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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의 사기
권43. 조세가(趙世家) 조(趙)의 선조
趙氏之先, 與秦共祖. 至中衍,1) 為帝大戊御. 其後世蜚廉有子二人, 而命其一子曰悪來, 事紂, 為周所殺, 其後為秦. 悪來弟曰季勝, 其後為趙.
조씨(趙氏)의 선대(先代)는 진(秦)나라와 조상이 같다. 중연(中衍)에 이르러 은(殷)나라 대무(大戊)의 마부가 되었다. 그의 후예 비렴(蜚廉)은 두 아들을 두었는데 그중 한 아들의 이름을 오래(惡來)라고 지었다. 오래는 주왕(紂王)을 섬기다가 주(周)나라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했으니, 그 후 손이 바로 진(秦)나라의 선조가 되었다. 오래의 동생은 이름이 계승(季勝)이었는데, 그의 후손은 조(趙)나라의 선조가 되었다.
季勝生孟増. 孟増幸於周成王, 是為宅皐狼.2) 皐狼生衡父, 衡父生造父. 造父幸於周繆王. 造父取驥之乗匹,3) 與桃林4)盗驪、驊騮、綠耳, 献之繆王. 繆王使造父御, 西巡狩, 見西王母,5) 樂之忘帰. 而徐偃王反,6) 繆王日馳千里馬, 攻徐偃王,7) 大破之. 乃賜造父以趙城,8) 由此為趙氏.
계승은 맹증(孟增)을 낳았다. 맹증은 주 성왕(周成王)의 총애를 받았으니 그가 바로 택고랑(宅皐狼)이다. 고랑은 형보(衡父)를 낳고, 형보는 조보(造父)를 낳았다. 조보는 주 목왕(周繆王)의 총애를 받았다. 그는 도림(桃林)의 도려(盜驪), 화류(驊騮), 녹이(綠耳) 등 여덟 필의 준마를 얻어 목왕에게 바쳤다. 목왕은 조보를 마부로 삼고 서쪽을 순수(巡狩)하던 중, 서왕모(西王母)를 만나 함께 즐거이 노닐다가 돌아갈 것을 잊었다. 이때 서언왕(徐偃王)이 반란을 일으키자, 목왕은 마차를 타고 하루에 천리 길을 달려가서 서언왕을 공격해 대파했다. 그리고는 조보에게 조성(趙城)을 하사했으니 이로부터 조씨 성을 가지게 되었다.
自造父已下六世至奄父, 曰公仲, 周宣王時伐戎, 為御. 及千畝戦,9) 奄父脱宣王. 奄父生叔帯. 叔帯之時, 周幽王無道, 去周如晉, 事晉文侯, 始建趙氏于晉国.
조보로부터 6대 후손인 엄보(奄父)는 자(字)가 공중(公仲)이며, 주 선왕(周宣王)이 융(戎)을 정벌할 때 그의 마부 노릇을 했다. 엄보는 천무(千畝)에서의 전쟁에서 선왕을 위험에서 벗어나게 했다. 엄보는 숙대(叔帶)를 낳았다. 숙대 때에 주 유왕(周幽王)이 황음무도하자, 그는 주나라를 떠나 진(晉)나라로 가서 진 문후(晉文侯)를 섬기니 이로써 진나라에서 조씨(趙氏) 가문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自叔帯以下, 趙宗益興, 五世而(生)[至]趙夙.
숙대 이래 조씨 종족은 더욱 흥성했으며 5대를 지나 조숙(趙夙)에 이르게 된다.
趙夙, 晉献公之十六年伐霍、魏、耿, 而趙夙為将伐霍. 霍公求奔斉.10) 晉大旱, 卜之, 曰「霍太山為祟」. 使趙夙召霍君於斉, 复之, 以奉霍太山之祀, 晉复穣. 晉献公賜趙夙耿.11)
진 헌공(晉獻公) 16년에 진(晉)나라가 곽(霍), 위(魏), 경(耿) 등 삼국을 정벌할 때, 조숙은 장군이 되어 곽나라를 공격했다. 곽공(霍公) 구(求)는 제(齊)나라로 도망했다. 그해 진(晉)나라에 크게 가뭄이 들어 점을 치자, “곽태산(霍太山) 신령님께서 재앙을 내리셨다.”라는 점괘가 나왔다. 그리하여 헌공은 조숙을 제나라에 파견해 곽공을 소환하고, 그의 군주 지위를 회복시켜 곽태산 신령에게 제사를 봉헌하게 하니 진나라에는 다시 풍년이 들었다. 진 헌공은 조숙에게 경(耿)나라 땅을 하사했다.
夙生共孟, 當魯閔公之元年也. 共孟生趙衰, 字子余.12)
조숙이 공맹(共孟)을 낳은 것은 바로 노 민공(魯閔公) 원년의 일이었다. 공맹은 조최(趙衰)를 낳고 자를 자여(子餘)라 했다.
각주
1 正義中音仲.
2 集解徐広曰:「或云皐狼地名, 在西河.」 索隠按:如此説, 是名孟増号宅皐狼. 而徐広云「或曰皐狼地名, 在西河」. 按地理志, 皐狼是西河郡之県名, 蓋孟増幸於周成王, 成王居之於皐狼, 故云皐狼.
3 索隠言造父取八駿, 品其色, 斉其力, 使馴調也. 並四曰乗, 並両曰匹. 正義乗, 食証反. 並四曰乗, 両曰匹. 取八駿品其力, 使均馴.
4 正義括地志云:「桃林在陝州桃林県, 西至潼関, 皆為桃林塞地. 山海経云夸父之山, 北有林焉, 名曰桃林, 広闊三百里, 中多馬, 造父於此得驊騮、騄耳之乗献周穆王也.」
5 索隠穆天子傳曰「穆王與西王母觴於瑶池之上, 作歌」, 是樂而忘帰也. 譙周不信此事, 而云「余常聞之, 代俗以東西陰陽所出入, 宗其神, 謂之王父母. 或曰地名, 在西域, 有何見乎」.
6 正義括地志云:「大徐城在泗州徐城県北三十里, 古之徐国也. 博物志云:『徐君宮人娠, 生卵, 以為不祥, 棄於水浜. 孤独母有犬名鵠倉, 銜所棄卵以帰, 覆煖之, 遂成小児, 生偃王. 故宮人聞之, 更収養之. 及長, 襲為徐君. 後鵠倉臨死生角而九尾, 実黄竜也. 鵠倉或名后倉也』.」
7 索隠譙周曰:「徐偃王與楚文王同時, 去周穆王遠矣. 且王者行有周衛, 豈聞亂而独長駆日行千里乎?」並言此事非実也.
8 正義晉州趙城県即造父邑也.
9 正義括地志云:「千畝原在晉州岳陽県北九十里也.」
10 集解徐広曰:「求, 一作『來』.」
11 索隠杜預曰:「耿, 今河東皮氏県耿郷是.」
12 索隠系本云公明生共孟及趙夙, 夙生成季衰, 衰生宣孟盾. 左傳云衰, 趙夙弟. 而此系家云共孟生衰, 譙周亦以此為誤耳
권43. 조세가(趙世家) 조최(趙衰)
趙衰卜事晉献公及諸公子, 莫吉;卜事公子重耳, 吉, 即事重耳. 重耳以驪姫之亂亡奔翟, 趙衰従. 翟伐廧咎如, 得二女, 翟以其少女妻重耳, 長女妻趙衰而生盾. 初, 重耳在晉時, 趙衰妻亦生趙同、趙括、趙嬰斉. 趙衰従重耳出亡, 凡十九年, 得反国. 重耳為晉文公, 趙衰為原大夫, 居原, 任国政.1) 文公所以反国及霸, 多趙衰計策, 語在晉事中.
