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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말이야, 무너지고 있는 것 같아”
작년 한 해 동안 지상파와 종편을 통틀어 최고의 드라마는 단연 〈나의 아저씨〉였다. 인기를 입증하듯 2018년 서울어워즈 드라마 부문 ‘대상’과 한국극예술학회 드라마 부문 ‘올해의 작품상’을 거머쥐었다. 인상적인 것은 주인공 이지안(아이유)의 삶의 자리였다. 그녀는 한국 드라마의 뻔한 공식인 ‘가난하고 예쁘고 착한’ 여주인공의 전형을 비껴갔다. 청각장애 할머니와 단둘이 사는 파견직 노동자라니! 게다가 부모의 사채까지 떠안고 몸이 부서져라 알바를 전전하는 신세라니! 이토록 ‘리얼’한 생존의 무게 앞에서 ‘예쁘고 착한’이라는 수식어를 장착할 여지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녀가 무표정한 얼굴로 외로이 거리를 서성일 때면 어김없이 정승환의 〈보통의 하루〉가 흐르곤 했다.
“나 말이야, 무너지고 있는 것 같아 / 겨우 지켜내 왔던 많은 시간들이 사라질까 두려워 /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막아 / 또 아무렇지 않은 척 / 너에게 인사를 건네고 / 그렇게 오늘도 하루를 시작해.”
이제 막 20대에 접어든 ‘푸르른 청춘’의 배경음악치고는 너무도 처연하지 않은가. 도대체 누가 그녀를 세상이 붕괴한 듯한 절망감 속에 유폐시켰단 말인가.
이 절망은 한때 인문학 담론을 휩쓸었던 ‘아프니까 청춘이다’ 식의 부르주아 낭만으로 위로될 성질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자기가 겪어보지 않은 아픔에 대해 어떤 처방을 내린다는 것 자체가 월권이자 오만일 터. 40대의 박동훈(이선균)에게도 나름의 아픔이 있고, 사람은 저마다 자기 손톱을 찌른 가시가 남의 심장을 찌른 칼보다 더 아픈 법이나, 그가 어른이랍시고 섣불리 충고를 남발하지 않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운명의 여신 모이라(Moira)의 장난인지 아니면 시청률을 의식한 작가의 설정인지, 이지안의 경우는 다소 지나친 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아무리 불운은 혼자 찾아오는 법이 없고 반드시 친구를 데려온다지만, 그래도 그렇게 연약한 청춘에게 고난의 종합선물세트를 덜컥 안기는 건 보기가 심히 불편하다. 한데 곰곰 생각하면 우리 문화 자체가 이미 가학 중독이 아닌가. 인공첨가물(MSG)을 거두어내고 보면 ‘알바생’ ‘파견직’ ‘계약직’ 등 다양한 ‘비정규직’으로 불리는 청년 노동자들의 하루가 이지안의 하루와 뭐 그리 크게 다를까.
식구들의 생계를 담당하거나 대학 등록금을 마련해야 해서, 아니 이보다 형편이 나은 경우에는 용돈이나 데이트 비용을 벌기 위해 ‘알바천국’에 입성하면서부터 청(소)년은 자연스럽게 노동시장으로 편입된다. 그러나 경험 많고 노련한 ‘숙련 노동자’가 아니기에, 또 신자유주의 시대의 노동시장은 과거와 달리 ‘유연성’(언제든 자를 수 있다는 무자비한 말을 이렇듯 세련되게 돌려 말하는 것도 시장의 신이 지닌 용한 재주다)이 특징이기에 청년 노동자들의 자리는 언제나 ‘비천’할 수밖에 없다.
사람에게는 ‘자리’가 필요하다
방탄소년단(BTS)을 좋아하고 치킨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평범한 스물네 살 청년은 계약직이었다. 전문대를 졸업하고 군대를 다녀와서 처음 입사한 회사인 만큼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려고 애썼다. 1년만 지나면 정규직으로 전환될 수 있다는 희망이, 그러다 만에 하나 윗사람들 눈 밖에 나면 영영 계약직에 머물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그를 채찍질했다.
