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코스테는 1920년대 프랑스의 테니스 스타인 장 르네 라코스테(Jean René Lacoste)가 앙드레
질리에(André Gillier)와 함께 1933년에 만든 의류 브랜드다.
앙드레 질리에는 당시 프랑스 최대의 니트웨어를 생산하는 사업가였다.
장 르네 라코스테는 1920년대 중반부터 후반까지 세계 테니스계를 지배한 스타 선수였다.
라코스테의 로고가 악어가 된 데에는 사연이 있다. 데이비스컵 대회의 프랑스 대표팀 주장은
르네 라코스테에게 내기를 했다. 만약 라코스테가 프랑스 대표팀의 중요한 경기에서 승리하면
악어가죽 가방을 선물해주기로 약속한 것이다.
이 사연을 들은 미국의 기자가 라코스테에게 ‘악어(crocodile)’라는 별명을 지어주었다.
더구나 라코스테는 코트에서 절대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상대를 물고 늘어지는 플레이로 유명
했으므로 이 별명은 더욱 적절했다. 별명이 붙여진 뒤 라코스테의 친구인 로베르 조르주는
라코스테가 경기장에서 입는 블레이저 상의에 자수로 악어 그림을 수놓아주었다.
1920년대까지만 해도 테니스 선수들은 거의 정장에 가까운, 소매가 길고 칼라를 뻣뻣하게 세운
셔츠를 입었다. 그러나 라코스테는 선수 시절부터 좀 더 편안한 복장을 스스로 디자인해 입을
정도로 디자인 감각이 있었다.
그는 니트 섬유로 만든 셔츠를 만들어 입었는데, 이 셔츠는 통풍이 좋을뿐더러 신축성이 좋고
칼라는 부드러워서 운동복으로 아주 적합했다. 그리고 모든 셔츠의 가슴에 친구가 그려준 악어를
새겨 넣었다.
은퇴 이후에도 그가 디자인한 옷에 대한 수요는 테니스 선수뿐만 아니라 폴로 선수들에게도 매우
높았다. 당시 프랑스에서 가장 큰 니트웨어 제조업을 운영하던 앙드레 질리에는 이런 수요에 고무
돼 라코스테와 함께 오늘날 가장 유명한 폴로셔츠 브랜드 가운데 하나인 ‘라코스테’를 만들기에
이른다. 물론 가슴에는 악어 마크를 선명하게 새겨 넣어서 팔았다.
1940년대 이후 사람들은 테니스와 폴로가 갖는 상류층 이미지 때문에 그 스포츠를 즐기는 것과
관계없이 라코스테 셔츠를 즐겨 입기 시작했다.
그 뒤 라코스테는 더욱 성장했고, 상품군을 신발, 모자, 스웨터로 확장했다.
오레곤 대학의 트랙 선수인 필립 나이트(Philip Knight)와 그의 코치 빌 바워만(Bill Bowerman)이
1964년에 만든 블루 리본 스포츠(Blue Ribbon Sports)가 나이키의 전신이다.
블루 리본 스포츠는 일본의 스포츠화 메이커인 오니츠카 타이거의 제품을 유통하는 사업으로 돈을
번다. 일본 회사와 계약이 끝나갈 무렵 그들은 자신들만의 제품을 생산하기로 결심하고 새로운
브랜드인 나이키를 출시한다.
나이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승리의 여신’의 이름이다.
이름도 스포츠 브랜드로서 매우 적절했지만, 그 디자인 또한 스포츠 브랜드다웠다.
필립 나이트는 당시 그래픽 디자인을 전공하고 있던 대학생 카롤린 데이비슨에게 나이키의 로고
디자인을 의뢰한다. 필립 나이트는 데이비슨의 시안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마감이 임박하여
할 수 없이 스우시(swoosh) 마크를 선택한다. 이것은 승리의 여신의 날개를 형상화한 것이다.
당시 카롤린 데이비슨이 이 일로 받은 돈이 불과 35달러라는 것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일화가 되었다.
데이비슨은 그 이후로도 나이키를 위한 디자인 일을 한다.
첫눈에 필립 나이트의 사랑을 받지는 못했지만, 이 로고는 나이키 운동화의 옆을 장식하면서 세계
에서 가장 갖고 싶은 브랜드의 로고가 되었으며, 나이키는 오늘날까지 최고의 스포츠 브랜드로 사랑
받고 있다.
