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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나는 본래 카투사병의 TO가 없는 미군이 맡아야할 식당사무원 일을 맡게 되었다.
모든 서류작업을 수동타자기로만 하던 당시 거의 타자를 칠 줄 모르던 처음에는 많은 고생을 하였지만 Mess Clerk으로 일하던 그때가 나의 군대생활 중 가장 화려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이때 모범사병으로도 선발이 되어 받은 상장이 지금도 보관되어 있고 포상휴가도 나왔었다.
직책으로 치면 나중에 제대 전 10개월 정도 일한 KATUSA 1SG=First Sergeant로서 형식상의 대대 인사계 겸 선임하사를 맡게 된 것이 더 중책이었지만 골치 아픈 일이 많고 별로 환영받는 자리가 아니었다.
사건이나 사고가 생기면 골치 아프기 한량없다.
미군, 한국군을 불문하고 나만 불러댄다.
이때 미군측과 한국군측이 얘기가 잘 되면 별 문제가 없지만 서로 요구 조건이 달라서 공통분모가 안 만들어지면 나는 그야말로 중간에서 완전히 새가 된다.
형편없는 영어실력에도 불구하고 번역해야할 수많은 공문과 사건 현장에 통역을 하러 대대장이나 고위 간부급 GI옆에 나란히 앉아 차를 타고 가야한다.
대부분 사소한 개인적 다툼으로 출발하여 집단화한 것, 처우 등 돈에 관련되어있거나 인격적 부당한 대우에 관한 것들이 많다.
이렇게 한국인과 미국인들의 충돌은 전혀 문제가 될 것이 아닌데 ‘언어’와 ‘문화’의 차이에서 오는 오해가 상당히 많다.
또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훈련을 나갔는데 한 참 작업을 하느라 식사 시간이 늦어졌다.
미군이 먼저 말했다.
“I'm hungry, too much!"
“Are you? But me yet."
"You are not hungry, huh?"
"Yea!“
‘넌 배가 안고파, 어?’
‘응!’
우리 한국어는 이게 말이 되지만(물론 고집스럽게 ‘아니’라고 말해도 된다. 좀 애매하다.), 영어에서는 안(No) 고프니까 일관성 있게 ‘아니(No!)’라고 반드시 말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너는 벌써 배고프냐? 나는 아직 참을 수 있다.’는 정도의 가벼운 농담이었는데 미군은 열 받았다.
그렇지 않아도 배고파 기분이 좋지 않은 상태의 미군은 ‘너, 날 놀리냐? 왜 이랬다 저랬다 하느냐?’고 화를 냈고 아직 Broken이나마 영어에 익숙지 못한 신참 카투사는 ‘내가 뭘 잘못했느냐?’고 어리둥절해 했다.
‘No!'나 ’Nope!'이라고 해야 할 것을 우리말 하듯이 ‘예’와 ‘아니오’를 바꾸어 사용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얼마 전에는 한국인이 미국내 법정에서 'yes'와 'no'를 잘못 사용하여 정신병자 취급을 받았다는 뉴스를 들었다.
아무 생각 없이 말해도 ‘yes'와 'no'를 제대로 쓴다면 그것만도 상당한 영어실력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식당 사무원일이 어느 정도 숙달되어 있을 무렵의 어느 날, 식당 사무실(mess office)에서 다음날 메뉴를 만들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Battalion mess hall corporal Kim speaking, sir!" (대대식당 김상병입니다.)
“Hey, let me talk to Porter." (야, 포터 좀 바꿔줘.)
목소리를 들으니 블랙파워의 지도자급인 Williams의 목소리이다.
나는 순간적으로 열을 팍 받았다.
군대에서 군대예절에 맞는 공식적 회화가 아닌 상대를 완전 무시하는 형식이며 말투이기 때문이다.
제대로 하면,
“This is Spec4 Williams. Can I talk to Spec4 Porter, Please!"
이렇게 해야 하는데 내가 한국인 이므로 아무렇게나 명령조로 말하는 것이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이렇게 대답했다.
“No, I can't.”
(제대로 말했으면 식당 홀에 나가 큰소리로 ‘Porter, You got a phone call. in th mess office!’라고 말하고 불러다 바꿔 주었을 것이다.)
그러고는 수화기에서 뭐라고 마구 떠들어대는 것을 그대로 끊어버렸다.
성질 더러운 Williams의 비위를 건드려 놓은 것이 다소 찜찜하기는 하였지만 내가 잘못한 것은 없다 생각하고 계속 일을 하였다.
그런데 이게 그렇게 끝나는 일이 아니었다.
잠시 후에 머리에서 김을 팍팍 내 뿜으며 큰 몸집의 윌리엄스가 좁은 내 사무실로 달려 들어왔다.
거친 욕을 섞어가며 마구 기관총 쏘아대듯 퍼붓는 소리에 정신이 하나도 없다.
내 짧은 영어로 자세히 알아듣진 못하지만 쉬운 우리말로 하면 ‘야, 이새끼야. 네가 뭔데 전화를 안 바꿔 주는 거야, 임마!’
같이 맞서 시비를 붙었다간 맞아죽기 딱 알맞다.
사실 겁도 나고 어찌할 방법이 없어서 타자기 앞에 앉아서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자 잠시 후에 사람들이 몇 모여들었다.
대부분 윌리엄스의 흑인 친구들이었지만 매우 반가운 사람이 하나 눈에 띈다.
같은 흑인이긴 하나 바로 식당 책임자(Mess Sergeant)인 SFC Armwood(암우드 중사)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어찌된 일인지 ‘싸진 암우드’는 주특기가 Cook으로서 식당책임자를 보고 있지만 우리 부대에 전입 되어 왔을 때 특전단의 상징인 베레모를 쓰고 왔었다. 색깔은 자주색이었다. 녹색베레모와 어떤 차이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명찰위에도 낙하산 무늬 선명한 공정대 마크가 새겨져 있다. 그리고 월남전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된다.
몸집 또한 커서 거의 사병들 간에 물리적 충돌이 생겼을 때에 해결사 노릇을 한다.
무엇보다 나를 전적으로 신임하여 내가 하는 부탁은 좀 무리하다 싶어도 다 들어준다.
나는 천군만마의 지원군을 얻은 듯 용기가 치솟았다.
아까는 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당하면 아무도 모르게 혼자 당할 수밖에 없었는데, 지금은 아니다. 보는 사람도 많고 근본적으로 내가 잘못한 게 아무것도 없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서 소리쳤다.
“Hey, Williams. Listen exactly. I'm not your servant. Damn it! You got'ta say 'Please!' to me, you know?"
갑작스런 반격에 잠시 멈칫하는 사이 나는 계속하여 퍼부어 댔다.
“I'm working now. Get out'ta my office. I'm very busy, son of a bitch!"
사실은 여기 표현하기 곤란한 더 심한 욕을 했다.
내가 한 말이 영문법에 맞는지 나도 잘 모른다. 어쨌든 상대방은 알아들은 것 같다.
그리고 나는 욕만은 거의 다 꿰뚫고 있다.
이럴 때 미국문화의 좋은 점도 있다.
우리 같은 경우 ‘개새끼’라고 욕을 했다간 육박전을 각오해야겠지만 미국인들은 그저 욕설에 대하여 좀 거친 표현 정도로 생각하는 관대한 편이다.
근무 중이라고 내 사무실에서 나가라는데 제가 어쩔 것인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해지면서도 비실비실 물러섰다.
그때까지 말없이 뒤에서 지켜만 보던 싸진 암우드는 소동이 가라앉자 나를 보며 싱긋이 웃더니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워 보이고는 키친으로 갔다.
나는 불과 길지 않은 시간에 평소 다소 못 마땅했던 거물 Williams에게 두방을 먹인 것에 대하여 통쾌함을 느낌과 동시에 막연한 불안감도 같이 느꼈다.
--Williams라는 인물에 대하여
몸집이 중간보다 큰 편이고 합기도를 배운 적이 있으며 현재 태권도 도장에 다니며 붉은띠이다. 그런데 다행히도 윌리엄스가 농구를 하는 것을 우연히 본적이 있는데 그리 날래다고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말투나 행동이 거칠고 대대 내 블랙파워의 중심인물이다.--
이후 많은 사람들로부터 걱정 어린 인사를 많이 받았다.
앞으로 과연 ‘무사할 수 있을 것이냐?’하는 의구심이다.
글쎄 그게 나도 걱정이다.
