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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위병으로 기동타격대로
증 언 자 : 이재춘(남)
생년월일 : 1959. 11. 7(당시 나이 21세)
직 업 : 방위병(현재 무직)
조사일시 : 1989.7
개 요
당시 송정리 공군 3252부대 방위병이었던 이재춘 씨는 5월 19일부터 항쟁에 참여해 숭의실고에서 학동 지역방위를 서고, 21일 저녁 도청으로 들어가 기동순찰대 대원으로 일한다. 26일 저녁 기동타격대에 들어가 1조 조장으로 활동하다가 27일 새벽 도청에서 체포되어 내란 부화수행에 연루, 1981년 3월에 석방되었고, 현재는 기동타격대 모임을 이끌고 있다.
송정리 비행장에 개구리복을 입은 공수들이
나는 광주시 방림동에서 5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모님들이 시장에서 식료품 및 야채 장사를 하여 전가족이 생계를 유지했다. 성질이 급한 나는 중학교 2학년 때 패싸움을 하고 학교를 그만두게 되었다. 학교를 그만두고 무작정 서울로 올라갔다. 서울에서 약 2년 동안 정착지 없는 생활을 전전하다가 다시 광주로 내려왔다. 광주에 내려와서도 하는 일 없이 어영부영 지내다 광주시내를 자주 드나들게 되었다. 이무렵 시내에서 DJ 하는 선배를 알게 되어 그를 자주 따라다니게 되어 나도 점차 그런 세계에 흥미를 느꼈다. 그래서 나는 다방에서 소위 '판돌이' 생활부터 거쳐 DJ, 그리고 나이트 클럽의 사회를 보게 되었다. 이런 생활 중에 군대 영장이 나왔다.
1980년 4월 8일 송정리에 있는 공군 3252부대에 입대를 하였다. 이 부대는 야전 정비부대로서 비행기 엔진 세척과 정비를 하는 곳이었다. 나는 방위로 근무하면서도 퇴근 후에는 시내에 나가 DJ 일을 하였다.
5월 16일인가 17일 오후 2시경 송정리 비행장에 '개구리복'을 입은 공수부대원들이 비행기를 타고 도착했다. 20분 간격으로 도착한 여러 대의 비행기에서 내린 공수들은 대략 5백-6백여 병력이 되는 것 같았다. 그들은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중대별로 모여 최루탄을 분배하고 그것을 받은 군인들은 최루탄을 가슴에 달았다. 가슴에 최루탄을 부착한 군인들은 비행장 앞에 대기중인 10여 대의 군용 버스를 타고 어디론가 갔다.
우리 부대에도 이미 '진도개 2마리'가 걸려 '시내 데모 구경하지 말 것', '보안을 철저히 할 것' 등의 교육을 받아 비상사태임을 알았으나 느닷없이 공수들을 보자 군인인 나로서도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낄 수 있었다. 또한 부대에서는 시국이 어수선하니 출퇴근하지 않고 영내생활을 해도 좋다고 했다. 나는 이런 식으로 하다가 대충 비상이 풀릴 것으로만 생각했는데 상황은 그렇게 전개되지 않았다.
5월 18일은 공휴일이었다. 오전에는 집에만 머물다 오후에 동네 방위병들과 함께 사복으로 갈아입고 시내로 나왔다. 시내는 정말 어수선했다.
오후 4시경 학생들이 유동 쪽에서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를 하면서 금남로로 오고 있었다. 중앙로는 이미 교통이 차단된 상태였다. 또한 시내 곳곳에는 공수부대들이 2-4명씩 짝을 지어 다니고 있었다. 군인의 신분인 나는 시내에 계속 머물러 있는 것이 안 좋을 것 같아 빨리 시내를 벗어났다.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상한 이야기가 많이 나돌았다. 주로 시내에 출현한 공수 부대의 만행에 관한 얘기였다. '공수부대가 학생, 시민들을 잡아 무조건 때린다는 등 .' 그러나 나는 설마 하는 생각만 하고 곧바로 집으로 돌아왔다.
5월 19일 동네 방위병 9명 중 서너 명만 출근하고 나머지는 출근을 하지 않았다. 나는 송정리로 가는 버스가 다니지 않아 가는 것을 포기했다. 나머지 방위병들은 왜 부대에 근무하지 않았는지 알 수 없었다.
오후에 동네 친구들과 어울려 시내로 나와 학생들과 시민들이 도청 앞에서 시위하는 모습을 보았다. 오후에 DJ를 봐야 하기 때문에 나왔는데, 이렇게 시내가 시끄러워서는 영업하기가 어려울 것 같았다. 그래서 내가 일하는 충장로 '하나음악실'로 가서 주인을 만나 영업을 중지하자고 했다. 주인도 시내상황을 직감하고 빨리 문을 닫자고 했다. 주인과 얘기가 끝난 후 집으로 돌아가는 중에 금동에서 처음으로 공수들이 시민을 구타하는 모습을 보았다. 솔직히 나는 이때까지만 해도 군인의 신분이라 스스로 몸을 사리고 다녔는데 공수들이 시위 도중 도망가는 학생들을 끝까지 쫓아가 무자비하게 끌고 오는 모습을 보니 앞으로 나설 수도 없는 형편이 된 것 같아 몹시 기분이 상했다.