아디다스의 역사는 192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신발을 만들기 시작한
루디 다슬러(Rudi Dassler)는 1924년 동생 아디 다슬러(Adi Dassler)와 함께 다슬러 형제 신발 공장
(Gebrüder Dassler Schuhfabrik)을 만들어 사업을 운영한다.
결정적인 번영은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때 찾아온다. 아디 다슬러는 자신이 만든 육상 스파이크를
들고 올림픽에 참가 중인 육상의 유력한 메달 후보 제시 오웬스를 찾아간다.
그리고 자신의 스파이크를 신고 경기에 참여해달라고 설득한다. 이 신발을 신고 오웬스는 100m를
비롯해 무려 4개의 금메달을 딴다. 이것은 미국 흑인 선수에 대한 첫 번째 후원으로 기록된다.
이 후원으로 그의 스포츠화들은 날개 돋친 듯 팔리며 큰 성공을 거둔다.
2차 세계대전과 함께 다슬러 형제는 갈등을 겪게 되고, 1947년 둘은 각자의 길을 간다.
형인 루디 다슬러는 자신의 이름 첫 글자를 따서 ‘루다(Ruda)’라는 이름의 스포츠 브랜드를 만든다.
이것은 나중에 퓨마가 된다.
아디 다슬러는 1949년 역시 자신의 이름 첫 글자를 따서 아디다스(Adidas)를 설립한다.
세계인들에게 너무나 친숙한 심벌인 삼선(three stripe)은 1970년대부터 아디다스의 운동화와
운동복에 새겨졌는데, 아디다스와 관계없는 무수한 스포츠 상품들이 이 띠를 무단으로 이용할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삼선은 1967년에 처음으로 등장했다.
그리고 나이키라는 강력한 경쟁자가 성장하기 전 1970,80년대까지 세계 스포츠계에서 유일무이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던 아디다스의 로고는 1972년 탄생했다.
세 개의 나뭇잎으로 구성되었고, 나뭇잎의 밑 부분으로 줄무늬가 들어간 이 로고는 TV 스포츠 중계
에서는 예외 없이 노출되었다. 특히 축구와 같은 유럽이 강세인 종목에서 더욱 두드러졌다.
세 잎 로고는 1972년부터 1996년까지 아디다스의 공식 로고로 쓰였고, 1997년부터는 삼선을 새롭게
디자인한 로고가 공식 로고로 사용되고 있다.
♬Entre Les Feuilles Des Arbres(나뭇잎 사이로) - Marie Jeon ♬
♬―‥ 음악 소스‥―♬
인도를 다녀와 往五天竺國傳,을 남긴 승려
혜초
혜초(慧超, 704~787)는 신라 시대의 승려이다. 밀교를 연구하였고, 인도여행기인 [왕오천축국전
(往五天竺國傳)]을 남겼다. 719년 중국의 광주에서 인도 승려 금강지(金剛智)에게 배웠고, 723년
경에 4년 정도 인도여행을 한 뒤, 733년에 장안의 천복사에 거주하였으며, 780년에는 오대산에서
거주하였다.
불교의 본고장으로 향한, 순례자의 길
전인미답(前人未踏), 아무도 밟지 않은 길을 걸어간 사람의 전통이 있다.
우리 역사에서 이런 전인미답의 경지를 개척한 전통을 어디서 찾아볼 수 있을까?
구도(求道)의 길을 따라 인도까지 걸어서 갔다 온 순례자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신라 사람 아리나발마는 처음에 불교의 본디 모습을 보러 중국에 들어갔는데, 용기가 더욱 솟아
결국 오천축국까지 이르렀다.
오천축국이란 인도 북부 지방에 있었던, 부처님이 나신 나라를 비롯한 다섯 천축국을 말한다.
중천축국과 동서남북의 넷, 그래서 오천축국이다. 아리나발마는 나란타사에 머물며 ‘율론을 많이
열람하고 패협에다 베껴 썼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웬만한 학문적 성취를 이루어 낸 모양이다.
패협은 패엽이라고도 쓰며, 경전을 기록하는 기다란 나뭇잎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나뭇잎을
재료로 한 고급 종이인데, 살생을 금한 불교의 법칙에 따라 동물 가죽 대신 썼던 것이다.
