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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도 등은 옥저를 함경도 지방이라 하지만, 옥저는 칠로도산 또는 팔달령 동쪽으로 추정
◉ 낙랑국왕과 호동이 만난 옥저는 함경도나 연해주가 아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고구려 제4대 대무신왕(재위 18-44)의 아들 호동왕자가 대무신왕 15년(AD32년) 유람 중 옥저(沃沮)에서 낙랑왕 최리를 만나 그의 땅 날강공주와 결혼했다는 기록이 있다. 한국역사학자들은 낙랑국이 평양에 있었고, 낙랑왕이 호도왕자와 만난 옥저가 함경남북도 지방에 있었다고 현재까지 계속 주장을 하고 있다.
한국역사 학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고구려 초기 집안시을 수도로 하고 있는 고구려의 왕자가 험준한 낭림산맥고 개마고원을 넘어 함경도로 놀러 갔고, 평양에 있는 낙랑국의 왕이 험준한 낭림산맥을 넘어 함경도로 놀러 갔다가 천만분의 일 확률로 안되는 기회에 서로 만나 호동왕자를 평양으로 모시고 와서 왕의 사위로 삼았다고 하는 소설같은 주장이 현재의 한국 역사학자들의 논리이고 주장인 것이다.
이를 현재적으로 해석하면, 서울에 사는 큰 부자가 우람차 험한 길을 걸어서 부산까지 갔고, 속초에 사는 어떤 청년도 유람차 걸어서 부산까지 갔다는 것이며, 부산에서 속초 청년을 만난 서울 부자가 속초 청년을 서울로 데려와서 자기 딱과 결혼을 시켰다는 논리의 주장이다. 한국 역사하자들은 이게 가능하고 타당하다고 생각하고 있을까?
이와 같은 한국 고대사가 왜곡된 것은 줄기차게 한반도 내 한사군설을 주장한 일본 역사학자들의 주장을 추종하고 보충해 준 한국 역사하자들의 식민사학에서 근원이 된 것이다.
낙랑국이 펴양에 있지 않았고, 고구려도 훈강(동가강) 옆 졸본(집안시: 즙안)에서 건국된 것이 결콬 아니다. 그 이유는,
호동왕자와 낙랑왕이 만났다는 대무신왕 15년(AD32년) 보다 불과 17년 후인 모본왕은 AD49년 후한의 상곡, 어양, 북평(우북평), 태원을 공격하였다가 동태수(遼東大守) 제융(祭肜)註 005이 은혜와 신의로 대우하므로 다시 화친을 맺었다(慕本王 二年, 春, 遣將襲漢 北平·漁陽·上谷·大原, 而遼東大守蔡彤, 以恩信待之, 乃復和親)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 『후한서 동이열전 고구려』 건무 25년(AD 49년) 봄에 고구려가 우북평, 어양, 상곡, 태원을 침입하여 노략질하는 것을 요동태수 제융이 은혜와 신의로 초유하니 모두 다시 경계를 회복하였다(建武 二十五年 春, 句驪寇右北平·漁陽·上谷·太原, 而遼東太守祭肜以恩信招之, 皆復款塞) 라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위와 같이 삼국사기 기록과 일치하는 후한의 기록을 보면 고구려 5대 모본왕이 AD49년 후한의 상곡, 어양, 북평(우북평), 태원을 공격한 사실은 일본인들이나 일본인들의 주장을 추종하는 한국 역사학자들이 삼국사기의 고구려 초기 기록을 믿을 수 없다고 하는 주장이 얼마나 잘못되고 한국의 고대사를 왜곡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분명한 사례이다.
이보다 앞서 고구려 2대 유랑헝 31년(AD 12년) 한나라 왕망(王莽)이 고구려를 침략하였다가 요서 대윤 전담이 죽임을 당하였다. 다시 고구려를 침략한 왕망은 고구려 장수 연비의 목을 베고, 고구려왕을 하구려후라고 멸시 비하하였다.
이병도는 이때 징발된 병력은 고구려군이 아니라 중국 현도군 소속 고구려현(高句麗縣) 사람들로 보기도 한다(李丙燾, 180~181쪽; 권오중, 248쪽; 윤용구, 13쪽; 李仁哲, 98쪽).