방위병의 신분으로 참여하다 전경에게 붙잡힘
5월 20일 나는 이날부터 본격적으로 시위에 가담했다. 어제 공수들의 폭력을 본 나는 이미 군인의 신분을 벗어난 상태로 시위에 참여했다. 나의 머리 속엔 나라를 지키는 정의로운 군인이 무고한 시민들을 못살게 구는 것을 눈으로 보고만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런 군인이라면 전투에서의 적이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자리잡았다.
이 무렵 주로 시내에 뿌려진 유인물은 공수들의 만행을 규탄하고 시민들은 도청 앞으로 모이자는 내용이었다. 계속 이곳저곳의 시위현장을 쫓아다니다 보니 밤이 되었다.
20일 밤 9시경 점차 시위가 격렬해져 갔다. 시위군중들 사이에서는 기름이 필요하다고 했다. 나와 몇 명의 사람이 무등극장 앞에 세워진 차의 기름을 빼러 갔다. 다급한 나머지 나는 호스로 기름을 빼다가 잘못하여 기름을 한모금이나 삼켜버리게 되었다. 기름을 먹고는 속이 답답해 엢엢거리고 있는데 4, 5명의 공수부 대원들이 우리를 향하여 달려오고 있었다. 우리들은 잡히지 않으려고 잽싸게 도망을 쳤다. 이미 시내 상가들은 소등상태라 앞이 깜깜한 상태에서 나는 왕자관 앞의 전경들을 보지 못하고 그들 쪽으로 도망을 쳤다. 호랑이 굴 속에 스스로 들어가버리고 만 것이다. 곧바로 나는 그들의 손아귀에 잡히고 말았다.
나는 곧바로 도청 앞 분수대로 끌려갔다. 그곳에는 사복을 입은 경찰관들이 권총을 차고 잡혀온 사람들을 수사하고 있었다. 워낙 캄캄한 밤이라 그곳에 잡혀온 사람들이 몇 명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수사관이 뭐 하는 사람이냐고 물어보길래 나는 머리가 짧았기 때문에 고등학생이라고 했다. 그러자 주위에 지키고 섰던 공수들이 고등학생이라며 마구 두들겨 팼다. 그래서 나는 다시 나이는 18살이며 공장에 다니고 있다고 했다. 곧바로 수사관들이 조서를 썼다. 조서를 쓰는 과정에서도 수없이 두들겨맞았다. 그런데 불행히도 맞는 과정에서 나의 옷에 있던 방위병임을 증명하는 신분증이 나와버려 나는 그로 인해 또 한차례 더 심한 구타를 당해야만 했다.
도청 본관 뒤로 끌려갔다. 그곳에는 이미 잡혀온 사람이 대략 40-50명 가량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고개를 처박고 땅에 엎드려 있었다. 그들 중 여자도 한 명 있었는데, 그 여자는 옷이 거의 벗겨진 상태로 책상 위에 정신을 잃고 누워 있었다. 그 여자의 모습을 보니 섬뜩해졌다. 잠시 후 그 여자는 군용 헬기에 실려져 갔다.
주위의 공수부대원들은 우리들을 계속 괴롭혔다. 한 사람씩 잡혀올 때마다 여러 명의 공수가 달려들어 두들겨팼다. 그곳에 있던 경찰관들도 공수부대원들이 너무했다고 생각했는지 우리에게 물을 가져다주기도 하였다. 그러다 공수부대원에게 들키면 주전자는 박살이 났다. 공수들은 경찰관들조차도 아무렇게나 대해 경찰관들도 겁을 먹었다. 이날 저녁은 그곳에서 땅에 엎드린 자세로 밤을 샜다.
5월 21일 도청 앞에서 광주시장과 시민대표들이 협상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군인들은 협상이 잘 안 되어 시민들이 도청 뒤에서까지 싸움을 하고 있다고 했다. 조금 후 무리를 지어 들어온 전경들은 우리가 있는 곳에서 사복으로 갈아입고 나갔다.
사태는 점차 심각하게 돌아가는 모양이었다. 공수부대원들은 잡혀온 사람들을 헬기에 실었다. 그 와중에 도청 밖의 상황이 다급하게 전개됐는지 공수부대들은 안절부절 못했다.
12시경 공수부대원들이 모두 조선대로 철수한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고는 공수부대들이 우리에게 모두 일어나라고 했다. 나도 이제 헬기에 실리게 되는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옆에 있던 경찰관이 뒷줄에 있는 나를 포함한 4명을 도청 뒤로 데리고 갔다. 우리는 도청 뒤 담에 있는 비상문을 통과하여 밖으로 나왔다.