조최는 진 헌공과 여러 공자 중 누구를 섬기면 좋을지 점을 쳐서 결정하려 했으나 점괘가 모두 길하지 않았다. 다만, 공자 중이(重耳)를 섬기면 길하다는 점괘가 나왔으므로 바로 그를 섬기었다. 중이는 여희(驪姬)의 난으로 인해 적(翟) 땅으로 도망가자 조최가 그를 따랐다. 적인(翟人)이 장고여(嗇咎如)를 침략해 두 여자를 잡아 젊은 여자는 중이에게 시집을 보내고, 나이 든 여자는 조최에게 시집을 보냈다. 조최는 조순(趙盾)을 낳았다.
당초 중이가 진(晉)나라에 있을 때, 조최와 본부인 사이에는 이미 조동(趙同), 조괄(趙括), 조영제(趙嬰齊)가 있었다. 조최는 중이를 따라 망명생활을 했는데 19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진(晉)나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중이가 진 문공으로 즉위하자, 조최는 원(原)의 대부(大夫)가 되어 원에 거주하면서 국정을 돌보았다. 문공이 귀국하고 또한 패자(覇者)의 지위에 오를 수 있었던 까닭은 대부분 조최의 계책에 의한 것이었다. 이에 관한 사적은 「진세가(晉世家)」에 기록되어 있다.
趙衰既反晉, 晉之妻固要迎翟妻, 而以其子盾為適嗣, 晉妻三子皆下事之. 晉襄公之六年, 而趙衰卒, 謚為成季.
조최가 진나라로 돌아오자 진나라에 있던 본부인이 적(翟) 땅에서 얻은 부인을 데려오라고 한사코 권하며, 또 그녀의 소생인 조순을 적자(嫡子)로 삼으니 진나라 본부인의 세 아들은 모두 아래 자리에서 조순을 받들게 되었다. 진 양공(晉襄公) 6년에 조최가 죽자 시호(諡號)를 성계(成季)라 했다.
각주
1 索隠系本云:「成季徙原.」宋忠云:「今鴈門原平県也.」 正義括地志云:「原平故城, 漢原平県也, 在代州崞県南三十五里.」崞音郭. 按:宋忠説非也. 括地志云:「故原城在懐州済原県西北二里. 左傳云襄王以原賜晉文公, 原不服, 文公伐原以示信, 原降, 以趙衰為原大夫, 即此也. 原本周畿内邑也.」
124] 권43. 조세가(趙世家) 조순(趙盾), 영공(霊公)
趙盾代成季任国政二年而晉襄公卒, 太子夷皐年少. 盾為国多難, 欲立襄公弟雍. 雍時在秦, 使使迎之. 太子母1)日夜啼泣, 頓首謂趙盾曰:「先君何罪, 釈其適子而更求君?」趙盾患之, 恐其宗與大夫襲誅之, 廼遂立太子, 是為霊公, 発兵距所迎襄公弟於秦者. 霊公既立, 趙盾益専国政.
조순이 성계를 대신해 국정을 맡은 지 2년 만에 진 양공이 죽었다. 태자 이고(夷皐)가 아직 나이가 어렸기에, 조순은 국가에 어려운 일이 많은 것을 감안해 양공의 동생 옹(雍)을 옹립하려고 했다. 옹은 당시 진(秦)나라에 있었으므로 사신을 보내 그를 영접하려고 했다.
그러자 태자의 어머니가 밤낮으로 울며 머리를 조아려 절하며 “선군(先君)께서 무슨 죄를 지으셨기에 그의 적자를 버리고 달리 군주를 구하십니까?”라고 조순에게 말했다. 조순은 이 일로 고심하다가, 그녀의 종친(宗親)과 대부(大夫)들이 자기를 습격해 주살(誅殺)할까 두려워서 태자를 즉위시켰는데 그가 바로 영공(靈公)이다. 동시에 군대를 보내 양공의 동생을 영접하러 진(秦)나라에 간 일행을 돌아오지 못하게 막았다. 영공이 즉위하고 나자 조순은 더욱더 국정을 독점했다.
霊公立十四年, 益驕. 趙盾驟諫, 霊公弗聴. 及食熊蹯, 胹不熟, 殺宰人, 持其尸出, 趙盾見之. 霊公由此懼, 欲殺盾. 盾素仁愛人, 嘗所食桑下餓人反扞救盾, 盾以得亡. 未出境, 而趙穿弑霊公而立襄公弟黒臀, 是為成公. 趙盾复反, 任国政. 君子譏盾「為正卿, 亡不出境, 反不討賊」, 故太史書曰「趙盾弑其君」. 晉景公2)時而趙盾卒, 謚為宣孟, 子朔嗣.
영공은 재위한 지 14년이 지나자 날이 갈수록 오만해졌다. 조순이 여러 차례 간했으나 영공은 듣지 않았다. 한번은 곰발바닥 요리를 먹다가 잘 익지 않았다며 요리사를 죽이고는 그 시체를 들고 나가게 했는데 조순이 그것을 보았다. 이 일로 겁이 난 영공은 조순을 죽이려고 했다.
본디 인자하고 동정심이 많은 조순은 일찍이 뽕나무 아래에 굶주려 쓰러진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어 살려준 적이 있었는데, (조순이 위험에 처하자) 그 사람이 조순을 보호해 구해 주어, 조순은 비로소 도망칠 수가 있었다. 그가 아직 국경을 넘기도 전에 조천(趙穿)이 영공을 시해하고 양공의 동생 흑둔(黑臀)을 왕으로 세웠는데 그가 바로 성공(成公)이다. 조순은 다시 돌아와서 국정에 임했다. 군자들은 “정경(正卿)의 몸으로서 도망하면서 국경도 넘지 않고, 되돌아와서는 역적을 주벌(誅伐)하지도 않았다.”라고 조순을 비난했다. 그래서 태사(太史)는 “조순이 그의 군주를 시해했다.”라고 적었다. 진 경공(晉景公) 때에 조순이 죽자 시호를 선맹(宣孟)이라고 했고 그의 아들 삭(朔)이 뒤를 이었다.
각주
1 索隠穆嬴也.
2 索隠成公之子, 名拠.
[125] 권43. 조세가(趙世家) 조삭(趙朔)
趙朔, 晉景公之三年, 朔為晉将下軍救鄭, 與楚荘王戦河上. 朔娶晉成公姊為夫人.
조삭은 진 경공 3년에 진(晉)나라의 하군(下軍)을 거느리고 정(鄭)나라를 구원하러 갔다가 황하 강변에서 초 장왕(楚莊王)과 교전했다. 삭은 진 성공(晉成公)의 손위 누이를 부인으로 삼았다.
晉景公之三年, 大夫屠岸賈欲誅趙氏.1) 初, 趙盾在時, 夢見叔帯持要而哭, 甚悲;已而笑, 拊手且歌. 盾卜之, 兆絶而後好. 趙史援占之, 曰:「此夢甚悪, 非君之身, 乃君之子, 然亦君之咎. 至孫, 趙将世益衰.」屠岸賈者, 始有寵於霊公, 及至於景公而賈為司冦, 将作難, 乃治霊公之賊以致趙盾, 遍告諸将曰:「盾雖不知, 猶為賊首. 以臣弑君, 子孫在朝, 何以懲罪? 請誅之.」韓厥曰:「霊公遇賊, 趙盾在外, 吾先君以為無罪, 故不誅. 今諸君将誅其後, 是非先君之意而今妄誅. 妄誅謂之亂. 臣有大事而君不聞, 是無君也.」屠岸賈不聴. 韓厥告趙朔趣亡. 朔不肯, 曰:「子必不絶趙祀, 朔死不恨.」韓厥許諾, 称疾不出. 賈不請而擅與諸将攻趙氏於下宮, 殺趙朔、趙同、趙括、趙嬰斉, 皆滅其族.
