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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호 기독교 유적지 답사②]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곳, 그리스도인의 신앙고백을 따라 | ||||||||||||||||||||||||||||||||||||||||||||||||
중국 상해에서 선배들의 신앙과 뜨거움을 느끼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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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 황포강은 우리 민족에게 특별한 곳이다. 무역항으로 이름이 높기도 하였겠지만, 나라를 잃고 독립운동을 하던 투사들이 고향이 그리울 때 걸었던 곳이다. 그리고 고국에 갈 수 없던 이들이 조선을 떠나는 배를 바라보며 그리워하던 곳이다. 이곳에서 새로운 세상을 꿈꾸던 청년을 만나려 한다. 개화파라는 이름에 상해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던 윤치호. 타향에 머무르면서도 고종의 생신에는 고국으로 가는 상해의 황포강 항구에서 조선을 향해 절을 한다. 나라를 위한 충심에 언제고 돌아가리라고 다짐하던 이 젊은 청년은 자신의 삶과 다른 무엇인가를 상해에서 발견하게 된다.
윤치호의 신앙고백을 좇아 중서서원의 기숙사에 지내면서도 그는 종종 괴로움과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주막을 찾는다. 점점 타락해가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그는 스스로 ‘주막은 일주일에 한 번만 간다’는 등의 결심을 세우지만 잘 지켜지지 않는다. 그리고 철저한 유교적 전통에 있는 자신도 지키기 힘든 이러한 금욕적인 생활을 자신보다 더 잘 지키고 있는 사람들을 발견한다. 바로 중서서원에 함께 있는 알렌 선교사와 학생들의 모습이었다. 알렌 선교사는 윤치호에게 “믿으라!”고 다그치지 않는, 기다릴 줄 아는 탕자의 아버지와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다. 초기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몇 가지 재미있는 특징을 가진다. 새로운 세상에 대한 도(道)의 개념으로 기독교를 받아들이기도 하고, 새로운 제도의 개혁 수단으로 받아들이기도 했다. 그리고 윤치호와 같이 유교적인 풍토와 학문을 뛰어넘는 초월적인 것을 만날 때 그 신앙이 형성되기도 한다. 자신이 해결하지 못한 부분에서 희망을 가지고 그 희망은 소망으로 자리를 잡게 된다. 윤치호는 새로운 소망을 위해 세례를 받기 원했다. “종교 안에서 나의 지식과 믿음이 자라나는 가운데, 나의 시간과 재능을, 그것이 다섯 가지든 혹은 한 가지든, 기울이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이라면 나와 내 동포를 위해 유용한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밤이 되면 많은 이들이 그러한 것처럼 죽음의 문 앞에서 구원을 추구하기 위한 필요를 갖지 못합니다. 나는 그 때문에 이전의 나로부터 다른 사람으로 인정받게 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나는 어느 길로 가야할지 결정할 수 없을 때에 유혹당하는 일이 적어지게 되기를 원합니다.” 윤치호는 회심을 하는 신앙고백서를 작성하고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된다. 1888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공부한 윤치호는 청일전쟁의 국내 상황 때문에 한국으로 바로 돌아가지 못한다. 대신 상해 중서서원에서 영어교사로 일을 한다. 윤치호의 계속적인 요청으로 1895년 남감리회의 리드 선교사가 한국으로 파송되고 남감리회의 한국 선교의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답사란 이런 것일까? 책으로 만나고 이야기만 듣던 곳에 내 발을 딛고 서있는 느낌. “한국교회사는 발로 하는 학문이다”라는 이덕주 교수의 뜻에 따라 감신대 한국교회사학회 내에 답답회(踏踏會)가 만들어 진지도 벌써 5년이다. 그동안 강화, 서울 종로와 정동, 충청권, 호남권, 경상도, 강원도 등의 국내 답사가 하계 방학 동안에 이루어졌다. 2003년 동북삼성지역 답사를 시작으로 해외 기독교 유적지 답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 후 일본 답사에 이어 세 번째 해외 기독교 유적지 답사다. 이번 답사는 북경과 상해를 이어 중국 기독교 역사의 과거와 현재를 되짚어 볼 요량으로 준비되었다. 답사를 준비하며 그분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주실 것인가에 대한 기대감으로 옷깃을 여미던 모습들이 기억난다.
