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어 상식] 가상현실(Virtual Reality)
195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선의 왕인 선조는 시종과 식솔들을 거느리고 최북단의 의주까지 야반도주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대통령인 이승만은 서울을 사수하겠다던 대국민 약속을 헌신짝처럼 팽개친 채 한강 인도교를 끊고 남쪽으로 도망쳤다. 우리나라 위정자들은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다. 한 가지 위안이 있다면, 앞으로는 설령 전쟁이 터진다 해도 그럴 일은 없으리라는 점이나 위정자만이 아니라 국민들도 보따리 싸서 피란 갈 필요가 없을 테니까.
1991년 쿠웨이트를 무력으로 점령한 이라크를 응징하기 위해 미국의 주도 아래 벌어진 걸프 전쟁은 현대전의 양상을 명확하게 보여주었다(아마 진지전과 참호전의 효시힌 1853년의 크림 전쟁과 더불어 새로운 전쟁 방식의 기점으로 전쟁사에 길이 남을 것이다). 한마디로 그것은 ‘가상 전쟁’이다. 불과 42일만에 15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전쟁이 가상이라면 의아스럽겠지만 전쟁의 성격은 그렇다.
컴퓨터로 조작하는 현대식 미사일을 발사할 때 병사는 실제 미사일의 움직임을 눈으로 직접 보는 게 아니라 컴퓨터 화면상의 가상 이미지만을 다룬다. 물론 그 이미지는 현실의 미사일을 나타내고 있지만 병사가 관심을 두는 것은 이미지일 뿐 그것의 지시 대상(미사일)이 아니다.
따라서 미사일이 실제로 목표물에 명중했는지 여부는 병사에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는 단지 화면상에서 미사일이 명중하면 임무를 훌륭하게 완수한 것이다. 설사 미사일 작동에 문제가 생겨 화면과 달리 실제 과녁을 맞히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프로그램이 잘못된 탓이므로 병사의 책임이 아니다. 물론 상관에게 징계를 당하지도 않는다. 이렇게 전쟁의 성격이 가상적이었으므로 프랑스 현대 철학자인 보드리야르는 “걸프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라고 말한다(수많은 인명을 희생시키고 정치적 지형을 변화시킨 전쟁을 그렇게 말했다고 해서 그를 비난한 사람들도 있었으나 이는 그 말의 진의를 오해한 탓이다).
“이미지는 실재의 반영이지만 실재를 감추고 변질시키며, 실재의 부재를 감춘다. 이미지는 어떠한 실재와도 무관하며, 그 자체의 수순한 시뮐라크르(모방)다.” 브드리야르는 가상 이미지, 시뮐라르크가 실제의 현실보다 더 강력한 힘을 가진다는 점이 바로 현대사회의 특징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가상공간에서 일어나는 일이 현실보다 생생하게 느껴지는 경우도 있다. 인터넷 게임에서 사용되는 무기나 아이템이 현실의 공간에서 판매되고 거래되는 현상은 현대사회에서 가상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를 잘 보여준다. 그것들은 실존하는 물건이 아니라 가상현실 속의 물건임에도 현실을 살아가는 게이머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구속을 가한다.
과거에는 현시로가 가상을 혼동하면 비정상으로 취급했지만, 오늘날에는 두 세계가 서로 밀접히 관련되고 구분이 불가능할 만큼 뒤얽혀 있다. 가상의 공간을 뜻하는 ‘사이버 스페이스(cyber space)는 원래 1980년대에 윌리엄 깁슨의 SF소설 <뉴로맨서>에서 처음 제기된 개념이지만, 지금은 독자적인 세계성을 얻었고 나아가 ‘물질성’마저 부여받았다. 중국의 고대 철학자인 장자는 ‘내가 나비가 된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나비가 내 꿈을 꾸는 것인지 구분할 수 없다’는 호접몽을 이야기했지만, 지금이라면 나비와 ‘나’를 굳이 구분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그러나 가상이 아무리 현실 못지않게 생생하고 강력한 힘을 가진다고 해도 가상은 어디까지나 가상이다. 가상이 의미를 지니는 것은 궁극적으로 현실과의 피드백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인터넷 게임에 푹 빠진 사람이라도 먹고살아야 하듯이, 현실과 관련되지 않는다면 가상은 무의미하다. 예를 들어 인터넷 서점을 이용하는 목적은 현실의 물건인 책을 구입하기 위해서이며, 인터넷에서 얻는 모든 정보는 현실의 물건인 책을 구입하기 위해서이며, 인터넷에서 얻은 모든 정보는 현시로가 밀접한 연관성을 맺고 있기 때문에 가치를 지닌다. 이런 현실과 가상의 관계는 아무리 가상이 발달한다 해도 결코 역전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가상은 현실을 좌지우지할 수 없다. 화면상의 미사일이 프로그램대로 완벽하게 작동했다 해도 현실에서 물리적인 원인으로 불발에 그친다면 인명 살상은 없다. 그렇게 보면 폭력적인 컴퓨터 게임이나 영화가 현실에서 폭력을 조장한다고 보는 관점은 잘못이다. 언뜻 생각하면 그렇게 여겨질지 몰라도 가상과 현실은 엄연히 차이가 있다. 만약 가상 이미지의 영향을 받아 현실에서 범죄가 발생한다면, 그런 일을 예방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가상 이미지를 제한하는 법적 조치 따위가 아니라 가상과 현실을 올바로 구분하도록 도와주는 교육 프로그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