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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울분을 안고 시민군이
증 언 자 : 박내풍(남)
생년월일 : 1957. 6. 18 (당시 나이 23세)
직 업 : 구두닦이 (현재 빵공장원)
조사일시 : 1988.10
* {광주여 말하라}, 실천문학사, 실림.
개 요
박내풍씨는 화순에서 광주로 공수부대가 투입되어 시민을 때리고 무작위로 잡아간다는 말을 듣고 광주로 와서 시민군에 참가하게 된다. 그는 22일 화순 역전 파출소로 가 무기를 탈취하고, 23일부터는 조를 짜서 시신을 관에 넣는 일을 했다. 27일 새벽 도청에서 계엄군에게 잡혀 상무대, 화순경찰서로 끌려다니며 온갖 고문과 구타를 당했다. 1심에서 구형 7년과 실형 4년을 받고, 복역하던 중 1981년 4월 특사로 석방되었다.
구두닦이와 매표소 일을 함께
내가 여섯 살 때 아버님께서 돌아가셨다. 어머님은 그해에 나를 고아원에 맡기고 개가하셨다. 형제도 없었고 그때부터 혼자 생활하기 시작했다. 무등갱생원에서는 월산국민학교를 졸업하던 해까지 살았다. 원생들은 1백50여 명쯤 되었다.
여느 고아원과 마찬가지로 사회사업가나 사회단체의 보조금으로 생활하였고, 국민학교를 다니면서부터는 학용품은 각자가 벌어서 썼다. 나는 구두닦이를 했는데, 다른 친구들은 신문팔이도 했다.
국민학교 졸업 후 구역 부근에서 약 4년 동안 구두닦이를 하다가 서울로 올라갔다. 친척도 없기 때문에 기숙사에서 생활하면서 장농에 자개 붙이는 일을 2년간 했다. 그때 고생했던 것을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겠는가! 연락이 닿는 한, 고향 사람들을 틈틈이 찾아다니면서 어머님 소식을 물었다. 그렇게 생활한 지 2년이 지난 어느 날 고향 어른으로부터 어머님이 화순에서 살고 계시다는 말씀을 듣고 곧바로 그곳 생활을 정리하고 화순으로 왔다.
여섯 살 때 헤어진 후로 13년 만에 어머니를 만났다. 과거야 어찌됐든 어머니 곁 에 있으면서 도움이 되고 싶었다. 새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동생이 다섯 명이었다. 화순에서 한국음식을 전문으로 하는 '우리식당'에서 4년간 종업원으로 일했다. 어머니와 함께 살기는 힘든 조건이기 때문에 식당에서 먹고 자고 했다.
그 후 화순 버스터미널에서 구두닦이를 하면서 매표소 일도 했다. 그곳에서 일할 때 1980년 5월을 맞았다. 버스터미널에 있었기 때문에 비교적 빨리 광주에서 데모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5월 18일 광주에서 온 사람들이 학생과 시민들이 데모를 하는데 경찰이 최루탄을 뿌리고 학생들을 다 잡아간다고 했다. 공수대에 대한 얘기도 들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분노가 치밀었다. '데모 조금 한다고 같은 민족을 실신하도록 때리고 잡아갈 수가 있어야!' 하는 생각이 들자 분해서 그냥 있을 수가 없었다. 그 길로 화순에서 농사짓고 있던 친구 용호와 함께 광주로 갔다.
같은 민족끼리 이럴 수 있나
5월 19일 오후 3시경에 광주에 도착했다. 그날은 도청에는 못 가보고 금남로 4가로 갔다. 거기에서 학생들과 함께 데모를 하다가 현대극장 앞에서 처음으로 시체를 봤다. 공수부대가 때려서 죽인 사람이라고 했다. 그것을 보고 '같은 민족끼리 이럴 수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피가 거꾸로 솟았다. 오후 4시쯤에 많은 시민과 함께 금남로 2가로 가서 군인들과 투석전을 벌였다. 나도 그때 돌을 던졌다. 그들이 최루탄을 쏘자 흩어졌다가 다시 모이고 또 흩어지는 식으로 데모를 했다. 그날 화순으로 가려다가 친구와 함께 가지 말기로 합의를 보고 여관에서 잤다.