이병도는 이같은 주장을 하면서 고구려가 압록강변 환인지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정말 해괘한 주장이다. 왜냐하면, 수경과 수경주(水經註)에 고구려현은 고구려에 속한 땅이라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음에도 이병도는 이런 사실조차 외면하고 궤변을 늘어놓은 것이다. 고구려 초기 고구려는 압록강변이 아니라, 요서지방에 있였음이 분명한 것이다.
사마천의 사기 기록에 의하면
“동옥저(東沃沮: 동쪽의 옥저)”는 『고구려(高句驪) 개마대산(蓋馬大山) 동쪽에 있다.』동쪽으로 큰 바다(海. 河)에 림하고, 북쪽으로 읍루(挹婁)와 부여(夫余)가 있으며, 남으로 예맥(濊貊)이 접하였다. 그 땅은 동서가 좁고 남북은 길다. 사방 가히 천리(千里)이다. 땅은 기름지고 좋으며, 산을 등지고 바다(?)를 향해 있고, 마땅히 오곡이 있고, 밭농사도 좋다.
➡ 주[一]
“개마는 현의 이름으로 현도군에 속한다. 그 산(蓋馬大山)은 지금의 평양성 서쪽에 있고, 평양은 곧 촹검성이다.
(【東沃沮 在高句驪 蓋馬大山之東[一] 東濱大海; 北與挹婁、夫余, 南與濊貊 接。其地 東西, 南北長[二] 可折方千里.土肥美,背山向海,宜五穀,善田種,
➡ 注[一] 【山 : 】 (王儉城)이다.”(『蓋馬,縣名,屬玄菟郡.其山在今平壤城西.平壤即王險城也』)“라고 기록되어 있다.
위의 사기 기록게 분명히 기록된 바와 같이 옥저는 고구려의 개마대산 동쪽에 있다고 하였다. 또 일본인들이나 한국의 사학자들은 개마대산을 백두산이라도도 하고, 일본시대 지어진 이름인 낭림산맥의 개마고원을 개마대산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 고구려 개마고원 동쪽인 함경도와 연해주 지방의 땅이 옥저라고 지도에 표시하고 있다.
이들 주장대로라면, 백두산이나 개마고원 동쪽에 당시의 평양성과 왕검성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어찌 개마고원 동쪽에 기름진 땅이 있고, 평양 왕검성이 있겠는가?
사마천은 사기를 쓸 당시 사마천은 백두산이나 개마고원을 알 턱이 없고, 중국에서 가까운 산을 지칭한 것이다. 개마대산은 지금의 중국 개주시(개평)의 서쪽에 있는 칠로도산맥을 말하는 것으로 추정하며, 개마대산의 동쪽 평양은 지금의 개주시(개평) 부근일 것이다. 그러므로 칠로도산의 동쪽에 위치한 개주시(개평)가 왕검성일 가능성이 높다. 단재 신채호 역시 평양 왕검성의 위치는 개주시(개평)이라고 하였다.
◉ 개마대산은 유주 현도군 서개마현 산이고 고구려 땅이다
필자는 개인의 사견(私見)으로 개마대산(蓋馬大山)을 지금의 갈석산에서 북경 팔달령으로 이어지는 만리장성 쌓은 산 줄기일 가능성이 있다고 가설(假設)을 주장한다.
그 이유는 한서지리지(漢書地理志)의 기록에 유주(幽州)에 현도군이 있고, 이 현도군에 서개마현(西蓋馬縣)이 있는데 이 서개마현에 개마대산이 고조선 땅이었다가 후에 고구려 땅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사기(史記)의 고구려 개마대산 동쪽에 옥저가 있었다는 기록과 일치하는 점이 있다. 한서지리지의 현도현에 대한 기록은 아래와 같다.
한서지리지(漢書地理志)의 현도군 편을 보면,
”현도군은 유주에 속하고(①옛 진번조선 오랑케의 땅이었고, ②고구려의 땅이기도 했다), 호수가 4,500호, 인구가 221,845인이다. 현은 3개인데, 고구려현이 있다. 이현에 요산(遼山)이 있고, 요수(遼水)가 나오며, 서남쪽으로 흘러 요대현을 지나 대요수(大遼水)로 들어간다....두번째 상은대현(上殷台縣), 세 번째 서개마현(西蓋馬縣)이 있다. 서개마현에서 마자수(馬訾水)가 서북쪽에서 들어와 염난수가 되며, 서남쪽으로 흘러 서안평현(西安平縣)에서 바다로 들어간다. (이 강은) 2개의 군(郡)을 지나고 1100리12를 흐른다. 왕망은 현도정(玄菟亭)이라고 했다.