지금도 남아있는 패협은 무척 고급스럽게 보인다. 가난한 순례자들은 제 몸의 치장 대신 이 종이를
사는 데 재물을 모두 바쳤으리라. 나란타사는 중인도 마갈타국에 있던 절인데, 5세기에서 12세기
까지 불교를 가르치던 대학이 있었던 곳으로 유명하다.
[서유기]로 잘 알려진 손오공의 스승 현장도 이 절에서 5년간이나 머물며 공부했다.
이 같은 이야기를 일연은 중국 승려 의정의 [구법고승전]에서 전적으로 인용해 [삼국유사]에 적어
놓았다. 본디 이름이 [대당서역구법고승전]으로, 7세기 말 의정이 스스로 인도순례를 하며 지은
책이다. 인도까지 구법 여행을 한 승려들의 전기를 실은 것인데, 아리나발마를 비롯한 모두 60인이
나온다.
그런데 여기서 동국(東國)인 곧 신라 사람이 무려 9명이나 된다. 산술적으로 계산해도 15%에 달한다.
한편 각훈의 [해동고승전]에는 의정의 승전에 없는 현조와 현대범이란 이름이 보인다.
의정의 승전에 나오는 현태와 구본이 이들일 가능성이 있지만, 그렇지 않다면 숫자는 더 불어난다.
귀(歸), 한번 가서 돌아오지 못한 순례자들
그러나 [왕오천축국전]의 지은이인 혜초는 어느 기록에도 보이지 않는다.
인도로 가는 그 길이 얼마나 험했는지, 오늘날 우리에게 가장 구체적으로 전해주는 사람이 혜초인데
말이다. 먼저 [왕오천축국전]에 실린 그의 시 한 편을 읽어보자.
차디찬 눈은 얼음과 엉기어 붙었고/ 찬바람은 땅을 가르도록 매섭다 넓은 바다 얼어서 단을 이루고/ 강은 낭떠러지를 깎아만 간다.
사실 이 책은 그 전부가 남아있지 않아 그의 여행경로며 보고 들은 자세한 것을 다 알 수 없다.
둔황 석굴의 깊은 곳에 묻혔다가 세상의 빛을 다시 본 것이 겨우 100여 년 전, 그것으로 신라 출신
이라는 사실 말고는 고향이며 죽은 곳도 알 길 없지만, 719년 열다섯 살의 나이에 중국에 들어가 5년
동안 수학한 다음 결행한 4년간의 인도 여행을 어렴풋이 전해준다.
겨울날 투가라국에 있을 때 눈을 만나 그 느낌을 읊은 이 시에서 우리는 무시무시한 고행의 한 단면
을 읽을 뿐이다. 시는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용문(龍門)엔 폭포조차 끊기고 말았으며/ 정구(井口)엔 뱀이 서린 듯 얼음이 얼었다 불을 들고 땅끝에 올라 노래 부르리/ 어떻게 저 파밀고원 넘어가리오
뱀이 서린 듯 얼어붙은 얼음길을 오르는 그의 가슴 속에는 불 같은 열정이 가득 차 있다는 뜻일까?
그럼에도 파밀고원은 멀기만 하고 생사를 오가는 여행길은 불안하기 그지없었으리라.
그런데도 두려운 마음을 때로 기도하며 때로 노래하며 풀어내고, 사막과 얼음 구덩이로 발걸음을
옮긴 그들에게 도대체 어디서 그런 용기가 생겼다는 것일까?
같은 길을 따라 거슬러 왔던 전도자들을 생각하며 걸었던 것일까?
해동의 작은 나라 신라에서 출발한 순례자들이 아리나발마처럼 처음에는 중국까지만 가려다가 인도
까지 가게 된 것인지, 아니면 애당초 인도 여행을 목적으로 출발한 것인지 알 수는 없다.
그러나 모두 한 번 가서 돌아오지 못했음은 분명하다. 아니 돌아오지 못해도 좋다는 각오가 서 있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삼국유사]에서 일연이 이들의 기록에다 ‘귀축제사(歸竺諸師)’라 제목을 붙인 것은
깊은 의미를 지닌다. 귀(歸), 가고서는 끝내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곳이 진정 돌아갈
곳이었는지 모른다.
중국 정통 밀교의 법맥을 이은 혜초
아리나발마는 ‘돌아오고 싶은 마음 간절했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나란타사에서 죽는다.