다음날인 5월 20일 아침 9시 도청 앞으로 나갔다. 그곳에 있던 시위대들이 "각자 자동차를 한 대씩 타고 도청으로 쳐들어가자"고 했다. 그러면서 돌도 던지고 몽둥이도 던지면서 힘껏 싸웠지만 도저히 그들을 이길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싸워봤자 우리만 손해보겠다는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친구와 함께 화순으로 가려고 했다. 우리는 둘 다 주민등록증이 없었는데, 그러면 공수부대들이 시외로 빠지는 길목에서 지키고 있다가 총으로 쏴서 죽인다는 말을 듣고 무서워서 못 갔다. 도청 부근에서 세수를 하고 시위군중들과 함께 금남로에 있는 중앙극장 앞까지 갔다. 거기에서 다시 올바른 보도를 하지 않는 방송국을 불태우러 가자고 해서 스크럼을 짜고 시위대열에 화염병을 숨겨서 MBC방송국 앞에까지 왔다. 그곳에서 학생으로 보이는 청년에게 화염병 2개를 받아서 문화방송국 건물에다 던졌다. 시위대와 함께 있다가 밤 11시경에 같이 데모하고 다녔던 시민의 집에 가서 친구와 함께 잤다. 그 사람은 우리가 집에 가지 못하는 사정을 얘기했더니 백운동에 있는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간 것이다.
21일 친구와 나, 그리고 우리를 데리고 간 시민과 셋이서 백운동에서부터 걸어서 금남로 쪽으로 왔다. 금남로는 우리보다 먼저 나온 사람들로 꽉 메워져 있었다. 잠시 그곳에 있다가 배가 고파서 양동시장 쪽으로 갔다. 양동에서 시민이 싸 준 김밥을 먹고 다시 셋이서 도청으로 왔다. 금남로는 각종 차량들과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장갑차에 다리만 넣고 몸은 밖으로 내놓고 태극기를 흔들면서 도청을 향해서 가던 한 시민이 공수군이 쏜 총에 맞고 즉석에서 사망했다. 그 광경을 목격하고 두려운 나머지 더 이상 그곳에 있지 못하고 황금동 콜박스 부근으로 갔다. 거기에서 학생으로 보이는 청년 5명을 공수군이 잡아서 무릎을 끓어 앉혀놓고 몽둥이로 구타하는 것을 봤다. 나도 저렇게 되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겁도 나고 분하기도 해서 그곳에 모여 있던 시민들 옆으로 갔다. 60여 명의 시민, 학생들이 있었는데, 그 광경을 보고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저럴수가 있느냐", "우리가 이렇게 보고 있지만 말고 힘을 합쳐서 학생들을 구해 주자"는 등의 말과 동시에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 60여 명의 시민들이 몰려가서 돌을 던지자 공수들이 도망갔다. 잡혀 있던 학생들에게 가서 물어보니 "길을 가고 있는데 잡아다가 마구잡이로 때렸다"는 것이다. 학생들의 말을 듣고 보니 더욱 화가 치밀었다. '데모를 하지도 않은 사람을 때리다니'라는 생각이 들자 놈들이 한없이 미웠다.
그곳에서 불안감을 떨쳐버리기 위해 친구가 사온 맥주를 마시고 다시 도청 앞으로 갔다. 상무관 앞에 여학생의 시체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그곳으로 갔다. 요즘 자료집이나 5·18 사진 전시할 때 나오는 바로 그 시체이다. 정말 눈 뜨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참혹했다. 여자라고는 하지만 도저히 육안으로는 구별되지 않았다. 팔과 다리가 모두 잘려나가고 없었다. 그 광경을 보고 이제 더 이상 무섭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여기저기 구경이나 하고 돌이나 던져서는 총을 든 공수들을 이길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친구와 함께 도청으로 갔다.