그가 몸담은 한국발전기술이라는 이름의 회사는 하청업체였다. 원청업체인 한국서부발전이 운영하는 태안화력발전소의 현장설비 점검이 주요 업무였다. 365일 하루도 쉬지 않고 돌아가는 화력발전소의 특성상 그와 동료들의 업무도 24시간 릴레이로 이어졌다. 주간반에 투입되면 아침 7시 30분에 출근해 저녁 6시 30분까지 11시간 일하고, 야간반에 투입되면 저녁 6시 30분부터 다음 날 아침 7시 30분까지 13시간 일해야 했다.
지난 12월 10일, 야간반에 배치된 그는 평소대로 저녁 6시쯤 출근해 할당 구역을 돌았다. 입사한 지 겨우 석 달, 아직 일이 서툰 만큼 매사에 신중했을 것이다. 하지만 운명의 여신은 지독하게 야박했다. 그는 이튿날 새벽 3시 20분께 태안화력 9·10호기 트랜스포머 타워 04C 구역 석탄 이송 컨베이어벨트에 몸이 끼이는 사고를 당했다. 교대 시간 즈음에 동료가 발견했을 때는 이미 숨을 거둔 뒤였다. 미처 먹지 못한 컵라면 세 개를, 그가 보냈을 수많은 ‘보통의 하루’의 증거물로 남긴 채.
이 청년의 이름은 김용균이다. 국회가 부랴부랴 그의 이름을 단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을 통과시키는 바람에 공공의 기표가 됐다. 전태일이라는 이름이 20세기 한국형 자본주의의 비정함을 고발하는 이름으로 역사의 유전자에 새겨졌듯이, 그의 이름 역시 21세기 신자유주의 체제의 불의함을 폭로하는 이름으로 기억될 것이다. 2016년 5월 28일, 지하철 2호선 구의역에서 스크린도어에 끼여 숨진 은성 PSD(파워스크린도어 업체) 소속 비정규직 청년 김 군(당시 열아홉 살)은 그러지 못했다. 사회적 반향은 컸으나 정부의 안이한 인식 탓에 법률적 대응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사이에 ‘싼값에 마구 부릴 수 있는’ 청년 노동자들이 계속해서 죽어 나갔다.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며 중노동에 시달리다 기계에 끼이거나 용광로에 빠지거나 리프트에서 추락하거나 어이없게 참변을 당했다.
국민소득 3만 불 시대에 컵라면이 주식이라니! 요즘 티브이를 틀면 지상파든 케이블이든 여기저기서 온종일 ‘먹방’(먹는 방송)이 나오던데, 누군가의 조소처럼 ‘배달의 민족’답게 음식을 배달해 먹는 ‘어플’도 지천이던데…. 하기야 〈나의 아저씨〉 속 이지안도 설거지 알바를 하는 식당에서 손님들이 남긴 음식으로 배를 채우고 회사에서 몰래 가져온 믹스커피를 한꺼번에 두세 봉지씩 타 먹으며 잠을 쫓지 않았던가. 그야말로 ‘미생’인 이들에게 희망이란 사치이거나 고문일 뿐.
이토록 참담한 땅의 현실에 절망한 나머지 하늘로 오른 이들도 많다. 망루, 송전탑, 골리앗크레인, 타워크레인, 전광판, 공장 굴뚝… ‘고공농성’은 어느덧 대한민국 노동 운동의 상징이 되었다. 현실이 불의할수록 이들의 고도는 점점 더 높아지고 투쟁 기간도 점점 더 늘어난다. 파인텍(스타플렉스) 노동자들이 오늘(1월 8일)로 423일째 고공농성을 벌이고 있는 굴뚝은 땅에서 무려 75미터. 끝이 안 보일 정도로 높다란 그곳은 사람이 살 환경이 전혀 못 된다. 사람은 모름지기 땅에 발을 붙이고 살아야 하는 까닭이다. 한데도 그들이 중력의 법칙을 거슬러 기어코 그 높은 곳까지 올라간 이유는 단 하나다. 땅 위에 있을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지난 1월 11일 파인텍 노사 협상이 6차 교섭 끝에 극적으로 타결, 파인텍 고공농성 노동자들이 426일째 농성을 끝내고 내려왔다. - 편집자)
자리는 사람의 사회적 좌표다. 사람이 ‘사회적 동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리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비’정규직은 말 그대로 자리가 ‘아니다.’ 비정규직에 머물러 있는 한, 사회적 삶은 위축될 수밖에 없다. 비정규직이 감히 어떻게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원활한 대인관계를 맺으며 풍요로운 삶을 누린단 말인가. 아모스 선지자가 우리 시대에 다시 태어난다면 필시 이보다 더한 종말의 때가 없겠다고 혀를 찼을 것이다.