그 뒤로는 가능한 한 맞부딪치는 일이 없도록 윌리엄스를 피하여 다니려고 노력을 하였다. 그러나 그게 어디 가능한 일인가? 넓지도 않은 겨우 전 병력 500여명의 대대 규모 부대 내에서......!
가끔은 내가 잠자는 barracks에 들어와 갑자기 공격을 해오면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이 되기도 했다.
도대체 밥 맛을 모르겠고 하루하루 지나는 것이 불안하였다.
피할 길이 없이 어느 날 정면으로 딱 마주치고 말았다.
“Hi, Kim!" 그가 먼저 웃으며 인사를 해 왔다.
"Hi!" 나도 반갑진 않지만 억지로 웃으며 인사를 하였다.
그런데 서로 웃으며 인사를 교환하기는 하였지만 아무래도 저 웃음 뒤에는 무슨 음모가 숨어있는 듯 하다. 그렇지만 당장 충돌하지 않은 것이 무척 다행스럽게 생각이 되었다.
무사히 며칠이 지났다.
하루는 백인병사 몇과 저녁을 먹고 걸어가는데 저 쪽에서 흑인병사 몇과 얘기를 하고 있던 윌리엄스가 반갑게 나에게 달려왔다.
의례적인 인사를 나누자 윌리엄스는 뜻밖의 제안을 해왔다.
나보고 태권도 자유겨루기(Free Fight)를 한번 하자는 것이다.
피할 핑계를 찾다가 너는 중량급이고 나는 경량급이니 상대가 안 된다고 하였다.
그랬더니 곧바로 그 대신 너는 검은띠이고 나는 붉은띠이니 비슷한 것 아니냐고 하였다.
그래도 피하고 싶은데 내 실력이 뛰어난 것으로 아는 백인병사와 윌리엄스편의 흑인병사들이 맞다고 한번 해보라고 강력히 권해온다.
‘난 이제 죽었다.’ 속으로 생각하고 우선 모면할 길을 찾는다는 것이 이번 주는 바빠서 안 된다고 했다. 그랬더니 그럼 다음 주도 좋다고 아예 날짜를 지정하여 내게 제시한다.
더 이상 피할 방법이 없다. 마지못해 약속을 하고 말았다.
아마 그동안 나에게 당한 수모를 보복할 길을 찾다가 나의 빈약한 체격을 만만히 생각하고 동료들과 상의한 후 결정한 내용 같았다.
나는 그날부터 간절히 기도를 했다. 제발 갑자기 윌리엄스나 내가 다른 부대로 전출을 가든지 팀스피리트나 FTX등 큰 훈련이 걸려서 그날 둘 중에 하나가 부대를 떠나게 되기를.......!
내가 뭐 평상시 하느님께 잘한 게 있나 이 기도는 전혀 효험이 없었다.
윌리엄스는 여러 사람들에게 광고를 한 모양으로 윌리엄스와 나의 대결은 부대 내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지경이 되어버렸다.
그것도 겨루기가 아니고 그냥 ‘싸움’을 하기로 한 것으로.......!
이건 내가 백날 손해 보는 대결이다.
이길 가망이 없는 것은 둘째 치고, 우선 이겨봤자 검은띠가 붉은띠를 이긴 당연한 결과이다.
지는 날이면 복수를 당하는 것이면서 태권도라는 동양무술에 막연한 신비함 같은 것을 가지고 있던 미국인들에게 태권도 별 볼 일없다는 인식을 심어줄 우려가 있다.
뿐만 아니라 나는 제대하는 날까지 불명예를 안고 놀림을 받으며 비참하게 살아야 한다.
피할 길 없는 D-Day는 속절없이 하루하루 다가오고......!
드디어 그 날이 돌아왔다.
나는 며칠 전부터 밥맛이 하나도 없고 세상 살 의욕이 없이 신경이 쓰이건만 어찌된 셈인지 윌리엄스로부터 아무런 연락도 없다.
‘다행히 윌리엄스가 약속을 잊은 것인가?’
이런 어림없는 상상도 해 보았다.
저녁 식사 때까지도 아무 소식이 없다. 왠지 불안감은 더 깊어간다.
불안감을 안고 부대 식당에서 제공하는 메뉴 중 최고급인 티본스테이크(T-bone Steak)가 나온 저녁 밥맛도 모른 채 식당 문을 나섰다.
나의 숙소를 향하여 천천히 걸어가다가 깜짝 놀랐다.
막사 사이 좀 넓은 잔디밭에 흑인 백인 병사들이 적잖이 모여 있는 것이다.
내막을 모르는 카투사병들은 한두 명밖에 눈에 안 띈다.
어쩌면 다행일지도 모르겠다. 기왕에 당할 창피이라면 아는 사람이 될 수 있으면 적은 편이 낫다.
윌리엄스가 손짓을 하며 나를 불렀다.
“Hey, Kim. Are you ready?"
우와, 미치겠다. 도저히 도망갈 방법이 없다.
순간적으로 윌리엄스 앞에 엎드려 잘못했다고 빌고 싶은 생각까지 난다.
그것이 비굴하긴 하지만 정당한 방법으로 맞아죽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그때 기분은 나빴어도 전화나 바꿔주고 말 것을 괜히 자존심 있는 체 하다가 인생을 망치게 되는구나하는 생각도 들었다.
더 이상 우물쭈물하는 것 보다는 차라리 정정당당히 대결하여 쓰러지더라도 빨리 해결하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상대하기로 했다.
어디에서 나의 수호천사 싸진 암우드가 지켜보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나는 미리 다짐을 해 두었다.
첫째, 잡는 것 없기
둘째, 오로지 태권도 방식에 의해서만 경기하기
그리고는 곧바로 마주 섰다.
--여기서 나의 태권도 경력을 잠시 소개한다.
고교 일학년 때 태권도 도장에 6개월 다닌 적이 있다. 붉은띠도 못 따고 후배로부터 창피를 당하고 집어치웠지만 이때 사범의 과학적 이론을 바탕으로 한 지도 방법이 탁월하여 기초는 튼튼히 다졌다.
1970년 내가 처음 교직에 발을 들여놓고 얼마 후 1년쯤 지난 22살 때, 내가 근무하는 학교에 서울 무덕관 중앙본관에서 태권도 공인 5단인 김창선 사범이라는 사람이 와서 학교 아이들 및 근동의 청년들에게 태권도를 가르친 적이 있었다.
이 사람의 숙소가 마땅치 않아서 나의 하숙집에 함께 기거하면서 6개월 정도 같이 지낸 적이 있었는데 TV도 없던 시절, 저녁을 먹고 나면 별다른 오락거리도 없어서 틈틈이 나에게 유단자 품세 및 겨루기를 가르쳐 주었다.
그 당시 태권도 수련을 할 때는 몇 가지로 나누어 하였는데
첫째, 지르기, 차기, 막기 등 기본자세
둘째, 태극형, 팔괘형, 평안형 등 여러 가지 품세
셋째, 약속겨루기, 자유겨루기 등 겨루기
넷째, 주먹, 손날, 팔굽, 이마, 발 등을 이용한 격파 등이 있었는데 내가 주로 배운 내용은 품세와 겨루기였다.
난 태권도에 대하여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그 당시는 몇 년 전 한창 매스컴을 타던 김운용씨가 태권도계에 막 등장을 한 초기로서 아직 우리나라에 전통적인 무술로서 태권도가 위상을 찾지 못했던 것 같았다.
우선 ‘태권도’라는 말과 ‘태수도’라는 말이 병행되어 사용되었고, 사회에서도 당수(소림사를 뿌리로 하는 중국 권법)나 공수(일본 권법, 가라데)라는 말이 통용이 되었으며 전국규모의 단체에도 ‘태권도 연맹’과 ‘태권도 협회’가 공존하며 세력 확장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당연히 용어에도 혼란이 있었던 것 같아서 내가 가장 멋있게 생각하고 가장 많이 연습을 하였던 유단자 품세에 ‘밧싸이’라는 것이 있었다. 내 생각에 용어에서도 느껴지는 바와 같이 공수도의 품세를 그대로 차용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나로서는 '태권도가 우리나라의 전통 무술'이라는 데에 무슨 근거가 있기는 하겠지만 선듯 동의 하기 어렵다.
이 ‘밧싸이’ 품세는 나이 40이 될 때 까지도 잊지 않고 종종 연습을 했었는데 이제는 완전히 다 까먹어 버렸다. 지금은 당연히 기본자세도 나오지 않는다.
나중에는 충분히 유단자 실력이 된다고 자기 권한으로 단증을 만들어 준다는 것을 사양한 바가 있다.
