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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 20세기 한국사
그 백일흔여덟 번째 00/10/01
<준비 오래 했습니다--국민의 정부 출범>
극본 김광수 연출
이영노
음 악...오프닝.
해 설...시대는 왜 단 하나만의 정치적 카리스마를 배출하지 않고 둘, 혹은 서넛의 카리스마를 동시에 배출해서 풍운을 일으키는 것일까. '국민의 정부' 출범을 평가하기 전에 김대중이라는 배가 대통령으로서 출범하게 되는 과정을 살펴보노라면, 카리스마를 타고난 죄로 끝없이 다른 카리스마와 싸우며 상처받고 상처받다가, 끝내 상처받은 그 카리스마를 장엄하게 일으켜세우고야마는 일대 역정을 목격하게 된다.
시대는 어찌하여 단 하나의 카리스마만을 허용하지 않았을까. 사실 민주주의와 정치적 카리스마는 썩 어울리는 짝이라고 볼 수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민주주의를 위하여 저마다 선호하는 카리스마 밑으로 집합했고, 카리스마들은 저마다 민주주의를 외치면서 지지자를 규합하여 그 위에 우뚝 솟아올랐으며, 그로하여 국론은 곧잘 분열되었다. 모두가 상처받고, 서로가 서로를 상처입힌 한국현대정치사의 카리스마들. 절대악도 절대선도 있을 수 없는 시대에서, 선도 되고 악도 되면서, 승리하고 패배하는 그 속에서 김대중이라는 카리스마는 맨 나중에 승리했고, 그래서 그 승리의 결과는, 다른 카리스마들에 대한 평결과는 상관없이 아직 미지수다.
왜냐하면, 늦게 오른 그의 막이 지금 한창 공연을 진행중이기 때문이고, 평가는 막이 내린 뒤에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아직도 과거형 인물이 아니라 현재진행형 인물이며, 과거형으로 밀려나지 않으려고 버틴 이력에도 그의 풍상은 담겨 있다.
1998년 2월 25일, 제15대 대통령 김대중의 '국민의 정부'가 IMF의 찬바람 속에서 출범했을 때 우리는 유감없이 '인동초의 생명력'이라는 의미를 부여했다. 그런데, 인동초가 만고풍상 다 겪고 봄볕을 쬐려는 날까지도 IMF의 찬바람 속이라니. 여야정권 교체의 의미가 있다 하더라도 '국민의 정부' 출범이 새정치국민회의의 집권이라는 의미보다도 '김대중 대통령의 출범'이라는 의미로 다가오게 되는 이유가 '인동초의 생명력'이라는 표현 속에 있다. 여야정권 교체를 이룩한 제15대 대선의 선거상품이 김대중이라는 개인이었고, 김대중이라는 이 오래된 상표가 인동초의 내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오랜
겨울의 모진 추위를 이겨낸 야당이 집권당이 된 '국민의 정부' 출범기를 작성하자면 그 간판상품 김대중의 정치이력부터 조명해야 한다.
낭 독...(필터) 김대중은 공식적으로 1925년 12월 3일 전남 신안군 하의면 후광리에서 출생한 것으로 되어 있다. 목포상업학교를 졸업하는 1944년 3월에 목포상선회사에 입사했고, 1951년 3월에는 주식회사 흥국해운의 사장이 된다. 그리고 남해안의 여러 섬에 지점을 개설하는 등 사업수완을 발휘한 이 젊은 해운업자는 사업상 부산에 머물고 있던 1953년, 한 정치연구모임에서 서울대 출신의 미혼여성 이희호를 만나게 된다. 그러나 이들은, 김대중은 국회의원 출마를 위해 목포로 돌아가고, 이희호는 미국유학을 떠나므로써 특별한 인연을 만들지 못한 채 헤어지게 된다.
김대중이 선거벽보에 그 인물을 올린 첫 선거는 1954년 5월 20일에 실시된 제3대 국회의원 선거로서, 흥국해운을 일으키고 목포신보를 경영한 목포에서 출마하지만 여덟 명의 후보 중 5위로 낙선을 한다. 한편 이때 김영삼은 거제에서 자유당 공천으로 출마하여 당선하므로써 약관 26세의 최연소 국회의원이 된다.
김대중이 두 번째로 치른 선거는 1958년 5월 2일의 제4대 국회의원 선거이다. 이때 김대중은 민주당의
원외 대변인이었는데, 목포에는 이미 민주당의 현역 의원이 공천을 받아놓고 있어서 민주당 공천이 없는 지역을 찾다가 강원도 인제에서 입후보 등록을 하게 된다. 그러나 김대중의 입후보 등록은 그 자체가 무효로 처리되면서 출마도 못하게 되고, 김대중은 즉각 '선거 무효' 소송을 제기한다. 한편 이때, 자유당에서 민주당으로 옮긴 초선의원 김영삼은 선거구를 부산 서구로 옮겨서 출마했다가 부정선거의 영향으로 차점낙선을 한다.