그의 나이 70세였다. 현태는 그나마 중국까지 돌아온다. 그러나 그 역시 어디서 죽었는지 전해지지
않는다. 순례자의 마음이지만, 범인(凡人)의 그것에 조금이나 가까운 것이 있다면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수구초심(首丘初心) 하나일까? 혜초는 다른 시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내 고향은 하늘 끝 북쪽/ 땅 한 모서리 서쪽은 남의 나라 남천축 해 떠도 기러기 한 마리 없어/ 누가 내 집으로 돌아가리
기러기 발목에 편지를 묶어 날렸다는 고사가 있거니와, 그런 기러기조차 보이지 않는 곳에서의
막막한 심정이 잘도 그려져 있다. 혜초가 언제 어떤 연유로 중국을 가게 되었는지는 자세하지 않다.
기록으로 그가 중국 밀교의 초조(初祖) 금강지의 문하에 들어간 것이 719년, 곧 그의 나이 열다섯
살일 때인 것으로 알려졌다. 금강지는 인도 출신의 승려이다. 스승의 문하에서 5년을 수학한 혜초는
감연히 인도 여행을 떠난다. 갈 때는 해로로, 돌아올 때는 육로를 이용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가 남긴 [왕오천축국전]은 오늘날 우리에게 8세기경, 인도 풍경을 소략하게나마 전해주는 유일한
기록이다. 물론 그의 존재는 1908년 프랑스 탐험가 펠리오(P. Pelliot, 1878~1945)의 둔황 석굴 발견
과 1909년 중국인 나진옥(羅振玉)의 손을 거쳐, 1915년 일본인 다카쿠스 준지로(高楠順次郞)의 노력
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천 년 세월의 긴 잠을 잔 책이 바로 [왕오천축국전]이다.
그대 서번이 멀다 한숨짓는가/ 나는 탄식하네, 동쪽 길 아득하여 길은 거칠고 설령(雪嶺) 높은데/ 험한 골짝 물가에 도적떼 소리치네
새는 날아가다 벼랑 보고 놀라고/ 사람도 가다 길을 잃는 곳 한 생애 눈물 닦을 일 없더니/ 오늘은 천 갈래 쏟아지네.
‘서번 가는 사신을 만나’라는 제목의 시이다. 서번(西蕃)은 서쪽 오랑캐 나라인 토번이다.
지금의 서장이라 부르는데, 이때는 인도와 중국 사이에서 두 나라의 문물을 교류하며 번성하였다.
설령(雪嶺)은 눈 쌓인 봉우리이지만, 여기서는 히말라야 산맥을 일컫는다.
한참 인도 여행이 무르익을 무렵, 혜초는 우연히 서번으로 가는 중국 사신을 만나게 된다.
설령은 도적떼 출몰하는 계곡이었기에 대국의 사신답지 않게 코를 빼고 가고 있다. 처량한 모습이다.
그러나 하늘 나는 새마저 놀라는 길을 사람이 무슨 재주로 편히 지날 수 있겠는가. 승려인 혜초마저
펑펑 눈물을 쏟는다. 그런 고행의 대가(代價)였을까, 혜초는 귀국하여 스승의 총애 아래 수행 정진
하여, 중국 밀교의 정통으로 일컬어지는 금강지 불공(不空) 법맥을 잇는 제자로 우뚝 섰다.
고향에선 주인 없는 등불만 반짝이리
혜초가 남긴 몇 편의 시를 통해 우리가 받는 감동은 단지 전인미답의 길에서 정진한 그의 용맹함
때문만은 아니다. 도리어 약하고 쓸쓸한 심정을 숨김없이 내보이는 그 솔직성 때문이다.
지극히 인간적이다. ‘슬픈 죽음’이란 시는 그 가운데 대표적인 작품이다.
고향에선 주인 없는 등불만 반짝이리/ 이국 땅 보배로운 나무 꺾이었는데 그대의 영혼 어디로 갔는가/ 옥 같은 모습 이미 재가 되었거늘
생각하니 서러운 정 애끊고/ 그대 소망 이루지 못함을 슬퍼하노라 누가 알리오, 고향 가는 길/ 흰 구름만 부질없이 바라보는 마음.
혜초는 동천축국과 중천축국을 지나 남천축국으로 향하였다. 그의 나이 이십 대 초반.
막 스물 접어들어 여행을 떠나 동서남북중의 다섯 군데로 나뉜 인도를 4년에 걸쳐 여행했다.