나는 밖으로 나와 도청 뒤의 오외과에 입원했다. 군인들의 구타로 인해 상처를 많이 입었기 때문이었다. 병원에서는 제대로 치료도 해주지 않고 진통제만 주었다. 병실에 누워 있는데, 시민들이 총을 들고 있어 병원도 위험하다며 병원측에서는 퇴원을 하라고 했다. 환자들은 보호자가 오는 대로 퇴원을 했다. 나도 집으로 연락을 했다. 어머니와 여동생이 나를 인계받아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오는 과정에 보니 많은 시민들이 머리에 띠를 두르고 손에는 총을 든 채 군용 지프차를 타고 돌아다니고 있었다. 또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조선대로 후퇴한 공수부대들이 지원동 쪽으로 빠진다는 이야기도 나돌았다.
지원동으로 빠져나간 계엄군과 교전을 벌이고
밖의 상황을 보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집에만 머물 수 없다는 생각에 걱정하는 어머니 몰래 화장실을 가는 척하면서 다시 밖으로 나왔다. 방림동에서 남광주 쪽으로 걸어오니 철도 부근에서 총을 나누어준다고 했다. 그곳에 가보니 총을 나누어주는 것은 아니고 도로에 총이 쌓아져만 있었다. 사람들은 스스로 알아서 총을 가져갔다. 총이 약 2백정 정도 되었는데 거의가 카빈총이었고 실탄은 없었다. 다이너마이트도 몇 개 있었다.
나는 카빈총을 들고 지원동으로 갔다. 군인들이 그쪽으로 빠져나간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숭의실고 안에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소리를 듣고 그 안으로 들어가니 백여 명 정도의 사람이 있었다. 내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내가 있었던 곳은 5, 6층 정도였는데, 그곳에는 우유와 빵 등 먹을 것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또한 그곳에는 실탄도 있었는데 사람들은 서로가 많아 가져가려고 야단들이었다. 나는 3클립 정도의 실탄을 가져왔다.
저녁 10시경 숭의실고 앞 도로로 군용 트럭 4대 가량이 지나갔다. 맨 앞에는 지프차가 지나갔다. 우리들은 그들을 향하여 총을 쏘았다. 머리는 숙이고 총구만 내놓은 채 무조건 갈겨댔다. 군인들도 우리를 향해 M16을 갈겨댔다. 한참 총격전을 벌였다. 군용 차량 한대만 우리의 사격을 당해 멈추고 나머지는 화순 쪽으로 빠져나갔다.
22일 아침 도로로 가보니 어젯밤에 총격으로 인해 시민군들은 부상 하나 없었는데, 군용 트럭 안에는 군인 일등병이 총에 맞아 죽어 있었다. 죽은 군인은 공수가 아니라 일반군인으로 운전병이었다. 그 옆에는 수류탄 2, 3 박스가 놓여 있었다. 우리들은 수류탄을 학교 안으로 옮겨와 너나 할 것 없이 소지했다. 그곳에는 어린 사람들이 많았는데, 나이든 어른들은 어린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총을 내놓으라고 했다. 나는 총을 놓기 싫어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를 의심할까봐 방위병이라는 소리도 하지 않았다. 내 나이가 어리다고 해서 이런 상황에서 절대 그냥 집에 들어갈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아침에 동네 아주머니들이 밥과 김밥 등을 가져와 식사를 했다. 밥을 얼마나 많이 해왔던지 우리들이 먹고 남을 정도였다. 음료수는 흔해 빠져버릴 정도로 많았다. 아주머니들은 우리에게 술은 먹지 말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아침을 먹고 숭의실고에서 나와 총을 들고 집으로 들어갔다. 집식구들은 내가 총을 들고 가자 겁을 먹고 할머니는 나 몰래 실탄을 변소에 빠뜨려버렸다. 나는 실탄이 없는 총을 가지고 다시 집을 나왔다. 동네 청년 30여 명과 함께 우리 마을을 지켜야 한다며 방림국민학교 옥상으로 올라갔다. 나 외의 나머지 동네 청년들도 어디서 났는지 모두들 총과 실탄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학교 옥상에서 밤 12시경까지 있었다. 그 과정에 방림국민학교 옆의 '청년동산'에 위협 사격을 가하기도 했다. 군인들에게 우리들이 지키고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함이 기도 했다. 동네 청년들 중 조병국 씨가 스스로 소대장을 하겠다고 자처하여 우리는 그를 지휘자로 인정했다.
밤 12시가 넘자 계속 그곳에 머문다는 것이 별볼일이 없음을 알고 우리는 철수하기로 했다. 그래서 나와 열댓 명은 지나가는 버스를 타고 도청으로 갔다. 나머지는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도청으로 오니 이미 와 있던 사람들이 우리에게 도청 경비를 서라고 하였다. 그래서 나는 잠을 식당에서 2시간씩만 자고 교대로 도청 경비를 섰다. 주로 방림동 친구들이 두서너 명씩 짝을 지어 도청 정문 경비를 섰다.