김대중의 '선거 무효' 소송이 승소한 것은 1959년 3월. 김대중은 6월에 실시된 인제 보궐선거에서 출마하지만 낙선을 한다. 그리고 이 해에 홍일 홍업 두 아들을 낳고 14년간의 결혼생활을 한 아내 차용애와 사별한다. 제5대 민의원 선거는 제2공화정의 출범과 함께 1960년 7월 29일에 실시되는데, 이때 김영삼은 부산 서구에서 재도전하여 당선하므로써 재선의원이 되고, 김대중은 여전히 민주당 원외 대변인의
신분으로 머물게 된다. 김대중에게 처음으로 당선의 영광을 준 것은 1961년 5월 14일 인제의 보궐선거였다.
뒷날 대통령에 네 번 도전하여 당선하게 되듯이 국회의원에 네 번 도전하여 당선을 하게 된 것이다. 5월 14일 밤에 당선을 확인한 김대중은 5월 15일 하루 온종일 인제 지역주민을 찾아다니며 당선시켜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5월 16일 아침 일찍 국회에 당선 신고를 하기 위해 서울로 출발하는데, 그러나 그때
서울에서는 5 16의 무혈쿠데타가 성공하고 있었고, 그가 당선 신고를 위해 국회를 찾아갔을 때 제5대 국회는 이미 해산이 되고 없었다.
김대중이 미국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이회호와 재회한 것은 1962년 봄이었고, 결혼은 곧바로 5월 10일에 한다. 결혼 당시의 얘기를 이희호 여사는 뒷날 이렇게 술회한다.
이희호...제가 결혼을 한다고 하니 주위사람들이 모두 깜짝 놀랐습니다. YWCA 동료들은 물론이고 저를 아는 주위 모든 사람들이 다 반대를 하는 겁니다. 지금까지 독신으로 잘 버텨왔는데 하필이면 왜 그런 사람한테 갑자기 시집가려 하느냐며 필사적으로 말리는 겁니다. 지금 생각해봐도 내가 왜 그렇게 겁없이 모험을 했는지 모르겠어요. 그분은 그때 정치규제법 때문에 정치활동을 할 수도 없었고 직업도 없었어요. 무직상태였고 장래에 대한 희망도 보이지 않았지요. 그분의 셋집에는 병든 어머니와 심장병을 앓는 누이동생이 함께 살고 있었고, 게다가 어린 두 아들도 있었습니다. 그런 집에 제가 시집을 가겠다고 했으니 정말 큰 모험을 했다고 할 수 있지요. 그분의 사람 됨됨이에 끌려서 결혼을 결심하게 된 것 같아요. 결심을 굳힌 후 사람들에게 저는, '저를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라고
당당하게 말했던 것을 지금도 기억합니다.
낭 독...(필터) 뒷날 대통령이 된 뒤에 김대중은 이희호를 이렇게 말한다.
김대중...아내가 아니었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것입니다. 아니, 살아있는 것조차 불가능했을지도 모릅니다.
낭 독...(필터) 목포는 김대중이 학창시절을 보낸 곳이고 청년사업가로 성공한 곳이며 정치가로서의 입지를 세운 곳이다. 김대중은 이 정치적 고향 목포에서 1963년 11월 26일의 제6대 국회의원 선거와 1968년 6월 8일의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연거푸 당선된다. 그리고 마침내 1970년 9월 29일, 제7대 대통령 선거의 신민당 후보로 선출이 된다. 새로운 고난의 출발점이었다. 그리고 그 고난의 여정은 이 시간의 <긴급조치시대> 편, <서울의 봄> 편 등에서 대강 얘기한 바가 있다.
해 설...1997년 12월 18일의 제15대 대선에서 김대중이 이긴 것을 두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최초의 여야간 평화적 정권교체라는 의미를 부여하면서 우리는 감격했다. 김대중은 1971년 4월 27일의 제7대 대선과 1987년 12월 16일의 제13대 대선, 그리고 1992년 12월 18일의 제14대 대선에서 그 세 번 모두를 낙선한 경험이 있는데, 그 세 번의 습관성 낙선을 보면서 여론은 아쉽고 안타까운 마음을 누른 채, 아무래도 김대중으로는 한계가 있어, 그렇게들 동정 섞인 푸념을 했다. 무엇이 그의 한계였을까. 국민의 정부가 출범하게 된 배경에서 그가 극복한 한계를 알아보자.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조희연 교수.
인서트 1...조희연 교수. (취재 1:17'35". '국민정부는 50년만의 야당정권이라고 할 정도로 ~ 6.27선거에서 이미 김종필 씨가 자유진영연합 결성으로 나오면서 여권의 분열이 가시화됐다.' 에서 끊고, 넉 줄 건너뛰어서, '김종필 씨가 민자당에서 이탈, 자유민주연합을 구성함으로써 문민정부를 가능하게 했던 충청, 영남지역은 ~ 김대중 정부는 가까스로 성립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해 설....국민의 정부 출범의 이면에 재미 통계학자 이영작의 선거전략이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최근 한 월간지에 공개되어 세간의 이목을 끈 바 있다.
