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왕 여호야긴은 18세에 왕위에 올랐으나, 100일 만에 포로가 되어 바빌론으로 끌려갔다. 「열왕기하」 25장27절 이하와 「예레미야」 52장31절~34절에 보면, 여호야긴은 포로생활 37년 후, 즉 느부갓네살 왕이 죽고 그의 아들 에윌므로닥(Evil-Merodach) 즉위 원년(BC562)에 감옥에서 풀려나 왕의 지위를 회복하고, 식탁에서 바빌론왕과 식사를 할 수 있는 특권이 부여되었다. 그러나 에윌므로닥 왕이 BC560년에 그의 부하이자 매부인 네르갈사레셀(렘39:3,13)에 의해 암살당할때, 여호야긴도 죽임을 당했다. 하지만 「마태복음」 1장12절에 보면,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에 여고냐(여고야긴)는 스알디엘을 낳고 스알디엘을 스룹바벨을 낳았다"는 예수님의 족보가 있다. 스룹바벨은 유대총독으로서 다리우스 왕 제2년(BC520)에 바빌론 포로의 후손들을 이끌고 유대땅으로 귀환했던 인물이다.
헬라의 역사가 헤로도투스(Herodotus)에 의하면, 바빌론 제국의 마지막 왕 벨사살(Belshazzar)이 BC539년10월10일 밤에 연회를 베풀때, 바사왕 고레스가 메마른 강을 건너서 성으로 침투하여 벨사살을 살해했다고 전한다. 성경 「다니엘」 5장에는, 다니엘이 그날 밤 연회장 벽에 나타난 손가락이 벽에 쓴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란 글씨의 뜻을 풀이하면서 벨사살의 죽음을 예언했고, 요세푸스는 『유대고대사』에서, 벨사살은 바빌론이 점령당할 때까지 17년간 통치하였다고 말했다.
그런데 성경은 「다니엘」 5장에서 갈대아왕 벨사살이 죽임을 당하였고, 메대 사람 다리오(다리우스)가 나라를 얻었는데, 그 때에 다리오는 육십세였다고 한다. 「다니엘」 9장1절~2절에는 "메대 족속 아하수에로의 아들 다리오가 갈대아 나라 왕으로 세움을 받던 첫 해, 곧 그의 통치 원년에 나 다니엘이 책을 통해 여호와께서 말씀으로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알려 주신 그 연수를 깨달았나니, 곧 예루살렘의 황폐함이 칠십년 만에 그치리라 하신 것이니라." 「다니엘」 6장에는 다니엘이 다리오의 총리로 소개되고 있다. 즉 메대왕 다리오가 갈대아를 얻은 후에 갈대아 왕국의 신하였던 다니엘을 메대에 있는 자기 궁전으로 데리고 가서 총리로 삼았다는 것이고, 6장8절에는 다니엘을 시기하던 다리오 왕의 신하들이 다니엘을 잡아넣기 위해 왕의 금령을 만들면서 다리오 왕에게 "메대와 바사의 고치지 아니하는 규례를 따라 금령을 다시 고치지 못하게 하옵소서"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요세푸스는 『유대고대사』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메대의 다리오는 그의 친척 고레스와 같이 바빌론을 멸망시키려고 진격하였다. 다리오는 아스티아게스(Astyages)의 아들이었고, 헬라인들 사이에서는 아르타크세르크세스(Artaxerxes)라고 불리었다. 다니엘은 메대의 다리오 왕으로부터 전적인 신뢰를 받았으며, 메대에 있는 엑바타나(Ecbatana)에 아름답고 훌륭한 요새를 세웠는데, 이 요새 속에 메대왕, 바사왕, 심지어는 파르티아(Parthia)왕까지 장사를 지내 묻히었다. 이 요새를 돌보던 사람은 유대 제사장인데, 이 관습이 요세푸스의 생존시기에도 이어지고 있다." 성경 「에스라」 6장1절 이하를 보면,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1세는 엑바타나 요새(악메다 궁성)에서 고레스의 "유대인 귀환령" 원본을 찾았다.
메대(Mede)는 성경에서 나오는 이름이고, 세속사 즉 역사서에는 메디아(Media)로 되어 있다. 메디아(Media)는 이란 북서부에 자리했던 고대국가이다. BC612년에 메디아와 갈대아의 연합군은 앗시리아의 수도 니느웨성을 함락시킨 역사적 사실이 있다. 그런데 BC539년 이번에는 메데와 바사가 연합하여 바빌론을 멸망시켰는데, 메데의 다리오가 먼저 정권을 잡았다는 식으로 성경에는 나온다. 다리오의 영어식 이름은 다리우스(Darius)이다. 다리오 왕의 신하들의 꾀임에 빠져 사자굴 속에 들어간 다니엘은 아무런 해를 입지 않고 나오고, 다니엘을 모함했던 다리오 왕의 신하들은 사자굴 속에 던져져 사자밥이 되었다.
