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밥에 콩
남의 밥에 있는 콩이 더 커 보인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한 솥에서 쪄낸 밥의 콩이 네 밥의 콩은 크고 내 밥의 콩은 왜 작아 보일까요? 이기심(利己心)의 발로인가요, 아니면 사대주의(事大主義) 심보일까요?
옛날이 호랑이 꼬리를 잡은 나무꾼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이 나무꾼이 산에 나무를 하러 갔습니다. 칡덩굴을 거두려고 붙들었는데, 그것이 그늘에서 자고 있던 호랑이 꼬리였습니다. 잠자는 호랑이를 건드린 나무꾼은 깜짝 놀라 재빠르게 나무 위로 올라갔죠. 화가 난 호랑이는 나무를 마구 흔들었습니다.
나무꾼은 놀라서 그만 손을 놓아 나무에서 추락했는데, 떨어진 곳이 하필 호랑이 등이었습니다. 이번에는 호랑이가 놀라 몸을 흔들었고, 나무꾼은 호랑이 등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습니다. 호랑이는 나무꾼을 떨어뜨리기 위하여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나무꾼은 살기 위해서 사력을 다해 호랑이 등을 더 꽉 껴안고 달렸죠.
그런데 한 농부가 무더운 여름에 밭에서 일하다가 이 광경을 보고는 불평을 합니다. “나는 평생 땀 흘려 일하면서 사는데, 어떤 놈은 팔자가 좋아서, 빈둥빈둥 놀면서 호랑이 등만 타고 다니는가?” 농부는 죽기 아니면 살기로 호랑이 등에 붙어있는 나무꾼이 부러웠습니다. 때로 남들을 보면 다 행복해 보이고, 나만 고생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실상을 알고 보면 사람 사는 것이 거의 비슷합니다. 나와 똑같은 고민을 하고 나와 똑같이 일하고 고독 속에 몸부림칩니다. 남과 비교하면 다 내 것이 작아 보이는 것이죠.
남의 밥에 콩이 종교에도 해당이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종교는 네 밥의 콩이 큰 것이 아니라 내 밥의 콩이 더 커 보인다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내 종교만이 진리이고 유일한 구원(救援)의 길이라는 착각에 빠지기 때문에 생기는 비극이죠. 에베레스트라는 진리의 정상(頂上)에 도달하는 길은 여러 방법이 있습니다. 고정하여 한 길만 있는 것이 아니죠. 혹 다른 길은 내가 오르는 길과는 비교도 안 되는 난코스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어찌 되었건 모로 가도 정상에만 올라 구원만 받으면 되는 것이 아닌지요?
종교에 입교하여 얼마 동안 다니다가 또 자리를 옮기고 하는 사람을 봅니다. 언제나 지금 서 있는 자리보다는 저쪽 편 잔디가 더 좋아 보이죠. 그 쪽으로 가서 보면 또 저쪽에 있는 종교의 교리와 진리가 더욱 푸르게 보입니다. 가보면 처음 잡았던 자리가 더 좋아 보여 결국 한 바퀴 돌고 제 자리로 돌아오는 철새족이 흔합니다. 왜 그럴까요? 남의 밥에 콩이 더 커 보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무튼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서양 문물과 함께 기독교가 본격적으로 한국에 들어 왔습니다. 상당수의 한국 사람들에게 이렇게 남의 나라에서 온 서양 문물이나 그들의 종교가 더 크고 화려하게 보였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그 후 계속 그 숫자가 늘어나 요즘은 한국 인구의 20% 이상이 기독교인이라는 선교사상(宣敎史上) 유례가 없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이상스런 현상이 벌어졌습니다. 예수교가 굵은 콩으로 보여 기독교를 받아들인 한국 사람들의 상당수가 이제는 전에 자기가 먹던 밥의 콩이 작은 콩으로만 보이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모두 썩은 콩 으로 보는 경향까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교만 진리요, 한국 전통 종교들은 모두 사교(邪敎)라고 보는 태도가 편만해 있다는 얘기이죠.
요즘 같은 다원주의 사회에서는 어느 하나가 모든 것들 위에 군림해야한다는 제국주의적 발상이 용납될 수는 없습니다. 모든 분야에서와 마찬가지로 종교에서도 타종교를 정복의 대상으로 적대시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남의 종교를 경시하는 태도는 지양되어야 합니다.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고 협력하려는 종교적 다원주의(Religious Pluralism)가 오늘 이 시대를 위한 올바른 태도로 받아져야 하지 않을까요?
일부 기독교인들, 특히 19세기 이전의 고전주의적(classist) 사고방식을 가진 기독교인들 중에는, 복음(福音)을 전하기 위해서는 남의 종교를 헐뜯고 비하해야만 되는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방법이 지각 있는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온다고 하는 사실을 입증해주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요.
이천삼백여년 전 인도의 성왕(聖王) ‘아쇼카’ 대왕도 그의 유명한 비문(碑文) 중 하나에 이런 사실을 표현해 놓은 것이 있습니다.
「기회 있을 때마다 남의 종교를 공대할지라.
누구든 이런 식으로 나가면,
그는 자기 자신의 종교도 신장시키고,
남의 종교에도 유익을 끼치는 것.
그 반대로 하면,
그는 자기 종교도 해치고 남의 종교에도 욕을 돌리는 것.
이것이 모두 자기 종교만을 찬양하려는 데서 나오는 일.
누구든 자기 종교를 과대선전하려면,
그는 오히려 자기 종교에 더욱 큰 해만을 가져다줄 뿐,
일치만이 유익한 것.
각자는 남의 종교에 대해 경청하고 거기 참여할지라.」
우리 저마다 가만히 살펴볼 일입니다. 나의 종교만을 유일한 진리라고 주장하고 남의 종교들을 비방하는 것이 믿음의 표시요 충성심의 발로라고 생각하시는지요? 또 그래야만 모두 내 종교로 들어와 내 종교가 흥왕(興旺)하리라 믿고 있지는 않으신가요? 물론 종교에도 심천(深淺)이 있습니다. 다 같은 것은 아니죠. 그렇다고 다른 종교는 다 사교(邪敎)라 그들을 모두 개종시켜야만 한다는 것은 억지요 무지이며 무리입니다.
종교의 목표가 교인숫자를 증가시키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세상을 위해 봉사하고 헌신하는 데 있는 것이죠. 그리고 무슨 방법으로든지 도탄에 빠진 인류의 구원에 힘쓰는 것이 종교의 본의(本意)가 아닌가요? 콩이 콩인 한 그것이 내 밥에 있든 남의 밥에 있든 그 가치를 다 같이 인정해 줄줄 아는 양식(良識)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 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