이희호 여사의 친정조카로서 미국에서 성공한 학자인 이영작 씨가 고모부인 김대중 대통령의 선거 때마다 관여하면서 세운 전략들을 선거사적 자료로 제시한 점이 흥미로웠는데, 한편 미묘한 해석을 낳게 하지만, 선거전략이 장막 뒤에서 행사되고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우리 선거풍토에서 이와같은 선거백서가 공개된다는 것은 대단히 의미있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영작 씨가 제시한 이 자료로 하여 우리의 선거판은 이제 흑막을 걷고 대명천지에 나섰다고 할 수 있겠거니와, 어차피 누가 벌이건간에 선거판이 이전투구라는 사실은 뻔한 일이고, 감춘다고 해서 정의롭게 보일 일도 아니라면 이처럼 솔직하게 털어놓으므로써 그때 그 역사 이면의 진실을 알 수 있게 해서 좋은, 그런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아무튼, 이 자료에서 이영작은, 김대중의 세 차례 대선 패배 요인을 대강 이렇게 분석하고 있다.
이영작...1971년과 1987년의 대선은 민주 대 반민주의 대결로서 반민주가 이긴 선거고, 1992년의 대선은 영남 대 호남의 대결로서 영남이 이긴 선겁니다. 이번 1997년의 대선은 '준비된 후보'와 '준비되지 않은 후보', '경제를 살릴 수 있는 후보'와 '경제를 살릴 구상이 없는 후보'의 대결로 몰고가서 '준비된 후보' '경제를 살릴 수 있는 후보'가 이기는 선거가 되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김대중 후보의 진가를 알릴 필요가 있습니다. 새삼스럽게 뭘 더 알리느냐고 하겠지만, 한국의 유권자들은 여러 차례 대선에서 김대중을 만났어도 정작 김대중을 잘 아는 사람이 없어요. 김대중을 잘 모르기로는 호남사람도 마찬가지예요. 자신있게 김대중으로 밀고나가야지, 김대중 후보의 어디가 어때서 김대중 아닌 정당 이름을 상품으로 밀고나갑니까? 1992년 대선에서 우리가 왜 패배했는지 아십니까? 김대중으로는 한계가 있다면서 민주당의 이름을 전면에 내세운 것입니다. '민주당을 보고 찍어주십시오' 했지 '김대중을 보고 찍어주십시오' 한 운동원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김영삼 후보보다 김대중 후보의 어디가 어떻게 훌륭하니 김대중 후보를 찍어주십시오' 한 사람 있습니까? 다들 '김대중은 싫더라도 정권교체를 위해서 김대중을 찍어주십시오' 했잖습니까? '김영삼 죽이기'를 해야 하는데 '김대중 감추기'를 했으니 선거에 이길
수 있겠습니까? 물론 그래서 김영삼 정권 하에서, 대선 때 김영삼 욕한 죄로 욕본 사람은 없습니다만, 이게 결국, 자기 몸 다치지 않는 선거운동을 했다는 증거이고, 지는 선거를 했기 때문에 졌다는 증겁니다. '준비된 후보 김대중' '경제를 살릴 수 있는 후보 김대중'으로 밀고나가면서 '준비되지 않은 후보 죽이기' '경제 살릴 구상이 없는 후보 죽이기'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김대중이 경제를 살릴 수
있다는 증거를 어떻게 제시하느냐... 김대중 후보의 경력이 있지 않습니까. 이렇게 알리면 됩니다. 2~30대에는 사업에 성공한 청년사업가였다, 40대에는 의정활동을 하면서 국가경제정책 수립에 참여한 경제정책가였다, 50대에는 '대중참여경제론'을 제창한 경제이론가였다... 경제실제와 경제정책과 경제이론을 두루 갖춘 경제대통령!... 이걸 캠페인하는 겁니다.
음 악...브리지.
해 설...당 내에서, 김대중이라는 이름의 한계에 대하여 그 어느 선거 때보다 더 노골적으로 거론된 것이 1997년의 대선이었다. '3김시대의 종식'이라는 주장이 그 어느 때보다도 드높았고 '세대교체'라는 주장도 21세기를 여는 대통령이라는 점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도 설득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3김시대'를 종식시키고 '세대교체'를 하기에는, 3김씨가 장악했던 세월의 무게가 너무 막중했고, 3김시대를 종식하고 세대교체를 이룩하자는 후보들의 정치적 역량은 제대로 검증이 돼 있지 않았으며, 때마침 국가가 부도나느니 마느니 하는 때였다. 그래도 예전이나 이때나 김대중 진영의 부담은 김대중이라는 이름이 가지는 득표력의 한계였다. 많이 희석되긴 했으나 '정치지도자 김대중까지는 괜찮지만 대통령
김대중은 안돼' 라고 말하는 축이 여전히 요지부동이었던 것이다. 결국 '김대중 진가 알리기' 작업이 아직도 미흡했다는 것인데, 그러나 이 문제는 상대 당인 신한국당의 내분과 외환위기 상황이 해결을 해준다. 김대중 후보에게 유리하도록 돌아가준 정치상황과 시대상황에 대해 알아보자.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조희연 교수.
인서트 2...조희연 교수. (취재 1:21'47". '국민정부가 성립할 수 있었던 배경들은 여러 가지로 볼 수 있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 국민정부 성립에 대단히 중요한 변수의 하나로 볼 수 있다.')