“(玄菟郡, 武帝元封四年開. 髙句驪, 莽曰下句驪. 属幽州.[1] 戸四萬五千六, 口二十二萬一千八百四十五, 縣三. 髙句驪, 遼山, 遼水所出, 西南至遼隊, 入大遼水. 又有南蘇水, 西北經塞外.[2] 上殷台, 莽曰下殷.[3] 西蓋馬, 馬訾水西北入鹽難水, 西南至西安平, 入海, 過郡二, 行一千一百里. 莽曰玄菟亭.
[1] 應劭曰故真番朝鮮胡國. 응초(應劭)가 말하기를 옛 진번조선(真番朝鮮) 호(胡)의 나라이다.
[2] 應劭曰故句驪胡. 응초(應劭)가 말하기를 옛 구려(句驪) 호(胡)이다.
[3] 如淳曰台音鮐師古曰音胎. 여순(如淳)이 말하기를 台의 음은 태(鮐)이다. 사고(師古)가 말하기를 음은 태(胎)라고 했다)”
***참고: 위의 기록에서 볼 수 있드시 유주 현도군은 옛날 진번조선(眞蕃朝鮮) 오랑케의 땅이었다가 후에 고구려 오랑케의 땅이 되었던 곳이다. 현도에서 요수가 나오고 이 요수가 만리장성 안쪽으로 흘러 요대현(遼隊縣)을 지나 대요수와 합치고, 서북쪽으로는 국경 밖으로 흐른다. 개마현에서는 마자수가 서북쪽에서 들어와 염난수가 되고, 서남쪽으로 서안평현(西安平縣)을 지나 바다로 들어간다고 하였다. 이 기록을 보면 현도에서 요수가 나온다고 하였는데, 이곳이 압록강일 수 없고, 서안평현에서 나온 물이 요동군 서안평현(西安平縣)을 지나 바다로 들어간다고 했는데, 요동군 서안평현이 지금의 신의주 맞은 편 단동(丹東)일 수 없다.
삼국사기와 수서(隋書)의 기록을 보면,
삼국사기에 수양제의 침략 당시 좌 12군 중 4번째 침략 경로에 개마도(蓋馬道)가 기록되어 있고, 수서(隋書)에도 좌4군(左 四개軍)에 좌둔위대장군(左屯衛大將軍) 토만서(吐萬緖) 대장의 진격 목표를 개마도(蓋馬道)라고 기록하고 있다.
수나라 군사의 최초 침략 목표가 개마(蓋馬)로 향하는 길이라면, 지금의 개주시(개평)은 최초 침략의 목표로 삼기에 너무 멀다. 그러므로 개마도산 역시 칠로도산 보다 훨씬 서쪽인 지금의 진황도시 갈석산에서 북경 팔달령에 이르는 만리장성을 잇는 산들을 개마대산(蓋馬大山)이라 지칭했을 가능성이 있다.
뿐만 아니라, 수양제의 침략경로에는 서개마현이 속한 군(郡)인 현도군(玄菟郡)이 우둔위장군(右屯衛將軍) 신세웅(辛世雄)이 좌8군(左八軍)을 이끌고 현도도(玄菟道)를 공격 목표로 삼았다. 또 서개마현을 지나는 마자수는 요동군 서안평현(西安平縣)을 지나 바다로 들어간다고 하였는데, 서안평현이 속한 요동군(遼東郡)은 좌효위대장군(左驍衛大將軍) 형원항(荊元恒)의 좌7군(左七軍)의 공격 목표 지역이었다.
위와 같이 옥저(沃沮)가 위치했다는 개마대산과 현도군, 서개마현, 부근의 요동군이 모두 수양제의 첫 공격 루트인 고구려 서쪽 국경지역이었다. 사학자들이 말하는 현도가 압록강변이다가 압록강에서 가까운 무순(撫順)이라거나, 옥저가 함경도 및 연해주라는 주장, 서안평현(西安平縣)이 압록강 하구 단동(丹東)이라는 모든 주장은 역사를 날조한 주장이다. 이들 지역은 모두 고구려 서쪽 국경지역 조백하 부근에 밀집해 있었다.