같은 해에 대부 도안고(屠岸賈)가 조씨를 주멸(誅滅)하려고 했다. 당초 조순이 살아 있을 때 꿈을 꾸었는데 숙대(叔帶)가 자기의 허리를 끌어안고 매우 슬피 울다가 잠시 후 크게 웃으며 손뼉을 치고 노래를 부르는 것이었다.
조순이 점을 쳐보니 불로 지진 거북 껍질의 균열이 끊어졌다가 후에 다시 좋아졌다. 조(趙)나라의 사관(史官) 원(援)이 해석하기를 “이 꿈은 매우 흉한 것으로 당신 대(代)가 아니고 당신 아들 대에 들어맞겠으나, 그것 역시 당신의 잘못 때문입니다. 손자 대에 이르러서는 조씨 가문이 더욱 쇠락할 것입니다.”라 했다.
도안고라는 사람은 처음에 영공의 총애를 받다가 경공 때에 이르러 사구(司寇)가 되었다. 난을 일으키기 위해서 먼저 영공을 시해한 역적을 처벌한다는 빌미로 조순을 연루시켰다. 그리고는 두루 장수들에게 말하기를 “조순이 비록 사건의 내막을 몰랐으나 역시 역적의 두목입니다. 신하된 자로서 군주를 시해하고도 그의 자손이 조정에서 관직을 맡고 있으니 어떻게 죄 있는 사람들을 처벌할 수가 있겠습니까? 조씨를 주멸합시다.”라고 했다. 한궐(韓厥)이 “영공께서 살해를 당하실 때 조순은 외지에 있었습니다. 우리의 선군(先君)께서 그가 무죄라고 여기시어 그를 죽이지 않으셨습니다. 지금 여러분께서 그의 후손을 죽이시려고 하는 것은 선군의 뜻이 아니고 멋대로 주살하는 것입니다. 함부로 주살하는 것은 난을 일으키는 것이라고 합니다. 신하가 큰일을 도모하는 데 군주에게 알리지 않음은 군주를 안중에 두지도 않은 것입니다.”라고 했으나 도안고는 듣지 않았다.
한궐이 조삭에게 빨리 도망가라고 일렀다. 그러나 조삭은 도망가려고 하지 않으면서 “그대가 틀림없이 조씨 가문의 제사가 끊어지지 않게 해주신다면 나는 죽어도 여한이 없겠소.”라고 말했다. 이를 응낙한 한궐은 병을 핑계삼아 외출하지 않았다. 도안고는 경공에게 지시도 청하지 않고서는 제멋대로 여러 장군들과 하궁(下宮)에서 조씨를 공격해 조삭(趙朔), 조동(趙同), 조괄(趙括), 조영제(趙嬰齊) 등을 죽였다. 마침내 그 일족을 모두 멸했다.
趙朔妻成公姊, 有遺腹, 走公宮匿. 趙朔客曰公孫杵臼, 杵臼謂朔友人程嬰曰:「胡不死?」程嬰曰:「朔之婦有遺腹, 若幸而男, 吾奉之;即女也, 吾徐死耳.」居無何, 而朔婦免身, 生男. 屠岸賈聞之, 索於宮中. 夫人置児■中, 祝曰:「趙宗滅乎, 若号;即不滅, 若無声.」及索, 児竟無声. 已脱, 程嬰謂公孫杵臼曰:「今一索不得, 後必且复索之, 柰何?」公孫杵臼曰:「立孤與死孰難?」程嬰曰:「死易, 立孤難耳.」公孫杵臼曰:「趙氏先君遇子厚, 子彊為其難者, 吾為其易者, 請先死.」乃二人謀取他人嬰児負之, 衣以文葆,2) 匿山中. 程嬰出, 謬謂諸将軍曰:「嬰不肖, 不能立趙孤. 誰能與我千金, 吾告趙氏孤処.」諸将皆喜, 許之, 発師随程嬰攻公孫杵臼. 杵臼謬曰:「小人哉程嬰! 昔下宮之難不能死, 與我謀匿趙氏孤児, 今又売我. 縦不能立, 而忍売之乎!」抱児呼曰:「天乎天乎! 趙氏孤児何罪? 請活之, 独殺杵臼可也.」諸将不許, 遂殺杵臼與孤児. 諸将以為趙氏孤児良已死, 皆喜. 然趙氏真孤乃反在, 程嬰卒與倶匿山中.
조삭의 아내는 성공(成公)의 누나로 그 당시 임신 중이었는데 경공의 궁으로 도망가 숨었다. 조삭의 문객 중에 공손저구(公孫杵臼)라는 자가 있었다. 공손저구가 조삭의 친구 정영(程嬰)에게 “왜 같이 죽지 않는가?”라고 물으니, 정영은 “조삭의 부인이 임신 중인데 만약 다행히 아들을 낳으면 내가 부양하고, 딸을 낳는다면 나는 조금 천천히 죽을 따름이다.”라고 대답했다. 얼마 되지 않아 조삭의 부인이 분만했는데 아들을 낳았다.
도안고가 이 소식을 듣고 궁중을 수색했다. 부인이 갓난아기를 속바지 가랑이 사이에 넣고 “조씨 종족이 멸망하려면 네가 크게 울고 멸망하지 않으려면 아무 소리도 내지 말아라.”라고 기도했다. 수색할 때에 아이는 의외로 울지 않았다. 위험을 벗어나자 정영이 공손저구에게 “이번 한 차례 수색해 잡지 못했으니 다음에 또 수색할 것이 분명한데 어떻게 할까?”라고 하자, 공손저구는 “고아를 부양하는 일과 죽는 일 중 어느 것이 어려운가?”라고 물었다. 정영이 “죽는 일은 쉬우나 고아를 부양하는 일은 어렵지”라고 하니, 공손저구가 “조씨의 선군이 당신을 후대했으니 당신은 힘을 다해서 어려운 일을 맡아주게. 나는 쉬운 일을 담당해 먼저 죽을 것일세.”라 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상의한 끝에 다른 사람의 아이를 데려다 등에 업고 화려한 강보로 덮고서는 산속에 숨었다.
정영이 산에서 내려와 거짓으로 여러 장군에게 이르기를 “이 정영은 불초해 조씨 고아를 부양할 능력이 없습니다. 누가 나에게 천금을 주신다면 조씨 고아가 숨어 있는 장소를 말해드리겠습니다.”라 했다. 그러자 여러 장수들이 기뻐하며 그 조건을 수락하고 군사를 출동시켜 정영을 따라가서 공손저구를 공격했다. 공손저구가 거짓으로 “이 소인배 정영아! 예전에 하궁의 난(亂)에서 순사하지 않고 나와 더불어 조씨 고아를 숨기기로 상의했건만, 이제 와서 또 나를 배반하는구나. 아무리 네가 부양할 수 없었기로서니 차마 그를 배신할 수가 있단 말이냐?”라고 욕하며 아이를 안고 “하늘이여! 하늘이여! 조씨 고아가 무슨 죄가 있습니까? 제발 그를 살려주시고 저만 죽여주소서.”라고 외쳤다.
여러 장수들은 이를 허락하지 않고 마침내 공손저구와 고아를 죽였다. 여러 장수들은 조씨 고아가 정말로 죽은 줄 알고 모두 기뻐했다. 그러나 진짜 조씨 고아는 오히려 여전히 살아 있었으니 정영은 마침내 그와 함께 산속에 숨어있었던 것이다.