기동순찰대 활동
5월 23일 기동순찰대로 편입을 했다. 기동순찰대는 큰 조직력을 갖추었기보다는 주로 수위실 입구에서 무전기 하나를 받고 몇 명씩 짝을 지어 차를 타면 순찰대로 인정해 주었다. 그래도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기동순찰대라고 하면 많은 호응과 찬사를 보냈다. 나는 이때부터 군인 신분을 잊어버리고 끝까지 목숨을 걸고 싸우리라고 생각했 다. 군인의 신분으로 이왕 이렇게 되는 판에 나는 군에 다시 들어간다고 해도 어차피 영창감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집에서 어머니와 동거중인 여자가 나를 찾으러 와도 나는 과감히 도청에 남겠다고 말을 했다.
순찰대가 하는 일은 주로 계엄군의 동태파악으로 시내와 변두리 쪽을 순찰하였다. 그렇다고 도청에서 순찰대를 강력하게 통제하는 것이 아니어서 조직력에 있어서는 아주 미약했다. 도청에서 무전기로 사고지역을 일러주면 우리가 곧바로 그곳으로 출동을 했다. 출동을 할 때 다른 기동순찰대 대원들도 한꺼번에 같은 장소에 몰려들어 혼선을 빚기도 했다. 우리는 주로 도청에서 내린 지시를 무전기로 받았지 우리가 스스로 도청에 보고를 하는 일은 없었다. 순찰대는 또한 강도 사범을 잡거나 도청에서 필요한 물품을 실어나르기도 했다.
도청에서 필요한 물품은 동네별로 준비하여 도청으로 가져가라는 연락을 했다. 그러면 우리는 즉시 그곳으로 출동하여 실어왔다. 아파트촌이나 동네 반장 아주머니들이 솔선수범하여 음식물을 챙겨주었다. 주로 빵이 많았고 쌀, 김치도 많았다. 라면 종류는 주로 박스채로 건네받았다. 광주시민들의 열기는 정말로 대단한 것이었다. 5, 6명으로 조직된 순찰대원이 음식물을 실어와 도청 앞에 내려놓으면 보급조가 도청 안으로 가져갔다.
기동순찰대가 조직력이 없다는 것은 총기회수를 하면서도 나타났다. 한쪽에서는 총기회수 반대의 입장인데, 다른 한쪽에서는 도청에서나 각 동네마다 돌아다니며 총기를 회수하고 다녔다. 이렇듯 순찰대는 일정한 통제가 없이 활동했다.
어느 날인가 도청수습위에서 무기를 반납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순찰대원을 비롯한, 죽음을 걸고 싸우겠다는 사람들과 함께 도청 본관 2층 수습위원들이 있는 곳으로 쫓아갔다. 우리는 지금 계엄군들이 곧 치고 들어올 판에 무기를 반납한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소리쳤다. 그리고 수습위원들 앞에 있는 책상을 걷어차버렸다. 어떤 사람은 수습위원에게 총을 들이대며 죽여버린다고 윽박질렀다. 그만큼 상황이 다급한 판국에 책상 앞에서 광주를 군인들에게 그냥 넘겨준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5월 24일 지원동에서 사건이 터졌다. 우리는 도청 상황실의 연락을 받고 곧바로 출동하여 지원동 버스종점으로 갔다. 그곳에 온 순찰대는 우리 조와 다른 한 조였다.
주위의 사람들이 건너편의 논바닥에 산에 있는 군인들의 총을 맞아 사람이 쓰러져 있다고 했다. 우리는 그들을 구출해야 한다는 생각에 그곳에 온 2개조의 순찰대를 다시 편성했다. 하나는 '모모조', 또 하나는 '닐리리조'라고 이름을 붙였다. 나는 모모조의 소대장을 맡았다. 순식간에 두 개의 조를 재정비한 것이다.
조를 편성한 후 우리는 논바닥을 거의 기다시피 하여 사건의 현장으로 접근했다. 닐리리조가 먼저 출동하여 산에 있는 계엄군에게 백기를 흔들었는데도, 군인들은 계속해서 우리를 향해 위협사격을 했다. 사건현장에 당도해 보니 19살 정도의 여자가 발에 총을 맞아 쓰러져 있었다. 우리가 들것을 만들어 그를 데리고 나왔다.
계속 계엄군의 총소리가 들려왔다. 우리가 여자를 구출해 가지고 나오자 기다리고 있던 주위의 사람들이 박수를 치며 환영했다. 한편 지원동 부근에서 우리를 향해 사진를 찍고 있는 사람이 있어 우리는 그 사람의 카메라를 빼앗아 땅바닥에 내동댕이쳐버렸다. 지금 생각하면 사진을 많이 남겨두는 것이 중요했는데 그때는 조금이라도 이상한 행동을 하면 군인들의 첩자로 생각했다.
