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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백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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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예수의 부활은 무엇을 말하나
어쩌면 우리는 바리사이를 닮았다. 예수 당시 바리사이들은 ‘육신의 부활’을 믿었다. 그들은 땅에 묻힌 육신이 되살아나는 것이라고 여겼다. 사두가이들은 육신의 부활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도 ‘육신의 부활인가, 아닌가’ 하는 이분법적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부활 논쟁을 벌였다.
이스라엘 예루살렘의 골고타 언덕에 있는 성묘교회. 십자가에서 내린 예수의 주검을 뉘었다고 전해지는 돌판에 순례객들이 손을 올린 채 기도하고 있다. 백성호 기자
예수는 그들 모두에게 말했다.
“너희는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른다.” 예수는 그들의 생각이 “잘못된 생각”이라고 꾸짖었다.(마르코 복음서 12장 24절)
왜 그랬을까. 부활은 죽음이 불가피한 ‘육신의 속성’이 아니라 ‘천사의 속성’, 더 나아가 ‘신의 속성’과 통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것이 통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백 번, 아니 천 번 죽었던 육신이 다시 살아나더라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 시간이 지나면 육신은 결국 소멸하게 마련이다.
예수는 분명하게 말했다.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 그들은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그리고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다는 사실은, 모세도 떨기나무 대목에서 ‘주님은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는 말로 이미 밝혀주었다.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 (루카 복음서 20장 36~38절)
예수가 직접 십자가를 짋어진 채 걸어간 길인 '비아 돌로로사'에 있는 조각상. 백성호 기자
왜 아브라함의 하느님이 이사악의 하느님일까. 또 왜 이사악의 하느님이 야곱의 하느님일까. 또 왜 야곱의 하느님이 아브라함의 하느님일까. 어째서 그들 모두의 하느님이 하나의 하느님일까. 속성이 같기 때문이다. 내 안에 있는 신의 속성과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 안에 있는 신의 속성이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신의 속성은 생명이다. 그래서 그 자체가 부활이다. 그러므로 ‘죽은 이들의 하느님’은 있을 수가 없다. 왜 그럴까. 신의 속성 자체가 살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산 이들의 하느님’이 될 수밖에 없다.
바리사이파와 사두가이파가 육신의 부활을 놓고 논쟁을 벌일 때 예수는 그들을 꾸짖었다. 왜 그랬을까. 그들이 부활 속에 담긴 신의 속성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들이 ‘부활의 속성’을 전혀 몰랐기 때문이다.
골고타 언덕에 섰다. 멀리 서편으로 해가 떨어지고 있었다. 노을 속으로 나는 물음을 던졌다. 예수가 부활하는 곳은 진정 어디일까. 온갖 고고학적 지식을 총동원해 찾아가는 이 언덕의 땅속 어디쯤일까. 아니면 골고타 언덕의 꼭대기일까. 그런 유적지 속일까.
골고타 언덕에 잇는 성지. 사진 속 십자가상이 있는 곳이 예수께서 십자가 처형을 당한 곳이라고 전해진다. 순례객들이 그 앞에 엎드려 기도하고 있다. 백성호 기자
아니다. 예수가 부활했던 곳, 지금도 부활하는 곳, 앞으로도 부활할 곳은 거기가 아니다. 바로 우리의 내면이다. 나의 고집이 무너진 자리에 신의 속성이 드러난다. 그러니 ‘나의 십자가’야말로 우리가 찾는 진정한 골고타가 아닐까.
짧은 생각
구약의 창세기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습니다.
신이
인간을 지을 때
자신을 닳도록
창조했습니다.
겉모습을
닮는 게 아니라
속모습을
닮도록 지었습니다.
창조의 마지막 순간,
신은 아담에게
숨결을
불어넣습니다.
그 숨결이 바로
신의 속모습,
다시 말해
신의 속성입니다.
그러니
창조된 아담에게는
신의 속성이
흘렀습니다.
다시 말해
신의 속모습과
아담의 속모습이
서로 통했습니다.
그렇게
신의 속성과
나의 속성이 통하는 곳,
거기가 바로
낙원입니다.
구약에서는
그곳을
‘에덴’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신의 속성을 공유한
아담과 하와에게
에고가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선과 악을 나누는
선악과의 결과물입니다.
그때부터
아담과 하와의 속성은
신의 속성과
단절됩니다.
에고의 속성에 가려서
아담의 내면에 깃든
신의 속성이
보이지 않게 된 겁니다.
오랜 세월이 흘렀고
예수께서
이 땅에 왔습니다.
예수가
온 이유는
하나였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의 후예,
인류의 속성을
다시
신의 속성으로
되돌리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방법을
일러주기 위함입니다.
예수는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라’고
일러주었습니다.
나의 에고가
십자가 위에서
무너지면,
에고에 가려져 있던
신의 속성이
드러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통해
에고의 속성에서
다시
신의 속성으로
돌아가는 일.
저는 그게
부활이라고 봅니다.
거기에
부활의 본질적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그러니
육신의 부활을 갖고
바리사이와 사두가이가
열띠게 논쟁할 때,
신의 속성을 아는
예수의 눈에는
안타깝게만 보였겠지요.
부활의 의미는
천사의 속성,
신의 속성을
회복하는 일인데 말입니다.
사람들은 그저
이 몸뚱이를 가지고
영원히 살 일에만
몰두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다시 말해
에고가 영원히 살기를
바라고 있는 셈입니다.
그러니
부활의 통로는
나의 십자가입니다.
나의 삶에서
나에게 주어진
나의 십자가를
통하지 않고선
아무도
신의 속성을 향해
나아갈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의 십자가 없이는
부활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부활이 없다면
신의 속성도
회복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몸소 보여주신 게
아닐까요.
어떻게 하면
신의 속성과
하나가 될 것인지
말입니다.
에디터
관심
중앙일보 종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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