居十五年, 晉景公疾, 卜之, 大業之後不遂者為祟. 景公問韓厥, 厥知趙孤在, 乃曰:「大業之後在晉絶祀者, 其趙氏乎? 夫自中衍者皆嬴姓也. 中衍人面鳥噣, 降佐殷帝大戊, 及周天子, 皆有明徳. 下及幽厲無道, 而叔帯去周適晉, 事先君文侯, 至于成公, 世有立功, 未嘗絶祀. 今吾君独滅趙宗, 国人哀之, 故見亀策. 唯君図之.」景公問:「趙尚有後子孫乎?」韓厥具以実告. 於是景公乃與韓厥謀立趙孤児, 召而匿之宮中. 諸将入問疾, 景公因韓厥之衆以脅諸将而見趙孤. 趙孤名曰武. 諸将不得已, 乃曰:「昔下宮之難, 屠岸賈為之, 矯以君命, 并命群臣. 非然, 孰敢作難! 微君之疾, 群臣固且請立趙後. 今君有命, 群臣之願也.」於是召趙武、程嬰遍拝諸将, 遂反與程嬰、趙武攻屠岸賈, 滅其族. 复與趙武田邑如故.3)
15년이 흐른 후, 진 경공이 병이 나자 점을 쳤다. 대업(大業)의 후대가 순조롭지 못해 재앙이 생긴다는 점괘가 나왔다. 경공이 한궐에게 물으니 한궐은 조씨 고아가 살아 있다는 것을 아는지라 “대업의 후대자손 중에 진(晉)나라에서 제사가 끊긴 것은 조씨가 아닙니까? 중연(中衍)의 후대는 모두 성이 영(嬴)입니다. 중연은 사람의 얼굴에 입은 새부리 모양으로 인간 세상에 내려와 은나라 왕 대무(大戊)를 보좌했으며 그 후 손은 주(周)나라의 천자를 보좌하는 등 모두 빛나는 덕행이 있었습니다. 그 후 유왕(幽王), 여왕(厲王)이 무도하자 숙대는 주나라를 떠나 진(晉)나라로 와서 선군 문후(文侯)를 섬겼고 성공(成公)에 이르기까지 대대로 공을 세웠으며 제사가 끊긴 적이 없었습니다. 이제 오직 군왕께서 조씨 종족을 멸하셨으니 백성들이 모두 그것을 슬퍼한 까닭에 거북 껍질과 시초(蓍草)에 나타난 것입니다. 다시 고려해 주시기 바랍니다.”라 했다.
경공이 “조씨 가문에 아직 후대 자손이 있는가?”라고 묻자, 한궐은 모두 이실직고했다. 그러자 경공은 조씨 고아를 세우기로 한궐과 상의하고, 조씨 고아를 불러다가 궁중에 감추어두었다. 여러 장수들이 문병 차 입궁하자, 경공은 한궐의 많은 병력을 이용해 조씨 고아를 만날 수 있도록 장수들을 협박했다. 조씨 고아의 이름은 무(武)였다.
장수들은 마지못해 “지난번 하궁의 난은 도안고가 책동한 것으로 군주의 명이라고 사칭해 여러 신하에게 명령했던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누가 감히 난을 일으켰겠습니까? 만약 군왕께서 병이 나지 않으셨더라도 저희들은 본래 조씨의 후예를 세울 것을 청원하려고 했습니다. 지금 군왕께서 명령하시니, 그것은 저희들이 진실로 바라던 바입니다.”라 했다. 이에 조무(趙武)와 정영을 불러 여러 장수들에게 두루 절하게 하니, 여러 장수들이 이번에는 반대로 정영, 조무와 함께 도안고를 공격해 그 종족을 주멸했다. 경공은 다시 원래대로 조씨의 옛 전읍(田邑)을 조무에게 하사했다.
각주
1 集解徐広曰:「按年表, 救鄭及誅滅, 皆景公三年.」
2 集解徐広曰:「小児被曰葆.」
3 集解徐広曰:「推次, 晉复與趙武田邑, 是景公之十七年也. 而乃是春秋成公八年経書『晉殺其大夫趙同、趙括』, 左傳於此説立趙武事者, 注云『終説之耳, 非此年也』.」
권43. 조세가(趙世家) 조무(趙武)
及趙武冠, 為成人, 程嬰乃辞諸大夫, 謂趙武曰:「昔下宮之難, 皆能死. 我非不能死, 我思立趙氏之後. 今趙武既立, 為成人, 复故位, 我将下報趙宣孟與公孫杵臼.」趙武啼泣頓首固請, 曰:「武願苦筋骨以報子至死, 而子忍去我死乎!」程嬰曰:「不可. 彼以我為能成事, 故先我死;今我不報, 是以我事為不成.」遂自殺. 趙武服斉衰三年, 為之祭邑, 春秋祠之, 世世勿絶.1)
조무가 20세가 되어 관례를 행하고 성인이 되자, 정영이 여러 대부들에게 하직하며 조무에게 “그 전 하궁의 난 때 사람들은 모두 순사(殉死)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때 제가 죽을 수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저는 조씨의 후예를 부양해 가업을 잇게 하려고 생각했습니다. 이제 당신께서 가업을 잇고 성인이 되었으며 원래의 작위를 되찾았으니 저는 장차 지하에 가서 조선맹과 공손저구에게 보고하고자 합니다.”라 했다.
조무가 흐느끼며 머리를 조아려 한사코 “제가 모든 힘을 다해 그대가 죽을 때까지 보답하고자 하는데, 그대가 차마 저를 버리고 죽을 수가 있습니까?”라고 하며 말렸다. 정영은 “그렇게는 할 수 없습니다. 그 사람 공손저구는 제가 대사를 성공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저보다 먼저 죽은 것입니다. 이제 제가 가서 보고하지 않으면 그는 제가 맡은 일을 완수하지 못한 것으로 알 것입니다.”라고 하고는 결국 자살했다.
조무는 3년 동안 재최(齊衰)를 입었으며 그를 위해서 제읍(祭邑)을 마련해 봄, 가을로 제사를 지내고 대대로 끊이지 않게 했다.
趙氏复位十一年, 而晉厲公殺其大夫三郤. 欒書畏及, 乃遂弑其君厲公, 更立襄公曾孫周,2) 是為悼公. 晉由此大夫稍彊.
조씨가 복위한 지 11년 만에 진 여공(晉厲公)은 극씨(郤氏) 대부 3명을 죽였다. 난서(欒書)는 화가 자기에게 미칠까 두려워해 급기야는 군주 여공을 시해하고 양공의 증손 주(周)를 바꾸어 세우니 그가 바로 도공(悼公)이다. 진나라는 이로부터 대부의 세력이 점차 강성해졌다.
趙武続趙宗二十七年, 晉平公立. 平公十二年, 而趙武為正卿. 十三年, 呉延陵季子使於晉, 曰:「晉国之政卒帰於趙武子、韓宣子、魏献子之後矣.」趙武死, 謚為文子.
조무가 조씨 종족을 유지한 지 27년 만에 진 평공(晉平公)이 즉위했다. 평공 12년에 조무는 정경(正卿)이 되었다. 13년에 오(吳)나라의 연릉계자(延陵季子)가 진(晉)나라에 사신으로 와서는 “진나라의 정권이 마침내는 조무자(趙武子), 한선자(韓宣子), 위헌자(魏獻子)의 후손에게 돌아가겠구나!”라 했다. 조무가 죽으니 시호를 문자(文子)라 했다.
文子生景叔.3) 景叔之時, 斉景公使晏嬰於晉,4) 晏嬰與晉叔向語. 嬰曰:「斉之政後卒帰田氏.」叔向亦曰:「晉国之政将帰六卿. 六卿侈矣, 而吾君不能恤也.」
문자는 경숙(景叔)을 낳았다. 경숙 때에 제 경공(齊景公)이 안영(晏嬰)을 진나라에 사신으로 보내니 안영과 숙향(叔向)이 서로 이야기할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안영이 “앞으로 제나라의 정권은 결국 전씨(田氏)에게로 돌아가게 될 것이오.”라고 말했다. 숙향도 “진(晉)나라의 정권은 장차 육경(六卿)에게로 돌아갈 것이오. 육경이 오만방자하거늘 우리 군왕은 걱정할 줄도 모른다오.”라 했다.
趙景叔卒, 生趙鞅, 是為簡子.
조경숙이 죽자 그가 낳은 아들 조앙(趙鞅)이 즉위했다. 그가 바로 간자(簡子)이다.