◉옥저에 대한 다른 역사 기록들
옥저에 대한 기록은 위만조선 초기의 기록부터 나타난다.
사기(史記)에
“위만은 한나라 초기에 망한 연나라의 사람인 위만이 조선에서 왕을 할 때, 옥저가 모두 (조선에) 복속하였다” 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이어서 옥저는 다시 낙랑에 속하게 되었다. 한나라는 그 지역이 넓고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단단대령의 동쪽에 있는 지역에 동부도위를 나누어두고, 불내성을 치소로 한 영동 7현을 따로 관할하게 하였다. 이때에 옥저(의 읍락)가 모두 현(縣)이 되었다.
이어서 ”한무제 원봉 2년(BC 109)에 조선을 정벌하였다. 위만의 자손 우거를 죽이고 그 땅을 나누어 4군으로 삼았다(BC 108). 옥저성을 현도군으로 삼았는데, 후에 이맥의 침입을 받아 (현도)군을 구려의 서북 방면으로 옮기니(BC 75), 지금 소위 '현토고부'라는 곳이다
(漢初 燕亡人衞滿王朝鮮 時沃沮皆屬焉 沃沮還屬樂浪 漢以土地廣遠 在單單大領之東 分置東部都尉 治不耐城 別主領東七縣 時沃沮亦皆爲縣)
(漢武帝元封二年 伐朝鮮 殺滿孫右渠 分其地爲四郡 以沃沮城爲玄菟郡 後爲夷貊所侵 徙郡句麗西北 今所謂玄菟故府是也)“라고 하였다.
위의 사기 기록을 검토해 보면, 한나라에서 망명한 위만이 패수(조백하)를 건너 한나라 초기 한나라의 권력이 미치지 못햇던 상하운장(북경지역으로 추정)에서 번조선(기자조선)의 변방을 지키다가 번조선을 침략하여 위만조선을 세웠을 때 옥저(沃沮)까지 복속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을 보면 위만 당시 옥저(沃)沮를 정복한 것으로 보아야 하는데, 이 때의 옥저가 지금의 함경남북도 및 연해주 지방이라는 한국 역사학자들의 주장은 정말 터무니 없다. 어떻게 위만이 백두산과 낭림산맥과 개마고원 너머 수 천리 떨어진 연해주 땅까지 점령할 수 있다는 말인가?
사학자들은 한무제가 위만을 멸하고 한사군을 설치할 때 옥저성도 현도군에 포함시켜서 설치했는데, 후에 이 옥저성을 동이(조선) 예맥의 침략을 받아 고구려의 서북쪽에 있는 당시의 현도부로 옮겨갔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 고구려의 서북쪽에 있는 현도라면, 현도는 지금의 무순(撫順: 푸순)이 아니다.
전술한 바와 같이 현도 땅에 옥저가 있었으며, 옥저는 현도와 마찬가지로 수경에 나타나는 만리장성 안팎의 땅에 현도군 서개마현(西蓋馬縣) 땅에 옥저가 존재해따.
한국 사학자들은 현재까지 옥저는 함경도와 연해주 지방에 있었고, 현도를 평안도 산악지역과 집안시(즙안: 저들은 이곳이 고구려 현이라고 주장) 부근에 있다가 옥저성과 현도가 함께 무순(撫順: 푸순)으로 옮겨 갔다는 것이 한결같은 주장인데, 이는 명백한 역사 날조 왜곡이다.
한무제가 BC 109년 위만조선을 침략하여 불과 1년 후인 BC 108년 한사군을 설치하였는데, 한무제가 1년 사이에 머나먼 한나라 장안에서 압록강변과 평양을 점령하고, 백두산과 개마고원을 넘어 함경도와 연해주까지 점령한 후 이를 통치하는 지방관을 설치했다는 것은 물리적으로나 시간적으로 불가능하다. 더 이상 한국의 역사학자들은 거짓말을 계속하지 말아주어야 한다.
옥저의 위치를 추정할 수 있는 중국의 기록이 있다.
