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을 따면서 / 김남주
감을 따면서 푸른 하늘에
초가을의 별처럼 노랗게 익은 감을 따면서
두 발의 연장인 사닥다리의 끝에 서서
두 손의 연장인 간짓대의 끝으로 감을 따면서
나는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태초에 노동이 있었다
그리고 인간이 인간의 뿌리가 있었다
네 발로 기어다니는 짐승과는 구별되는
나는 감 따는 노동을 중지하고
인간의 대지로 내려왔다 직립보행의 동물인 나는
손을 호주머니에 찌르고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감나무와 감나무 사이를 왔다갔다하면서
그렇다 인간을 인간이게 한 것은 노동이었다
수천년 수만년 수백만년의 노동이었다
숲과 강과 자연과의 싸움에서 노동 속에서
인간은 짐승과는 다른 동물이 되었다 인간이 되었다
보라 감을 쥐고 있는 이 상처투성이의 손을
손과 발의 연장인 이 간짓대와 사닥다리를
간짓대와 사닥다리를 깎고 잘랐던 저 낫과 톱을
낫을 갈았던 저기 저 숫돌까지를 보라
노동의 손자국이 나 있지 않은 것이 어디 있느냐
노동의 과실 아닌 것이 어디 있느냐
보라 내가 지금 앉아서 먼 산을 바라보고 있는 이 평상을
이 평상 위에 놓은 네 발 달린 밥상과 밥상 위의 밥을
보라 내가 짓고 있는 저 돼지막과
내가 기거하고 있는 저 초가집과
지붕 위에 우뚝 솟은 검은 굴뚝과
굴뚝에서 하얗게 피어 올라 하늘 끝으로 사라지는 연기를
보라 장독대를 그 위에 가득 찬 옹기그릇을
옹기에 가득가득 담겨져 진한 냄새를 뿜어내고 있는 간장과 된장을
어느 것 하나 노동의 결실 아닌 것이 있느냐
모두가 모든 것이 노동의 역사 아닌 것이 있느냐
뿐이랴 내가 입고 있는 이 내의도
내가 벗어 놓은 저 저고리의 단추도 노동의 과실이자 옷의 역사다
내가 만지고 있는 이 장딴지의 굳은살도
굽혔다 폈다 할 수 있는 이 팔의 뼈도
그리고 내 가슴에서 뛰고 있는 이 심장의 피도
수천년 수만년 수백만년의 노동이 창조한 물질이다
노동의 역사이고 인간의 역사다 그리고 지금
내가 쥐고 있는 이 펜도
펜 끝에서 흐르는 언어의 빛도 종이 위에서
끝없이 이어지는 말의 행렬도 하나가
하나같이 노동의 결정이고 인간 역사의 기록이다
이제 확실해졌다 노동이야말로
인간을 인간이게 한 장본인이었다 짐승과는 다르게
살과 뼈와 피를 빚어낸 마술이었다 기적이었다
노동이야말로 인간의 출발점이고 과정이고 종착역이다
한마디로 끝내자 인간의 본질은 노동이다
노동에서 멀어질수록 인간의 짐승에 가까워진다
이제 분명해졌다 적어도 나에게는
나의 가장 가까운 적은 노동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인간이다
아니다 노동에서 이미 멀어져 버린 인간은 인간이 아니다
그것은 된장 속의 구더기다 까맣게
감잎을 갉아먹는 불가사의한 벌레다
쌀 속의 좀이고 어둠 속의 쥐며느리이고 축축하고
더럽고 지저분한 곳에서 서식하는 이고
황소 뒷다리에 붙어 있는 가증스런 진드기이고
회충이고 송충이고 십이지장충이고 기생충이고 흡혈귀다
인간의 동지는 노동 그 자체다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미래사, 19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