각주
1 集解新序曰:「程嬰、公孫杵臼可謂信友厚士矣. 嬰之自殺下報, 亦過矣.」 正義今河東趙氏祠先人, 猶別舒一座祭二士矣.
2 集解徐広曰:「年表云襄公孫也.」 索隠晉系家襄公少子, 名周.
3 索隠系本云:「景叔名成.」
4 集解徐広曰:「平公之十九年.」
권43. 조세가(趙世家) 조간자(趙簡子)
趙簡子在位, 晉頃公之九年, 簡子将合諸侯戍于周. 其明年, 入周敬王于周, 辟弟子朝之故也.
조 간자가 정경(正卿)의 지위에 있었던 진 경공(晉頃公) 9년에, 간자는 제후들과 회합해 그들을 이끌고 주나라를 지켰다. 그 이듬해 주 경왕(周敬王)을 호송해 주나라로 돌아왔는데, 이는 경왕이 그의 동생 자조(子朝)를 피해 외지에 유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晉頃公之十二年, 六卿以法誅公族祁氏、羊舌氏, 分其邑為十県, 六卿各令其族為之大夫. 晉公室由此益弱.
진 경공 12년에 육경은 법도로써 군주의 친족인 기씨(祁氏), 양설씨(羊舌氏)를 죽이고 그들의 봉읍을 10현으로 나누어 각기 자기의 동족들을 현의 대부로 삼았는데 진(晉)나라의 공실(公室)은 이로부터 더욱 쇠약해지게 되었다.
後十三年, 魯賊臣陽虎來奔, 趙簡子受賂, 厚遇之.
13년 후, 노(魯)나라의 난신(亂臣) 양호(陽虎)가 도망오자 조 간자는 뇌물을 받고 그를 후대했다.
趙簡子疾, 五日不知人, 大夫皆懼. 医扁鵲視之, 出, 董安于問.1) 扁鵲曰:「血脈治也, 而何怪! 在昔秦繆公嘗如此, 七日而寤. 寤之日, 告公孫支與子輿2)曰:『我之帝所甚樂. 吾所以久者, 適有学也. 帝告我:「晉国将大亂, 五世不安;其後将霸, 未老而死;霸者之子且令而国男女無別.」』公孫支書而蔵之, 秦讖於是出矣. 献公之亂, 文公之霸, 而襄公敗秦師於殽而帰縦淫, 此子之所聞. 今主君之疾與之同, 不出三日疾必閒, 閒必有言也.」
조 간자가 병이 나서 5일 동안 인사불성이 되자 대부들은 모두 걱정이 대단했다. 명의 편작(扁鵲)이 진찰을 하고 나오니 동안우(董安于)가 병세를 물었다. 편작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혈맥(血脈)이 정상인데 뭐 걱정할 게 있겠는가? 이전에 진 목공(秦繆公)도 이런 적이 있었는데 7일 만에 깨어났소. 깨어난 날에 공손지(公孫支)와 자여(子輿)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하오. 내가 상제(上帝)가 사는 곳에 갔었는데 매우 즐거웠소. 내가 그렇게 오랫동안 머문 이유는 마침 배울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소. 상제께서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소. ‘진(晉)나라는 장차 대란이 일어나 금후 5대 동안 안정을 얻지 못할 것이다. 그의 후예가 장차 패자가 되겠지만 오래 살지 못하고 죽을 것이며, 패자의 아들이 그대 나라의 남녀 사이를 문란하게 만들 것이다.’ 손지가 이를 적어 보존했는데 진(秦)나라의 참어(讖語)는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오.
헌공(獻公) 때의 변란이나 문공(文公)이 패자가 된 것, 그리고 양공(襄公)이 효산(殽山)에서 진군(秦軍)을 대파하고 돌아가서는 육욕에 빠져 음란을 자행했던 것, 이러한 사실들은 그대가 모두 들은 바 있을 것이오. 지금 주군(主君)의 병이 목공의 것과 같으니 3일이 지나지 않아 병세가 반드시 호전될 것이며 병세가 호전되면 틀림없이 할 말이 있을 것이오.”
居二日半, 簡子寤. 語大夫曰:「我之帝所甚樂, 與百神游於鈞天, 広樂九奏萬舞, 不類三代之樂, 其声動人心. 有一熊欲來援我, 帝命我射之, 中熊, 熊死. 又有一羆來, 我又射之, 中羆, 羆死. 帝甚喜, 賜我二笥, 皆有副. 吾見児在帝側, 帝属我一翟犬, 曰:『及而子之壮也, 以賜之.』帝告我:『晉国且世衰, 七世而亡,3) 嬴姓将大敗周人於范魁之西,4) 而亦不能有也. 今余思虞舜之勳, 適余将以其冑女孟姚配而七世之孫.』」5)董安于受言而書蔵之. 以扁鵲言告簡子, 簡子賜扁鵲田四萬畝.
이틀하고도 한나절이 지나자 간자가 깨어났다. 그리고는 대부들에게 “내가 상제가 사는 곳에 갔는데 매우 즐거웠소. 여러 신들과 하늘 한가운데서 노닐었고, 여러 악기로 웅장한 음악이 여러 차례 연주되는 것을 들었으며, 또한 “만무(萬舞)”를 보았는데, 삼대(三代)의 음악과 같지는 않았으나 그 소리가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켰소. 그때 곰 한 마리가 나를 붙잡으려고 하자 상제께서 나에게 쏘라고 명령하셔서 내가 곰을 쏘아 맞추어 곰을 죽였소. 또 큰 곰 한 마리가 오자 내가 또 쏘아 맞추어 큰 곰을 죽이니 상제께서 매우 기뻐하시며 나에게 대나무 상자 두 개를 주셨는데 모두 보조 상자가 달려 있었소.
나는 한 어린애가 상제 곁에 있는 것을 보았는데, 상제께서 나에게 적견(翟犬) 한 마리를 주시면서 ‘너의 아들이 장성한 후에 적견을 그에게 주어라.’라고 하셨소. 상제께서는 또 나에게 ‘진(晉)나라가 장차 대대로 쇠락하다가 7대에 이르러 멸망할 것이다. 영성(嬴姓)의 사람들이 범괴(范魁) 서쪽에서 주나라 군대를 대파하겠지만 그 땅을 차지하지는 못할 것이다. 이제 내가 우순(虞舜)의 공적을 생각해서 때가 되면 내가 순의 후손인 맹요(孟姚)라는 여자를 너의 7대손에게 시집보내겠다.’라고 하셨소.”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동안우는 기록해 보관했다. 그는 또한 편작의 말을 간자에게 고하니 간자는 편작에게 밭 4만 무(畝)를 하사했다.
他日, 簡子出, 有人當道, 辟之不去, 従者怒, 将刃之. 當道者曰:「吾欲有謁於主君.」従者以聞. 簡子召之, 曰:「譆, 吾有所見子■也.」6)當道者曰:「屏左右, 願有謁.」簡子屏人. 當道者曰:「主君之疾, 臣在帝側.」簡子曰:「然, 有之. 子之見我, 我何為?」當道者曰:「帝令主君射熊與羆, 皆死.」簡子曰:「是, 且何也?」當道者曰:「晉国且有大難, 主君首之. 帝令主君滅二卿, 夫熊與羆皆其祖也.」7)簡子曰:「帝賜我二笥皆有副, 何也?」8)當道者曰:「主君之子将克二国於翟, 皆子姓也.」9)簡子曰:「吾見児在帝側, 帝属我一翟犬, 曰『及而子之長以賜之』. 夫児何謂以賜翟犬?」當道者曰:「児, 主君之子也. 翟犬者, 代之先也. 主君之子且必有代. 及主君之後嗣, 且有革政而胡服,10) 并二国於翟.」11)簡子問其姓而延之以官. 當道者曰:「臣野人, 致帝命耳.」遂不見. 簡子書蔵之府.
