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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회상-황혼의그리움
지은이;벌마로(김윤식)
60의 나이를 넘긴 영우의 한가로운 날 가끔은 가슴속 깊이 묻어 두었던 첫사랑
병휘오빠와 나누었던 사랑의 기억이 문득문득 떠오른다. 그것은 공교롭게도 남편에게 모든 이야기를 풀어놓고 난 뒤부터 였다. 병휘오빠와 나누었던 사랑의 추억이 요즘에 와서는 전부 되살아나고 마치 한 편의 그림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듯
눈앞에 아른 거린다. 많은 기억 속에서도 특별히 생각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횡계에서 함께 지내며 어설펐지만 행복했던 그 시절이 그리워질 때다. 스무 살 시절 무모하지만 순수했던, 이제는 거의 퇴색되어 가슴속 저 깊은 곳 아주 조그마한 흔적이 아련하게 남아있는 이야기들을 40여 년의 세월이 흘러온 지금 그 흔적을 꺼내놓고 있다.
가을의 문턱 선선한 바람이 부는 어느 날 수많은 세월이 한없이 흘러 기억조차
희미해져가는 옛 추억을 찾아 떠나기로 마음먹고 남편에게 동의를 구하기로 했다. 물론 횡계까지 함께 동행해 달라는 요구도 했다. 그녀 혼자 먼 거리를 운전하고 가는 것도 부담이지만 남편의 적극적 이해를 얻고 싶은 마음이 더 컸을 게다. 남편은 잠시 고민에 잠기는 듯 하더니 이내 그렇게 해 주겠다고 동의했다. 역시 남편은 언제나 영우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아침에 출발한 차는 영동고속도로를 몇 시간째 달려갔다. 남편이 운전하는 자동차가 횡계 나들목을 빠져 나와서 조금 더 달리자 횡계마을 표지판이 보였다.
‘고속도로에서 이렇게 가까웠나?’
영우는 사실 40여 년 전 이곳을 떠난 이후로 여기를 한 번도 찾은 적이 없었다.
대관령도 수차례 지나갔었고 주위에 산을 오른 적도 있었지만 횡계와 연관 지어서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정확한 위치를 짐작해 본 적도 없었다. 영우는 창문을
열고 바람을 맞으며 경치를 감상했다. 조금 더 달리자 횡계 시외버스 터미널이
눈앞에 보였다. 거의 지워진 그녀의 기억 속에서 버스 터미널을 떠올려 보려고
애를 써 봤다. 그녀가 예전에 병휘오빠와 헤어질때 눈물을 흘리며 버스를 타고 집으로 오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그러나 터미널 위치도 다른 곳으로 옮겨 졌고, 건물도 새로 지어졌다. 과거에는 터미널 위치가 마을 중심부에 있었는데,
지금은 조금 외곽으로 옮겨졌다.
터미널을 중심으로 주변을 살펴보기로 했다. 가까운 곳에 차를 세우고 걸으면서
기억을 더듬었다. 남편은 말없이 그녀를 뒤따라 걸었다. 두 사람은 이곳저곳을 기억나는 대로 걸었다. 제일 먼저 마을 중심에 있는 넓은 공터가 눈에 띄었다. 마을 앞 신작로는 말끔하게 포장이 되어 있었고 황태덕장으로 쓰던 장소는 평창 올림픽 홍보거리로 바뀌었다. 만국기가 펄럭이고 평창올림픽 문구와 상징물이 장식하고 있었다. 평창올림픽을 치른 지 벌써 몇 년이 지났는데 아직까지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은 아마 이 마을 사람들은 세계적 체육행사를 치른 자부심이 꽤나 자랑스러웠던 모양이다. 그리고 오래 기억되기를 바라는 마음일 것이다.
마을 끝자리에 있던 중학교는 어디로 이사를 갔는지 빈 공터로 남아있고 길가의 상점들은 새로 지은 건물로 바뀌어 있었다. 거리에는 가지각색의 간판들이 상가마다 화려하게 걸려 있었다. 대로변은 여느 지방도시의 번화한 광경과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영우가 보고 싶었던 모습은 이게 아니었다. 기억 속의 모습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길 바라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보이는 광경은 옛날의 그 모습은
온 데 간데없이 사라지고 흔적조차 찾을 수 없게 변했다. 세월이 43년이나 흘렀으니 어쩌면 당연한 것일 수도 있는데 추억 찾아 먼 길을 달려온 영우의 입장은 아쉬울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어서 좀 더 마을을 걷기로 했다.