군대에 들어와서는 무장공비 침투사건 이후 전력향상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전군에 태권도를 강력 권장하여 심사를 통하여 외출도 제한하는 등 불이익을 주어 누구나 태권도를 연마하게 되었다.
별 내용 없지만 내가 파견대장 대신 일주일에 두 번 검은띠 선명한 도복을 들고 용산으로 다니는 걸 김포 부대 내의 대부분 사람들은 몇 번씩은 봐서 내가 무슨 대단한 태권도라도 하러 다니는 고수로 아는 것이다.--
그 당시에는 중국 무협영화가 많이 나왔다. 성룡, 주윤발, 이연걸 같은 실력파가 있긴 하지만 무기와 맨손을 결합한 형태이고, 그 당시는 내가 좋아하는 맨손 무술로 유명한 사람이 둘이 있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깡따위(강대위)와 그리고 이소룡(브루스 리)이다.
이 둘의 무술을 보면 크게 다른 점이 있다.
이소룡은 계속 경쾌한 스텝을 밟으면서 몸을 움직이는데 비하여 깡따위는 상대가 움직이기 전에는 자세를 바꾸지 않는다. 즉 이소룡은 동적(動的)이고 깡따위는 정적(靜的)이다.
나는 잘 모르지만 듣기로는 이소룡의 권법은 남권(南拳)이고 깡따위는 북권(北拳)인 때문이라고 한다.
둘 중 누가 더 센지는 모르겠다. 연예인의 무술실력을 그대로 믿어도 되는 건지?
나와 윌리엄스가 마주서서 예를 갖추고 겨루기에 들어가고 보니 신기하게도 윌리엄스는 스텝을 밟는 이소룡 스타일이고, 나는 정적인 깡따위 스타일이다.
내 머리 속에는 이 글의 첫머리에서 밝혔듯이 ‘양놈은 다리가 약하다.’는 생각이 강했다.
몸집으로 보면 황소와 송아지의 대결이라고나 할까?
드디어 스텝을 밟으며 탐색을 하던 윌리엄스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접근전이 아니므로 공격은 주로 발을 사용하고 방어는 손을 사용하는데 나는 항상 먼저 공격하면 손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공격을 하면 상대에게 허점과 약점이 쉽게 노출된다.
나는 체력에 절대적인 열세를 가지고 있으므로 가급적 옆으로 뒤로 몸을 피하면서 어느 때 다리를 공격하는 것이 좋을까를 궁리하고 있었다.
내가 제일 두려워하는 공격은 앞차기이다.
스피드도 빠를 뿐 아니라 방어가 곤란하다. 거기다가 공격 당하는 부분은 아래위로 몸의 중심을 따라 급소가 늘어서 있다.
윌리엄스의 파워 정도면 빗맞아도 KO되기 십상이다.
천만 다행히 윌리엄스는 앞차기 공격은 거의 없고 옆차기, 돌려차기와 뒤로 돌려차기 등 남 보기에 화려한 기술이 중심이다.
내가 한번도 공격을 하기 전 열 번도 더 공격을 해 온다.
그만큼 자신감에 차 있는 것이다.
헛발이 반도 더 되지만 몇 번을 손으로 막아보았더니 파워가 엄청나다. 이러다간 방어를 하다가도 손이 남아나지 않겠다.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라고 ‘손자병법’에 있었나, ‘육도삼략’에 있었나?
한 없이 방어만 하다간 결국 내 손이 다 부서져 버리고 말 것만 같다.
죽이 되던 밥이 되던 나도 공격을 해야겠다. 손도 아프고......!
나는 체중이 빈약하여 체력이 약한 대신 몸이 가벼워 뛰어오르기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다.
나이 사십이 될 때 까지도 손에 닿는 것이면 어느 것이나 뛰어올라 찰 수가 있었다.
몇 번 하단을 공격 하는 체 주의를 아래로 끌다가 갑자기 뛰어올라 머리를 돌려 찼다.
윌리엄스는 당황하여 얼결에 손이 나가 방어를 하였으나 가볍게 머리에 가격을 당하였다.
물리적으로는 별 충격이 없는 것이었지만 정신적으로는 충격이 큰 것 같았다.
자신만만하던 얼굴 표정이 사라진 것이 역력히 보였다.
상대적으로 자신감을 얻은 나는 공격의 빈도가 높아졌다.
하단을 공격하는 체 상단을 공격하는 나의 수를 어느 정도 읽은 윌리엄스의 방어능력이 향상되었다.
몇 번 방어를 당하니 이번엔 공격하던 내 다리가 부러질 것 같이 아프다.
방어하자니 팔이 부러질 것 같고, 공격을 하자니 다리가 부러질 것 같고, 그야말로 진퇴양난이다. 이런 나의 속내를 윌리엄스가 눈치를 못 채야 할 텐데........!
나는 다시 깡따위의 전형적인 정적인 폼으로 돌아왔다.
이젠 윌리엄스도 섣불리 공격을 하지 못한다.
윌리엄스의 파워 대 나의 스피드와 기술의 대결 양상이다.
가능한 한 그의 공격에 방어를 하지 않고 피하면서 나 또한 그의 손이 닿지 않을 만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폼만 그럴싸하게 그의 얼굴 앞으로 발이 지나가도록 높이 뛰어 올라 내 둘렀다.
간간이 구경하는 GI들로부터 감탄이 터져 나온다.
더 이상 시간을 끌면 나의 체력이 들통 난다. 빨리 끝장을 내야겠다.
내가 접근을 해 들어가니 공격을 하려고 앞으로 굽혔던 몸이 뒤로 빠지면서 방어자세로 전환이 된다.
방어 자세인 뒷굽이(후굴자세)에선 몸의 무게 중심이 뒷다리에 가 있어야 되는데 자세를 바꾸느라 아직 무게 중심이 뒤로 이동되지 않았을 때 상단을 공격하는 척 시선을 위로 잔뜩 치뜨고는 있는 힘을 다하여 앞에 나와 있는 다리를 옆으로 돌려 찼다.
이때 걸리면 공격당하는 쪽에서 나가떨어지는 것이요, 이미 몸무게 중심이 뒤로 이동되어 걸리지 않으면 공격을 하는 쪽이 중심을 잃고 쓰러지게 된다.
다행히 제대로 걸렸다.
윌리엄스의 두다리가 공중에 떴다가 그 황소같이 육중한 몸뚱아리가 잔디밭위에 ‘꽈당’ 나뒹굴었다. 윌리엄스도 놀랐겠지만 거짓말 같은 현실에 나도 놀랐다.
윌리엄스는 예기치 못한 사태에 몹시 당황했나보다.
급히 일어나려고 서두르니 몸은 더 말을 안 듣고 버둥거린다.
‘역시 양놈은 다리야, 팔촌형님의 말이 딱 맞네!’
나는 속으로 춤을 추고 싶도록 기뻤지만 애써 표정을 감추었다.
사실은 상대를 넘어뜨렸다 해도 별 수는 없다. 심리적으로만 위축 시킬 수 있을 뿐!
왜냐하면 누워서도 얼마든지 방어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나는 기회다 싶어 자세를 완전히 풀고 윌리엄스에게 손을 내 밀었다.
그리고는 한껏 목소리를 낮추어 깔고 말했다.
“Hey, young man! You are a good Taekwondo player. You'll be better than me in a year. I'm getting old."
사실 그 때 나는 24살이었고 윌리엄스는 20살에 불과했다.
다행히 윌리엄스는 기꺼이 내 손을 잡고 일어났다. 가짜일망정 검은띠인 내 칭찬에 흐뭇했던지 입이 튿어져라 얼굴 가득 웃음을 머금고.......! 나는 얼마나 고맙던지.......!
관중들은 더 깊이 있는 경기를 보고 싶었겠지만 나는 지옥에서 탈출한 느낌이었고, 어쩌면 나의 심정을 잘 모르는 윌리엄스도 나에게 더 공격당하지 않는 것을 고마워하였을는지도 모르겠다.
남이 알까 모르게 날아갈 듯 홀가분한 마음을 안고 막사로 돌아왔다.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흐뭇한 느낌을 즐기고 있는데, 잠시 후에 이 세기의 대결을 지켜본 내 방에서 같이 자는 Room Mate인 백인 병사 Hubbard가 들어와 나에게 강력 항의를 하였다.
왜 윌리엄스가 쓰러졌을 때 네가 충분히 이길 수 있었는데 포기를 하였느냐는 것이다. 남의 속도 모르고.......!
그래서 또 점잖게 한마디 했다.
“That's not Taekwondo man ship."