역사서의 설명은 이렇다. 페르시아 왕 고레스(Cyrus: BC586~528)의 모친은 메디아왕국 아스티게스(Astyges) 왕의 딸 만다네이고, 그녀는 변방의 작은 왕국이었던 얀산의 왕에게 시집을 갔다. 만다네와 얀샨의 왕 캄비세스 1세 사이에서 키루스(고레스)가 태어났고, 아스티게스 왕이 신탁의 예언을 두려워하여 자기 외손주인 키루스를 죽이려 했으나, 키루스가 목동과 함께 달아나 실패하였다. 키루스는 BC557년 얀산 왕이 되었으며, BC548년 아스티게스를 쳐서 메디아를 멸망시켰고, 그 도읍인 에크바타나(엑타바나)로 수도를 옮겼다. BC544년 리디아의 수도 사르디스를 함락시키면서 소아시아를 지배하였다. 그는 계속해서 정복전쟁을 벌였고, 바빌로니아로 전진하여 BC536년 바빌론의 최후의 왕 나보니도스를 무찔러 갈대아 나라를 멸망시켰다. 그 해를 고레스 왕 원년으로 삼고, 바빌론에 잡혀 있던 유대인 포로들을 해방하였다. 이렇게 해서 오리엔트는 이집트를 제외하고 전부 그의 지배하에 들어갔으나, 고레스 왕은 끊임없는 정복전쟁을 벌이다가 스키타이 지방에서 죽었다. 따라서 메대와 바사가 인척관계에 있었다는 것은 증명되었으나, 요세푸스의 말대로 메대와 바사가 연합하여 바빌론을 멸망시켰는지, 그래서 성경대로 메대의 다리오 왕이 다니엘을 총리로 데리고 갔는지는 풀어야 할 숙제로 남아 있다.
키루스 왕의 아들 캄비세스(BC527~522)가 왕위를 이어받았다. 그는 이집트를 정복하고 돌아오는 길에 시리아의 다메섹에서 병사했다. 캄비세스의 동생 바르디아가 왕위에 올라 7개월을 통치했는데, 진짜 바르디아는 오래전에 죽었고, 지금 왕위에 있는 바르디아는 가짜라는 소문이 돌았다. 대귀족 오타네스는 자신의 딸을 바르디아에게 주어, 그가 왕실과는 관계없는 메디아계의 마고스(사제)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오타네스는 여섯 명의 동지들과 함께 왕위를 메디아계에서 페르시아계로 다시 찾아오자는 계획을 세웠다. ‘가짜 바르디아’ 를 살해한 7명의 귀족들은 페르시아 제국을 어떤 정치체제로 이끌어갈 것인지 토론했다고 헤로도토스는 그의 책 『역사』에 적고 있다. 오타네스는 전제군주제가 이런 불행한 사태를 가져왔다며, 민주주의 체제로 전환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다리우스는 민주주의는 어리석은 민중들이 주도권을 갖는 중우정치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며, 전제군주제를 유지할 것을 주장했다. 여기에 소수 귀족들의 과두정치를 주장하는 메가비조스의 의견까지 합쳐 한동안 논쟁이 벌어지다가, 자기 의견을 내지 않은 고브리아스, 인타프레네스, 아스파티네스, 히다르네스가 모두 다리우스를 지지하면서 결론은 군주정으로 났다. 그리고 다리우스가 페르시아의 왕(BC521~486)이 되었다. 다리우스 1세는 사업가처럼 돈과 권력으로 나라를 다스렸다. 그의 치세 중 제국은 최대로 넓어져서, 인도의 상당 부분과 소아시아 지역까지 수중에 들어갔다. 그 다음은 유럽으로 건너가 스키타이를 남러시아로 밀어내고, 유럽의 트라키아를 정복하고 마케도니아의 항복을 받았다. 다리우스 1세는 건설사업도 활발히 벌였다. 이집트에서는 나일강과 홍해를 잇는 운하를 파고, 페르시아 제국의 수도인 파사르가다 남쪽에 웅장하고 화려한 새 수도 파르사(페르세폴리스)를 세웠다. 그리고 엘람 지방의 수사를 제2의 수도로 삼고, 두 왕도를 연결하는 '왕의 길'을 닦았다. '왕의 길' 은 수사와 소아시아의 사르디스 사이에도 닦였고, 페르시아 제국 전체가 육로와 해로로 긴밀하게 연결되었다.