기억에 가장 많이 남아있는 마을 옆 냇가로 발길을 옮겼다. 눈에 들어온 냇가의
모습도 변해 있었지만 그래도 떠오르는 기억 속의 모습이 조금은 남아 있었다.
그 옛날 자연 그대로의 모습은 아니라도 그 흔적은 남아 있어서 기억을 되살리기엔 충분했다. 면회 온 애인들과 이곳에서 사랑을 속삭이며 미래를 꿈꾸던 수많은
인연들이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할까 궁금해진다. 냇가는 넓은 큰 강으로 정돈돼
있었고 물에 빠지며 건너던 돌다리는 잘 다듬어진 대리석으로 변했지만 잘 정돈된 모습이 오히려 보기 좋았다. 그 위로는 넓고 튼튼한 다리가 놓여져 있었다.
영우가 그 옛날 살았던 장소를 찾으려고 언덕 쪽으로 발길을 돌려 걸었다. 언덕이랄 것도 없지만 그래도 비탈진 곳이라 몇 걸음은 위쪽으로 걸어야 했다. 기억을 더듬어 주변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주변의 골목은 맞는 거 같은데 집들이 구조가 바뀌어서 도통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러다 낯익은 광경이 눈에 들어 왔다.
베롱 나무다. 키가 조금 더 커져 있을 뿐 틀림없이 옛날 추억이 서려 있는 그 나무다. 그녀는 마치 고향에 온 듯한 착각 속에 빠져 들었다. 그 하숙집 배롱나무는
영우의 애절한 사연을 알고 있으면서 비밀을 숨긴 채 (이제는 비밀이랄 것도 없지만,,,) 마치 이제야 찾아왔느냐며 서운한 듯 영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곳은 먼 옛날 영우의 애환이 서려있는 곳이었다. 아니 영우보다 병휘오빠가 더
많은 애환이 남아 있었다는 게 맞는 말 일게다. 깊게 생각해 보면 영우 말고도
40여 년 긴 세월, 다른 많은 사람들이 머물며 수많은 삶의 흔적을 남기고 떠났을, 어쩌면 유서 깊은 곳이기도 했다.
너무 많은 사연들을 남기고 떠났을 긴 세월을 아마 배롱나무는 전부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을 거다. 그러나 영우만은 잊지 않고 기다렸다는 듯 기억을 소환하고
반겨 주었다. 그녀 눈에 그렇게 보였다.
집은 허물어지고 잡초만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주인 잃은 빈 공터에 덩그러니 홀로 남아서 그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배롱나무가 고마워서 가만히 다가갔다.
살던 집은 사라지고 아쉬웠지만 배롱나무 만이라도 남아있는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예전에 했던 대로 나뭇가지를 살짝 간지려 주었다. 나무는 변함없이
몸을 흔들며 간지럼을 탔다. 몸을 돌려 주위를 살펴보며 기억을 떠올려 보았다. 어렴풋이 아이들과 술래잡기를 하며 놀던 추억이 떠올랐다.
아마 그 아이들도 벌써 어른이 되고 어디선가 가정을 이루며 살고 있을 텐데, 혹시라도 이곳에 살고 있는 아이들이 있다면 만나보고 싶어졌다. 그러다 이내 부질없는 생각이라고 치부해 버렸다.
‘지금 우연히 마주친다 한들 누가 누구를 알아볼 수 있겠어?,,,’
영우가 살던 집터 보다 조금 위쪽에 제법 그럴듯하게 잘 지어진 저택이 있었다.
‘이 동네에도 돈을 많이 벌어서 부자로 사는 사람이 있구나’ 혼자 상상을 하며 돌아 서려는데 아까부터 나무그늘 아래 의자에 앉아서 고개를 숙인채 무언가를 만지작거리고 있는 할머니가 신경 쓰였다. 무심히 할머니를 스치며 아래로 내려오다가 다시 그 할머니에게 다가갔다.