총을 들고 도청으로
22일 도청에서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친구와 함께 무기를 탈취하기로 결심했다. 같이 있던 시민군들은 영산포 쪽으로 가자고 했으나 거부하고 평소에 지리를 잘 아는 화순으로 갔다. 중앙고속버스를 앞세우고 일부는 화순군 구암리 경찰서로 가고 나와 친구, 그리고 세 사람의 시민군은 지프차를 타고 화순 역전파출소로 갔다. 무기고는 자물쇠가 채워져 있고, 경찰은 아무도 없었다. 자물쇠를 지프차에 걸고 당겨서 문을 열었다. 다섯 명이 함께 파출소로 갔는데, 그때 모두 총 한 자루씩을 나눠가진 것으로 기억한다. 그곳에서 실탄 1박스와 총알 20개를 가지고 도청으로 돌아왔다. 우리가 총과 실탄을 가지고 오니까 당시 상황실장을 하던 박남선 씨가 총과 실탄을 반납할 것을 요구했다.
나는 단호히 거부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싫다"고 하자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공수대놈들은 총으로 무고한 시민을 쏘아죽이는데 우리가 화순까지 가서 탈취해 온 총을 달라고 하니 어이가 없었다. 친구와 함께 강당으로 가서 아줌마들과 학생들이 해준 밥을 먹고 도청에서 그날밤을 보냈다.
23일 정오쯤 되었을 때 박남선 씨가 조를 편성했다. 5인 1조로 짜졌는데, 나는 친구와 같은 조에 들어갔다. 우리 조에게는 백운동으로 가서 외곽지역을 경계하라고 지시했으나 나는 그 일보다 '시체담당'을 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하자 수락되었다. 그때부터 우리 조는 각처에서 도청으로 옮겨진 시신들을 옷을 입혀 관에 넣고 관 위에 태극기를 씌우고 과일도 놓아주는 일을 했다. 그날 오후에 시민의 제보가 들어왔다. 학동 남광주시장 부근에서 시민 한 명이 총에 맞아 죽었다는 것이다. 우리 조 5명이 가보니 옆구리에 관통상을 당해 죽어있었다. 도청으로 싣고 가서 관에 넣었다.
24일 새벽에 근무를 서고 있는데 연락이 왔다. 학동에 있는 제재소에 총에 맞아 쓰러져 있는 사람이 있으니 운반하라는 것이다. 2층 강당에서 그 연락을 받고 앰불런스 운전수와 함께 갔다. 15살 정도의 학생이었는데 아직 죽지는 않고 실신해 있었다. 주위는 피로 낭자해 있었다. 입고 있던 잠바를 벗어 총에 맞은 옆구리를 묶어 일단 지혈을 시켜 전대병원으로 갔다. 응급실로 가자 간호원이 "환자들이 침대마다 꽉차 있어 더 이상 수용할 수 없으니 다른 병원으로 가보라"면서 거절했다. "사람이 죽어가는데 어디로 옮기냐"면서 바닥이라도 좋으니 빨리 응급 처치를 하라고 강요했다. 간호원과 한참을 옥신각신하고 있을 때 의사가 보였다.
의사에게 달려가 급히 수술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의사는 환자를 보더니 수술해도 가망이 없다며 외면하려 했다. 계엄군의 총에 맞아 죽어가는 어린 학생을 대하는 의사의 태도가 지나치게 냉정해 보였고 같은 시민으로서 가질 수 있는 걱정하는 마음이 전혀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지금이야 나도 그 의사들이 고생을 많이 했고 당시 수없이 밀려드는 환자들을 치료하다 보면 당연히 있을 수 있는 행위라는 것을 이해하지만 그때는 그런 여유가 전혀 없었다. 의사가 어린 학생에게서 돌아서자 총을 들이댔다. "설령 수술하는 사이에 죽는 한이 있더라도 최선을 다하라"면서 수술을 강요했다. 우리의 요구를 의사가 들어줬다. 어린 학생은 즉시 수술실로 옮겨져서 수술을 받았다. 막상 수술을 하고 보니 비교적 간단한 수술이었고 상처도 그리 크지 않았다. 옆구리로 총알이 관통해 갈비뼈 3개가 나갔다. 수술 전에는 워낙 피를 많이 흘린 데다 실신한 상태였기 때문에 혹시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의사가 "괜찮을테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해서 우리 조 다섯 명은 거듭 부탁하고 다시 도청으로 갔다. 그뒤 26일까지 계속 도청에서 생활했다.