그랬더니 윌리엄스는 이미 공공연히 사람들에게 오늘 Kim Y. B.를 패 죽이겠다고 공언을 하고 다녔는데 태권도맨쉽은 무슨 놈의 태권도맨쉽이냐고 다음에 또 그런 일이 있으면 끝장을 내버리란다.
누군들 마음에는 없으랴마는.........!
나는 이 일로 인하여 많은 덕을 보았다.
우선 블랙파워 집단으로부터 한동안 집적거림을 덜 당했고 부대 내 여러 사람들에게 태권도 고수이며 신사적이라는 평을 받았다.
몇 해 전 내가 맡은 반에 태권도 도 대회에 나가서 금메달을 땄다고 기고만장 뻐기는 녀석이 하나 있었다.
그래서 내가 이놈에게는 겸손을 가르칠 필요가 있겠다 생각하고 겨루기 한 판을 하자고 했다.
그리하여 언젠가 30여 년 전 그날처럼 반 아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가벼운 한 판이 벌어졌는데, 별 일은 없었다. 내 안경이 날아간 것 밖에!
11. GI의 상벌
대대본부에는 Regal Clerk(상벌계)이 한명 배치되어 있었다.
그가 하는 일은 사병들의 시상과 징벌에 관한 서류작성이 주 업무이겠지만 내 눈에 보이기는 수시로 소령인 대대 부관과 각 중대의 선임하사(1SG)들과 얘기를 나누는 것만 많이 보았다.
부대 내에서 상을 주는 경우는 널리 알려지지 않는 개인적인 문제여서 그런지 한달에 한번씩 선출하는 모범사병 상을 주는 것 외엔 아는 것이 없다.
(나도 한번 카투사 모범사병에 선발되어 표창장을 받은 바 있다. 아무데도 쓸데 없는 종이쪽지이지만 제대하고 미국사회에 취업을 하고자 할 때는 매우 유효하다 한다.)
그러나 벌을 받는 것은 많이 보아서 알고 있다.
벌은 상급자에게 밉게 보였다고 무조건 줄 수 있는 것은 아니고 ‘Army Regulation’(육군규정)과 ‘Article 15’(비사법적 징계조항)에 의하여 인데 아마 육군규정을 위반하는 것은 중범죄로 재판을 통하여 영창을 보내는 등 처벌을 하는 것 같고, ‘Article 15’은 지휘관(장교)이 군기 위반자를 재판 없이 처벌할 수 있게 하는 재량권에 관한 조항으로 거의 모두 이 조항을 위반하여 지휘관으로부터 징계를 받는다.
내가 직접 목격한 징계의 종류를 알아보면
ㅇ 외출정지 - 우리 카투사도 사소한 잘못을 저지르면 인사과에서 얼마간 외출증을 내 주지않는다. GI도 마찬가지이지만 우리와 다른 점은 우리는 주말에 한하여 외출이 가능하지만(특별한 경우는 주중도 가능) GI들은 근무시간 만 아니면 언제나 외출이 가능하다 그것도 중대본부에 항상 놓여있는 자기 Daily Pass Card를 임의로 가져가고 자기가 소지하고 있는 아이디카드, 소파카드만 가지고 나가면 Gate에서 무사통과다. 내 기억이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 당시 미군 사병 봉급이 우리나라 직장인의 8~10배 정도 되었다고 생각하는데 많은 수의 사병이 영외에서 현지처로 한국여성(대부준 양공주)과 방을 얻어서 살림을 차려도 자기 보수의 1/20 정도만 들여도 되니 별 부담이 없다. 매일 나갔다가 밤 12시 이전에만 Pass를 제자리에 갖다 놓기만 하면 된다. 부대밖 유흥장 출입도 그들의 보수에 비하면 푼돈이니 매일 다녀도 별 부담 안 된다. 외출을 정지시키는 것은 충분히 징벌의 효과가 된다.
ㅇ Detail(사역) - 듣기로는 넓은 광장에 직경 1m 정도의 구덩이를 팠다 메웠다 하는 중노동 얘기를 들었는데 그런 것은 구경 못했다. 기껏 일정한 시간 동안 영내에 Area를 정해주고 쓰레기 줍는 봉사활동을 하는 것인데 거의 쓰레기가 없다. 왜냐하면 미군부대에는 청소를 하는 군인이 없다. 실내청소는 각 막사에 고용된 House Boy들이 하고 실외 청소와 잔디깎기 같은 것은 KSC(Korean Service Corps, 한국인 노무대)에서 다 한다. 중대 본부에 와서 시작과 끝을 신고만 하면 된다.
ㅇ 감봉 - 여기서 부터는 큰 문제이다. 받아야 할 돈이 줄어든다는 것은 우리나 남이나 보통 일이 아니다.
ㅇ 강등 - 우리나라 육군규정에도 강등 당할 수 있는 규정이 있지만 나라를 들썩일 만한 사회적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한 강등되는 것 규경하기 어렵다. 그런데 GI들은 강등 당하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감봉이야 몇달 보수가 줄어들 뿐이지만 감봉은 계급이 낮아지다보니 장기간에 걸쳐 보수가 줄어들게 되는 것이다. GI들이 우리 한국군 보다 배짱이 좋은 것인지 강등될 것을 뻔히 알면서도 잘못을 저지르는 수가 많다.
그래서 진급을 하는 사병에게는 동료들이 계급장 떨어지지 말라고 계급장 붙이는 어깨를 주먹으로 때려주는 풍습이 있다.
ㅇ불명예제대 - Norton이라는 이름의 이등병, 딱 한명 본적이 있는데 무슨 규정에 의한 징벌인지 잘 모른다. 꽤 미남인 백인 병사이고 같은 사병은 물론 우리 카투사들에게도 잘 대해주는 멋진 사람이었는데 안타까웠다. 오래된‘에덴의 동쪽’이라는 영화의 주인공 ‘제임스 딘’처럼 사사건건 Section Chief, GI선임하사와 중대장 등 상사들에게 대립각을 세우더니 결국은 불명예제대를 하고 홀로 미국으로 떠났다. 높고 강한 사람들과만 사이가 나쁘다. 불명예 제대를 하면 연금도 못 받고 직장을 구하기도 어렵다는데 그 사람 앞날이 걱정된다. 모쪼록 행운이 함께 하기를!
12. 대대 카투사 선임하사(Bn KATUSA 1SG)
‘까라면 까’라든가 ‘X퉁소는 불어도 국방부 시계는 돌아간다’는 말을 요즘도 쓰는지 모르겠다.
어느듯 세월은 흘러흘러 암흑가의 소굴 같던 SP 막사에서 신고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22개월이 지났다. 이제 병장도 달고 이권식 병장이 제대를 하게 됨에 따라 내가 뒤를 이어받아 본부중대 카투사 선임하사가 되었다.
그 당시 메스 싸진은 켄튼의 뒤를 이어 암우드(Armwood)라는 몸집이 큰 흑인 중사였었는데 처음 전입올 때 자주색 베레모에 가슴에는 공정대 휘장을 달고 왔었다. (월남전 참전 후 바로 한국으로 왔다한다.)
미국 액션 영화 ‘언더 씨즈’의 주연이었던 ‘스티븐 시걸’이 쿡으로 나와 열차에서 테러리스트 들을 제압하는 영화를 흥미진진하게 본 적이 있었다. 지금 메스 싸진 암우드를 생각하면 영낙없이 스티븐 시걸이 떠오른다.
내가 메스 클럭 일을 마지막으로 하던 날은 나를 위해 NCO Club에서 맥주 몇 캔 놓고 간단한 스몰 파티도 열어 주었다.
실권이야 아무것도 없이 중대원들 외출, 외박, 휴가, 진급 업무와 인사과 지시사항을 중대 카투사들에게 전달해 주고 군대 생활이 무난하게 돌아가도록 중간역할을 하는 것이지만 GI들이 생각하기엔 본부중대 선임하사(인사계)이니 GI CSM(Command Sergeant Major 특무상사)처럼 대대내의 모든 카투사를 내가 지휘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내 사무실 앞에 붙어있는 공식적 직책은 대대 카투사 선임하사, 대대 번역관, 대대 통역관이다.
대대본부 Main Loby 옆에 그럴 듯한 일인용 사무실에 책상, 타자기, 책꽂이, 접견용 의자 등 집기가 제대로 갖춰진 사무실로 혼자 출근하여 하루 종일 지내다가 저녁에 퇴근을 한다.