이미 동천축국과 중천축국에서 쿠시나가라∙바라나시∙라자그리하∙룸비니 등 이름만 들어도 설레는
불교의 성지를 둘러본 다음이었다.
그리고 혜초가 북천축국에 이르렀을 때 여행은 막바지로 치닫고 있었다. 그곳의 한 절에서 덕망
높은 승려 한 사람이 고국으로 돌아가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다는 말을 듣는다.
위의 시는 그에 대한 뜨거운 애도의 노래이다.
일연의 [삼국유사] 가운데 ‘귀축제사’ 조의 일부를 앞서 소개했다. 인도기행을 떠난 승려들의
아름답고도 장한 이야기가 자세히 실려 있다. 요즈음도 인도기행이 상당한 붐을 이루지만, 당대
승려들의 여행은 그야말로 목숨을 건 것이었다. 목숨을 건 여행의 시종기(始終記), 그러나 거기
에는 어떤 스릴러 영화의 라스트 신과 달리 살아남은 주인공이 아무도 없다.
일연은 ‘귀축제사’ 조의 끝에 이런 시 한 구절을 남겼다.
외로운 배 달빛 타고 몇 번이나 떠나갔건만/ 이제껏 구름 따라 한 석장(錫杖)도 돌아오지 못했네
달빛 타고 떠나간 순례자(석장) 가운데 구름 따라 돌아온 이 아무도 없다.
혜초는 “고향에선 주인 없는 등불만 반짝이리”라는 첫 행부터 사람의 애를 끊는 표현으로
시작하였다. 이 한 줄로 그 심정을 헤아리기에 족하다고 본다.
혜초의 천축 여행 시작점이었던 평택시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2009년 5월 평택호 인근 모래톱 공원에 혜초 기념비를 세웠다. |
둔황의 석굴(제 17굴, 장경동)을 조사하는 펠리오.
그는 둔황 석굴에 보관되어 있던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을 프랑스로 가져갔다. <출처 : 강병기 at ko.wikipedia.com>
바보가 한 순간에 천재가 된다? 상상하기 힘든 일이지만 지금부터 소개할 스마트폭탄의 세계
에서는 가능한 일이다. 일반적인 범용폭탄에 몇 가지 유도키트만 달아주면 폭탄은 그야 말로
바보에서 천재가 되어 정확하게 목표를 타격한다.
이전까지의 범용폭탄은 중력과 바람에 따라 떨어질 곳이 정해졌다. 결국 정확도가 떨어져서
무차별적으로 투하될 수밖에 없었고, 목표물에 명중되기까지 여러 번의 공습이 필요했다.
하지만 현대전에 쓰이는 정확한 스마트폭탄은 목표물을 한번에 정확하게 제거한다.
놀라운 정확도로 명중하는 스마트 폭탄 | |
스마트폭탄 전장을 변화시키다
스마트폭탄은 지난 1991년 걸프전에서 전쟁 상황이 실시간으로 TV 방송을 통해 보도되면서 그
위력을 대중에 유감없이 선보였다. 특히 걸프전에서는 새로운 작전 개념으로 동시에 대규모 목표
를 타격하는 방식을 적용하여 150여 개의 표적을 24시간 이내에 공격하였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때에 B-17과 B-24 같은 대형 폭격기로 유럽을 1942년과 1943년에 공격하기
로 계획했던 것보다 더 많은 표적을 단 하루 만에 공격한 것이다.
하지만 걸프전에서 사용된 스마트폭탄은 전체 폭탄의 8%에 불과했다. 반면 2003년의 이라크전
에서 사용된 스마트폭탄은 전체 폭탄의 68%로 대폭 늘어났다. 스마트폭탄의 사용량에 비례하듯
이라크의 정규작전은 '충격과 공포'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내고 불과 1달여 만에 끝나고 말았다.
스마트폭탄의 원조는 독일
걸프전과 이라크전을 통해 스마트폭탄이 미군에 의해 대량 사용되면서 스마트폭탄이 미국에 의해
개발되었을 것이라 생각하기 쉬우나 사실 스마트폭탄의 원조는 독일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이 개발한 중장갑 목표 타격용 프리츠-X(Fritz-X)가 역사상 최초의
스마트폭탄이었다.
스페인 내전 당시 독일공군 루프트바페는 이동 중인 함정에 대한 폭격이 일반적인 범용폭탄으로
는 힘들자 스마트폭탄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프리츠-X는 길이 3.3m 무게 1.4톤의 초강력 폭탄에 폭 1.4m의 날개, 조절판, 꼬리날개, 유도 장치
와 점광 신호기 등으로 구성된다.