황금돼지해에 톺아보는 돼지의 ‘자리’
어디 사람살이만 팍팍한가. 동물들의 삶은 어떤가. 올해가 기해년(己亥年)이니 돼지 이야기를 해볼까. 돼지는 농업혁명 이후로 인류가 가축화에 성공한 대표적인 동물이다. 수렵 채집 시대에 사람이 야생 멧돼지를 만났다면 십중팔구 잡아먹혔을 것이다. 그러나 멧돼지를 울타리 안에 가두고 길들여 식용돼지로 변형시킨 뒤에는 아무도 돼지에게 잡아먹힐 걱정을 하지 않는다. 돼지를 보고도 겁을 먹거나 도망가기는커녕 삼겹살과 족발을 떠올리며 입맛을 다신다.
미국 에모리 대학교의 로리 마리노 박사 연구팀이 조사한 결과, 돼지의 지능(IQ)은 75-85 정도로 서너 살짜리 아이와 맞먹고 돌고래나 침팬지와 비슷한 수준이며 평균 60인 개보다 훨씬 똑똑하다는데, 심지어 우리는 그런 돼지를 ‘미련함’의 대명사로 모욕하기 일쑤다. 그러면서도 부유해지고 싶은 원초적 욕망은 감출 수 없어서, ‘노란색’을 나타내는 ‘기’(己)자를 ‘황금색’으로 둔갑시켜, ‘기해년’을 굳이 ‘황금돼지해’라 읽는다. 어릴 때부터 ‘돼지저금통’에 돈을 모으는 습성은 또 얼마나 노골적인가.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에 따르면, 뉴기니의 수많은 부족사회에서 전통적으로 부를 가늠하는 기준은 보유한 돼지의 숫자였다.
“북부 뉴기니 사람들은 돼지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돼지 코에서 큼지막한 살덩이를 잘라낸다. 그러면 돼지는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을 때마다 심각한 통증을 느낀다. 돼지는 냄새를 맡지 못하면 먹을거리를 찾지 못할 뿐 아니라 길조차 찾지 못하므로, 그렇게 절단된 녀석들은 인간 주인에게 완전히 의존하는 수밖에 없다. 뉴기니의 다른 지역에서는 돼지의 눈을 파내어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조차 파악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 관행이다.”(143-144쪽)
야만적으로 느껴지는가. 그렇다면 산업사회의 ‘문명화된’ 축산 방식은 괜찮은가. 동물들의 자연적 본능과 사회적 유대를 박탈한 채 비좁은 우리에 몰아넣고 순전히 인간의 먹거리로만 사육하는 건 온당한가. 아무리 축산업자가 때맞춰 밥을 먹이고 때맞춰 예방주사를 맞히고 ‘마치 제 새끼인 양’ 애지중지 보살펴도 구제역을 막지 못하는 데는 바로 그 공장형 축산 방식이 주요 원인으로 꼽히지 않던가. 2010년 구제역 파동 때 살처분 당한 돼지가 331만 8,298마리, 소가 15만 864마리, 염소가 7,559마리, 사슴이 3,241마리였다는 사실이야말로 문명의 역설이다. 아우슈비츠 대학살이 따로 없다. 그 반동으로 2013년에 부랴부랴 동물보호법이 제정되었지만, 무슨 소용인가. 구제역은 2017년에도 역습했다.