하는 일은 매일 아침 Daily Morning Report(일보)와 월 1회 Monthly Report(월보)를 작성하여 병력의 이상 유무와 보직, 계급 변경 상태를 카투사 인사과와 GI 대대본부에 보내면 되는데 서류를 내가 직접 가지고 다닐 필요도 없다. Main Loby에 있는 Messenger Box에 넣어두면 가져가는 사람이 따로 있다.
그리고 나는 직책이 위에 말한대로 대대 번역관 겸 통역관을 겸하고 있는데 실지로 번역, 통역을 할 만큼 영어의 끈이 길지 않다.
그러나 매일 내 책상앞에는 번역할 서류들이 수북히 쌓여있다.
이거 말년에 또 메스 오피스에 처음 옮겨갔을 때처럼 매일 아침저녁으로 생고생을 하게 되는 것 아닌가 걱정이 되었다.
영한사전, 한영사전을 찾아가며 서류에 번역을 반도 못했는데 찾으러 왔다. 아직 못했다고 조금있다 오라고 했더니 진짜 조금있다가 바로 또 왔다. 아직도 못했다고 했더니 이렇게 말했다.
‘이 서류들은 부대내의 규정, 내규 같은 것으로 규정상 몇군데의 게시판에 붙여놓아 한국 사람들도 볼 수 있도록 되어 있어서 가져왔을 뿐이지 보는 사람이 없다 그러니 그냥 아무거나 한글로 대충 써라. 전에도 그랬다.’는 것이다.
그래서 드문 드문 아는 단어만 대충 해석하여 주었다. 빽빽한 영어 문장에 비하여 나의 번역은 내용이 길지 않다. 작은 게시판에는 게시해야 할 내용이 많아서 자주 바뀌므로 다행이었다.
주로 카투사나 한국인 종업원들에게 알리는 내용이 많았지만 게시판에 붙여놓기 전에 이미 그들은 그런 정보를 먼저 다 알고 있었다.
더 큰 문제는 통역이었다.
부대와 한국인 사이에 갈등이 생기면 대대장 컬러널 탐슨(LTC Thompson) 중령이나 부관이 전화를 먼저 해 놓고 찝차를 타고 와서 나를 데려간다. 한국사람들을 모아놓고 연설하는 것을 통역하라는 것이다. 처음에는 난감하기 짝이 없었는데 이것 역시 엉터리 번역이나 마찬가지 일이었다.
긴 대대장의 연설에 비하여 나의 통역은 짧다. 아는 게 없으니.... 그러나 대부분 잘 알아 듣는다. 내 통역이 아니어도 문제점이 무엇인지 어떻게 해결을 하려고 하는 것인지 말투만 들어도 다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질문은 직접하는 경우가 많고, 어쩌다 나에게 말 해달라고하는 경우도 있는데 나도 부대 돌아가는 상황을 대개 파악 하고있기 때문에 크게 어렵지는 않았다. 대부분 돈 문제, 처우 문제, GI의 부당한 언행 등의 문제이다.
아마 영외(營外)에서 대학 영문학과를 우수하게 졸업하여 유창한 영어회화를 구사하는 민간인이 와서 통역을 한다 해도 나의 무식한 통역을 따라오지는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아무리 영어를 잘해도 우리 부대에 필요한 군사용어는 나만큼 모를 것이요, 오랜 부대생활로 사건의 내막이 무엇이며 한국인들이 요구하는 것이 무엇이고 미군들이 어떻게 답변하고자 하는지 내가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이다.
오후에는 할일이 없어서 이리 저리 돌아다니며 우리 중대나 다른 중대 비슷한 처지의 고참들과 농담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다 온다. GI들은 대대 인사계의 업무차 이곳저곳 근무하는 카투사의 일을 감독(Supervisor)차원에서 돌아다니며 보는 것으로 안다.
저녁에 NCO Club에 올라가면 전과 분위기가 다르다.
바로 전 식당 사무실에 있을 때만 해도 맥주를 한두 캔씩 갖다 주던 GI들이 이제 Bn First Sergeant가 되었으니 자기들 맥주를 사달라고 한다. 남의 사정도 모르고!
동서양을 막론하고 같이 몸을 부딪쳐 가며 땀 흘려 일하는 곳에서는 동지애가 생겨 정이 깊어지지만 서류 작업을 하는 사람들 사이이거나 직급이 차이나는 사이에는 정이 깊어지기 어려운 것 같다.
13. 현충원 앞 검문소
선임하사를 맡고서 몇 개월 지났다.
중대 내에서야 내 위로 고참이 서너 명 있었지만 내가 어려워할 이유 없고, 나한테 잘 해줘야 아뭇소리 않고 외출증 꼬박꼬박 챙겨다 주지 기분 나쁘면 핑계대고 안 끊어다 줄 수 있다. 더러 기어오르는 하급자들도 있을 수 있는데 스스로 내리누를 힘이 없으면 당하고 말 수도 있다. 내가 가끔 제동을 걸고 질서 유지를 해 주어야 고참들의 군대 생활이 편하다.
나는 중대 내에서는 막강하지만 중대 밖이나 특히 Gate를 벗어나면 한 없이 나약한 존재다.
나보다 6개월 정도 선임인 천안 다가동 사람 나기섭이란 사람이 있었다.
입대 전에는 모르는 사이였지만 학교로는 나와 동기로 그 사람의 친구 중에 유건석이라는 친구는 나의 중, 고등학교 동창생인데 나병장 면회를 와서 부대에서 함께 만난 적도 있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제대하고 서울의 예식장에서 결혼식을 하게 되었다.
부대 내 그와 가까운 여러 사람이 외출증을 끊어 결혼식에 같이 갔다.
점심 잘 먹고 나오려하니 천안에서 하객을 싣고 올라온 대절버스가 자리 많이 남는다고 천안을 내려가자고 한다.
외출증 밖에 없어 안 된다고 하니 말년에 무슨 그런 걱정을 다 하냐고 하면서 관광버스는 헌병들이 잡지 않으니 자꾸 같이 가자고 권한다.
나한테만 그런게 아니고 거기 있는 여러 사람들에게 그랬는데 가겠다는 사람이 열명 가까이 되었다. 그들을 세 종류로 분류할 수가 있는데 하나는 천안지역을 갈 수 있는 외박증을 가진 사람, 타지역 외박증이 있는 사람, 외출증만 있는 사람 등
군인에게는 벗어날 수 없는 위수지역(구)이라는 것이 있다. 외출증은 부대가 속한 위수지역만 효력이 있고, 외박증에는 거기 명시된 지역과 그 지역을 오가는 교통로에 한하여 통행할 수 있다. 우리 김포 부대도 서울시내에 위치하므로 외출 시에는 서울시내 권역만 갈 수 있다.
식사와 함께 반주로 마신 술기운 탓인지 외출증 밖에 없는 아이들이 가겠다고 나선다.
시선이 나에게 쏠리는 듯하다.
‘쫄병들도 간다는데 왕고참급이 용기 없게.....!’
싫지만 분위기에 휩쓸려 나도 그만 천안행 대절버스에 타고 말았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주머니에 있던 많은 돈은 양말 안 발바닥 밑에 넣어두고 넉넉한 교통비와 뺏겨도 섭섭지 않을 만큼의 돈만 남겨 놓았다.
내려가면서도 나는 올라올 때 잡히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이 태산 같은데 다른 사람들은 하나 개의 않고 화기애애하게 농담들을 해가면서 즐겁게 논다.
천안에 도착하여 다가동 일봉산 밑 나병장 집에 가서도 대접 잘 받고 술마시고 노래도 부르고 놀다가 시간이 늦어져 서울로 가려고 나왔다.
기차로 가자커니 버스로 가자커니 우왕좌왕하는데 내가 시외버스로 가자고 강력히 주장하였다.
천안역 앞에는 TMO에 헌병들이 있어서 무사히 지나가기 어려워 시외버스를 타자고 한 것이다. 그래도 일부는 천안역으로 가고, 또 일부는 한잔 더 먹는다고 술집으로 가고, 나와 우리 본부중대 하급자 2명만 버스를 타러 갔다.
그때는 강남고속버스터미널이 생기기 전으로 시외버스터미널이 용산에 있었다. 그때 우리가 탄 버스가 제대로 운행노선을 지켜 간 것인지는 모르나 동작동 현충원 앞으로 지나가게 되었다.
시외버스 정류장도 아닌데 버스가 선다. 왜그런가 밖을 내다보고는 그만 하늘이 노랗게 보였다. 동행한 두 사람은 천안 내려갈 때는 세상 걱정 하나 없는 사람 같더니 얼굴이 흙빛이 된 채 내 얼굴만 바라보고 있다.