폭탄의 유도과정은 폭격기에 탑승한 승무원이 점광 신호기로 폭탄의 위치를 확인하면서 라디오
원격 조정으로 낙하 궤도를 수정해 목표물에 폭탄을 명중시킨다.
1938년부터 개발이 시작된 프리츠-X는 1943년 7월 21일에 실전 배치 되었다. 프리츠-X를 이용한
폭격은 8월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는데 이탈리아 시실리 항구와 메디나 해협의 연합군 목표물
에 대한 폭격이 감행되었다. 하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그러나 9월 9일 단 세 발의 프리츠-X가 이탈리아 해군의 만재 배수량 4만 5천 톤의 최신형 전함
비토리오 베네토급 3척 중 1척을 침몰시키고 다른 1척을 항행 불능에 빠뜨리면서 전쟁의 양상을
바꾸는 스마트폭탄의 존재를 세상에 처음으로 알렸다.
스마트폭탄의 원조인 프리츠-X |
스마트 폭탄의 가치가 입증된 것은 베트남전이다. |
스마트 폭탄의 시작은 제2차 세계대전이었지만 실전에서 스마트 폭탄의 가치를 입증한 전쟁은
베트남전이다. 베트남전 당시 1965년부터 4년 동안 연 600대의 전투기와 폭격기가 범용폭탄으로
폭격하고도 파괴시키지 못한 중요 목표를 단 한 차례의 폭탄으로 파괴시킨 사건이 발생한다.
그 목표는 북베트남의 수도 하노이에서 90Km 떨어진 탄호아 철교이며, 이때 사용된 폭탄이 바로
스마트 폭탄, 레이저유도폭탄이었다.
레이저유도폭탄에 대한 개발은 1964년 미국의 텍사스 인스트루먼츠사가 시작했다.
레이저유도폭탄들은 1968년부터 베트남전에서 운용되기 시작했으며 이후 6년 동안 레이저유도
폭탄은 TV유도폭탄과 함께 2만 5000여 발이 사용되어 1만 8000여 개의 목표물을 파괴하였다.
레이저유도폭탄은 범용폭탄에 레이저유도키트를 장착해 완성하게 된다.
장착되는 레이저유도키트 중 가장 유명한 것이 미국 레이시언사와 록히드 마틴사가 생산한
페이브웨이 키트이다. 페이브웨이(Paveway)라는 명칭은 레이저유도폭탄 개발을 위한 프로젝트
명에서 유래된다.
레이저유도폭탄이 목표물에 유도되는 원리는 이렇다.
전투기나 지상군이 목표물에 레이저빔을 비추면 전투기 조종사가 목표 근처 상공에서 레이저유도
폭탄을 투하하고, 낙하 중인 폭탄이 목표물에 반사된 레이저 빔을 감지하여 목표를 따라가 명중
하는 것이다. 1960년대에 처음 실전에 투입된 페이브웨이 시리즈는 페이브웨이Ⅰ이다.
이후 1973년부터 미 공군에 실전 배치된 레이저유도폭탄은 페이브웨이Ⅱ 시리즈이다.
페이브웨이Ⅱ는 항공기 탑재를 용이하게 개량되었고 전개식 핀이 장착되어 사정거리가 증대
되었다.
1986년부터 배치된 페이브웨이Ⅲ 시리즈는 최종 단계인 레이저 유도 이전 중간 단계에 디지털
자동조종장치를 사용하는 2단계 유도방식과 대형 핀을 사용해 보다 저고도에서 원거리 투하가
가능하도록 키트가 개발되었다.
대표적인 레이저 유도 스마트폭탄, 페이브웨이III |
페이브웨이 Ⅲ의 레이저 탐색기 |
GPS 유도폭탄 제이담의 등장
앞서 살펴본 레이저유도폭탄은 목표의 2~3m 이내에 명중할 정도로 정확했지만 레이저를 비춰야
되므로 시각에 상당 부분 의존해야 했다. 또한 악천후 상황에서는 사용이 불가능할 때가 많았다.