[열하특별구경熱河特別區境]을 보면 춘추시대春秋時代 산융지山戎地(조선지역), *한초漢初에 흉노속匈奴屬(흉노지역), *무제武帝 무렵엔 새경塞境(국경지역), *후한後漢 시 오환烏丸, *선비지鮮卑地, *동진東晋 때 모용씨慕容氏의 지역이라 하였으니 아마 모두 열수(列水: 난하)를 기댄 서북과 서남 지역을 말한 듯하다.
이 기록을 보면 한무제의 한사군 경계(새경塞境)가 지금의 열하, 즉 난하의 서쪽까지 미쳤으며, 그 동쪽은 한사군 지역이 아님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더구나 한무제가 설치한 한사군 중에서 옥저는 한사군 설치 25년 후 현도에 통합되었다고 식민사학자들은 주장하고 있다. 옥저는 함경도나 연해주에 설치된 역사적 사실이 전혀 없고, 전술한 바와 같이 만리장성 안팎지역 현도군 서개마현 지역에 옥저가 있었다고 역사 기록이 신빙성이 있다. 옥저도 수양제의 고구려 침략경로 좌12군 11번째에 있어서 함경도가 아닌 고구려 서쪽 요서의 국경지대에 있었음이 분명하다. 사학자들은 옥저를 함경도와 연해주지방이란 주장은 앞으로 하루 속히 폐기되어야 한다.
◉낙랑군 부조현과 옥저에 대한 여러 학설은 날조이며, 쓰레기이다.
다음의 <나무위키 ‘옥저’>에 기록된 내용을 비롯하여 일본과 한국의 식민사학자들은 옥저가 함경도와 간도 및 연해주에 걸쳐서 있었다는 주장을 계속하고 있다.
https://namu.wiki/w/%EC%98%A5%EC%A0%80
그러나,
중국의 한서(漢書)에서 유주(幽州)에 속했던 10개의 군(郡)은 다음과 같다.
1) 탁군, 2) 발해군, 3) 대군, 4) 상곡군, 5) 어양군, 6) 우북평군, 7) 요서군, 8) 요동군, 9) 현도군, 10) 낙랑군이다.
이중 낙랑군에는 25개의 현이 있었는데, 그 마지막 25번 째의 군이 부조군(夫租郡)이다.
이 부조군(夫租郡)이 옛 고조선 때부터 고조선의 영토이었던 옥저군(沃沮郡)과 돌일한 군(郡)임에도, 유주 낙랑군 부조현을 삼국사기나 한국 역사에서 잘못 옥저군(沃沮郡)으로 표기했거나 다른 지방으로 인식했다는 주장이 일본인, 중국인, 외국인 및 한국인을 포함한 18인이 20여 편의 논문과 글을 발표하였다.
일본인 다수와 중국인 다수 및 한국인 다수인 18명의 역사학자가 유주 낙랑군 부조현을 한반도 내 평안도에 있었다는 논문을 발표한 것이다. 이들이 발표한 논문은 일본인들이 발굴한 ”금속제 부조예군은인(夫租薉君銀印)“에 근거를 두고 낙랑군 부조현 평안도 존치설이란 논문을 썼다.
《한서》 지리지, 평양 정백동 1호분 출토 〈부조예군〉 인장 등에 적혀 있는 부조(夫租)에서 와전된 것일 가능성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실제로 '沃沮'가 '夫租'의 오기 혹은 '夫租'에서 파생된 표기라는 설이 존재한다. (藤田亮策(1936; 1948), 이병도(1976), 임기환(1992), 張博泉(1998), 田中俊明(1999; 2009), 이현혜(2002; 2010), Gardiner(2012), 김선숙(2019), 동북아역사재단(2020), 김성한(2021), 이승호(2021), 박대재(2021), 甘懷眞(2023).)
위 학설과 달리 부조(夫租)가 요조(夭租)의 오기라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池內宏(1941), 金元龍(1986), 日野開三郞(1998), 林沄(1999; 2002), 孫慰祖(2008), 윤용구(2024).)
***참고: 위의 논문이나 책자의 발표를 보면, 한서 지리지에 낙랑군 속현 25개의 현(縣) 중에서 25번째 마지막으로 기재된 부조현(夫租縣)이 있다. 일본인들은 평양 정백동 1호 무덤(소위 부조예군 묘)에서 <부조예군>이라고 새겨진 인면(印面) 2.05cm 크기의 금속제 부조예군은인(夫租薉君銀印)이 발굴되었다고 보고하였다.