구제역이 잠잠하다 싶으면 ‘에이아이’(AI, 고병원성 조류인플루엔자)가 말썽이다. 닭이나 오리, 메추리 같은 가금류가 주요 표적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닭, 날개가 퇴화하여 날지 못하는 새. 이 땅의 무수한 자영업자들에게 ‘치킨집 사장님’이라는 타이틀을 안겨준 닭들이 ‘에이아이’에 걸리면 사회 전체가 줄줄이 초상집으로 전락한다. 양계업과 치킨집이 무너지는 것도 큰일이지만, 치킨을 시켜달라며 보채는 아이는 어찌 달래고, ‘치맥’으로 뭉치던 그 많은 회합은 어찌 모이며, 삼계탕으로 보신하던 관습은 어찌 보상하고, 달걀이 들어가야 하는 무수한 요리들은 또 어찌 대체한단 말인가.
동물보호법이나 동물복지법으로 해결될 성질이 아니다. 교육계든 종교계든 아무리 생명윤리를 떠들어대도 소용없다. 정작 문제는, 뭐가 문제인지 모른다는 사실이다.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이렇게 복잡하면 지레 손을 놓게 된다. 사칙연산을 잘하던 아이도 인수분해에서 헤매기 시작하면 골치 아픈 방정식이나 삼각함수, 미적분 따위는 아예 손을 댈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초등학생 때 ‘수학천재’가 고등학생 때 ‘수포자’(수학포기자)가 되는 경우를 우리는 누누이 본다.
‘노란 조끼’ 안에 감춰진 욕망
이른바 ‘환경문제’의 생리가 다 그렇다. 너무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누구에게 책임을 묻고 어디서부터 해결해야 할지 난감하다. 미세먼지만 해도 심각한 수준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이 문제를 풀려면 선뜻 답이 나오지 않는다. 미세먼지는 석탄이나 석유 등 화석연료를 태울 때, 또는 공장이나 자동차 등에서 배기가스가 나올 때 주로 발생한다. 공기 중에 퍼져 있으니 호흡기를 통해 폐로 들어가 질병을 일으키는 건 당연지사. 2013년 세계보건기구는 미세먼지를 1군 발암물질로 지정했다.
그러니까 줄여야 맞다. 한데 어떻게 줄이느냔 말이다. 공장을 멈출 수야 없지 않은가. 자동차를 안 탈 수도 없다. 아니 우리 국민의 의식 수준이 높아져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똘똘 뭉쳐서 문제를 해결하기로 마음먹는다 치자. (사실 우리나라는 2018년 8월 14일 ‘미세먼지 저감 및 관리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하여 올 2월 15일부터 시행 예정이다.) 하늘에는 국경선이 없는데, 중국발 미세먼지는 어찌 막을까.
지금까지도 프랑스 전역을 들쑤시고 있는 ‘노란 조끼’ 시위를 보라. 이른바 ‘탄소세’가 원인이었다. 마크롱 정부가 작년 초 휘발유는 리터당 3.9센트(50원), 경유는 리터당 7.6센트(98원) 인상하겠다고 발표한 게 화근이 됐다. 파리 외곽에서 시내로 출퇴근하는, 대중교통의 혜택을 받지 못해 직접 차를 몰아야 하는 저소득층 시민들에게는 큰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보도에 따르면, 대서양 연안 브르타뉴 지방의 보알(Bohal)이라는 소도시에 사는 50대 여성이 지난 10월 자신의 페이스북에 ‘기름값이 비싸서 차를 세워둘 수밖에 없다’며 불만 어린 영상을 올린 게 기폭제가 됐다. 이 영상은 사회연결망서비스(SNS)를 통해 빛보다 빠른 속도로 번져나가 전국 규모의 ‘노란 조끼’ 시위를 낳았다.
나는 그 50대 여성이 너무나 이해가 된다. 서울에서 살 때는 굳이 자가용이 절실하지 않았는데, 외곽 소도시로 나오니 대중교통 체계가 완전 ‘노답’이었다. 할 수 없이 중고차를 구해 김포에서 서울 시내까지 왕복 75킬로미터를 운전하고 다니는데, 주유소를 지나칠 때마다 저절로 ‘오늘의 기름값’에 눈길이 가는 거다. 그러니 지난 11월 문재인 정부가 유류세 인하 정책을 발표한 뒤로, 리터당 1,800원까지 치솟았던 휘발유 값이 뚝뚝 떨어져 1,300원대로 내려간 게 얼마나 기분 좋겠나. 어디 가서 생태신학 전공자라는 명함을 내밀기가 부끄러울 정도로 속물근성에 절어 있다.