27일 새벽 3시경에 계엄군이 도청으로 쳐들어왔다. 2층 강당에서 30여 명과 함께 있었는데 갑자기 총소리가 들렸다. 바로 그때 같은 조원 1명이 밥을 먹고 오다 총에 맞아 쓰러졌다. 기어서 그곳으로 갔다. 총알이 허리를 관통했다. 빨간 런닝샤쓰를 벗어서 허리를 묶어서 일단 지혈을 시키고 이불을 덮어주고 총을 들고 돌아서자마자 "꽝!" 하는 굉음이 들렸다. 반사적으로 뒤돌아보니 방금 총에 맞아 쓰러져 있던 동지는 온데 간데 없고 천장을 보니 저쪽 형광등에 내가 동지의 몸에 덮어주었던 이불이 걸려 있었다. 내가 들고 있었던 총도 반쪽은 날아가 버리고 반쪽만 남아 있었다. 계엄군들이 도청으로 쳐들어오면서 수류탄을 던진 것이다. 계엄군이 도청으로 쳐들어오기 바로 직전에 친구와 나는 밥을 먹고 강당으로 왔다. 웬지 이상한 예감이 들어 친구한테 라디오를 켜보자고 했다. 친구가 시간도 오래됐으니까 그냥 있자고 해서 라디오를 틀지 않았다. 아마 계엄군이 도청으로 들어온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알았다면 나는 도청을 나갔으리란 생각이 든다. 그때 도청 정문 앞으로는 장갑차와 탱크가 들어오고, 뒤쪽에서는 총을 쏘며 공격한 것으로 기억한다. 강당에 있다가 도청 앞에 공수가 보이자 나도 강당에서 도청 앞마당을 향해 총을 쐈다. 같이 있던 동지들은 쓰러지는데, 그때 상황에서 는 그들을 보살펴줄 수 있는 여유는 전혀 없었다. 공수부대들이 쏘는 총소리는 마치 콩을 볶는 듯했다. 공수가 계단으로 올라오는 것을 보고 무서워서 화장실로 숨었다. 화장실에는 나 이외에도 2명이 더 있었다. 그때 도청 2층에 있는 강당에만 수류탄이 3개 정도 터졌다. 화장실에 있다가는 죽을 것 같아서 셋이서 손을 들고 자수했다. 우리가 나가자 공수들이 "너희들은 폭도들이니까 계단으로 내려 갈 필요도 없이 나무 타고 내려가!" 했다. 도청 2층 강당 앞에는 나무가 심어져 있었다. 우리는 반항할 생각도 못 하고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쏴버릴 것 같아 힘껏 나무 있는 곳으로 뛰어 나무를 간신히 잡고 그 기둥을 타고 내려갔다. 땅에 내리자마자 구타하더니 포승줄로 묶어 땅바닥에 엎드리게 해놓고 구두발로 밟고 다니면서 닥치는 대로 때리기 시작했다. 그런 상태로 2시간 정도 지난 후에 우리를 미니버스에 태웠다. 새벽 5시경에 양동을 거쳐 상무대 헌병대 유치장으로 보내졌다.