실제는 낙랑군 부조현(夫租縣)이 평양 부근에 있을 수가 없고, 낙랑군 25개 현 모두가 수양제 침략경로 만리장성의 안쪽에 있었음에도 일본인들은 무덤 발굴시 중국에서 밀수해온 <부조예군>의 인장을 슬쩍 끼워넣고, <부조예군>이 이 무덤에서 발굴되어다고 위조 날조한 것이다.
이후 이 오염된 고고학 유물을 근거로 일본인, 중국인, 한국인은 물론 외국인 까지 18인이 20여편의 논문을 발표하면서 낙랑이 평양 부근 평안도에 있었다는 낙랑군 평안도설을 논문으로 발표하고 일본인의 날조된 평양 무덤 출토품 <부조예인>을 뒷받침한 것이다.
이 <부조예군> 인장을 근거로,
”실제로 '沃沮'가 '夫租'의 오기 혹은 '夫租'에서 파생된 표기라는 설“과 ”위 학설과 달리 부조(夫租)가 요조(夭租)의 오기“라는 견해로 모두 한(漢)나라 낙랑군 부조현의 부조(夫租)는 옥저(沃沮: 옥조라고 읽어야 하나 식민사학자들이 옥저로 표기)와 ”부(夫)“자와 ”옥(沃)자는 전혀 다른 한자임에도 부조와 옥저가 같은 글자라고 한 자가 일본인과 중국인은 물론 외국인과 한국인을 합쳐서 18인 20여 편이 발표되었다. 역사에 대한 기록은 글자 한 자도 중요한데, 전혀 다른 글자인 부(夫)자와 옥(沃)와 같은 글자라고 주장한 역사학자들이 무려 18명에 달한다.
그러나 위의 일본인이나 중국인 또는 한국인의 논문 20여 편은 정말 쓰레기만도 못한 날조 조작된 논문이다. 왜냐하면, 낙랑군 속현 옥저는 수양제의 평양을 향한 침략경로 좌12군 11전째에 옥저도(沃沮道)라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수양제가 좌12군 11번 째에 있는 옥저가 낙랑군 부노(夫沮)가 아니고 분명히 옥저인 것은 삼국사기 뿐 아니라, 수양제의 수서(隋書)에도 분명히 기록된 사실이어서 전혀 다른 지역이다. 그럼에도 무려 18명이란 역사학자들이 역사를 날조하고 왜곡하였으며, 현재에도 정부 역사기관 마져 이를 추종하고 있다.
◉ 평주의 전지역(낙랑 및 대방 포함)과 유주 일부(현도군 등)이 고구려 영토
한편, 통감지리석 권 10에는
“진(晉)이 평주(平州)를 설치하였다. 후위(後魏) 시기에는 고구려가 그곳(晉 平州)에 도읍하였고 당(唐)이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였다.
(『通鑑地理通釋』 권 10. 晉置平州 後魏時 高麗國都其地 唐置安東都護府)”라고 기록하고 있다.
***참고: 위의 통감(通鑑) 기록을 보면 후위(後魏)는 중국 남북조 시대의 북조(北朝) 최초의 나라이다. AD 386년에 선비족(鮮卑族)의 탁발규가 화북(華北) 지방에 세운 이후 AD 534년 동위(東魏)와 서위(西魏)로 분열하였다. 후위의 존속기간은 138년에 이른다. 이 기간 중 고구려가 그곳(晉 平州)에 도읍하였다고 분명한 기록을 하고 있다.
이 기간은 고구려 19대 광개토대왕(AD 391-413년)과 장수왕(AD 413-490년)의 시절로 이 시기에 고구려가 평주(平州) 땅을 점령하고 또 수도를 그곳에 두었다고 분명한 기록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때는 평주에 속한 낙랑의 모든 군현과 대방에 속한 모든 군현이 고구려의 영토에 편입되었던 것이다. 낙랑군에 속한 옥저도 요서 조백하 부근이며, 결코 낙랑군 옥저가 함경도에서 연해주에 이르는 땅에 존재할 수 없고 또 이곳에 존재한 사실이 없다.