프랑스 이야기여서 다행일까. 탄소세는 핀란드니 스웨덴이니 독일이니 일본이니 그런 잘 사는 나라들에서나 물리면 되지, 우리나라는 시기상조일까. 2010년 ‘녹색성장’을 내세운 이명박 정부가 탄소세 도입을 검토했다가 흐지부지된 것도 그런 논리였다. 대한민국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한 게 언제이고 국가경쟁력에서 쟁쟁한 나라들과 어깨를 겨루기 시작한 게 언제인데 여전히 지구에 무임승차를 하고 싶어 하는지, 이것도 생각하면 부끄럽다.
호모 사피엔스는 정말 ‘슬기인’일까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 끝난 뒤 전 세계가 일제히 복구 작업에 돌입하면서 20세기 후반 들어 ‘환경’ 문제가 지구적 의제로 떠오른 사실은 굳이 되짚을 필요가 없다. 최근 이슈는 기후변화다. 2007년 2월,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 제4차 보고서는 지구 온도가 2,100년까지 섭씨 6도 상승할 것으로 예측했다. 이게 무슨 뜻인지 잘 와닿지 않는다면, 사람의 몸을 생각하면 된다. 평균 36.5도를 유지하다가 갑자기 6도가 오르면 어찌 되겠나. 죽는다!
더 무서운 건 지구의 몸과 사람의 몸은 다르다는 점이다. 산업화 이전까지 지구는 놀라운 항상성을 유지했다. 항상성(恒常性)이란 일희일비하지 않는 힘이다. 나이가 지긋한 분들이 사소한 사건이나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특유의 묵직함을 발휘하는 게 항상성의 한 측면이겠다. 45억 년을 지내는 동안 소행성 충돌이나 빙하기 등 별의별 큰일을 겪으면서도 지구가 굳건히 버틸 수 있었던 원동력은 거기에 있었다. 그러던 중 지구의 항상성에 치명적인 위협이 되는 존재가 등장했으니, 바로 인간이다.
지구의 나이를 24시로 잡을 때 23시 59분 58초에 태어난 인간, 이름하여 ‘호모 사피엔스’는 골칫덩어리였다. 같은 ‘호모’(인간) 속에 속한 네안데르탈렌시스, 솔로엔시스, 플로레시엔시스, 데니소바, 루돌펜시스, 에르가스터 등 형제들을 제치고(‘멸종’시키고) 사피엔스의 독무대가 펼쳐지면서, 이전까지 별 볼 일 없던 인간의 지위가 단숨에 먹이사슬의 정점으로 뛰어오르는 대이변이 일어났다. 굳이 기독교의 원죄론에 기대지 않아도, 사피엔스가 얼마나 악한지는 그 이력을 잠시 살피는 것으로 충분하다. 사피엔스는 가는 곳마다 멸종의 역사를 갱신했다.
“가장 심한 타격을 받은 것은 털북숭이 대형동물들이었다. 인지혁명이 일어날 즈음 지구에는 몸무게 45킬로그램이 넘는 대형동물 약 2백 속이 살고 있었다. 농업혁명이 일어날 즈음 이들 중 남은 것은 약 1백 속에 지나지 않는다. … 우리는 생물학의 연대기에서 단연코 가장 치명적인 종이라는 불명예를 갖고 있다.”(《사피엔스》, 115, 117쪽)
이 멸종의 역사가 과학혁명 이후 가속화된 것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여기에는 과학혁명 이후 인구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게 큰 몫을 차지한다. ‘기하급수’란 지구가 감당하지 못할 정도의 빠른 속도로 증가한다는 뜻이다. 1800년대 초에 10억 명이었던 인구가 지금은 76억 명을 넘어섰다. 2008년 기준, 세계 인구 67억 명의 절반이었던 때가 1965년임을 고려하면, 20세기 후반 들어 그 속도가 얼마나 빨라졌는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인간들이 먹고 싸고 만들고 버리고 돌아다니는 모든 활동이 지구를 아프게 한다. 그래서 지구의 항상성이 깨지고 탈이 난 것이다. 인류가 전성기를 구가한 지난 100년 동안 지구의 평균온도는 0.74도 상승했다. (우리나라는 1.7도) 그런데도 폭염과 홍수, 지진과 해일이 끊이지 않아 전 세계가 얼마나 아우성이었나. 적도 부근 바닷물의 온도가 0.5도만 올라가도 ‘엘니뇨’ 현상으로 몸살을 앓는 게 지구의 생리다. 2015년 12월 12일, 196개 나라가 프랑스 파리에 모여 지구 온도의 상승 폭을 산업화 이전과 비교해 금세기 말까지 1.5도 이상 넘기지 말자고 협의한 데는 이러한 위기의식이 작용했다.