어느 날 간자가 외출했을 때였다. 어떤 사람이 길을 막고서는 쫓아도 비키지를 않자 시종이 화가 나서 그를 죽이려고 했다. 길을 막은 사람이 “나는 주군을 배알할 일이 있소.”라고 하니 시종이 간자에게 보고했다.
간자가 그를 불러 보고는 “아하, 나는 전에 당신을 똑똑히 본 적이 있소.”라고 하자, 그는 “좌우를 물리쳐주십시오. 긴히 아뢸 말씀이 있습니다.”라 했다. 간자는 시종들을 물러나게 했다. 길을 막은 사람은 “주군께서 병이 나셨을 때에 제가 상제 곁에 있었습니다.”라고 하니 간자가 “예, 그랬지요. 그대가 나를 보았을 때 내가 무얼 하고 있던가요?”라고 하자, 그는 “상제께서 주군에게 곰과 큰 곰을 쏘라고 하시어 모두 죽이시더군요.”라 했다. 간자가 “그랬소. 그런데 그건 무엇을 뜻하는 거요?”라고 묻자, 그는 “진(晉)나라에는 앞으로 대란이 있을 것인데 주군이 제일 먼저 그 피해를 당하게 되므로, 상제께서 주군에게 두 상경(上卿)을 주살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 곰과 큰 곰은 그들의 선조입니다.”라 했다.
간자가 “상제께서 나에게 하사하신 대나무 상자에 모두 보조 상자가 달려 있던데 그것은 무슨 뜻입니까?”라고 물으니 그는 “주군의 아들이 장차 적(翟) 땅에서 두 나라를 쳐서 이길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나라는 모두 동성(同姓)의 나라입니다.”라 했다. 간자가 또 “어린아이가 상제 곁에 있는 것을 보았는데 상제께서 나에게 적견을 한 마리 주시면서 ‘너의 아들이 장성한 후에 적견을 그에게 주어라’라고 하셨습니다. 어린아이에게 적견을 주라고 하신 것은 무슨 뜻입니까?”라고 묻자, 그는 “그 어린애는 주군의 아들이고 적견은 대(代)나라의 선조입니다. 주군의 아들은 장차 틀림없이 대나라를 차지할 것입니다. 주군의 후예는 정치를 개혁하고 오랑캐 복장을 입을 것이며 적 땅에서 두 나라를 합병할 것입니다.”라 했다. 간자가 그 사람의 성명을 묻고 초빙해 관직을 주려고 했다. 그러자 그는 “나는 일개 야인(野人)으로 상제의 명령만 전할 뿐입니다.”라고 하더니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간자는 이 일을 기록해 부고(府庫)에 보관해 두었다.
異日, 姑布子卿12)見簡子, 簡子遍召諸子相之. 子卿曰:「無為将軍者.」簡子曰:「趙氏其滅乎?」子卿曰:「吾嘗見一子於路, 殆君之子也.」簡子召子毋卹. 毋卹至, 則子卿起曰:「此真将軍矣!」簡子曰:「此其母賎, 翟婢也, 奚道貴哉?」子卿曰:「天所授, 雖賎必貴.」自是之後, 簡子尽召諸子與語, 毋卹最賢. 簡子乃告諸子曰:「吾蔵宝符於常山上, 先得者賞.」諸子馳之常山上, 求, 無所得. 毋卹還, 曰:「已得符矣.」簡子曰:「奏之.」毋卹曰:「従常山上臨代, 代可取也.」13)簡子於是知毋卹果賢, 乃廃太子伯魯, 而以毋卹為太子.
또 어느 날 고포자경(姑布子卿)이 간자를 배견(拜見)하니 간자는 여러 아들을 모두 불러 관상을 보게 했다. 자경이 “장군이 될 사람이 없습니다.”라고 하자, 간자가 “그러면 조씨 가문이 멸망한다는 말이오?”라고 물었다. 자경이 “제가 길에서 한 어린애를 보았는데 아마 당신의 아들이겠지요.”라고 하자, 간자가 아들 무휼(毋恤)을 불렀다. 무휼이 오자 자경이 일어나 “이 아드님이 정말로 장군감이십니다.”라 했다. 간자가 “이 아이의 어미는 미천한 적(翟)나라의 비녀(婢女) 출신인데 어찌 귀하다고 말하시오?”라고 하자, 자경이 “하늘이 내려주신 인재는 비록 태생이 비천하다고 할지라도 나중에는 틀림없이 존귀하게 될 것입니다.”라 했다. 그 후로 간자가 모든 아들을 불러 대화를 나누어보았는데 무휼이 가장 현명했다.
한번은 간자가 여러 아들에게 “내가 귀중한 부절(符節)을 상산(常山)에 숨겨두었는데 먼저 찾은 사람에게 상으로 주겠다.”라 했다. 여러 아들이 상산으로 말을 달려 산에 올라가 찾았으나 찾을 수가 없었다. 무휼이 돌아와 “이미 부절을 찾았습니다.”라고 하자 간자가 “말해 보아라.”라 했다. 그러자 무휼이 “상산의 위에서 대(代)나라를 내려다보았는데, 대나라는 탈취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라 했다. 이에 무휼이 과연 현명하다는 것을 알게 된 간자는 태자 백로(伯魯)를 폐위시키고 무휼을 태자로 삼았다.
後二年, 晉定公之十四年, 范、中行作亂. 明年春, 簡子謂邯鄲大夫午曰:「帰我衛士五百家, 吾将置之晉陽.」14)午許諾, 帰而其父兄不聴,15) 倍言. 趙鞅捕午, 囚之晉陽. 乃告邯鄲人曰:「我私有誅午也, 諸君欲誰立?」16)遂殺午. 趙稷、渉賓以邯鄲反.17) 晉君使籍秦18)囲邯鄲. 荀寅、范吉射19)與午善,20) 不肯助秦而謀作亂, 董安于知之. 十月, 范、中行氏21)伐趙鞅, 鞅奔晉陽, 晉人囲之. 范吉射、荀寅仇人魏襄等謀逐荀寅, 以梁嬰父代之;22)逐吉射, 以范皐繹代之.23) 荀櫟24)言於晉侯曰:「君命大臣, 始亂者死. 今三臣始亂25)而独逐鞅, 用刑不均, 請皆逐之.」十一月, 荀櫟、韓不佞、26)魏哆27)奉公命以伐范、中行氏, 不克. 范、中行氏反伐公, 公撃之, 范、中行敗走. 丁未, 二子28)奔朝歌. 韓、魏以趙氏為請.29) 十二月辛未, 趙鞅入絳, 盟于公宮. 其明年, 知伯文子謂趙鞅曰:「范、中行雖信為亂, 安于発之, 是安于與謀也. 晉国有法, 始亂者死. 夫二子已伏罪而安于独在.」趙鞅患之. 安于曰:「臣死, 趙氏定, 晉国寧, 吾死晩矣.」遂自殺. 趙氏以告知伯, 然後趙氏寧.
그로부터 2년 후, 진 정공(晉定公) 14년에 범씨(范氏)와 중항씨(中行氏)가 난을 일으켰다. 이듬해 봄에 간자가 한단(邯鄲)의 대부 오(午)에게 “위(衛)나라 백성 5백호를 나에게 돌려주시오. 내가 그들을 진양(晉陽)에 안둔시키겠소.”라고 하자, 오가 승낙하고 돌아갔으나 그의 부형(父兄)들이 말을 듣지 않아 약속을 어기게 되었다.
조앙(趙鞅)은 오를 체포해 진양에다 감금했다. 그리고 한단 사람들에게 “나는 독자적으로 오를 죽이려고 결심했소. 여러분은 그의 후임으로 누구를 세우고자 하는가?” 하고는 마침내 오를 죽였다. 그러자 조직(趙稷)과 섭빈(涉賓)이 한단을 근거지로 해 모반했다. 진 정공은 적진(籍秦)을 보내 한단을 포위하게 했다. 순인(荀寅)과 범길석(范吉射)은 조오(趙午)와 관계가 친밀했기에, 이들이 적진을 도울 생각은 않고 오히려 반란을 꾀하려고 한다는 사실을 동안우(董安于)가 알게 되었다.