***참고: 현재 한국의 국립박물관에는 평양시 락랑구역(樂浪區域) 정백동(貞柏洞, 구 정백리) 부조예군묘(夫租薉君墓)에서 발굴되었다는 <부조예군은인(夫租薉君銀印)>을 보관하고 있다. 또 이 무덤에서 중국식의 ”세형동검(細形銅劍)과 동모(銅矛), 동탁(銅鐸), 철제장검·단검·대도, 철부(鐵斧) 및 다수의 마구류, 수레부속이 출토되었다“라고 정부기관인 국가유산지식처에서 설명하고 있다.
”벌거벗은 왕“이란 우화와 같이 지금 수많은 사람들이 날조된 허위 사실을 쓰레기보다 못한 논문으로 발표를 하고 있는데, 언젠가 거짓은 반드시 밝혀질 것으로 믿는다. 온갖 쓰레기가 불씨 하나로 완전히 타 버리듯이 온갖 한사군 내 낙랑과 대방군 존재설 쓰레기는 올바른 역사가의 불씨 하나로 완전히 불타벌릴 때가 오기를 기다린다.
◉부조현=옥저현에 따른 낙랑군 부조현이 함흥에서 연해주까지
지금 한국 역사학계는 ”한(漢)나라의 낙랑군 부조현이 옥저현이라고 한다. 이 옥저현은 함경남도에서 간도를 거쳐 러시아땅까지 뻗쳐 있었다고 지도에 그려놓고 있다. 지도에 표시된 지역은 북한 국기 북한 함경도, 중국의 길림성(지린성), 러시아의 프리모리예 지방“이라고 표시하고 있다.
현재 한국 사학계는 ”한무제 원봉 2년(BC 109)에 조선을 정벌하였다. 위만의 자손 우거를 죽이고 그 땅을 나누어 4군으로 삼았다(BC 108). 옥저성으로 현도군을 삼았는데, 후에 이맥의 침입을 받아 (현도)군을 구려의 서북 방면으로 옮기니(BC 75), 지금 소위 '현토고부'라는 곳이다“라고 하고 있다.
즉 전술한 함경도에서 연해주에 이르는 땅을 한무제가 BC 108년부터 BC 75년 까지 옥저를 지배했는데, 이 지역이 옥저의 땅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전술한 바와 같이 여러 역사기록이 옥저는 요수가 나오는 곳 현도군 서개마현(西蓋馬縣) 지역이다. 낙랑군 부조현(夫租縣)을 ”부(夫)“ 자(字)로 써야할 글자를 삼국사기나 수서(隋書)에서 ”부“자 대신 ”옥(沃)“라로 잘못 기록(記錄)한 것이라고 일본인과 한국사학자 18명이 20여 편의 논문이나 글을 발표하였는데, 이 자들은 역사 날조를 위해 한자의 글짜까지 틀렸다고 주장한 것이다. 함경도와 연해주에 있는 땅 덩어리를 일본인들과 이를 추종하는 자들은 무순(撫順)으로 올기기도 하고, 이제 현도군 서개마현 만리장성 안쪽까지 수양제 침략경로까지 제멋대로 옮길 수 있는 재주를 피우고 있다.
그러나 옥저는 함경도가 아닌, 수양제의 침략경로 좌11군 옥저도(沃沮道)라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요서지방 조백하 부근에 있었다. 옥저가 개마대산 동쪽에 있었다고 하였는데, 개마대산은 칠로도산이거나 수양제 침략경로를 고려하면 팔달령 동쪽에 위치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일본인이나 중국인 또는 한국인의 옥저가 함경도에서 연해주에 걸쳐 있었다는 논문 20여 편은 모두 정말 쓰레기보다도 못한 날조 조작된 논문이다. 빨리 이런 쓰레기 논문과 글은 소각되는 때가 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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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옥저도 수양제의 고구려 침략경로 좌12군 11번째에 있어서 함경도가 아닌 고구려 서쪽 요서의 국경지대에 있었음이 분명함에도 현재 한국의 식민사학자들은 옥저를 함경도와 연해주지방이란 주장을 계속하고 있으며, 교과서에도 이같은 식민사학자들의 주장대로 역사지도가 그려져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