해 설...김대중이 새정치국민회의의 대통령 후보로 결정된 것은 1997년 5월 19일이었고, 김종필이 자유민주연합의 대통령 후보로 결정된 것은 6월 24일이었으며, 이회창이 신한국당의 대통령 후보로 결정된 것은 7월 21일이었다. 그리고 경선에서 이회창에게 진 이인제가 신한국당을 탈당하고 기자회견을 통해
대선 출마를 선언한 것은 9월 13일이었고, 이만섭을 총재로 한 국민신당을 창당한 것은 11월 5일이었다. 김대중 김종필 이회창 이인제. 그러나 김대중과 김종필이 10월 26일 후보 단일화에 합의하고 이른바 DJP연합을 결성하므로써 제15대 대선은 김대중 이회창 이인제의 3파전이 된다. 한편, DJP연합의 합의사항을 보면, '대통령 후보는 김대중으로 단일화하되, 새정치국민회의와 자유민주연합이 공동집권시에 실질적인 각료 임명재청권과 해임건의권을 갖는 실세총리는 자민련 측에서 맡도록 하고, 독일식 순수내각제를 대선공약으로 채택하여 1999년 말까지 내각제 개헌을 완료할 것이며, 내각제 개헌 뒤에도 공조정신에 따라 연립정부를 구성하고 자민련이 대통령이나 수상 가운데 우선적으로 선택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었다.
이 내용을 보면 새정치국민회의가 상당히 다급한 상황에서 합의를 서두른 기색이 역력한데, 신한국당에서 터뜨린 이른바 'DJ 비자금'의 딜레마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딜레마는 김대중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회창과 이인제도 마찬가지였다. 김영삼과 불화하므로써 민주계의 외면을 당하게 된 이회창은 그 와중에 두 아들의 병역기피 사실이 폭로되면서 지지율이 급락했고, 이회창의 지지율이 급락하는 것과 자신의 지지율이 급등하는 것을 이유로 내세우며 후보를 교체해야 한다고 주장하다가 여의치 않자 신한국당을 탈당한 이인제 역시 경선 불복이라는 딜레마에 빠져야만 했던 것이다. 그런 가운데서 김대중은 '정권교체'를, 이회창은 '3김청산'을, 이인제는 '세대교체'를 선거전의 주 슬로건으로 내걸고 있었다.
낭 독...(필터) 새정치국민회의가 창당되던 1995년 9월에 이미 이영작은 김대중에게, '대통령 선거가 3자구도가 될 경우, 표는 40 대 20 대 40으로 나눠진다고 봐야 하는데, 앞의 40은 여당 후보의 것이고, 중간의 20은 제3후보의 것이며, 뒤의 40이 우리 것이다, 그리고, 앞의 40은 죽었다 깨어나도 우리가 얻을 수 없는 표이니 중간에 있는 20을 노려야 승산이 있다' 는 내용의 보고서를 올린다. 40 대 20 대 40. 김대중 이회창 이인제 3자구도에서 이것을 응용한다면 이회창이 40, 이인제가 20, 김대중이 40일 것이니 이인제의 20을 노려야 된다는 것인데, 선거전 초반 이인제의 인기는 40 대 20 대 40의 이론을 무색케 할 정도로 치솟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더욱 초조해진 김대중 측에서는 이인제를 견제대상으로 설정하게 된다. 그러나 이 3자구도는 1995년에 이영작이 내다본 3자구도와는 다른 것이었다. 그래서 이영작은 이 뜻밖의 3자구도에 대응하는 책략을 제시한다.
이영작...여론조사를 해본 결과, 이인제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 유권자의 우리 김대중 후보 지지율이, 이인제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 이회창 지지율보다 높다고 나타났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이회창 지지표가 우리 김대중 후보에게 올 확률은 희박하지만, 이인제 지지표와 우리 김대중 후보의 지지표는 서로 친화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인제 지지표와 우리 김대중 후보 지지표의 친화력, 이 말을 바꿔 말하면, 이인제가 싫어지면 우리 김대중 후보도 싫어질 가능성이 많은 표가 바로 그 표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이인제를 공격하면 우리한테 손햅니다. 40 대 20 대 40에서 중간의 20을 이인제가 잘 먹어주고 있는데 왜 공격합니까? 이인제 공격하면 중간의 그 20이 이회창에게 간다는 걸 알아야죠. 공격의 대상은 이회창이어야 하는 겁니다. 이인제는 견제도 말고 공격도 말고 오히려 키워줘야 해요.