우리는 전반적인 광주의 상황을 알 수가 없었기 때문에 자주 이북방송을 청취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곳의 방송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그래서 나는 분명히 광주에 간첩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곳에서 일어난 일을 그곳에서 그렇게 빨리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가끔씩 집안에서 동거하는 여자와 어머니가 나를 찾으러 도청으로 왔다. 나는 그럴 때마다 가족들을 돌려보냈다. 어머니는 한번 마음먹은 일은 끝까지 하는 내 성질을 알았기 때문에 더 이상 말리지 못하고 눈물을 글썽이고 되돌아가셨다.
용감한 기동타격대 대원들
26일 날이 밝았을 때 도청에 비상이 걸렸다. 군인들이 시내로 들어온다는 것이 도청에 접수되었다. 곧바로 도청에 있던 순찰대원들이 상무대 쪽으로 출동했다. 우리가 정신없이 차를 몰고 한국전력공사 앞까지 갔을 때 장갑차를 타고 온 군인들과 마주쳤다. 우리는 잽싸게 차를 돌려 다시 시내 쪽으로 왔다. 도청으로 돌아와서 보니 군인들은 더 이상 진출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때서야 비로소 한숨놓았다.
5월 26일 도청에서 기동타격대를 모집한다는 소리를 들었다. 이러한 말은 사람의 입을 통해 순식간에 도청 안에 나돌았고, 누군가 메가폰을 가지고 다니면서 이런 사실을 알리기도 했다. 나는 기동순찰대는 빠져도 무방하리라고 생각하고 기동타격대를 모집한다는 장소에 가보았다. 그 이전에 도청내의 지도부를 강경파가 장악하여 그에 맞는 조직을 만든다는 소식을 접했던 터라 더욱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도청 본관 2층 식산국장실로 갔다. 나와 함께 기동순찰대를 했던 대원 모두가 함께 갔다. 그곳에는 기동타격대 대장인 윤석루, 부대장인 이재호 씨가 있었고, 기동타격대를 모집한다는 소식을 접한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주 젊은 층에 속했다.
나는 기동순찰대에 참여했던 양동남, 구성회, 임성택, 오정호와 함께 제1조로 편성이 되었다. 우리 대원들은 거의 모두가 동네에서부터 알고 지내는 후배나 친구가 많아 단결력에 있어서는 아주 대단했다. 나는 제1조 조장이 되었다.
기동타격대의 편성은 한조당 5, 6명씩으로 구성이 되었다. 처음에는 6조까지 편성을 하였으나 점차 수가 늘어나자 7조에 많은 수를 배치했다. 7조는 다른 조에 문제나 사고가 발생했을 경우 보급, 지원할 수 있는 조로 편성하여 우리는 편의상 7조를 보급조라 이름하였다.
어느 정도 기동타격대의 편성이 끝나자 우리는 기동타격대 선서를 하였다. 나는 아주 의연한 마음으로 목숨바쳐 싸울 것을 다짐하였다. 기동순찰대 활동을 했던 것보다 아주 뿌듯한 감이 들었다. 기동순찰대보다 훨씬 체계적이고 조직적이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선서한 기동타격대 선서문을 만든 사람은 기동타격대 부대장을 맡고 있는 이재호 씨로, 그는 다른 기동타격대 대원중에서 나이가 제일 많았다. 그리고 실제로 그가 거의 모든 기동타격대 일을 지시하였다. 곧 실제적인 대장이나 다름없었다.
기동타격대 편성 후 우리는 도청에서 보관하고 있는 무기 중 가장 성능이 좋은 것으로 무장하였다. 그 누구보다도 무장이 잘되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각 조당 지프차 한 대와 무전기 한 대를 소지하고 대원 모두 수류탄도 소지하였다. 차는 군용 지프차를 각 조가 탔다. 또한 우리는 복장에 있어서도 좀더 의연하게 보이기 위해 전경들이 후퇴할 때 버리고 간 방석모를 거의가 다 썼다.
나는 공수부대가 버리고 간 공수모자를 썼다. 그리고 우리들은 거의가 이름을 모르는 상태에서 서로의 대원들의 이름을 부르게 좋게 하기위해 각자의 별명을 붙였다. 이를테면 머리에 쓰고 있는 모자에 '제1조 백곰'이라고 써붙였다. 별명은 대부분 동물 이름을 붙였다.
기동타격대 편성 후 제일 먼저 맡은 일은 사동에 있는 성하맨션에서 물품을 가져오는 것이었다. 그곳에서 물품을 가져가라는 연락이 왔기 때문이다. 이런 일을 우리는 기동타격대 지도부로부터 지시받고 곧바로 출발했다.