동오대학이 위치한 소주는 예원이라는 대표적인 남방양식 정원으로 유명하다. 명나라 관료였던 반윤단이 부모를 기쁘게 하기 위하여 1559년에 착공하여 18년 만에 완공했다. 북경의 황궁 정원인 이화원을 본떠서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중국의 귀신인 강시가 정원에 들어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다리 모양을 지그재그로 만든 것이 독특해 보인다. 강시는 앞으로 직진만 하는 귀신이라 그렇게 만들었단다. 언제든지 자신의 재산을 가지고 떠날 수 있는 것을 상징하기 위해 정원의 집을 배 모양으로 만든 것도 재미있다. 한 곳에 앉아 4계절의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묘미도 있다.
“상해 임시정부는 슬픈 곳이다. 우리는 그곳에 가면 울어야 한다.” 이덕주 교수는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일제가 한반도를 침략하고 민족의 숨통을 조일 때 많은 뜻있는 열사, 의사들은 상해로 모여들었다. 만주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도 상해에서 돌아갈 조국을 생각하며 굳은 의지를 다졌다. 20살의 청년이 장년이 되어, 노인이 되어 돌아온 조국의 광복! 그리고 그 조국은 둘로 갈라져 있었다. 하나 된 조국, 이상적인 광복을 원하던 상해 임시 정부 사람들은 광복을 맞은 조국에 들어가면서도 밝은 얼굴을 가질 수 없었다. 일제에 쫓겨 이념에 쫓겨 살아온 시간들은 어디서도 보상 받지 못하고 다시 상해로 들어올 수 밖에 없는 심정. 동북 삼성지역을 답사할 때,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시던 분들이 국내로 들어와서 보니 일제의 앞잡이 노릇하던 사람들이 정권을 잡고 있어서 다시 만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고 하던 말이 기억난다. 한국에서부터 고이 가슴에 품고 온 태극기를 꺼내어 구슬픈 옛 가락에 맞추어 애국가를 불러본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마지막으로 윤봉길 의사가 거사를 진행한 홍구 공원을 찾았다. 나라의 독립에 뜻을 둔 윤봉길은 만주로 가서 뜻을 키우나 1931년 만보산 사건을 겪으며 자신의 의지를 확고히 하고 상해로 오게 된다. 1932년 상해 사변 등이 일어나며 항일투쟁은 급격한 침체에 빠진다. 일왕의 생일인 천장절에 전승축하기념식을 상해 홍구 공원에서 개최한다는 계획을 탐지한 김구는 폭탄투척 거사를 준비한다. 이 거사에 선발된 윤봉길은 4월 26일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 애국단의 일원’이 된다는 선서를 한다. 4월 29일 김홍일이 준비한 도시락 폭탄을 식장에 던졌다. 상해는 나라를 잃고 망명이라는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선배들이 독립을 위해 모이던 현장이다. 희망이 없던 사람들이 고국까지 떠나야 하는 상황에서 만난 낮선 땅. 자신의 나라를 갈 수 없는 사람들이 모여 있던 곳에서 우리의 갈 길에 대해 묻는다. 희망을 읽고 절망적인 상황에서 새로운 길을 찾았던 윤치호. 일제치하의 숨 막히는 상황에서도 독립된 조국의 모습을 그리며 희망을 잃지 않았던 김구. 과감하게 도시락 폭탄을 던지며 후손에게 자유를 물려주고 싶어 했던 윤봉길. 과거와 현재를 함께 느낄 수 있는 땅에서 선배들의 신앙과 의지의 뜨거움을 느낀다. 그 역사는 죽어 묻히는 것이 아니라 다시금 이렇게 내 안에 살아서 부활하는 것이다. 이상수 (종교교회 전도사) |
첫댓글 독자들의 뜨거운(?) 호응에 힘입어 다음달(복음과상황 4월호)에도 답답회의 중국답사기(북경 편)가 연재된다고 하네요~ 어쨌거나 한국을 뛰어넘어 세계로 향하는 답답회... 화이팅입니다!!! ^^
글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4월호에 실릴 북경편도 기대하겠습니다.
상수형 종교교회로 가셨어요?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