10월에 범씨와 중항씨가 조앙을 공격하자 조앙이 진양으로 달아나니, 진(晉)나라 사람들이 진양을 포위했다. 범길석과 순인의 원수인 위양(魏襄) 등은 순인을 몰아낼 계책을 꾸며 양영보(梁嬰父)로 하여금 그를 대신하게 하고, 범길석을 몰아내어 범고역(范皐繹)으로 대치하려고 했다.
순력(荀櫟)이 진 정공에게 “선군께서 대신들에게 명령하시기를 난을 일으킨 주동자는 죽여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지금 세 명의 대신이 반란을 일으킨 주동자이거늘 단지 조앙만 쫓아내신다면 이는 형벌의 집행이 불공평한 것입니다. 그들을 모두 쫓아내십시오.”라고 진언했다.
11월에 순력, 한불녕(韓不佞), 위치(魏哆)가 정공의 명을 받들어 범씨, 중항씨를 토벌했으나 이기지 못했다. 범씨, 중항씨가 반대로 정공을 공격했으나 정공이 반격하자 범씨, 중항씨는 패해 달아났다. 정미일(丁未日)에 그 두 사람은 조가(朝歌)로 도망갔다. 한불녕과 위치는 조앙을 사면해 달라고 정공에게 호소했다. 12월 신미일(辛未日)에 조앙이 강성(絳城)으로 들어와 정공의 궁에서 맹세를 했다. 그 이듬해 지백(知伯) 문자가 조앙에게 “범씨와 중항씨가 확실히 반란을 일으키기는 했지만 동안우가 중간에서 그 사정을 알고 도발한 것이니, 이는 동안우도 난을 도모하는 데 참여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진나라 국법으로는 반란을 주동한 자는 죽이게 되어 있습니다. 범씨와 중항씨는 이미 그 죄를 받았으나 오직 동안우만이 건재합니다.”라고 하자, 조앙이 이 일로 고민을 했다.
동안우가 “제가 죽으면 조씨가 안정되고 진(晉)나라가 평안해질 텐데, 제가 죽는 것이 너무 늦었습니다.”라고 하고는 마침내 자살했다. 조앙은 이 사실을 지백에게 알렸다. 이후로부터 조씨는 비로소 안정되었다.
孔子聞趙簡子不請晉君而執邯鄲午, 保晉陽, 故書春秋曰「趙鞅以晉陽畔」.
공자(孔子)가 조 간자가 진나라 군주의 허락도 없이 한단의 대부 조오를 체포하고 결국에는 진양으로 물러나 지키고 있다는 말을 듣고는 『춘추(春秋)』에 “조앙이 진양을 근거지로 해 모반했다.”라고 기록했다.
趙簡子有臣曰周舎, 好直諫. 周舎死, 簡子毎聴朝, 常不悦, 大夫請罪. 簡子曰:「大夫無罪. 吾聞千羊之皮不如一狐之腋. 諸大夫朝, 徒聞唯唯, 不聞周舎之鄂鄂, 是以憂也.」30)簡子由此能附趙邑而懐晉人.
조 간자의 가신 중에 주사(周舍)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직간(直諫)하기를 좋아했다. 주사가 죽은 후, 간자가 매번 조회를 열어 정사를 처리할 때마다 언제나 언짢아하자, 대부들이 용서를 빌었다. 간자는 “대부들은 죄가 없소. 내가 듣기에 천 마리 양의 가죽이 여우 한 마리의 겨드랑이 가죽만 못하다고 하더이다. 여러 대부들이 조회에 참가할 때마다 오로지 ‘예, 예’ 하는 공손한 응답만 들리고 주사와 같은 기탄없는 직언은 들을 수 없으니 이를 걱정하는 것이오.”라 했다.
간자가 이렇게 했기 때문에 조읍(趙邑)의 백성을 순종하게 하고 진(晉)나라 사람들을 안무(安撫)할 수 있었다.
晉定公十八年, 趙簡子囲范、中行于朝歌, 中行文子31)奔邯鄲. 明年, 衛霊公卒. 簡子與陽虎送衛太子蒯聵于衛, 衛不内, 居戚.32)
진 정공 18년, 조 간자가 범씨와 중항씨를 조가에서 포위하자, 중항문자(中行文子)는 한단으로 도망갔다. 이듬해 위 영공(衛靈公)이 죽었다. 간자와 양호(陽虎)는 위나라 태자 괴외(蒯聵)를 위나라로 호송했으나 위나라에서 받아주지 않자 척(戚)에 거주하게 했다.
晉定公二十一年, 簡子抜邯鄲, 中行文子奔柏人. 簡子又囲柏人, 中行文子、范昭子33)遂奔斉. 趙竟有邯鄲、柏人. 范、中行余邑入于晉. 趙名晉卿, 実専晉権, 奉邑侔於諸侯.
진 정공 21년, 간자가 한단을 함락시키자, 중항문자는 백인(柏人)으로 도망갔다. 간자가 또 백인을 포위하니 중항문자와 범소자(范昭子)는 결국 제(齊)나라로 도망쳤다. 조씨는 마침내 한단과 백인을 차지했다. 범씨와 중항씨의 나머지 성읍은 진(晉)나라에 귀속되었다. 조 간자는 명의상으로는 진나라의 상경(上卿)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진나라의 정권을 독차지했으며 봉지는 제후와 다를 바가 없었다.
晉定公三十年, 定公與呉王夫差争長於黄池, 趙簡子従晉定公, 卒長呉. 定公三十七年卒, 而簡子除三年之喪, 期而已. 是歳, 越王句践滅呉.
진 정공 30년, 정공은 황지(黃池)에서 오왕(吳王) 부차(夫差)와 맹주(盟主)의 자리를 놓고 겨루었다. 조 간자가 진 정공을 수행했는데 마침내 오왕이 맹주가 되었다. 정공이 37년에 죽자, 간자는 3년 상을 폐지하고 1년으로 끝냈다. 이해에 월왕(越王) 구천(句踐)이 오나라를 멸망시켰다.
晉出公十一年, 知伯伐鄭. 趙簡子疾, 使太子毋卹将而囲鄭. 知伯酔, 以酒潅撃毋卹. 毋卹群臣請死之. 毋卹曰:「君所以置毋卹, 為能忍詬.」然亦慍知伯. 知伯帰, 因謂簡子, 使廃毋卹, 簡子不聴. 毋卹由此怨知伯.
진출공(晉出公) 11년, 지백(知伯)이 정(鄭)나라를 침략했다. 조 간자는 병이 났기 때문에 태자 무휼을 보내 정나라를 포위하게 했다. 지백이 술에 취해 무휼에게 억지로 술을 먹이고 구타했다. 무휼의 수행신하들이 지백을 죽일 것을 청했다. 무휼이 “주군께서 나를 태자로 삼으신 것은 내가 치욕을 참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셨기 때문이오.”라고 말은 했지만, 마음속으로는 지백을 불쾌하게 생각했다. 지백이 돌아와서는 이 일을 간자에게 말하고 무휼을 폐위시키도록 했으나 간자는 듣지 않았다. 무휼은 이로 인해 지백을 원망하게 되었다.
晉出公十七年, 簡子卒,34) 太子毋卹代立, 是為襄子.
진 출공 17년에 간자가 죽고 태자 무휼이 지위를 계승하니 그가 바로 양자(襄子)이다.
각주
1 集解韋昭曰:「安于, 簡子家臣.」
2 索隠二子, 秦大夫公孫支、子桑也.
3 正義謂晉定公、出公、哀公、幽公、烈公、孝公、静公為七世. 静公二年, 為三晉所滅. 拠此及年表, 簡子疾在定公十一年.