낭 독...(필터) 이인제의 인기 상승만큼이나 '이회창 대세론'도 그야말로 대세를 이루고 있을 때였다. '결국 이회창 밖에 없다'는 '이회창 대세론'. 왜, 결국 이회창 밖에 없다는 것인가. 이 점을 김대중 캠프에서 불식시켜주어야만 했고, 그러기 위해서 '이회창은 정치력을 검증받은 바 없는, 준비 안 된 후보이며, 국군통수권자가 되기를 바라면서 두 아들을 군대에 보내지 않았고, 법대로 하는 대쪽이라면서 노동법 날치기에 참여하는 등 악법을 수호했다' 는 쪽으로 몰고가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그리고 또하나 김대중 캠프를 초조하게 하는 것은 DJP연합의 효과가 금방 나타나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DJP연합은 권력 나눠먹기'라는 비난만 일 뿐 여론조사상으로 지지율의 상승이 나타나주지를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성급한 일부 당직자들은 'DJP연합이란 말보다는 자민련과의 공동전선이라는 말을 쓰고, JP를 잘 설득해서 정계은퇴를 시키자'는 의견을 내고 있었는데, 이영작의 생각은 달랐다. DJP연합이 지지율 상승으로 나타나지 않는 이유는 DJP연합의 강점을 적극 홍보하지 못한 탓이라고 지적한다. DJP연합의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고, 김종필이 김영삼에게 이용 당하듯 그렇게 이번에는 김대중에게 이용 당할지도 모른다는 충청도 사람들의 우려를 불식시켜주면 성과는 금방 나타난다는 것이었다. 과연 그의 분석과 지적은 정확한 것이었다. 김종필의 위상을 뚜렷이 해주고 DJP연합의 강점을 적극 홍보하자 소극적이던 충청권의 지지율이 치솟기 시작한 것이다.
해 설...9월 30일의 전당대회에서 김영삼 대통령으로부터 신한국당 총재 직을 물려받은 신한국당 대통령 후보 이회창이 김영삼의 탈당을 요구한 것은, 검찰의 김대중 비자금사건 수사 유보를 발표한 10월 21일의, 바로 그 이튿날이었다. 김영삼의 1992년 대선자금 건과 김대중의 비자금 건을 서로 불문에 붙이기로 밀약한 결과이기 때문에 김영삼 대통령이 더 이상 신한국당에 머물러 있을 필요도 없고, 있어봤댔자 선거에 지장만 준다는 것이었다. 대통령과 그 대통령 후계자 간의 싸움. 그것은 적전분열치고도 치명적인 적전분열이었다. 그리고 11월 6일 포항에서 개최된 신한국당 경북지역 필승결의대회. 그 대회장에서 김영삼 대통령을 상징하는 '03마스코트'가 등장하고, 성난 당원들이 '03마스코트'를 몽둥이로 두들겨패는 사건이 발생한다.
당원들...('03마스코트'를 몽둥이로 두들겨패면서. '탈당해!' '이인제한테 가!' '이적행위하지 말고 탈당하라!')
해 설...김영삼 대통령이 신한국당을 탈당한 것은 그 이튿날이었고, 한 주요 일간지는 '김영삼 대통령이 이인제에게 백억 원의 신당 창당자금을 지원했다는 설이 있다'고 보도했으며, 이미 신한국당 민주계 일부를 이끌고 나가서 11월 5일에 국민신당을 창당한 이인제에 이어 이회창은 신한국당의 깃발을 내리고 한나라당을 창당한다. 텔레비전 토론이라는, 가장 자신있는 선거운동 방편을 유효적절하게 이용하여 '준비된 후보'의 이미지를 착실하게 닦아가고 있는 김대중의 앞에서 여권이 니전투구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1997년 12월 대선전쟁의, 전에 없던 새로운 주제는 'IMF'였다. 아니 할 말로 외환위기 상황은, 선거를 치르는 입장에서 보면, 경제실무의 경험과 경제이론가로서의 명성이 있는 김대중의 득표에 도움이 되는 것이었다. 이회창은, 'IMF를 몰고 온 것은 신한국당이지 한나라당이 아니'라고 주장했고, 김대중은 그에 대해서 '소가 웃을 노릇'이라고 했다.
김대중...한나라당이라고 이름만 바꾸면 책임이 없는 것입니까? 국가경제를 파탄에 빠뜨린 것은 김영삼 정부와, 그 정부에 깊숙히 관여하여 혜택받은 이회창 후보와 한나라당인 것입니다. 국가를 도탄에 빠뜨리고 국민을 실의에 빠뜨린 이 사태에 대하여 저는, 제가 집권하면 청문회를 개최하여 그 전말을 밝혀낼 것입니다.
해 설...그러나 김대중이 'IMF 재협상'을 요구하고, 재협상 소리에 기분이 상한 IMF가 대통령 후보들의 각서를 요구해오면서 이회창은 역전을 시도하는데, 한편 이때, 김대중과 마찬가지로 IMF 재협상을 주장하던 이인제는 'IMF 다단계 협상론'으로 살짝 궁지를 모면한다. 지난 시절의 대선처럼 유세장마다 수천수만의 깃발과 수십만 백만의 인파가 몰리는 선거전이 아니라 텔레비전 토론이 위력을 발휘하는 선거전이 되어서 차분해진 듯했지만 IMF사태라는 돌풍이 여기저기 들쑤셔놓으므로써 선거전은 또다른 혼란상을 노출하고 있었다.
음 악...브리지.