그런데 할머니가 앉아있는 옆 빈 의자에 담배 종이가 쌓여있다. 그것을 할머니는
느리지만 부드럽게 접고 계셨다. 순간 하숙집 아주머니일지도 모른다는 어이없는
상상을 해보며 유심히 살펴봤다. 짧은 순간 별의별 상상을 다 했다. 세월이 너무
많이 흘러서 얼굴은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런데 요즘 세상에도 종이접기를 하는 사람이 또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생겼다. 하숙집 아줌마 말고는 없을 거
라는 확신이 들었다.
하숙집 아주머니가 맞는 거 같다. 가슴이 두근두근 뛰기 시작했다. 영우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저,,, 아주머니, 아니, 할머니! 담배종이는 뭐 하려고 접고 계세요”
“,,,,,,,,,,그냥 젊었을 때부터 하던 거라 습관이 돼서 심심할 때마다 접고 있지, 그런데,,,,,누구셔,,,,?”
할머니는 영우를 빤히 올려다보며 물었다. 하숙집 아주머니가 확실해 보였다. 영우는 조금 더 확인을 하려고 다른 질문을 했다.
“할머니 예전에 이 근처에서 하숙집 하신 적 있으세요?”
“있지,,,그만 둔지 이십 년 됐어 군인 관사가 신식으로 생기는 바람에 군인 하숙 도 한물 갔잖아, 우리 살던 집도 너무 오래되고 누추해져서 다른 사람한테 팔고
이사 갔어, 지금 우리가 있는 이 자리가 우리 집 장독대가 있던 자리야”
영우는 좀 더 확신을 얻으려고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이야기들을 찬찬히 물어봤다. 할머니의 대답은 그녀가 기억하고 있는 것과 일치했다. 하숙집 아주머니가 틀림없다는 확신이 서자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 했다. 그녀의 이야기 속 아득히 먼
곳으로 여행온 의미를 찾는 순간이다. 할머니는 영우의 기억 말고도 더 많은 일들을 기억하고 계셨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집에 시집와서 자식 낳고 살면서 남편
먼저 보내고 홀로 된 몸으로 군인들 상대로 하숙 치면서 자식들 키우며 한평생을
살았으니 얼마나 많은 애환이 서려 있었겠는가? 셀 수 없이 많았던 사연들은 지워지지 않고 그대로 할머니의 기억 속에 살아 있었을 것이다.
“지금은 어디에서 살고 계세요”
영우가 할머니의 생활이 걱정돼서 물어보았다.
“저기 길 건너에 조그만 아파트에서 살고 있어,,, 근데 댁은 누군데 뭘 그리 물어?
“할머니 저 모르시겠어요. 부천에서 온 색시, 할머니가 맨날 꽃이라며 예뻐해 주셨잖아요. 40년도 더 옛날에요”
할머니는 잠시 기억을 더듬는 듯하더니 이내 생각이 났다는 듯 환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영우의 손을 잡으셨다. 그녀도 할머니의 손을 맞잡고 자신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을 훔쳤다.
지금 이 순간 영우의 기억 속에 먼 옛날의 이야기로 아련하게 남아있던 첫사랑
병휘오빠와의 추억이 되살아나며 눈앞에 아른거렸다.
이슬에 젖은 영우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할머니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까만 눈동자를 보니까 색시가 틀림 없구먼 그때도 눈동자가 참 이쁘다고 생각했었는데,,,”
“네 그렇게 말씀하신 거 저도 기억나요”
“세월이 많이도 흘렀구먼 색시가 이렇게 나이를 많이 먹어서 나타났으니 말이야”
저만치 서있는 영머가 궁금했는지 작은 소리로 물으셨다.
“서있는 사람 키를 봐선 병휘총각 같지는 않은데,,,”
할머니는 병휘오빠보다 키가 조금 더 큰 남편을 구별해서 보고 있었다.