상무대 유치장에서 물고문
상무대에 도착하자마자 한참을 때리더니 유치장에 처넣었다. 그동안에 쌓였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와 나는 잠을 잤다. 주위가 시끄러워서 일어났는데 옆방에 있던 동지가 자살하려고 변소로 가서 시멘트벽 모서리에 머리를 찍어 이마가 갈라졌다고 했다. 변소에 피가 낭자해 있는 것을 봤다. 그 동지는 통합병원으로 후송되었을 것이다. 나는 아침부터 조사를 받기 시작했다. 포승줄로 묶인 채 맨발로 연병장으로 끌려갔다. 묻는 말에 대답하지 않는다고 몽둥이로 맞고 기합을 받고 다시 유치장으로 갔다. 다시 5명씩 불려가서 조사를 받았다. 우리 조에는 나하고 화순에서부터 같이 와서 활동했던 김용호와, 뒤늦게 화순에서 광주로 와서 잡힌 친구 강남원 외에 2명이 더 있었다. "어떻게 해서 데모를 하게 되었는가"에 대해 물었다. "화순에서 광주에 공수부대가 투입되어 시민을 때리고 무작위로 잡아간다는 말을 듣고 같은 한민족으로서 분노를 참을 수 없어 광주로 와서 시민군에 참가하게 됐다"라고 했다. 그러자 "넌 빨갱이다. 어차피 죽게 되니까 사실대로 말해라" 하면서 발로 찼다. 그것이 사실이라고 버티자 유치장으로 보냈다.
28일 화순경찰서 수사과에서 세 사람이 나왔다. 손반장, 한형사 그리고 1명이었다. 그날부터는 화순경찰서에서 파견 나온 형사들에게 조사를 받았다. 그들은 우리 세 사람을 불러서 아리랑포승(한쪽 팔은 어깨 뒤로 하고 다른 팔은 등뒤로 해서 묶음)을 해놓고 심문을 시작했다. "왜 데모에 참가했으며 누가 시켰느냐"고 다그쳤다. 나는 계속 같은 말만 반복했다. "참을 수 없는 울분 때문에 자진해서 싸웠다"고 하자 '아리랑포승' 하고 있는 손에다 방망이를 넣고 돌리면서 계속 심문했다. 그러기를 수차례 반복하여 까무라치기 직전에 유치장으로 돌려보냈다.
다음날 29일 다시 조그만 사무실로 불려갔다. 형사 세 명이 있었다. 손반장은 화순에서부터 안면이 있던 사람이다. 손반장이 담배를 권해서 피웠다. 한 형사가 밖으로 나가더니 5되짜리 주전자에 물을 담아왔다. 담배를 다 피우고 나자 의자에 앉히더니 손과 발을 의자에 묶었다. 한 사람이 머리채를 휘어잡고 고개를 뒤로 잡아 젖혔다. 한 형사가 강제로 입을 벌리게 하고 물을 부었다. 물이 입과 코로 들어가 숨도 못 쉬고 죽을 지경에 이르면 잠시 중단하고 또다시 전날과 똑같은 질문을 계속했다. 내 대답은 맨처음 조사를 받았을 때나 그때나 일관됐다. 상무대에 도착해서 처음 조사받을 때 했던 대답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같은 방법으로 또 물을 먹였다. 그것이 말로만 듣던 물고문이었다. 주전자의 물을 거의 다 먹어가도록 별다른 말이 나오지 않자 그들은 다시 협박을 했다.
"화순으로 가서 진짜 맛을 볼래, 아니면 여기서 끝낼래? 너는 빨갱이니까 어차피 죽는다. 개죽음당하지 말고 누가 시켰는지 그것만 말하면 살려준다."
"어디서 조사하든지 알아서 하시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그들은 물고문을 더 이상 하지 않고 점심을 먹었느냐고 물었다. 오전에 불려와서 그때가 점심식사 시간이 훨씬 지났으니까 그들도 밥을 먹지 않은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 물어봤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더니 형사 2명이 나가더니 한참 후 빵 하나와 물을 가져왔다. 그때서야 팔과 다리를 풀어주었다. 빵을 먹고 다시 유치장으로 돌아갔다. 그 후로도 유치장에서의 생활은 하루 서너 차례의 조사와 구타, 기합의 연속이었다.