해 설...선거 때마다 어김없이 부는 것이 북풍이었다. 이 선거라고 피해갈 바람이 아니었다. 전 천도교 교령 오익제가 밀입북한 사건이 터진 데 이어, 북에서 온 편지 사건까지 터지면서 김대중은 그가 짊어진 오랜 굴레인 '색깔론'에 또다시 발목이 잡히는 것이다. 제15대 대선에 분 북풍에 대해서 알아보자.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조희연 교수. 인서트 3...조희연 교수. (취재 1:24'50". '사실 여당의 총선이라든가 대선 선거전략에 ~ 97년 대선의 또다른 풍경이 아니었나 하는 거죠.')
해 설...제15대 대선의 선거구호 중에서 재미있는 것으로는 단연 '이인제 찍으면 김대중 된다'와 '이인제 찍으면 이인제 된다'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이인제 찍으면 김대중이 당선된다는 구호는, 김대중을 절대로 거부하는 계층에게 이회창이 호소한 것으로서 이인제의 지지표를 흡수하기 위한 작전이었고, 이인제 찍으면 이인제 된다는 구호는 자기 표를 지키려는 이인제의 안간힘이라고 할 수 있는데, 두 후보의 이러한 전략은 전체 유권자의 28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는 영남권에서 주로 구사되고 있었다. 이회창과 이인제의 싸움이야말로 김대중에게는 호재였다. 자신의 호남권과 충청권은 결속해 있는데 이회창과 이인제는 서로 영남권을 독점하기 위해 다투고 있었던 것이다. 어차피 영남권에서는 김대중이 얻을 표가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러나 전체 유권자의 28퍼센트나 되는 영남권의 표가 이회창이나 이인제 둘 중 어느 한
쪽으로 몰리는 것만은 절대적으로 경계해야만 했다. 그런데 김대중의 입장에서 다소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영남권도 반분되어 PK, 즉 부산 경남지역은 이인제에게, TK, 즉 대구 경북지역은 이회창에게로 기울고 있는 경향이 있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반분현상을 확실하게 굳혀놓아야 할 필요가 김대중에게는 있는 것이었다. 이인제 지지성향이 높고 김영삼을 전폭적으로 후원하는 PK지역에서 '이회창이 당선되면 김영삼을 감옥으로 보낼 것'이라는 소문이 출처도 알 수 없는 가운데서 떠돌고, 이회창 지지성향이 높고 김영삼에게는 배신감을 느끼는 TK지역에서 '이인제가 당선되는 것은 곧 김영삼이 집권을 연장하는 것'이라는 소문이 역시 출처도 알 수 없는 가운데서 떠돌게 되므로써 영남권이 확실하게 분열하기 시작한
것은 선거전이 한창 뜨거울 때였다. 호남권과 충청권이 결속해 있고, 수도권과 여타 지역 유권자들이 영남지역의 장기패권에 식상해 있는 상황에서 이회창과 이인제가 영남권을 분열시켰다는 것은 김대중에게 대단히 유리한 것이었다. 그런데 김대중이 가지고 있는 또하나 취약지구에 보수계층이 있었다.
이영작...총재님, 재야세력을 버리셔야 합니다.
김대중...재야세력을 버리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이영작...재야세력은 총재님께 계륵(鷄肋)과 같은 존재입니다. 먹자니 목에 걸리고 버리자니 아까운 계륵 말입니다. 그러나 선거에서 이기자면 과감히 버리셔야 합니다. 그래야 보수층이 총재님께로 움직여주게 됩니다.
김대중...재야사람들은 민주투쟁의 오랜 동지들인데, 표 얻는 데 방해된다고 버릴 수야 없지.
이영작...버리지 못하시면 13대 14대 대선의 패배를 또한번 경험하게 되실 것입니다. 전체 유권자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보수계층을 사로잡지 못하면 승산이 없습니다. 한총련을 용납하시면 안됩니다. 용공좌익에게는 강경노선을 구사하시고, 북한에 대해서도 강경노선을 유지하셔야 합니다, 총재님.
해 설...역대 대선에서 뚜렷하게 큰 작용을 한 유언비어 중에, '김대중이 당선되면 우리들 모가지가 달아난다'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특히 군부와 안기부 등의 정보기관 주변에서 일어나 공무원 사회로 퍼져가는 유언비어였는데,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면 군부와 안기부 등 정보기관은 박살이 나고 공무원도 싹 물갈이가 된다는 것이었으니, 그들이 모두 김대중 낙선작전을 적극수행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또한 이 부류는 곧잘, 김대중이 표방하는 '행동하는 양심'이란 말을 '행동하는 욕심'으로 변조 해석하곤 했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이 제15대 대선에서는 많이 희석되고 있었다. 여전히 군부 강압정권이라면 모를 일이로되, 제6공화정의 민주화 과도기와 문민정부의 민주화 진행기를 경험하면서 김대중에 대한 무시무시한 소문에서도 해방되고 있었던 것이다. 역대 대선에서 김대중이 우려해온 또하나의 대상은 미국 정부였다. 공산권과 대치하는 전략지구인 한반도의 남쪽 정권을 미국이 안심할 수 없는 인물이 통치하게 된다면 큰일이라는 인식 때문에 미국 정부는 군부독재까지도 묵인한 경향이 있는데, '과격한 용공분자'라는 마타도어에 오랜 세월 얽매어 있던 김대중의 당선을 과연 용납하겠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1994년 5월에 미국의 내셔널 프레스클럽에서 김대중이 연설한 '북한문제와 한반도 통일방안'에 감동한 기억을 되살리고 있었다. 제15대 대선에서는 미국 정부도, 김대중이 당선돼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문제가 있었다. 대통령 직을 수행하기에는 김대중의 나이와 건강이 미심쩍지 않으냐는 주장에 대한 대책이었는데, 설상가상으로 투표 전날 김대중의 동생이 지병으로 사망한 것이었다. 형님도 아닌 동생의 사망이라니. 그것은 대통령으로 다가가는 김대중 행보에 드리운 마지막 먹구름이었다. 그러나 역시 인동초였고 기사회생의 대명사였다. 1997년 12월 19일 새벽, 내외신은 일제히 흥분한 목소리로 '김대중의 제15대 한국 대통령 당선'을 보도했다.