요컨대 지구 입장에서는 ‘마지막 경고음’이 여러 번 울렸다는 뜻이다. 용케 그 소리를 알아듣고 민감하게 응답한 선지자들도 있지만, 그렇다고 달라질 성싶지는 않다. 왜냐하면, 사피엔스의 발자취에는 어쩔 수 없이 멸종의 그림자가 따라붙기 때문이다. 2017년 6월 1일,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이 파리협정 탈퇴를 선언한 것만 봐도 지구의 미래가 장밋빛이기는 틀려먹지 않았나. 돈에다가 노골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In God We Trust)고 새겨넣은 ‘기독교 국가’가 이럴진대, 더 무슨 증거가 필요한가.
그러니까 새해라고 해서 새삼스레 소원을 비는 건 시간 낭비다. 그보다는 차라리 우리가 끝을 살고 있음을, 이 끝을 자초한 건 나 자신임을 빨리 인정하는 게 현명하겠다. 김영민 교수의 조언대로, 아침을 열면서 끝을, 종말을, 죽음을 생각해 보는 거다. 나는 이미 죽었다. 내가 속한 공동체는 이미 죽었다. 지구는 이미 죽었다. “부고는 늘 죽음보다 늦게 온다. 밤하늘의 별이 반짝여도 그 별은 이미 사라졌을 수 있다.”(《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17-18쪽)
이 말에 냉소와 허무로 반응한다면 제대로 이해하지 않은 것이다. 그보다는 “침착함을 가지고 혹시 남아 있을지도 모르는 자신의 생과 이 공동체의 미래에 대해 생각”(윗글, 20쪽)해보자는 초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잠시 멈추어 끝을 묵상하는 자리, 새로운 시작의 꿈은 언제나 이 자리에서 움튼다. 가로되, 은총이로다.
■ 도움 받은 글
구미정, 《이제는 생명의 노래를 불러라》, 올리브나무, 2004.
《생태여성주의와 기독교윤리》, 한들출판사, 2005.
“김예슬 선언에 나타난 엑소시즘: 지구화 시대의 시장 귀신 내몰기”, 백소영 외 엮음, 《잉여의 시선으로 본 공공성의 인문학》, 이파르, 2011.
김영민,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어크로스, 2018.
김준우, 《기후재앙에 대한 “마지막 경고”》, 한국기독교연구소, 2010.
마크 라이너스, 《6도의 멸종》, 이한중 옮김, 세종서적, 2014.
유발 하라리, 《사피엔스》, 조현욱 옮김, 김영사, 2015.
샐리 맥페이그, 《기후 변화와 신학의 재구성》, 김준우 옮김, 한국기독교연구소, 2008.
스티븐 보우머 프레디거, 《주님 주신 아름다운 세상》, 김기철 옮김, 복있는사람, 2011.
하비 콕스, 《신이 된 시장》, 유강은 옮김, 문예출판사, 2018.
Danielle Nierenberg, “Population Rise Slows but Continues”, in Vital Signs 2007-2008.
조홍섭, “속임수 쓰는 돼지 봤어? … 우리가 몰랐던 돼지의 인지 능력”, 〈한겨레신문〉(2018.12.31)
이의철, “‘두 마리 치킨’의 서늘한 비밀”, 〈프레시안〉(2017.3.3)
심진용, “프랑스 탄소세 양극화, ‘노란 조끼’의 분노”, 〈경향신문〉(2018.11.29)
구미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