화순경찰서로 옮겨
6월 30일 웬일인지 오전 내내 부르지 않으니까 오히려 더 불안하였다. 조사받으러 간 동지들이 고통에 못 이겨 소리 지르는 비명을 듣는 것은 직접 맞을 때보다 더 고통스러운 고문이었다. 점심을 먹고 조금 지난 후 강남원, 김용호 그리고 나를 불렀다. 우리가 나가자, 그들은 화순에 사는 나와 내 친구들을 차에 태워 화순경찰서로 갔다. 수사과로 우리를 끌고 가더니 무릎을 꿇어앉혀놓고 무작위로 구타하기 시작했다. 구타하면서도 계속 같은 질문을 되풀이했고 나도 같은 답변을 되풀이했다. 그날부터 화순경찰서 유치장에서 생활하게 됐다. 유치장에는 이미 1백여 명의 동지들이 잡혀와 있었다. 그때 당시 화순에 살고 있던 사람들로서 5·18과 관계돼 붙잡혀온 분들이다. 그 가운데서는 평소 알고 지내던 선배들도 눈에 띄었다. 거기에서는 하루 종일 무릎을 꿇은 상태로 지내야 했고 화장실도 하루에 한 번 밖에 갈 수 없었다. 식사도 끼니마다 한 숟가락도 되지 않는 보리밥에 김치 한 가지였다.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기는 어디서나 마찬가지였다. 식사시간이 끝나기가 무섭게 배가 고팠다. 너무 허기가 져 기력도 없는 데다가 날마다 서너 차례씩 끌려가서 두들겨맞고 고문당하다 보니 어디 한군데나 성한 곳이 없었다. 이렇게 생활하는 것이 힘들면 힘들수록 어머님이 보고 싶었다. 5월 27일 붙잡혀온 이후로 한번도 집에다 연락한 적이 없기 때문에 어머님이 걱정되었다.
7월 1일 강남원, 김용호, 나를 수사과로 불렀다. 우리 세사람이 있는 자리에서 그들은 강남원을 때리면서 누가 주동했는지 사실대로 말하라고 했다.
"내풍이가 주동했지?"
다그치자 강남원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아니다. 우리는 각자 자기의 뜻에 따라 데모했다."
앞에서는 계속 심문을 하고 뒤에서는 눈뜨고는 보지 못할 정도로 구타를 했다. 화가 나서 반항하려고 하자 손반장이 나를 따로 불러갔다.
"밥 먹었냐?"
첫마디가 이것이었다.
"워낙 밥을 많이 주기 때문에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 모르겠다."
비꼬아서 말하자 손반장은 국밥을 한 그룻 주문해 줬다.
"난 안 먹을 테니 내 친구나 갖다주시오."
내가 거절하니까 친구들까지 밥을 시켜줘서 먹었다. 손반장이 비교적 온화한 것 같아 엄마 면회 좀 시켜달라고 부탁했다.
"보안대에서 승락이 떨어져야 면회를 할 수 있다."
면서 안 된다고 했다. 우리 집에 가서 속옷 좀 가져다주라고 부탁해도 안 된다고만 하고 다른 말은 없었다.
그날 이후로는 다시 수사과로 부르는 일은 없었다. 아마 우리들을 아무리 다그쳐봐야 더 이상 나올 것이 없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5월 27일 새벽에 상무대 헌병대로 끌려간 뒤부터 7월 1일까지 아침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거의 날마다 끌려가서 심문과 구타를 반복해서 당하다가 7월 1일 이후부터 비교적 편한 생활을 했다.
화순경찰서에서 오동찬 동지가 방귀를 뀌었다고 거의 한 시간 동안 폭행을 당하고 우리들은 한 시간 이상이나 단체로 원산폭격을 당했다. 이렇듯 조금만 움직여도 구타를 당하고 단체기합을 받는 생활을 한 달 동안이나 계속했다.