나는 애써 태연한 척 무표정하게 가만히 있었지만 어찌 뭇새가 봉의 타는 속을 알랴?
앞에서부터 젊은 사람들만 골라 하나씩 신분증 검사를 해오던 헌병, 내 앞까지 왔다.
계급장을 보니 일병인 이 헌병, 마치 무도장에서 아가씨에게 춤을 청하는 제비처럼 멋진 손동작으로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 손을 잡고 버스 안에서 블루스 한곡 땡겨?’어디까지나 헛소리이고, 나는 무표정하게 구멍 뚫린 주민등록증과 함께 외출증을 내밀었다.
역시 멋진 동작으로 받아 눈앞에 대고 한번 쓱 훑어보더니 돌려주지도 않고 나처럼 무표정한 채 한마디 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려간다.
“내리시죠!”
나는 꼼짝도 않고 버스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무슨 방법이 있어서가 아니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겠기 때문이다.
잠시 기다리다가 다시 올라탄 헌병, 아까와 똑같은 무표정으로 똑같은 말 한마디 ‘내리시죠!’를 하고는 아까와 달리 내려가지 않고 기다리고 서있다.
꼼짝 못하고 세명은 따라 내려갔다.
헌병의 교통 수신호는 또 얼마나 멋진가!
내가 내린 버스를 멋진 수신호로 보내고 잠시 서 있더니 뒤로 돌아서서
“야, 이 새끼야! 네가 뭔데 헌병이 내리라는데 안 내리고 버텨?”
헌병 좋다! 새카만 일병이 왕고참 병장에게 쌍욕도 할 수 있다니.....!
욕만 하면 다행이게? 그 즉시 씩씩 거리며 메고 있던 M-1 소총 개머리판으로 내 가슴을 사정없이 내려찍는다. 몇 차례 욕 얻어먹고 개머리판으로 얻어맞고를 반복하다가 분이 풀렸는지 현충원(국립묘지) 검문소 육각정 건물 안으로 끌고 들어간다.
나는 그 안의 상병에게 인계되었다. 내 밑의 두명은 엎드려뻗쳐를 시키고 나는 선임자 예우 차원인지 무릎 꿇려 앉게 시켰다. 가만히 앉아 있는데 어디서 ‘퍽, 퍽’빳따 치는 소리가 들리고 ‘아이고, 아이고’곡소리가 난다.
이리저리 살펴보니 이 건물은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다. 아래 지하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보이고 소리는 그 아래로부터 들려온다.
‘잠시 후에는 내가 저렇게?’불길한 예감! 이렇게 살벌한 속에서 가만히 기다리는 시간은 공포심이 배가가 된다.
진짜 잠시 후에 나는 밑으로 혼자 불려 내려갔다.
내려가는데 몇년전 훈련소에서 맡던 퀴퀴한 짬밥 냄새가 진동을 한다. 아마 지하층이 헌병들 밥먹고 잠자는 생활관과 취조실을 겸하고 있나보다.
S)책상 앞에 반바지에 런닝셔츠 차림의 병장이 앉아있고 그 주변에는 원산폭격 중인 사람, 푸쉬업 중인 사람, 얼굴이 빨갛게 부어 무릎꿇고 있는 사람 등등이 있고 옆에는 몽둥이를 든 헌병 일병이 그 군인들을 몽둥이로 직신 직신 거리기도 하면서 왔다갔다하고 있었다.
나는 각오를 단단히 하고 이를 악물었다.
군대가 다 그렇겠지만 여기 헌병들은 역할분담이 아주 잘 되어 있는 것 같다.
“야, 너 이리와, 여기 머리 박아!”
원산폭격? 훈련소에서 많이 해봤다. 그때는 원산폭격이 내게는 기합이 아니었다. 거의 편안히 잠자는 수준에 가까웠다. 그런데 그런 것이 다 때가 있는 건가 보다. 일분을 못 버티겠다. 나는 정말로 일분도 안 되어 그냥 그 자리에 앉아 버렸다.
그 반바지 병장, 다른 엎드려뻗치고 있던 다른 잡혀온 군인을 불러 한참 ‘탈영’어쩌고 저쩌고 말을 시키더니 몇 대 더 때리고 내보내라고 한다.
내가 앉아 있는 것을 한동안 지켜보더니 빙그레 웃으며 말을 건다.
“야, 왜 박고 있으랬더니 앉아있냐?”
“힘들고 아파서 못 하겠어요.”
‘못 하겠습니다.’라고 해야 하지만 같은 고참끼리의 말투로 그렇게 말했다.
“그래, 이리 와 봐!”
일어서서 가까이 갔더니, 내 몸에 대고 냄새를 킁킁 맡는다.
“아휴, 빠다 냄새! 야, 카추샤 군대생활 좋지?”
“아녜요. 양놈들 밑에서 고생 많아요.”
“야, 엄살 말아라. 대한민국에 카추샤보다 더 좋은 군대가 어디 있냐? 우리는 정말 죽겠다. 알아서 뜯어 먹으라고 부식도 안 대준다. 뜯어 먹으려 해도 순순히 내 놓는 놈 하나 없고....”
그러더니 본론에 들어간다. 병장 계급장 달린 모자를 책상위에 뒤집어 놓고
“야, 여기다 다 내 놔!”
이게 무슨 뜻인지 몰라 머리를 부산하게 굴렸다. 돈은 내라는 소리 같긴 한데 섣불리 돈을 넣을 수도 없고 하여 물어봤다.
“예? 뭘 넣어요?”
갑자기 온화하던 안면이 싸늘히 싹 바뀌더니
“야, 임마! 뉴스도 못 들어봤어? 오늘 탈영병이 있었다잖아? 네가 탈영병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 실탄을 갖고 탈영을 했다니 실탄 가진 것 다 내놔!”
“저, 아닌데요. 실탄 같은 것 없어요!”
“이 새끼가....! 주머니 뒤지기 전에 갖고 있는 것 모두 여기 내놔!”
처음부터 적당한 돈만 넣어 놓았으면 끝날 일이었나 보다. 할 수 없이 주머니에서 돈, 손수건, 이런저런 잡동사니..... 다행히 카투사라면 80% 이상 소지하는 양담배와 달러는 없었다. 나는 원래부터 외출 시에는 적발될 만한 소지품을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가지고 다니지 않는다.
불법 소지품도 없고 갖고 있는 돈의 액수도 많지 않고 실망의 기색이 역력하다.
“야, 다 집어넣어라. 웬 카추샤가 이렇게 가난하냐? 그래도 너희가 우리보다는 형편이 백배 나으니 알아서 좀 도와주라!”
그래서 돈을 다 털어서 넣어주었다. 그랬더니 고양이 쥐생각!
“야, 너 교통비도 없이 어떻게 귀대하려고?”
“괜찮습니다. 설마 쫄병들이 교통비도 안 갖고 나왔으려고요.”
“야, 미안하다. 우리도 어쩔 수 없다. 이해해라! 남은 군대생활 사고없이 잘 마치고....”
“예, 잘 압니다. 나도 쫄병 때 잠시 바가지 썼었지요. 수고하세요.”
하고 밖으로 나왔더니 아까 나를 개머리판으로 찍던 그 일병 지금까지 그 자리에서 검문을 하고 있다. 내가 한마디 했다.
“야, 김일병! 수고 해. 우리 끝내고 간다!”
“아, 그렇습니까? 차 잡아 드릴까요?”
“됐어, 근무나 열심히 해!”“
“옛, 알겠습니다. 필승!”
그때 개머리판으로 맞은 가슴, 일주일 정도는 뻐근하니 나를 괴롭혔다.
그날은 정말로 탈영병이 있어서 비상이 걸려 검문을 했던 것으로 다른 때 같으면 무사통과가 될 뻔도 한 일이었다. 이렇게 가끔 사고가 터지면 엉뚱한 사람이 피해를 입기도 하지만 때로는 전혀 뜻밖의 범죄자를 잡기도 한다.
그 뒤로 동작동을 가다가 그 검문소 앞을 지나려면 영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 검문소, 지금도 있나 모르겠다.
14. 기선 제압
형편이 넉넉한 편은 못 되지만 선비적 가풍을 가진 우리 가문은 다분히 문약한 요소가 강한 인물들이 많다.
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아버지의 6형제분 자녀인 사촌 35명 중 유일하게 둘째 큰아버지의아들 사촌형님 한분만이 그러하지 않으셨다.
나보다 열 살 정도 위이신 형님은 키는 큰 편이 아니지만 미국영화 ‘람보’의 ‘실베스터 스탤론’ 못지 않은 근육질을 소유했으며 힘과 용기가 걸출한 인물이었다.