“네! 제 남편이에요 그때 그 오빠는 헤어졌어요”
“그랬구먼 어쩌다가,,,”
할머니는 짧았던 시간이지만 정들었던 새댁언니들 이야기도 들려주셨다. 정아 씨는 대학원까지 학업을 계속해서 얼마 전까지 강릉의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로 일을 했었다고 했고 선미 씨와 은정 씨는 그 당시 남편이 오산으로 발령이 나서 오산으로 이사 갔고 안타깝게도 범수아저씨는 오래전에 돌아가셨단다.
대부분 영우가 짐작했던 삶을 살아온 것 같은데 범수아저씨는 장골이시라 건강하게 오래 사실줄 알았는데 너무 허무하게 돌아가신 듯 했다.
영우는 놓았던 할머니의 손을 다시 잡았다. 손마디가 몹시 굽어 있었다.
“할머니 이제 종이접기는 그만 하세요 손도 불편 하신대”
“심심해서 하는 거지 뭐”
할머니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고개를 숙이고 다시 종이접기를 하셨다.
“할머니 건강 하시고 오래오래 사세요”
그녀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겨 놓으며 진심으로 할머니의 행복을 빌었다.
고개를 들어 남편과 걸어가는 영우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할머니가 문득
무슨 생각이 났는지 황급하게 손지갑을 꺼내 뒤적이더니 꼬깃한 쪽지를 한 장 꺼내 펼친다.
(조병휘 011-000-0000). 영우쪽을 보며 손을 들어 뭐라고 말을 하려다 그만 손을 떨군다.
잠시 고개를 숙이고 쪽지를 응시하더니 이내 고개를 들어 멀어져 가는 영우의 뒷
모습을 보며 쪽지를 손지갑 속에 접어 넣는다.
영우는 모서리를 돌아서며 고개를 떨구고 종이접기를 하고 계신 할머니를 한 번
더 돌아보고 사라진다.
이대로 그냥 집으로 가려니 뭔가 아쉬웠다. 마을오거리 편의점에 들렀다. 아이스
크림이라도 하나씩 사먹고 가려는 거다. 이곳에서 나서 이곳을 한 번도 떠난 적
없이 고향을 지키며 살아온 60대 중반의 편의점 사장님에게서 40여 년 전 이곳의 풍경을 들었다. 혹시 그 옛날 영우에게 군부대 면회소를 알려주던 그 총각은
아닐까?
그녀가 이곳에서 보고 싶었던 마을풍경은 거의 사라지고 그녀 또래의 군인가족들도 어디서 무엇을 하고 사는지 소식조차 알 수 없었다. 그녀가 이곳을 찾아오려고 마음먹었을 땐 옛 친구들의 연락처를 알만한 단서를 찾을까 하는 기대를 품고
이곳에 왔다. 하지만 기대는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그나마 아주머니를 만나게 된 것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강릉에서 살고 있는 정아 씨만 연락을 취하다가
그마저도 오래전에 소식이 두절되면서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 수 없고 미용실에서 일하던 선미 씨도 부지런한 은정 씨도 모두 떠나고 없다. 아니 죽었는지 살았는지 조차 알 수가 없다. 그녀는 허망했고 가버린 날들이 원망 스러워졌다. 마을사람들도 43년 전 살던 분들은 거의 돌아가시거나 이사를 가셨고 외지에서 들어오신 분들이 대부분이다. 조금 젊은 사람은 그 시절 이야기를 잘 모르고
있었다. 당연히 그분들이야 본인들이 살아온 긴 세월 중에 아주 짧은 기간 어느
나이 어린 여자의 이야기를 그 누가 알까? 알 필요도 없었겠지,,, 그저 그녀에게만 오래도록 남아있는 기억일 뿐,,,
그녀는 아득히 먼 기억 속 인연들의 흔적을 찾아 이곳까지 왔다. 지금의 남편과
함께,,, 그리곤 이제 그 인연들도 가슴 속 깊은 곳에 묻어두기로 하고 여기를 떠난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지나간 인연들이 기억 속에서 살아 꿈틀 되고 있다. 이곳에서 인연을 맺었던 새댁 언니들, 믿음직했던 범수 아저씨도, 갑작스런 사고로 세상을 달리하기 전까지 인연을 이어오던 먼 옛날 어릴 적 추억의 광희도, 꿈 많던
여고시설 이야기 거리를 풍성하게 채워 주었던 용주도, 여고시절 함께 꿈을 키우던 의숙 효경 연배 성희 혜순 정미, 그리고 스무살 사랑을 알게 하고 이별의 아픔도 느끼게 했던 첫사랑 병휘오빠도 이제는 만날 수도 소식을 전할 수도 없는
오래된 회상이 되어 버렸다.