예를 들어 지난 1999년 나토의 유고연방 공습작전인 연합군 작전 때의 경우 산악 지형의 특성으로
인해 유고슬라비아에서는 종종 목표물 상공에 심하게 안개가 끼거나 낮게 구름이 깔리는 현상이
발생하였다. 이때 공중에서 투하된 레이저유도폭탄은 반사된 레이저빔을 찾지 못해 폭탄 투하가
불가능하거나 혹은 목표물이 아닌 다른 곳에 유도되어 오폭사고가 발생하였다.
미국은 1991년 걸프전 이후 레이저유도폭탄의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한 새로운 방식의
스마트폭탄을 찾게 되는데 GPS유도폭탄이 그것이었다.
최초의 GPS유도폭탄은 1992년부터 미국의 노스럽 그루먼사에 의해 생산된 GPS지원폭탄 갬(GAM, GPS-Aided Munition)이었다. 갬도 키트형식으로 개발되었으며, B-2 폭격기용으로 특별히
제작된 것이다. GBU-36/B와 GBU-37/B로 분류되는데 극히 소량만이 생산되어 아프간전과 이라크전에서 전량 사용되었다.
이후 본격적인 GPS유도폭탄이 선보이게 되는데 바로 JDAM(제이담)이다. 합동직격탄(Joint Direct
Attack Munition)의 약자인 제이담은 1996년부터 미국의 보잉사에 의해 생산되었다. 앞서 살펴본
페이브웨이와 같은 키트형식으로 GPS와 INS(관성항법장치)가 내장되어 있으며, 날개 부분에 방향
조정용 플랩이 붙어 있다.
키트는 범용폭탄 후미에 장착되어 폭탄을 정밀유도한다. 제이담의 사거리는 28㎞로, 고도
14,000m에서 제이담을 투하했을 경우를 가정한 것이다. 제이담은 GPS 위성의 정보를 받아 목표물
까지 정확하게 폭탄을 유도한다. 만일 적의 전파방해로 인해 GPS 위성의 정보를 받을 수 없으면
INS를 사용하여 유도한다. 그러나 GPS 유도 시 13m였던 오차가 30m로 커지게 되는 단점이 있다.
제이담은 키트형식으로 일반 폭탄에 부착된다. |
제이담의 가장 큰 장점은 기후조건에 영향을 받지 않다는 점이다. |
국내에서 개발 중인 한국형 스마트폭탄 KGGB
국내에서는 미래에 변화하는 전장에 대비하고자 공군을 중심으로 한국형 GPS유도폭탄 즉 KGGB
가 개발 중에 있다. KGGB는 앞서 설명한 페이브웨이나 제이담과 같은 키트 형식으로 GPS유도
방식을 사용한다.
같은 GPS유도방식을 사용하는 제이담과 달리 KGGB는 활공형 유도키트로 글라이더 날개가 달려
있어, 제이담의 28Km의 사정거리에 비해 장착되는 폭탄의 종류와 투하 고도에 따라 74Km~111Km까지 사정거리를 늘릴 수 있다.
KGGB를 장착한 폭탄은 투하 후 유도키트에 입력된 표적으로 비행하게 되지만 경우에 따라 비행
도중 목표물의 변경도 가능하다. 그리고 또 하나의 장점은 KGGB는 기존의 스마트폭탄과 달리
구형 전투기인 F-4와 F-5에서도 운용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기존의 GPS유도폭탄인 제이담의 경우 운용을 하려면 F-16과 같은 비교적 신형의 전투기라도
성능개량을 통해 항공전자체계와 인터페이스를 업그레이드하지 않으면 운용이 불가능하다.
이에 비해 KGGB는 조종사가 휴대하는 자료입력단말기를 통해 공격에 필요한 각종 자료를 입력
받는다. 조종사가 폭탄유도에 필요한 목표물의 좌표 선회지점 등을 무릎 위의 자료입력단말기에
입력하면 무선으로 직접 유도키트에 전달되어 투하 준비가 완료된다.
KGGB와 유사한 체계로는 미국 록히드 마틴사의 롱샷키트가 있으며 지난 1989년부터 개발해 운용
중에 있다. KGGB는 현재 한참 개발이 진행 중에 있으며 2013~2014년에 실전배치를 목표로 하고 있다.
KGGB는 2013~2014년에 실전배치를 목표로 개발 중이다 <사진: 국방일보>
자료제공 : 유용원의 군사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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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색이라도 세가지 다 잘 보았습니다 그래도 중간 부분이 가장 마음에 드는것 같네요
오늘도 즐거운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