5-16 군사혁명이 일어나 군사독재 정부가 정권확립 차원에서이겠지만 사회 기강을 잡는다고 폭력배를 잡아들여 ‘국토건설단’에 보내 순화 시키는 등의 사건이 있기 전에는 공권력에서 먼 시골은 그야말로 법보다 주먹이 가까운 춘추전국시대였다.
내가 초등학교 저학년 무렵 우리 동네에서 십여리 떨어진 둔포면의 한마을에 알아주는 주먹 이종철(가명)이라는 젊은이가 하나 있었다. 매우 가끔 이친구가 저녁에 술에 취하여 동네를 어슬렁거리면 소문이 삽시간에 쫙 퍼지면서 문을 닫아걸고 문을 잠그고 불을 끄는 등 난리가 난다. 특히 처녀들은 다락방으로 어디로 꼭꼭 숨는다.
아무집이나 들어가 두들겨 부수고 사람을 패도 당한 사람만 억울할 뿐 대책이 없다.
5km쯤 떨어진 곳에 경찰지서가 있지만 전화도 교통편도 없던 때 알리나 안 알리나 결과는 매 한가지 아무런 효과가 없다. 누군가가 지서에 가서 경찰을 대동하고 와도 잡아야 할 사람이 그때까지 잡혀가기 위해서 기다려 줄리도 없고 상황은 옛날에 끝난 것이다. 지나간 버스에 손 들기!(옛날 버스는 아무데서나 손만 들면 세워 줬었다.)
이 당시만 해도 우리 사촌형님은 아직 나이가 어려서 이를 막지는 못했으며 빈한한 가정형편으로 일판을 찾아 전국을 돌아다니며 떠돌이 생활을 하느라 고향을 떠나 있는 때가 많았다.
큰아버님이 살아계실 때는 살만 했는데 전란 통에 애국청년단을 이끌다가 공산군에 잡혀 피살을 당하시고 홀어머니와 3명의 누이와 생계가 매우 어려웠다.
우리 고향 동네는 동서남북 방향으로 천안, 아산, 온양, 둔포 등이 각각 이십여리 정도 떨어지고 내가 군대에 갈 때까지도 전기도 들어오지 않고 마을을 지나는 신작로에 버스도 다니지 않았으며 며칠에 한번 꼴로 어쩌다 차가 다니는 정도였다.
그러므로 항시 마을 앞으로 걸어서 지나다니는 여행자들이 적지 않았다.
별로 할 일이 없는 마을의 젊은 청년들은 몇 명씩 모여서 주막집 근처나 빈터에서 놀고 있다가 낯선 청년들이 지나가면 의례껏 신고를 받는 것이 중요한 일과였다.
“야, 어디 가냐?”
“예? 천안 가는데요.”
“어디서 왔어? 집이 어디야?”
“온양인데요.”
“야, 임마. 온양 전체가 다 너희집이야?”
이런 식으로 터무니없이 시비를 걸면서 죄인인양 말투가 공손하고 설설기면 막걸리나 한잔 사게 한 다음 그냥 보내주고 조금이라도 뻣뻣하거나 불손하다 생각되면 두들겨 패기는 예사이다.
경험 많은 젊은이 같으면 대번 먼저 선수를 친다.
“아, 동네분들이신가 본데 술이나 한잔하며 인사 나눕시다.”
하고 앞장서서 주막에 들어가 막걸리를 한순배 씩 돌리면 얘기가 부드럽고 이어 친구가 되어 다음에 지나갈 땐 답례로 막걸리 대접을 받기도 한다.
우리 형님도 다분히 이런 방면에는 이골이 나있고 삼지사방에 술친구가 매우 많다.
갓 삶아낸 시금치처럼 센 구석 하나없이 나긋나긋하기만 한 나는 이 형님이 영웅이나 다름없었다.
한번은 군복을 입고 한쪽 팔에 갈쿠리를 한 상이군인이 하나 동네에 들어와 행패를 부렸다.
-6.25 전쟁 후 전국 곳곳엔 전쟁통에 부상을 입은 수 많은 상이군인을 정부에서 생계를 책임져줄 능력이 없으므로 떠돌아 다니며 구걸이나 물건 강매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마침 건너마을 다른 또 하나의 큰어머님 댁에 와서 필요하지도 않은 물건을 사라고 행패를 부린다는 것이다. 이 소리를 듣고 형님과 나는 나는 듯이 달려갔다. 물론 어린 나는 형님을 믿고 구경을 간 것이다.
큰어머님은 필요한 물건도 아닐뿐더러 지금은 돈이 없어 못 사겠다고 죄인처럼 사정사정을 하고 계시고 상이군인은 갈쿠리를 휘두르며 나라에 팔 한쪽을 바치고 국민을 구해주었는데 사정도 안 보아준다며 협박을 하고 있고 몇몇 동네 사람들은 파랗게 질린 채 어쩌지 못하고 구경만 하고 있었다.
“당신 뭐요?”
형님이 한마디 했다. 나는 고함을 치고 갖은 욕설을 해대며 멱살이라도 쥐고 흔들 상황을 그려봤는데 영 아니다. 아무 감정이 실리지 않은 표정으로 담담하게 말하는 것이다.
“넌 또 뭐야? 죽고 싶지 않으면 나서지 마라!”
험악한 표정과 큰 목소리로 말하는 상이군인에 비하여 우리 형님은 평온한 표정으로 잠시 그윽히 지켜보더니 또 부드럽게 한마디 한다.
“우리 작은 어머니신데 그만 다른 데로 가보시죠?”
살며시 미소까지 지으며 말하며 어깨만 약간 움직거렸다.
거참 신기하다. 거친 말 한마디 건네지 않았는데 금방 좀 전까지 동네 전체를 시끄럽게 하던 이사람 붉으락 푸르락하던 얼굴에서 표나게 힘이 빠지면서 비실비실 짐을 챙겨 자리를 떠나고 만다.
이 작은 사건 말고도 수없이 많은 일화를 남겼는데, 나도 나이를 먹으면서 이 형님은 군대를 갔다 오셨고 종종 나에게 상대를 제압하는 법에 대하여 신체적, 심리적으로 많이 가르쳐 줬다. 실제로 써먹어 본 것은 별로 없지만......!
그 중에 가장 잊혀지지 않는 것은 사기대접을 씹는 것이다.
보통 상대를 겁 주기 위하여 유리를 씹는 경우가 많은데 유리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사나이들의 대결은 일반적으로 술자리에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막걸리를 담은 대접을 들고 한사발 쭉 들이킴과 동시에 두손으로 사발을 잡고 이빨로 물어뜯어 그대로 씹는다는 것이다. 그게 될까? 내가 믿지를 않으니 당장 시범을 보이겠다는 것을 내가 극구 말렸다.
나보고도 너도 나중에 꼭 그럴 필요가 있을 때가 있을테니 한번 써 먹어보라고 하기에 나같은 허약체질에 그게 가능하냐 물었더니 생각보다 별것 아니라고한다.
내가 중학교 다닐 때 천안으로 유학을 하였는데 내가 기거하는 성정동 외삼촌댁에서 가까운 곳에 ‘성화이발관’이라는 이발소가 있었다. 이발소 안집에 젊은 부부가 사는데 남편이 축구선수 출신이며 술버릇이 좋은 편이 아니다.
하루는 술에 취하여 부부 싸움을 하다가 부인이 도망을 치자 화가 덜 풀린 이 남자 몽둥이를 들고 이발소 유리문을 박살을 낸 후 주저앉아 문에서 쏟아져 내린 유리를 마구 씹는 것을 보았다. 주변에 구경꾼은 많지만 감히 나서서 말리지 못한다. 아주머니들 몇명만 "아유, 저걸 어떡해, 어떡해...." 라고 걱정하며 인상만 찌푸리고 있었다. 먼 곳에서 구경하는 나도 쭈볏쭈볏 머리칼이 설 만큼 공포심이 생겼다.
1975년 6,7월경 어느 토요일, 군대생활이 후반에 접어들어 한참 물이 올랐을 때를 거쳐 말년이 되었다. 군대 동기이자 우리부대 인사과에 있다가 이웃 예하부대인 258중대에 내려가 선임하사를 보고 있던 박상훈이라는 친구가 있는데, 대학에서 받은 교련으로 병역 혜택을 보아 우리보다 3개월 먼저 제대를 하게 되었다. 내가 서울지역에 근무하는 동기들 7-8명을 모아 신촌 연세대 근처에서 술집을 전세 내어 송별식을 겸한 회식을 하기로 했다.