하지만 소아시아에는 이전부터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세운 식민지가 있었다. 따라서 다리우스 1세는 그리스의 식민지를 빼앗은 것이다. BC499년 소아시아의 밀레토스를 중심으로 반란이 일어났다. 이 반란에 그리스의 아테네와 에레트리아가 가담했기 때문에 다리우스 1세는 '서쪽의 야만인들'을 그냥 놔둘수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BC492년 다리우스 1세는, 자신의 사위인 마르도니오스의 제1차 원정이 실패하자, BC490년 2만5천명의 병력과 6백척의 선박을 동원하여 제2차 원정을 하였는데, 마라톤 전투에서 패배하였다. 다리우스 1세는 세계 최대 영토의 제국을 남기고, BC486년10월에 파르사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리스 원정은 실패했지만, 다리우스 1세의 위대함은 전쟁에서 거둔 업적보다 제도의 정비와 효과적인 정책시행으로 사상 최대의 영토를 하나의 통일 제국으로 안정시킨데 있다. 그것은 다리우스 1세가 ‘견제와 균형’이라는 권력의 법칙과 ‘통상과 시장’이라는 경제의 법칙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직할령을 제외한 전국을 사트라피(Satrapeia:속주)라는 20개의 행정구역으로 나누고, 구역마다 사트라프(Satrap)라는 총독을 파견해 다스렸다. 하지만 사트라프(Satrap)는 행정과 사법을 맡을 뿐 징세와 병력 동원은 왕이 별도로 파견한 다른 관리들이 맡았다. 그리하여 지방 세력이 하나로 뭉쳐 중앙에 대항할 가능성을 방지했다. 또 전국에 ‘왕의 눈’, ‘왕의 귀’라 불리는 정보원들을 두어서 혹시라도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면 곧바로 알 수 있도록 했다. ‘왕의 길’과 '역참 제도'는 다리우스 1세가 왕궁에 앉아서도 제국에서 벌어지는 일을 빨리 알 수 있게 해주었다. 헤로도토스는 민주정이냐, 군주정이냐를 놓고 오타네스와 벌인 논쟁에서 다리우스가 승리했을 때, 그는 자신이 건설할 제국의 한계를 결정한 셈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리스의 민주정도 중우정치로 변질되면서 마케도니아 왕 필립에게 무릎을 꿇었다. 필립 왕의 아들 알렉산더 대왕은 페르시아 제국을 무너뜨리고, 동·서혼합을 지향했다. 그 결과 그리스문화가 확산되면서 헬레니즘문화가 형성되었다. 헬레니즘 문화에 물들은 로마제국과, 그 문화에 노출된 원시적인 게르만 민족을 기독교가 구원하였으나, 신의 대리자를 자처한 가톨릭교회는 세속의 권력을 잡자, 세속의 왕과 귀족들도 놀라자빠질 정도로 타락했다.
다리우스 1세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Xerxes:BC486~466) 일명 아하수에로 왕이 즉위하였다. 성경에는 에스더의 남편으로 나오는 인물이다. 전왕 때부터 끌어오던 이집트와 바빌론의 반란을 진정시킨 후, BC480년 제3차로 그리스를 원정했지만 살라미스 해전에서 패하여 급거 귀국했다. 이듬해의 그리스와의 전투에서도 패하였다. 만년에는 왕궁에서 호화생활을 누리다가 궁정음모에 휘말려 신하에게 암살당했다.
크세르크세스의 아들 아르타크세르크세스(BC466~424)가 왕위에 올랐다. 성경에는 아닥사스다 왕으로 나오며, 성경에 나오는 느헤미야는 그의 술맡은 관원이었다. 그의 별명은 '롱기마누스'인데 오른팔이 왼팔보다 길었기 때문이다. 그는 부왕을 암살한 아르타바누스에 의하여 왕위에 올랐으나, 얼마 후 그를 죽이고, 이집트와 박트리아 등의 난을 평정하였다. 그러나 그는 BC448년 키프로스섬 앞바다에서 키몬이 거느리는 아테네 해군에게 패하여, 유럽의 트라키아 등지에서 세력을 상실하였고, 칼리아스화약(Peace of Kallias)을 맺어 아테네와의 화평을 이루었다. 그때 헤로도토스와 데모크리토스가 당시의 페르시아 제국을 여행하여 그 지식을 그리스인에게 전하고, 또한 그리스의 미술양식이 페르시아에 전해지기도 하여 동·서문화교류가 이루어졌다. 아닥사스닥 왕은 고대 페르시아제국 융성기의 마지막을 장식한 왕이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