우리 조(제1조)와 타격대 대장인 윤석루 씨가 함께 갔다. 그곳에는 마스크, 식빵, 양말 등 우리가 도청에서 생활하는 데 필요한 물품들이 많이 있었다. 마스크는 성하맨션에 사는 아주머니들이 직접 만든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이 항쟁 후에는 우리가 그곳의 주민들에게 강탈해 온 것처럼 되어버렸다. 정부의 압력으로 성하맨션의 수위와 동네 아주머니들이 우리들이 와서 빼앗아 갔다고 말을 해버렸기 때문이다.
기동타격대 대원들은 선서를 할 때부터 목숨을 걸고 싸우기로 작정한 사람들이라 모든 일에 정말 용감했다. 광천동에서 군인들이 나타났다는 소식을 접한 기동 타격대 6조가 현장으로 출발했다. 현장으로 떠난 6조 대원들이 군용 버스를 타고 가던 군인 3명 중 군인 1명을 잡아왔다. 그 군인은 제대를 2개월 앞두고 상무대에서 근무하던 군인으로 시내순찰을 나왔다 생포가 된 것이었다. 생포된 군인을 곧바로 도청 보관 2층 기동타격대실로 데리고 온 후 다시 도청 조사과로 데리고 갔다. 그를 조사한 후 우리는 상무대 군인임을 알고 그의 총을 찾아주고 그를 다시 상무대 쪽으로 데려다주었다.
27일 새벽 계엄군에게 체포되다
기동타격대 대원들은 도청에서 내린 지시대로 이곳저곳의 사고지역을 순찰하여 굉장히 지친 상태가 되었다. 도청에서 내린 사고지역을 가서 보면 실제와는 다른 상황들이 많았기 때문에 우리들은 더더욱 피곤에 지쳐 있었다. 우리들은 거의가 차 안에서 약간씩 눈을 붙이고 자는 정도였다.
27일 새벽이 되자 계엄군이 들어온다는 소식이 거의 도청 안에 퍼져 우리는 아주 긴장된 상태로 죽더라도 이름을 남기고 죽자며 쪽지에 이름은 적어 호주머니에 넣었다. 이렇게까지 마음을 먹었어도 우리는 계엄군이 설마 들어오겠는가 하는 마음이었다. 그런데 도청 안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빠져나가자 더더욱 불안해 졌다.
새벽 2시가 넘어가자 계림동 쪽에서 군인들이 쳐들어온다는 소리와 함께 총소리가 들려왔다. 거의 비슷한 시각에 YWCA에서 도청을 지키겠다는 지원병들이 도청으로 들어왔다. 캄캄해서 정확한 수는 모르지만 꽤 많은 수가 도청이나 계림동 쪽으로 출동한 것 같았다. 그들은 총을 잘 쏠 줄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그중에 몇 명이 나에게 총을 어떻게 쏘냐고 물어왔다. 그들의 말은 총기교육을 받았는데도 총기 사용하는 방법을 잘 모르겠다고 했다. 사태는 아주 심각하게 진행되었다. 도청으로 들어온 지원병들은 대부분 고등학생 정도의 어린 나이였다.
나는 도청 분수대 앞쪽의 화단 뒤에 숨어 있었다. 어디선가 총소리가 계속적으로 들려왔다. 나와 같이 다른 화단의 뒷부분에서 지키고 있던, 도청으로 지원 나온 두 명의 시민군이 푹 고꾸라졌다. 내가 그들에게 고개를 숙이라고 했는데 고개를 들고 있다가 총을 맞았다. 그들은 상무관 쪽의 군인들에게 총을 맞은 것이다. 나는 그때 항쟁기간 중 처음으로 사람이 죽는 것을 목격했는데 어린 나이의 지원병들이 죽어가자 너무나 섬뜩했다. 나는 지원병들이 총을 맞기 전까지만 해도 상무관 쪽에 있는 사람들이 우리 편인 줄 알고 군인들을 향해 군인들의 동태를 묻기까지 했다. 지원병 2명이 죽자 나는 무조건 상무관 쪽을 향해 총을 갈겨 대고 낮은 포복으로 도청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도청 안도 마찬가지였다. 둥둥 떠다니는 헬기에서는 "폭도들은 투항하라"는 여자 음성의 방송소리가 나고 도청 뒤에서는 총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나는 도청 2층으로 올라갔다.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도청 입구 쪽으로 다시 내려왔다. 내려오면서 보니 군인들이 계속 도청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수위실 부근의 차 밑으로 들어가 잡히기 전까지 숨어 있었다. 차 밑에서 숨을 죽이고 내다보니 군인들이 왔다갔다하는 모습이 보였다. 도저히 다른 곳으로 도망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곳에는 기동타격대 대장인 윤석루 씨와 전남대생 한 명과 조선대생 한 명 이렇게 모두 4명이 숨어 있었다. 우리는 모두 차와 한몸이 되어 숨어 있었다. 날이 훤히 밝자 군인들이 차 밑으로 총을 한방 쏘더니 나오라고 했다. 우리는 곧바로 나갔다. 이때가 새벽 6시 30분 정도 되었을 것이다.