녹음자료...김대중의 대통령 당선 첫 뉴스.
해 설...1998년 2월 25일 김대중은 마침내 대통령에 취임하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래 초유의, 여야간 정권교체에 의한 정권이 탄생하는데, 이름하여 국민의 정부였다.
녹음자료...취임식전의 경축음악(취타연주). 녹음자료...김대중의 대통령 취임사.
음 악...브리지.
해 설...지난 2월, 취임 2주년을 맞이하여 외신과 기자회견을 할 때 김대중 대통령은 이런 말을 한다.
김대중...한국인이 위대하다, 그렇지 않다, 에 대해서는 외신에다 대고 제가 말씀드릴 수가 없는 문젭니다. 하지만 한국인에게 뛰어난 면이 있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것입니다. 동아시아 지도를 살펴보면 모든 것이 중국화되어 있습니다만, 중국대륙의 동쪽에 작은 점처럼 위치해 있는 한국이라는 나라만은 중국화되어 있지 않습니다. 매우 특별한 경우죠. 그것을 한마디로 말씀드리자면, 한국인에게 '문화창조의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한국인은 2천여 년에 걸쳐 중국으로부터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학문 등 거의 모든 것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중국인'이 되지 않고 7천여만 명의 민족이 한반도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우리 국민의 특성에다가, 학문을 경애하는 교육열과 문화 창조력이 우리 한국 국민들에게 있어서 커다란 힘이 됩니다. 외환위기를 극복할 때도 한국인이 가지고 있는 지적능력, 문화 창조력은 벤처기업 등의 다양한 형태에서 발휘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무엇보다도 한국인의 애국심이 커다란 역할을 수행했다고 생각합니다. 외환위기가 일어났을 때 어린아이의 돌반지로 받았던 금반지까지 가지고 나와 '금 모으기 운동'에 참여하여 22억 달러의 외화를 확보했습니다. 그래 가지고 겨우 38억 달러에 지나지 않던 외화가 현재에는 7백억 달러를 넘어섰습니다. 그리고 경제는 전반적으로 위기 이전의 상태로 회복되고 있습니다. 내가 본 바로는 이렇게 극복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원인은 역시 멋있는 국민, 그리고 책임있는 정부, 이 두 가지가 힘을 모아서, 그래 가지고, 함께 흔들리지 않고 일관되게 개혁을 진행시켰기 때문에 이런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합니다.
해 설...그야말로 국가의 장래가 누란(累卵)의 상황에 있던 외환위기를 극복해낸 것은 '경제 대통령'이 되겠다던 약속을 제대로 지킨 것이 된다. 그러나 최근의 한국경제는 또다시 위기의 조짐이 노정되고 있는데, 그에 대해서, 지난 정권의 불찰을 수습하는 과정에서는 국민의 절대적인 호응을 뒷받침으로 상당한 성과를 거둘 수 있었지만, 현 정부 자신이 책임져야 할 부분에서는 별 수 없이 헤매고 있다는 비난을 면치 못하고 있고, 이렇게 될 수 밖에 없었던 사정에는 북한에 대한 무분별한 지원도 하나의 원인으로 작용을 했다는 말까지 듣게 된다. 그 어느 때보다도 우리 생활 깊숙히 들어온 북한. 국민의 정부의 대북정책 기본노선은 햇볕정책이다. 햇볕정책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알아보자.
인하대 사회교육과 홍득표 교수.
인서트 4...홍득표 교수. (취재 47'30". '햇볕정책은 김대중 정부의 대북정책의 기본노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 햇볕정책은 궁극적으로 교류와 협력을 통하여 북한을 개혁 개방의 길로 유도하고 평화를 지킴과 동시에 평화를 만들어 가는 정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에서 끊고, 일곱 줄 건너뛰어서,
'한반도에 긴장이 완화되고 평화 정착에 대한 성급한 기대를 가질 수 있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김 대통령의 햇볕정책의 가시적인 성과가 나타나는 것이라고 ~ 초당적인 지지와 협력을 바탕으로 추진되어야 할 것입니다.')