자세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화순경찰서로 옮겨진 지 얼마 후에 우리들은 각 방으로 연락해서 3일 동안 '단식투쟁'을 하기로 합의하고 단식을 시작했다. 아마 하루 반밖에 못 하고 끝났을 것이다. 우리의 요구조건은 '면회를 실시하라', '죄 없는 우리를 석방하라' 등이었다. 노래도 부르고 구호는 주로 '전두환을 몰아내자'였다.
7월 30일 아침에 화순경찰서에 수감돼 있던 사람 전원이 상무대로 다시 이송됐다. 친구들과 나, 이렇게 세 사람은 지프차에 태워서 데려가고 나머지 사람들은 전경들이 타고 다니던 닭장차에 태워서 옮겼다. 날짜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은데 재판은 9월 8일경 토요일-요일은 정확함-에 처음으로 받았다. 내 죄명은 '내란실행', '총포탈취' 및 '계엄법위반'이었다. 1심에서는 구형 7년에 실형 4년을 선고 받았다.
4년형을 선고받고 교도소로
9월 27일경에 상무대에서 1심 재판을 받았던 전원이 교도소로 이감되었다. 교도소로 이감될 때까지도 집에다는 이렇다할 연락 한번 못 했었다. 교도소에 도착해서 죄수복으로 갈아입고 밥그릇 3개와 플래스틱 수저를 배당받고 감방으로 갔다. 나와 같은 방에는 명노근 교수님, 김상집 씨 그리고 학생들이 여러 명 있었다. 감방에 오자마자 큰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밥그릇으로 문짝과 벽을 두들기며 데모를 했다. '전두환을 처단하라, 김대중을 석방하라, 면회를 실시하라' 등의 구호를 외쳤다. 그때 이틀 동안 단식을 한 기억도 있다. 교도소에서는 같은 방 사람들끼리 단체로 행동하고 우리들의 요구조건 중의 하나였던 면회요청도 수락되니까 상무대나 화순경찰서에서 보다는 훨씬 힘이 났다. 나는 항소해서 구형 7년에 실형 4년, 대법원에서는 구형 7년에 실형 2년을 받고 복역중 1981년 4월 3일 특사로 오후 6시경에 석방됐다.
지금도 공수부대들이 광주에 투입돼 무고한 광주시민을 군화발로 짓밟고 대검으로 찌르고 기관총을 난사해서 그토록 많이 죽이고 부상당하게 했던 생각을 하면 치가 떨린다. 5월 27일 도청에서 붙잡혀서부터 상무대, 화순경찰서, 교도소에서 '공공연하게 자행돼 왔던 비인간적인 만행을 어떻게 견뎌내고 이렇게 살아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면 한편으로는 살아있음이 다행이다 싶기도 하고, 또 때로는 어이없기도 하다.
5·18을 경험한 후부터는 학생들이 데모하는 것을 보면 내 속이 다 후련하고 정부에서 정치를 올바로 못 하니까 많이 아는 학생들이 참지 못하고 일어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특히 5·18을 겪고 나서부터 정부를 믿을 수가 없다. 내가 직접 피해를 당했기 때문에 강하게 그런 감정이 남아 있다.
시민군 활동을 떳떳하게
지금도 어느 곳에서나 누구한테든지 5·18 광주민중항쟁 당시 시민군으로 참가한 부분을 떳떳하게 말한다. 타지방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광주나 전남지방 사람들은 똑똑히 봤으니까 알 것이다. '국민을 지켜야 할 군인이 무엇 때문에 죄없는 시민을 무참히 죽였을까', '그 광경을 목격하고 광주를 지키고 광주시민을 살리기 위해 그들과 맞서 총을 들고 싸운 사람들을 과연 폭도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면 광주시민을 폭도로 몰아붙인 살인마 전두환, 노태우를 찢어죽여도 억울함이 풀리지 않을 것 같다.
