(吳) 나라 지배를 받는 중에 베트남인들은 독자적
으로 또는 토착화된 중국인과 함께 독립 투쟁을 벌이는데.... 과거 쭝짝 자매에 이어 또 한명의 여성인
찌에우어우가 반란군을 이끌게 되니 천여명을 이끌고 오빠 찌에우꾸옥닷이 시작한 반란 (독립전쟁) 에 합류합니다.
찌에우어우는 “폭풍우를 타고 먼 바다의 상어를 죽이듯 침략자를 쫓아내 조국을 해방시키고
민중을 노예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하겠다” 라고 선언한뒤 코끼리를 타고 군사를
지휘하여 6개월간 오나라 군대와 싸우다가 패해 자결하니 그녀의 나이 23세 였다고 합니다!
마원은 베트남의 반란을 진압한후 지방자치를 폐지하고 베트남의 전통 체제를 뿌리채 파괴했으며
한나라의 직접 통치하에 중국 제도와 문화를 이식했으니, 종래의 지방자치제도인 락장과 락후를
폐지하고 군현제도를 강화하는데.... 복파장군 마원은 훗날 삼국지의 마등, 마초 부자의 조상입니다.
지방의 현의 수장에는 이제는 베트남인이 아니라 중국인들을 앉히며 일부 지역에만 친한계 베트남인을
임명했고 중국인 관리들이 상주하는 곳에는 성채를 쌓고 병사들을 주둔시켰으며 이들을
먹이기 위해 둔전을 만들었으니..... 마원이 돌아갈 때 함께 귀국한 병사는 원래의 절반이 되지 않았습다.
지역 유지 락장들을 당나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멸한후 중국으로 잡아간 것처럼 중국 남부로 강제 이주시켰으니
베트남 토착 지배 계급은 사라지고 중국 직접 지배체제가 완성되는데.... 농업생산력을 높이기 위해 제방을
쌓고 수로를 만들며 동물의 배설물을 이용한 퇴비 제조법을 베트남에 전파해서 피지배민들의 반발을 무마합니다.
후한서는 “쭝짝이 사나운 전사여서 태수 소정이 법으로 억제하려 하자 분노해 반란을 일으켰다” 라고 적었으니 중국
의 관리와 군대가 여자들에게 수모를 당했다는 것을 가부장적 유교관을 가진 중국인들이 인정하기는 힘들었습니다.
한나라 관리들의 가혹한 수탈과 쭝짝 남편의 살해등은 언급하지도 않으며, 쭝짝이 수도를 친정인 메링으로 정한걸
보면 남편이 살해당한게 아닐지도 모르니... 후대에 베트남 학자들도 유교관으로 남편이 살해돼 반란을
일으켰다는 식으로 부계사회 발상을 하는데 실제로는 모게사회였기 때문에 여자들이 앞장선게 아닌가 여겨집니다?
남북조시대 말 혼란시기에 중국 출신으로 내란을 피해 베트남으로 내려와서 7대째가 되는 리본이 542년에 반란을
일으켜 544년에 황제라 칭하고 국호를 “반쑤언 Van Xuan” 이라 했는데 후계자들은 62년간 독립국 지위를
이었지만 조상이 중국인이라 민족 독립이라는 개념이 약했으며,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한후 10만 대군을 보냅니다.
후한 이후 중국의 베트남 직접 통치는 흐지부지되었으나 수나라는 주변국과 민족을 모두 정벌함으로서, 옛 한(漢)
제국 시대의 영광을 되살리고자 했으니, 602년 수문제는 하노이가 속한 교주(交州) 를 점령했으며 605년
수(隨) 군은 남하해 참파 왕국을 침공해 코끼리 부대를 격파하고 점령에 성공했지만 풍토병으로 많이 죽었습니다.
수나라가 망한후 당나라가 베트남을 침략해 "안남도호부"를 세우고 베트남을 무자비하게 수탈했으니... 베트남인들은
금, 은, 비단, 상아, 악어가죽, 물총새 털등 특산물을 조공으로 바치고 무거운 세금과 매년 50일까지 부역을
나가야했고 국가 전매제도를 악용해 산간지역 소수민족에게는 소금 한되 값으로 물소 한 마리를 받아가기도 했습니다.
중앙정부의 착취 외에도 관리들의 악행도 심했으니 이들은 중국으로 전근을 가기 위해 바칠 뇌물을
마련해야 하고 게다가 자신이 한평생 먹고 살 재산까지 챙겨야 하니 이러한
가렴주구가 19세기 조선의 지방 관리들 만큼이나 혹독했습니다. 누가 더 낫다고 할수 없을 정도라?
여기에 더해 8세기 중엽에 잇달아 발생한 홍수와 가뭄은 생활을 파탄지경에 몰아넣었으니 당사(唐史)는
“ 몇 년간 천재지변과 굶주림으로 안남인은 조공을 납부할수 없게 되었다, 농민을 붙잡아 노비
로 만들고 노비 매매가 일반화 되었으며....” 농민들은 농노로 전락하거나 고향을 버리고 유랑하였다.
이것은 19세기 조선의 실정과 너무나도 유사하니 순조 시대는 “민란의 시대” 라고도 말하는
데.... 관리들은 관직을 얻기 위해 빚을 내서 뇌물을 준 돈과 3년후 임기를 마치고
해임되면 다시 관직을 얻기 위해 쓸 뇌물에, 평생 먹을 재산을 마련하기 위해 착취했습니다.