그녀가 열흘 전부터 여행 가방을 싸고 있다. 매일 가방을 싸고 풀고를 반복하는데 그것이 재미있나 보다. 남편이 보기에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이지만,,, 남편은 출발 하루 전에 옷가지 몇 벌만 준비하면 되지 뭘 그렇게 매일 가방을 갖고
씨름하느냐며 타박이다. 부부가 여행준비로 며칠째 투닥투닥하고 있지만 실상은
여행 떠날 기대에 내심 행복에 젖어있다.
며칠 전 두 딸들과 사위 손자 손녀들이 모두 와서 시끌버끌 지내다 갔다. 딸들과
사위들은 돌아가면서 해외여행을 다녀오라고 용돈을 두둑이 주고 갔다.
여행 예약 날이 이틀 앞으로 다가온 저녁 무렵 테라스에서 펜스 가까이 의자를
끌어다 놓고 앉았다.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이 그녀를 스치며 지나가고 그사이 마음이 가벼워지며 상쾌하다. 집 앞 공원입구 쪽으로 걸어가는 행락객들의 발걸음이 한가로워 보였다.
몸을 일으켜 화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테라스에 조그막하게 비닐보온을 해서
오이모종을 심었는데, 매일매일 정성을 다해서 가꾸었더니 하루에도 몇 센티씩
쑥쑥 자라고 있다. 오이넝쿨도 꽤 길게 뻗어 나갔다. 그 모습을 보면 신기하다.
며칠 전에는 잎겨드랑이에서 노랑 통꽃이 피는 듯 하더니 어느새 꽃이 떨어지고
조그마한 오이가 열렸다. 어제 저녁에는 부랴부랴 오이섶을 해주었는데, 오이가
알았는지 어느새 팔을 뻗어서 섶을 휘감아 붙잡고 있었다. 오이가 눈도 없는데
어떻게 자신을 지탱해 줄 구조물을 설치해 준 것을 알고 팔을 그쪽 방향으로 정확히 뻗어서 섶을 붙잡았을까? 신기하고 의아했다. 식물도 감각이 있어 보였다.
어쩌면 감각적인 면만 보면 인간보다 훨씬 발달을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추억과 사랑이 싹트는 희망의 계절 봄이다. 예전에 찾지 못한 마음의 여유 속 남쪽서 바람 타고 실려 온 상큼한 봄 내음이 코끝을 자극하고 커피 한잔의 감사와
행복을 발견한다. 여백의 틈사이로 따뜻한 햇살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자신의 발견은 삶의 여정 속 쉼에 감사하며 하루하루를 풍요롭게 만든다.
누군가 마냥 그리워지는 지금 아름다웠던 추억의 한 페이지도 한가롭게 마음에
들어오는 날들이 이어지고, 이 순간 맑고 고운 햇살을 받으며 마음의 여유를 찾는다.
노년의 뒤안길에 서보니 아련한 유년시절 정겹던 기억 한 줄기 봄 바람 타고 스친다. 마냥 신나서 뛰어놀던 그때 그 기억들이 뇌리를 스치며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평화로운 풍경에 옛 시절 아련한 추억의 향수가 아지랑이처럼 가물가물 피어 올라 봄날의 향기를 회상한다.
유년의 순수함도 청춘의 흔적들도 세월의 흐름 속에 모습은 퇴색됐지만 노년의
뜨락에 여유를 채운다. 반세기를 넘는 동안 잊혀짐과 절절함은 교차하고 한가한
오후의 한낮 새삼스럽게 스쳐가는 활화산 같았던 젊은 시절의 기억 속 순간순간들, 문득 아득한 그리움이 밀려온다. 그러다 어느새 희끗한 머릿결에 주름진 황혼이 노을 속에 물들고 있었다.