그 당시 술집들은 규모도 작고 소주와 막걸리를 주로 팔고 아가씨도 몇 명 있었으나 지금처럼 유흥비가 비싸지 않을 때이므로 지금 돈으로 치면 몇십만원 정도만 되어도 문 닫아 걸고 다른 손님은 안 받고 우리끼리만 소란하게 술을 마실 수가 있었다.
술이 약한 편인 나이지만 그날은 어찌된 일인지-아마 내가 회식의 주동자이므로 책임감 때문인가 보다- 내가 끝까지 떨어지지 않고 남아 계산하고(돈이 조금 부족하여 에니카 손목시계를 잡히고 외상을 긁었다.) 늘어진 친구들을 가까운 허름한 여인숙에 끌어다 놓았다. 나는 날은 더운데 잠은 오지 않아서 혼자서 툇마루에 앉아 바람을 쐬고 있었다.
잠시 뒤에 또 술에 잔뜩 취한 군발이 서너명이 들어왔다. 이들 역시 한명이 도 맡아 방에다 끌어다 뉘어놓더니 마루에 걸터앉는다. 처음엔 가만히 앉아 있더니 흘끔흘끔 나를 건너다 바라본다.
“야, 한잔 할래?”
같은 군인이지만 계급 관계없이 초면에 반말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술에 취했기 때문이다.
내가 움찔하긴 했지만 기죽어 경어를 쓰기는 싫다. 나도 병장이고 우리 중대에선 겁날 것 없는 막강한 사람이다.
“그거 좋지!”
이친구가 나가더니 소주 두병과 오징어를 사왔다. 이런 일이 흔한 일이므로 여인숙에서 술잔을 구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술을 나누어 마시면서 둘 사이에 기선제압을 위한 기싸움이 시작되었다.
우선 내 복장이 카투사인 것이 만만하게 보였던지 자기는 6관구 소속 헌병이라고 하면서 기선을 제압하려든다.
사실 카투사는 헌병의 밥이다. 아무데서고 카투사를 발견한 헌병이면 신이 나서 쫓아온다. 항상 불법적 요소 즉 양담배, 달러화, 사제물건 등등 털면 먼지 나는 것이 많아서 헌병들의 돈줄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특히 더 만만한 것은 카투사 보직은 권력기관이 거의 없기 때문에 함부로 다루어도 뒷 탈이 적어 더하다.
그런데 다행히 이 친구의 덩치가 나 비슷하고 목소리 또한 거칠지 않았다.
서울 관할인 수경사(수도경비사령부=>수도방위사령부, 수방사) 헌병이라면 좀 떨떠름하겠지만 서울외곽의 6관구 헌병이라면 과히 겁날 것도 없다.
거기다 만약 둘 사이 치고받고 육박전이 벌어진다면 지원 병력이 내가 두배나 더 많다. 비록 술 취해 늘어져 있기는 하지만 유사시엔 충분한 도움이 된다.
거기다가 체육과 출신도 한명 끼어있다.
헌병이라하면 내가 기가 죽을 줄 알았는데 별 반응이 없자, 이번엔 헌병 신분증을 꺼내 패용을 하더니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 내가 평소 구파발에서 하던 일을 보여 준다고 하더니 근처의 닫혀 있는 방문을 노크도 없이 벌컥 열어젖히며
“검문 나왔습니다. 신분증과 외출증을 제시 바랍니다!”
-아마 그 당시 그 지역이 군인들에겐 안전지대였던지 여인숙 손님들은 돈 없는 군인들이 대부분이었다.-
물론 자신도 헌병신분증인가 뭔가를 상대가 볼 시간도 안 되도록 눈앞에 스치기만 한다.
사실 자기 관할 구역도 아니고 근무복도 아닌데다가 술에 잔뜩 취한 상태이기 때문에 말썽이 난다면 이건 영창감이다.
더러 순순히 졸린 눈을 비비면서 보여주는 군인도 있는데 어떤 군인은 짜증을 내며 시비조로 따지는 군인도 있었다.
혹시 그들 중에 좀 끝발이 있는 사람이 있다면 매우 골치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할 수 없이 내가 가서 끌고 왔다.
“야, 박병장! 괜히 피곤한 동포 괴롭히지 말고 이리와 술이나 한잔 더하자.”
하고 술 한잔을 마시는데 퍼뜩 사촌형님의 '사발 물어뜯기' 말씀이 생각났다.
‘실험을 한번 해봐?’주의사항까지 선명히 떠오르는 기억!
천천히 마시던 술잔을 윗입술을 한껏 위로 올리고 잔을 물어뜯었다. ‘뚝!’
‘와, 된다!’
이어 입안에 든 유리컵의 조각을 씹었다.
‘우두둑, 우두둑!’
이 돌발적인 행동에 이 헌병 녀석 놀라는 기색이 역력하다.
잠시 씹던 유리를 마당에 뱉어 버리고 한잔을 권했다.
“야, 너도 한잔 더해라.”
술잔을 앞에 놓고 말도 못하고 잠시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하더니 질수 없다는 쪽으로 마음을 굳혔는지 잔을 힘 있게 잡고 마시더니 역시 컵을 물어뜯었다.
순간 입술에 쫙 번지는 피!
슬며시 뱃속 저 아래로부터 기쁨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나처럼 훌륭한 교관 사촌형님으로부터 교육받지 않은 6관구 헌병, 물어뜯는 순간 입술을 위로 발랑 들어 올려야 된다는 사실을 몰랐다.
“야, 야, 그거 아무나 흉내 내는 거 아니야! 쓸데없는 짓 말고 술이나 더 먹자!”
고수인 듯 어깨를 툭툭 치며 아이 달래듯 어깨를 감싸 안아 토닥여 준 다음 나가서 소주를 두어병 더 사가지고 들어왔다.
이후 기싸움은 끝나고 한참을 더 마시며 같이 군가도 부르고 뻥이 90% 이상인 얘기도 나누며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다. 내일은 일어나서 내가 미군부대로 데려가 부대구경을 시켜주고 점심과 클럽에 가서 맥주를 한잔 사고, 다음 주에는 내가 구파발로 가서 대접을 받기로 합의를 보고 남은 술을 모두 비우고 자러 갔다!
다음 날은? 뭘 궁금하게 생각해? 술 취한 남자의 객기가 술 깬 뒤에도 지속될 것으로 생각하는 그대는 순진파! ㅎㅎ
늦잠을 잤으니 따끈따끈한 햇살이 열린 문틈으로 이마를 내리쏘도록 뒤 늦게 일어나 쓰린 속을 달래느라 마당가에 있는 수도꼭지 물 받아먹느라 들락거리다가 둘이 마주 쳤지만 ‘우리가 언제 만났던가?’
그 뒤로도 삼십대가 되기 전 직원여행을 가다가 열차에서 만난 대구에서 태권도 사범을 한다는 친구와 만나서도 그렇고 그 비슷한 사건이 몇 번 더 있었다.
얼마 전에 이가 아파서 치과에 갔다.
지금으로서는 치료가 곤란하다고 다음에 오라고 하여, 조금 아플 때 아픈 부분을 치료하고 씌워달라고 했더니 지금 조금 먹은 충치가 문제가 아니고 이가 갈라지는 중이기 때문에 메우면 더 빨리 갈라져서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무슨 병원이 이런거야 도대체!
가만히 생각을 해 보니 전에도 이가 갈라져서 때우고 씌워달라고 했더니 빼는 수밖에 없다고 하여 빼고 해 넣은 적이 있었다.
이게 다 젊은 시절의 객기로 이빨을 망친 결과인 것이다. 지금은 유리는 커녕 바싹 구운 꽁치 가시조차 씹기 겁난다. 맛있는 음식일수록 단단하고 질긴 것이 많지만 나에게는 '일체사절'의 팻말이 붙어있다.
내 이는 거의 대부분 끝 부분이 부스러지고 여러 가닥으로 잘게 갈라져 있는데 그렇다면 갈라져 빼야할 이가 줄줄이 대기하고 있다는 얘기이다. 임플란트 하나가 몇백만원이라는데!
이런 미련한 경우는 아니겠지만 지금 젊은 분들 중에는 뭔가 다른 곳에서 이렇게 나처럼 젊은 객기를 부리다가 나이 먹어 후회를 하는 일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순간의 잘못된 선택으로 평생 고생을 하는 이런 일이 결코 있어선 안 될 것이다.
너무나 속이 쓰리다. T.T;
첫댓글 요즘은 카투사 들어가기도 어렵다는데 좋은 경험 하셨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