5·18에 대한 진상규명은 개인적인 보상이나 어정쩡한 문제해결보다는 살인마 전두환과 노태우를 처단하고 또 이들의 정중한 사과를 받아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광주민중항쟁이 역사에 올바르게 기록되어야 하고 광주시민의 정신이 후세에도 전해질 수 있도록 우리 모두 각고의 노력을 해야 한다. 그리고 물질적인 보상도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화순경찰서에서 경찰들에게 한쪽 귀를 맞아서 고막이 터졌는데 치료를 하지 못해 그쪽 귀가 지금도 전혀 들리지 않는다. 당시 교도소에서 귀 치료를 몇 번 형식적으로 받고 석방 후에 1년간을 치료받으러 다녔는데 낫지 않았다. 의사는 수술을 해야만 치료가 가능하다고 하지만 수술비가 너무 많아 꿈도 못 꾼다. 더욱이 의료보험카드도 발급을 받지 못해 수술은 엄두도 못 낸다. 귀뿐만 아니라 어깨, 허리가 결리고 아파서 무거운 것을 들면 통증이 훨씬 심해져 고생하고 있다.
이런 것을 생각할 때 또다시 5·18과 같은 사건이 일어난다면 나는 몸을 바쳐서 싸울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총을 쏘면 절대 놓치지 말고 나도 그들을 죽여버릴 것이다.
작년 6.10대회 때는 직장에서 일하다가도 광주에 와서 시민들과 함께 데모했다. 6월 19일날인가, 저녁에 일을 끝내고 광주로 나왔다. 그랜드호텔 앞에서 데모를 하다가 학생과 노동자들이 사직공원 입구에 있는 KBS 방송국을 불태워버리기로 했다. 화염병 40여 개를 숨겨들고 공원다리 부근까지 갔다가 부근에서 기다리고 있던 전경이 최루탄을 쏘며 저지하자 흩어져버렸다. 지금도 5월 민중항쟁동지회 모임이 있으면 꼭 참석한다. 길을 가다가도 학생들이 데모하고 있으면 행동을 같이한다. 이번 대통령선거와 국회의원선거 때도 열심히 선거운동을 했다. 김대중 씨가 대통령이 되기를 바라는 이유는 내가 태어난 이래로 전라도 사람이 대통령에 당선된 적이 한번도 없기 때문이었다. 같은 호남인으로서 호남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 아무래도 호남지역의 발전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그렇게 되면 경상도에 비해 월등히 소외되었던 감정적인 요인들이 많이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 한다. 그래서 대통령선거를 할 때 열심히 선거운동을 했는데 김대중 씨가 떨어지니까 무척 서운하고 의욕이 상실돼 버렸다. 국회의원선거 때 홍남순 변호사의 아들 홍기훈 동지가 당선돼서 굉장히 기쁘고, 또 정상용 동지도 당선돼서 힘이 솟구치는 듯한 감동을 받았다.
교도소에서 석방된 후 약 한 달간은 꼼짝도 않고 집에서 쉬면서 몸조리를 했다. 석방된 직 후부터 얼굴과 몸이 전체적으로 퉁퉁 부었다. 건강에 좋다는 약을 사서 먹었더니 얼마 후 부기가 가라앉았다. 건강이 조금 회복되자 화순터미널 매표소에서 차표 파는 일을 1년 정도 했다. 1982년 6월 18일 화순에 있는 미광식품에 입사했다. 빵을 만드는 공장으로 종업원은 총 60명 정도이다. 나는 빵을 만들기도 하고 포장기계를 맡아보니까 하는 일은 비교적 쉽다. 2교대를 하는데 오후반이 만들어야 할 물건이 남아 있으면 그 작업이 끝날 때까지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퇴근시간이 일정하지 않다. 대신 숙식은 직장에서 해결한다. 1982년부터 내내 평직원으로 있다가 1987년 7월에 주임으로 승진됐다.(조사.정리 양난희) [5.18연구소]
첫댓글 자료 감사합니다.
주말 마무리 잘하시고
사랑과 행복이 가득한 휴일 시간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