부모가 감기가 들면 자식이 불효해서 그렇다고 잡아가서 돈을 뜯고, 임신만 해도 사내아이가 틀림없다며 병역세인
군포를 거두고 죽은 사람도 자식에게 백골포를 징수하는등... 견디다 못한 농민이 달아나면 남은 사람들에게 그
몫까지 합쳐 거두니 조선은 사람이 살 수 없는 나라가 되어 결국 망하는데, 이때 베트남인들의 사정이 그러했습니다.
번영을 구가하던 대 제국 당나라도 300년이 지나니 절도사들이 황실을 옥죄고 궁정에서는 환관들이
발호해 황제를 갈아치우기 시작하니 문란한 정치로 토지겸병은 당나라 백성들의 삶을 피폐
시키니 황소의 난등 반란이 일어나고... 난을 진압한 주전충과 이극용이 권력투쟁, 내란으로 들어갑니다.
황소의 난이 한창일 때 베트남의 다이라(하노이) 에서는 군대가 반란을 일으켜 절도사를 내쫓았으며 하이즈엉의 유지
쿡트어주는 이 혼란을 수습하고 베트남을 장악하니.... 당나라 조정은 몇차례나 베트남 절도사를 내려보내지만
임무 수행에 실패하니 결국 베트남의 자치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지라 906년에 쿡트어주를 절도사로 임명합니다.
다음해에 당나라는 절도사 주전충이 강제로 양위를 받아 후량(後梁) 을 세우면서 망했고 이를 시작으로 화북에는 5개
왕조가 차레로 교체되고 지방에는 10개 나라가 서니 “5대 10국” 이라고 부르는데.... 주전충의 아들들이
왕위쟁탈전을 벌이자 이극용의 아들이 후당(後唐)을 세우고는 기병대를 앞세워 개봉을 점령해 후량을 멸망시킵니다.
중국 최남부 청해주 (광동성과 광서성) 절도사 유엄이 후량에 자신을 왕으로 책봉해 달라고 청해 거절당하자
자립해 나라를 세우니 남한(南漢) 이라.... 베트남의 쿡씨 정권은 후량과 관게를 강화해
대응했고 이후 후당으로 왕조가 교체되자, 남한은 이를 기화로 베트남을 침공해 쿡씨의 수장을 잡아갑니다.
그러자 장군 즈엉당으에가 흩어진 병사들을 모아 반격하는데..... 남한은 쿡씨 정권만 무느
뜨리면 베트남은 저절로 얻게 된다고 보고 남쪽으로 진격해 베트남 중부 참파국
까지 쳐들어가 노략질을 일삼다가 허를 찔렸으니 불과 1년만에 물러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베트남은 중국지배를 받으면서 무기등 중원의 선진기술이 도입됐고 참혹한 압제를 당하면서 민족의식이 생겼으며
독립의지가 강해진 것인데.... 하지만 절도사에 오른 즈엉당응에는 양아들 끼에우꽁띠엔에 암살당하니, 아이주
에 주둔했던 사위 응오꾸엔이 봉기하자 두려움을 느낀 끼에우꽁띠엔은 남한에 신하가 되겠다며 투항하려고 합니다.
남한 (南漢) 의 유엄은 아들 휴흥조를 베트남 왕으로 봉한뒤 휴흥조가 병사 1만으로 바다와 강을 통해 들어가 교두보
를 확보하면 국경에 대기하던 유엄은 육로로 진군해 합류한다는 계획이었는데.... 베트남은 두 세력으로 나뉘어
불리한 가운데 응오꾸엔은 938년 급속행군으로 북진해 수도 다이라(노이) 의 끼에우꽁띠엔 군대를 기습해 격파합니다.
응오꾸엔은 군대를 바익당 기슭에 매복시키고는 강 바닥에 끝을 쇠로 덮은 나무기둥 수천개를 박았는데, 이는 중국
남한군의 배는 대형선박인데 비해 베트남 선박은 소형이니 물에 잠기는 홀수가 낮은 것을 이용하려고 한 것입니다.
남한군의 선박이 올라오자 베트남군은 접전하다가 거짓으로 패한척 후퇴하니 남한군이 추격해 강 깊숙이 올라왔고
이때 조수가 밀물에서 썰물로 바뀌자 강물이 빠지면서 남한군 선박이 기둥에 걸려 움직이지 못하니 후퇴하던
베트남 선박들이 돌아서고 매복했던 베트남군이 뛰쳐나와 화공으로 남한 선박을 불태우고 유흥조를 잡아 죽입니다.
물때의 시기를 정확히 알고 후퇴의 속도를 세심하게 조절해야하는 어려운 전투였는데....‘대월사기전서’ 는
“응오왕께서 유흥조 수십만 군사를 물리치고 개국하시어 북방인들이 더 이상 남진하지 못하게 하셨다,
비록 칭제를 안하시고 연호를 바꾸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우리 대월의 정통을 확연히 재연하지 않으셨는가”
바익당강 전투 승리는 진시황 이래 천년간 이어져왔던 복속의 사슬을 끊어 베트남인들이 그토록 염원하던 해방의 꿈
을 이루어 냈습니다. 응오꾸엔은 절도사라는 직위를 버리고 독립을 선언한후 왕위에 올랐으며 수도를 식민통치의
중심인 다이라(하노이) 에서 기원전 3세기 안즈엉왕의 어우락국 도읍이었던 “꼬롸” 로 옮겨 자주의식을 과시합니다.
중국 사가들은 베트남인의 무력저항을 관리들의 무능과 정책미비로 인한 일시적 사건으로 생각했으며 쭝 자매의 봉기
를 “이상한 베트남 여자들의 반란” 으로 치부하고 중국인 태수들은 “베트남인들은 공연히 난을 일으키기를 좋아
하는 성향이 있으며 예의를 모르고 평화와 행복에 싫증이 나서 내란 일으키기를 좋아한다” 고 천자에게 상주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