끌려나간 우리를 군인들은 앞을 못 보게 하고 고개를 숙이라고 했다. 그러고는 우리 등 뒤에 뭐라고 글씨를 썼다. 나는 그때 도청에 몇 정 안 되는 M16을 가지고 있어 내 등 뒤에 M16 소지라고 씌어졌다. 다른 사람들은 대부분이 카빈을 가지고 있었는데, 나는 기동타격대로 편입된 후 카빈의 성능이 좋지 않음을 알고 M16을 소지한 것이다.
끌려나온 우리들은 일명 '올챙이 포복'을 하고 사람들이 잡혀 있는 곳으로 갔다. 그동안 많은 사람들의 부상이나 사망으로 길바닥에 여기저기 피가 흘려져 있어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그 어떤 냄새도 다 맡을 수 있어도 정말이지 피비린내만은 맡을 수가 없었다. 올챙이 포복을 하여 25미터 가량 가자 도청 안에서 잡혀 온 사람들이 60-70여 명 가량 있었다. 군인들은 잡은 사람들을 계속 실어가고 있었다. 우리는 곧바로 군용 버스에 실려 상무대로 끌려갔다.
내란죄로 몰아세우며 도장을을찍으라고
상무대로 끌려가자마자 나는 군인들의 프락치인 장계범에게 기동타격대임이 알려져버렸다. 장계범은 시내의 술집인 '옥천집'을 운영했던 자로 내가 군대 가기 전 그곳에서 술을 마시면서 그곳에 병영수첩을 놔두고 온 적이 있었는데, 이런 데서 이렇게 만나다니 정말 때려죽이고 싶었다.
상무대 영창 앞에서 열 명 가량이 서 있으면 장계범이 검은 안경을 쓰고 도청 안에서 주요활동을 했던 사람들을 지목했다. 나도 그에게 찍혀 곧바로 보안대 지하실로 끌려갔다. 보안대 지하실로 끌려가자 나는 수류탄을 터뜨려 함께 죽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보안대 지하실로 끌려가서는 대충 거짓말을 하고 나이도 19살이라고 속였다. 그들이 파악하기에 '단순범' 정도로 파악하게 내가 행동했다. 나는 다시 상무대로 끌려왔다. 그러나 상무대로 와서 기동타격대 1조 조장이라고 판명이 나버려 그에 관해 본격적으로 수사를 받았다.
수사관들은 먼저 고문부터 시작했다. 그것이 우리에 대한 인사나 마찬가지였다. 고문은 여러 가지 종류였다. 고문을 당해 보지 않은 사람은 그에 대한 고통을 모를 정도로 심했다. 특히 각진 볼펜을 손가락 사이로 넣어 뱅뱅 돌리면 더할 수 없는 고통을 느껴야만 했다. 이런 모진 고문과 구타 속에 조서를 14번이나 썼다.
나는 처음에는 진술을 거부하다 모든 사실이 밝혀질 것 같아 거의 사실대로 진술했다. 그런데 나 자신이 멍청했던 것이 처음부터 끝까지 조서의 내용이 같아야 하는데 다시 쓸 때마다 조서의 내용이 달라져, 그들은 계속적으로 나를 고문해가면서 죄목을 추가하려고 했다. 이런 조서는 컴퓨터로 조회가 되었기 때문에 글자 하나만 틀려도 곧바로 틀린 부분이 나왔기 때문에 계속 맞으면서 조서를 써야만 했다.
그들이 나에게 집중추궁한 것은 총기를 어디다 숨겨놓았는가 하는 부분과 내가 군대에서 근무이탈을 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절대 근무이탈이 아니라 차가 다니지 않아 근무를 할 수 없다고 했으나 결국 내 소속부대의 중대장이 근무이탈로 써줘버려 나는 근무이탈로 되어버렸다.
감옥 안의 수감자들은 수사받는 과정에서 많은 고문을 당했기 때문에 수사관들이 이름만 부르면 온 신경을 한데 쏟고 끌려나갔다. 그렇게 끌려나간 사람들은 모두가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어 영창 안으로 돌아왔다.
수사관들이 처음에는 나를 단순한 강도 정도로 묶으려고 했으나 나의 조사과정에서 내가 기동타격대 1조 조장이라는 사실과 그에 수반하는 많은 활동들을 보고 어느 날 갑자기 나를 내란죄로 몰아세우며 도장을 찍으라고 했다. 군인들은 나를 내란죄로 묶어세우고 나서는 나에 대한 대우가 남달랐다. 닭도 사다가 주면서 먹으라고 하고는 내가 불쌍했던지 혀를 끌끌 차며 나에게 불쌍한 놈이라고까지 했다. 실제로 나는 수사 받는 과정에서도 본래의 신분이 군인이라고 하여 거의 그들의 구타의 대표적 대상이었기 때문이었다. 한번은 기동타격대라고 하여 실컷 두들겨맞았다. 항쟁 당시 광천동에서 군인을 생포했을 때 함께 있다가 도망쳤던 수사관이 그에 관한 보복으로 우리를 구타했기 때문이다.