제목;황혼
지은이:나영우
봄 햇살에 피어나는 작고 가냘픈 보라색 들꽃이 발끝에 닿는다
너무 여려서 누군가에게 다치지나 않을까 걱정이다
시들어 아주 죽지만 않아도 좋을 텐데
작은 상처쯤이야
견디고 버틸 수 만 있어도 좋을 텐데
그 시간이 지나고 나면 언젠가 열매를 맺고 씨를 뿌릴 수 있는 것을,,,
산 너머 붉게 물든 석양이 흘러간 그리움을 더하고
작은 상처쯤을 견디며 지나온 시간이 노년의 감성에 풍요로움을 채운다
에필로그
그녀가 살아온 긴 세월 수 없이 많은 이야기가 쌓이고 존재했다. 그것이 삶이고
추억이다. 누군가 지난 이야기들은 오래된 것일수록 소중하다고 했다. 그리고 모두 아름답다. 왜냐하면 아름다움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추억은 아름답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녀는 청춘의 소유자였다. 언제나 젊음을 유지하려고 노력했고 남달리 젊은 감성을 유지하며 살아왔다. 사계절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했고 바람에 파르르 떠는 풀숲의 여린 풀꽃들을 보며 안쓰러움을 어쩌지 못해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늘 자연 속에서 삶의 지혜를 얻으며, 자연이 선물하는 흙과 햇빛과 바람과 교감하며 활력을 얻었다.
물 흐르는 대로 살았고 타고난 재능과 현실에 맞춰서 하고 싶고,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했다. 무엇이든 무리하지 말고 억지로 얻으려 하지도 말고 놓아야 할 때는 아까워하지 말고 편하게 놓을 줄도 알아야 한다고 믿었다.
흘러가는 시간을 애써 부여잡으려 하지도 않았고, 다가왔다 떠나는 인연에 막무가내로 매달리지도 않았다. 그녀는 주어진 현실의 삶을 불평없이 자신의 길을 천천히 걸어왔다. 굴곡진 삶의 길에 수많은 희로애락을 경험했고, 지치고 힘들 땐
잠시 쉬어갔으며, 행복을 느낄 땐 한없이 기뻐했다. 그런 삶 속에서 자연스레 깃드는 풍요로움이 있다는 것을 몸소 체득하며 살았다.
삶의 향기는 새로 피어나는 들꽃 같은 인연들과 매 순간 마주치며 살아가면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녀는 그렇게 믿고 살아왔다.
예순셋의 그녀는 모든 것이 부족했고 많은 것이 안타까움이었지만 지난날들은 파릇한 기억의 새로운 포근함으로 만들어 갔다. 이제는 노년의 시작이지만 마음은
언제나 소녀처럼 그렇게 그녀의 삶은 소녀 감성으로 쭉 살아갈 것이다. 사는 게
녹록지 않았던 결혼초, 낭만도 사치였던 지난 시절을 기억하며 그리움 하나 가슴에 담고 살아왔다. 이제 그녀는 더 이상 미련 두지 않기로 하고 지나온 수 많은
날들을 고이 접어 묻어두기로 했다. 언제 다시 그 기억들을 꺼내볼지 모르겠지만,,,
첫사랑이 아름다운 이유는 첫사랑의 그가 아름다웠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 첫사랑의 시절엔 서툴지만 솔직한 청춘이 있었고 지독할 만큼 순수한 영혼이 있었다.
그것이 누군가에게는 가슴속 깊은 곳에 묻어둔 채, 영원히 자신만의 기억으로 남겨 두여야 평화를 지키는 이유가 되기도 하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인생에 남겨지는 오래된 회상으로 기억될 것이다. 그것은 작은 씨앗처럼 남아있는 젊은 날의
감성에 생명의 물을 뿌려주게 될 것이다. 어쩌면 긴 세월이 흘러 그녀가 인생의
마지막을 정리하는 순간까지 오래된 회상은 그녀의 삶을 지탱해주는 아름다운 향기가 될 것이다. 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