해 설...국민의 정부에게는 드러내고 있는 목표와, 굳이 드러내서 세간의 입방아에 올리고 싶지 않은 희망, 그 두 개의 큰 목표와 희망이 있는 듯한데, 목표는, 집권기간 내에 평화통일의 기틀을 굳건하게 다져놓는 것이고, 희망은, 김대중 대통령이 노벨평화상 수상자가 되는 것인 듯 하다. 사실 그것은 우리 국민 모두의 희망이다. 김대중 대통령이 걸어온 민주화 역정이 세계인의 인정을 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가 국제사회에 제시한 한반도 평화통일 방안이 그 방면 전문가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터인지라, 실제적으로 남북통일의 물꼬만 터놓는다면 못 받을 상도 아니고, 받게 되면 민족의 자랑이 되는 것이다. 우리도 이제는 자랑스러운 대통령을 가져야 할 때가 됐다. 우리의 역대 대통령들은 한결같이 역사에 길이 남는 대통령이 되기를 열망했다. 그러나 우리가 목격한 것은 역사에 남으려다가 역사에 오점을 남긴 대통령들이었다. 그래서 국민의 정부와 김대중 대통령에게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역사에 남고싶은 욕심을 버리면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라는 점이다. 인동초의 삶에 대한 경이감으로, 불굴의 정신력에 대한 외경감으로, 끝없는 고난을 이겨낸 인간승리의 표본으로, 남북통일만큼이나 어려운 여야간 정권교체를 이룩한 대통령으로 기억될 것만은 확실한 것이다. 그런데 민심은 언제나 이동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국민의 정부 전반기의 정책을 평가해보자.
인하대 사회교육과 홍득표 교수.
인서트 5...홍득표 교수. (취재 57'50". '김대중 정부의 정책을 평가는 것은 ~ 대승적인 차원의 정치를 하면 정권 재창출의 기회는 저절로 오지 않나 싶습니다.')
해 설...국민의 정부 출범의 의의를, 지나간 2~30년 정치적 경험의 측면에서 풀어보면, 지역갈등의 원천적 무효를 선언할 수 있는 최적의 기회를 맞이했다는 것과, 한국 현대정치사에 점철된 정치파동의 일대 파노라마가 이제사 완결되고 조용해지겠다는 것, 그리고 활거하던 정치적 카리스마들의 시대가 종식되겠다는 것 등을 우선 떠올릴 수가 있는데, 소외된 자와 소외된 지역의 자존심이던 사람이 대통령이 된
것이고, 온갖 정치파동 속에서 대표적으로 수난 당하고서도 화해와 관용을 선언했으며, 1970년대부터 정치와 시대를 주름잡아온 '3김'의 사실상 마지막 집권자라는 점 때문이다. 참으로 파란만장한 정치적 곡절을 겪고 출범한 국민의 정부. 그래서 이 정부는, 이제는 더 이상 파란이 없는, 순탄한 정치가 펼쳐질 수 있는, 정치안정의 기틀을 마련하는 정부가 돼야 할 것이다. 파란 없는 정치의 시대가 통일보다도 더 빨리 와야 하는 이유는, 진정한 평화통일은 우리 자체의 안정 위에서만 안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음 악...<국민의 정부 출범> 편을 마치면서. 해 설...다음 주 이 시간에는 <더러는 잊고, 더러는 지우고, 더러는 맺힌 일들--20세기 한국의 주요 사건> 편을 보내드리겠습니다.
음 악...엔딩.
<등장인물> 해 설. 낭 독.
이희호. 김대중. 이영작...남. 50대. 재미 통계학자.
<예고
멘트>
'한국정치의 40대 기수'로 등장한 1970년 이래 27년동안 '대통령 준비'를 해온 정통야당의 대통령 상품, 김대중. 1997년의 제15대 대선에서 '김대중'이라는 상품의 가치는 '오래 준비하고 있었다'는 데 있었습니다.
오죽하면 '준비된 대통령'이라고 했을까요? 너무너무 당연한 그 말이 어째서 1997년 그 겨울에 절실하게 먹혀들었을까요? '준비'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알기 위하여, '준비'는 또한 얼마나 상대적이고 추상적인 언어인가를 알기 위하여 '국민의 정부' 출범의 내력을 조명합니다. 오늘 낮 11시 5분, 다큐멘터리 20세기 한국사, <준비 오래 했습니다--국민의 정부 출범> 편, 많은 청취 바랍니다.
10월 8일 다큐멘터리 20세기 한국사
<더러는 잊고, 더러는 지우고, 더러는 맺힌 일들
--20세기 한국의 주요 사건>
극본 김광수 연출 이영노
한민족 5천년사의 우여곡절이 열이라면 20세기 한국의 사연은 그중 일고여덟은 되지 않을까. 영광과 오욕의 역사라고들 하지만 한민족 5천년사에서 20세기만큼 영광보다는 오욕으로 뒤덮인 세기가 또 있을까.
나라 망해서 반세기, 분단돼서 반세기. 도대체 온전한 날이 없었던 20세기의 한국이었다. 그리고, 망국과 분단과 전쟁의 사이사이에 크고작은 사건들은 또 얼마나 있었던가. 더러는 잊고, 더러는 지우고, 더러는 아직도 기억 속에 현실 속에 맺혀 있는, 20세기 한국의
주요사건들을 정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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