재판을 받기 전 담당검사가 나를 불렀다. 검사가 음료수와 밥을 시켜주었다. 나는 평소와는 다른 검사의 태도에 이상한 느낌이 들어 검사에게 물어보았다.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너는 기 아니면 형이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무기 아니면 사형이라는 뜻이다."
앞이 캄캄했다. 당시의 상황으로 나는 사형을 받을 것이라고는 상상을 했지만 실제로 검사에게 그러한 말을 들으니 더욱 막막했다. 검사로부터 말을 들은 후 나는 화장실로 가서 엉엉 울었다. 사형만 면했으면 싶었다. 나는 더군다나 군인이라 항소할 수도 없기 때문에 더욱 답답했다.
다음날 재판을 받았다. 내 앞에서 형을 언도 받은 사람들은 사형이나 무기였다. 나는 착잡한 심정으로 기다렸다. 그런데 나는 의외로 15년을 받았다. 나는 어제 검사의 말이 생각나 그 자리에서 웃어버렸다. 기동타격대 대장을 했던 윤석루 씨는 무기징역을 받았다.
감방 안에서 가장 얄미운 사람들은 학생들이었다. 학생들은 각자의 환경이 어느 정도 좋았기 때문에 먹는 것도 우리들 보다 훨씬 잘먹었다. 우리가 먹는 것을 기대하는 것은 거의가 감방에서 주는 2인에 1그릇씩 지급되는 식기에 담겨진 적은 양의 밥과 저질의 반찬이 고작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먹는 것에 대한 집착이 강했는데 실제로 학생들은 사식이 들어와도 나눠먹을 줄을 몰랐다. 그래서 많은 갈등을 낳았다. 그러나 이러한 갈등도 함께 살다보니 점차 가셔갔다. 잡혀온 학생들은 거의가 예비검속자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에 대한 조사는 간단하게 끝나버려 학생들이 우리들에 대한 조서를 함께 의논해 주기도 했다. 그리고 학생들과 같이 있으면서 우리들은 이를테면 많은 얘기들 속에서 '의식화'가 되어갔다. 그동안 사회에 대해 단순하게만 생각했던 부분들을 점차 문제의식을 가지고 느끼게 된 것이다. 처음에 학생들은 우리를 갑갑하게 취급하고 우리들은 학생들의 얘기를 필요없는 말이라고 치부했으나 점차 많은 얘기 속에서 대화가 가능했다.
나는 1980년 10월에 재판을 받은 후 광주교도소로 옮겨져 생활하다 1981년 3월 3일 특사로 풀려났다. 다른 사람은 2심에 항소를 할 수 있었으나 나는 군인의 신분이었기 때문에 항소가 불가능했다. 그러나 형이 12년에서 7년으로 감형이 되어 풀려날 수 있었다.
기동타격대 회장으로 일하고
석방 후 많은 고민과 갈등 속에서 보내다 삼촌이 하는 삼성전자에서 일을 도와 주었다. 그러다 1984년에 결혼을 했다. 그 전에 동거한 여자는 나 자신이 감옥에서 오래 머물 것 같아 나를 떠나라고 했다.
1983년 기동타격대 모임을 해보려고 내가 임시 초대회장을 맡았으나 서부경찰서에 불려가 모임 한번 가져보지 못하고 깨져버렸다. 1985년 다시 기동타격대의 모임을 해보려고 하여 양동남 씨가 회장이 되었다.
우리 기동타격대의 성격은 거의 친목도모 정도이나 앞으로는 친목적인 성격을 벗어나 운동적 방향으로 일을 해보는 것이 바람이다. 그러나 많은 세월이 흐르고 많은 대원들이 각자의 생활기반을 찾아 객지에 나가 어려움을 안고 있다. 그러나 많은 대원들이 운동단체로 하자고 하는 것이 거의 1백 퍼센트의 바람이나 현실적으로 힘이 든다. 지금 나 자신이 기동타격대 모임의 회장을 맡고 있는 입장에서 열심히 우리 회원들을 규합하여 일을 해볼 생각이다.
1988년 국회의원 선거 때에는 개인적으로 광주 서구갑에 출마한 정상용 씨의 선거운동을 도왔고, 현재는 광주항쟁 당시 암매장된 시체를 찾는 암매장 발굴팀에서 일하고 있다. 이 암매장팀에는 우리 기동타격대회원 8명이 참가하고 있다.
지금에 와서 당시를 돌아보면 많은 점들이 아쉬움으로 남지만, 나에게 있어서 특히나 안타까운 것은 사회에 대한 전반적인 부분들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없었다는 것이다. 감방에 있으면서 문제의식을 학생들로부터 느꼈을 때 좀더 많이 공부를 했어야 했다는 안타까움뿐이다. (조사정리 신봉화) [5.18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