4 索隠范魁, 地名, 不知所在, 蓋趙地. 正義嬴, 趙姓也. 周人謂衛也. 晉亡之後, 趙成侯三年伐衛, 取都鄙七十三是也. 賈逵云「小阜曰魁」也.
5 索隠即娃嬴, 呉広之女. 姚, 姓;孟, 字也. 七代孫, 武霊王也.
6 索隠簡子見當道者, 乃寤曰:「譆, 是吾前夢所見, 知其名曰子■者.」
7 正義范氏、中行氏之祖也.
8 正義副謂皆子姓也.
9 正義謂代及智氏也.
10 正義今時服也, 廃除裘裳也.
11 正義武霊王略中山地至寧葭, 西略胡地至樓煩、楡中是也.
12 集解司馬彪曰:「姑布, 姓;子卿, 字.」
13 正義地道記云:「恆山在上曲陽県西北百四十里. 北行四百五十里得恆山岌, 号飛狐口, 北則代郡也.」
14 集解服虔曰:「往年趙鞅囲衛, 衛人恐懼, 故貢五百家, 鞅置之邯鄲, 又欲更徙於晉陽.」
15 集解服虔曰:「午之諸父兄及邯鄲中長老.」
권43. 조세가(趙世家) 조양자(趙襄子)
趙襄子元年, 越囲呉.1) 襄子降喪食, 使楚隆問呉王.2)
조 양자 원년에 월나라가 오나라를 포위했다. 양자는 거상 기간 동안에 음식의 질을 낮추고 가신 초륭(楚隆)을 사신으로 보내 오왕을 위문했다.
襄子姊前為代王夫人. 簡子既葬, 未除服, 北登夏屋,3) 請代王. 使厨人操銅枓4)以食代王及従者, 行斟, 陰令宰人各5)以枓撃殺代王及従官, 遂興兵平代地. 其姊聞之, 泣而呼天, 摩笄自殺. 代人憐之, 所死地名之為摩笄之山.6) 遂以代封伯魯子周為代成君. 伯魯者, 襄子兄, 故太子. 太子蚤死, 故封其子.
양자의 누나는 이전에 대왕(代王)의 부인이었다. 간자를 안장하고 아직 상복도 벗기 전에, 양자는 북쪽의 하옥산(夏屋山)에 올라서 대왕(代王)을 초대했다. 요리사에게 놋쇠로 만든 국자를 들고 대왕과 그 시종들에게 음식을 권하게 하고, 술을 따를 때에 은밀히 낙(各)이라는 이름의 백정을 시켜 국자로 대왕과 그 시종들을 쳐죽이게 했다. 그리고는 군대를 일으켜 대나라를 평정했다. 이 소식을 들은 그의 누나는 울부짖다가 비녀를 뾰족하게 갈아서는 자살했다. 대나라 사람들이 그녀를 가엾게 여겨서 그녀가 자살한 곳을 마계산(麻笄山)이라고 불렀다. 그리하여 양자는 대 땅을 백로(伯魯)의 아들 조주(趙周)에게 봉해 대성군(代成君)으로 삼았다. 백로는 양자의 형으로 원래 태자였으나, 그가 일찍 죽었기 때문에 그의 아들을 봉한 것이다.
襄子立四年, 知伯與趙、韓、魏尽分其范、中行故地. 晉出公怒, 告斉、魯, 欲以伐四卿. 四卿恐, 遂共攻出公. 出公奔斉, 道死. 知伯乃立昭公曾孫驕, 是為晉懿公.7) 知伯益驕. 請地韓、魏, 韓、魏與之. 請地趙, 趙不與, 以其囲鄭之辱. 知伯怒, 遂率韓、魏攻趙. 趙襄子懼, 乃奔保晉陽.
양자가 즉위한 지 4년, 지백은 조(趙), 한(韓), 위(魏) 세 가문과 함께 범씨, 중항씨의 옛 영토를 전부 나누어 가졌다. 진 출공은 노하여 이 사실을 제나라와 노나라에 알리고 그들의 힘을 빌려 사경(四卿)을 토벌하려고 했다. 겁이 난 사경은 연합해 출공을 공격했다. 출공은 제나라로 도망가다 도중에 죽었다. 지백은 소공(昭公)의 증손 교(驕)를 옹립하니 그가 바로 진 의공(晉懿公)이다. 지백은 더욱 교만해져 한씨와 위씨에게 땅을 요구하자 한씨와 위씨가 땅을 주었다. 또 조씨에게 땅을 요구했으나 양자가 정나라를 포위했을 때에 지백이 그를 모욕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조씨는 그에게 땅을 주지 않았다. 화가 난 지백은 한씨와 위씨를 이끌고 조씨를 공격했다. 두려워진 조 양자는 진양으로 도망쳐서 수비했다.
原過従, 後, 至於王沢,8) 見三人, 自帯以上可見, 自帯以下不可見. 與原過竹二節, 莫通. 曰:「為我以是遺趙毋卹.」原過既至, 以告襄子. 襄子斉三日, 親自剖竹, 有朱書曰:「趙毋卹, 余霍泰山9)山陽侯天使也. 三月丙戌, 余将使女反滅知氏. 女亦立我百邑, 余将賜女林胡之地. 至于後世, 且有伉王, 赤黒, 竜面而鳥噣, 鬢麋髭■, 大膺大胸, 脩下而馮, 左衽界乗,10) 奄有河宗,11) 至于休溷諸貉,12) 南伐晉別,13) 北滅黒姑.」14)襄子再拝, 受三神之令.
원과(原過)가 양자의 뒤를 따라 수행하던 중, 왕택(王澤)에 이르러 세 사람을 보았다. 그들은 허리띠 위로는 보이지만 허리띠 밑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원과에게 두 마디로 된 대나무 토막을 주었는데 가운데가 뚫어지지 않은 것이었다. 그러면서 “우리를 대신해 이것을 무휼에게 가져다주어라.”라 했다.
원과는 진양에 도착해 그 일을 조 양자에게 알렸다. 양자는 3일 동안 목욕재계한 후에 친히 대나무 토막을 가르니 안에 붉은 색 글씨로 “조무휼아, 우리들은 곽태산(霍泰山) 산양후(山陽侯)의 천사(天使)이니라. 3월 병술일(丙戌日)에 우리들이 장차 너로 하여금 되돌아가 지씨를 멸망시키도록 할 것이다. 너 역시 우리들을 위해서 백 개의 성읍에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지내면, 우리는 너에게 임호(林胡)의 땅을 주리라. 너의 후대에 굳세고 용맹스러운 왕이 나타날 것이니, 그는 검붉은 피부, 용의 얼굴에 새 부리 같은 입, 서로 어우러진 귀밑머리와 눈썹 그리고 무성한 구레나룻과 턱수염을 가졌고, 넓고 큰 가슴에 하체는 길고 상체는 우람하며, 옷깃을 왼쪽으로 여미고 갑옷을 입고 말을 탈 것이다. 그는 하종(河宗)을 모두 다 차지해 휴혼(休溷)과 제맥(諸貉)의 지역까지 이를 것이며 남쪽으로는 진(晉)나라의 다른 성읍을 정벌하고 북쪽으로는 흑고(黑姑)를 멸할 것이다.”라고 쓰여 있었다. 양자는 재배(再拜)하고 삼신(三神)의 명을 받아들였다.
三国攻晉陽, 歳余, 引汾水潅其城, 城不浸者三版.15) 城中懸釜而炊, 易子而食. 群臣皆有外心, 礼益慢, 唯高共16)不敢失礼. 襄子懼, 乃夜使相張孟同17)私於韓、魏. 韓、魏與合謀, 以三月丙戌, 三国反滅知氏, 共分其地. 於是襄子行賞, 高共為上. 張孟同曰:「晉陽之難, 唯共無功.」襄子曰:「方晉陽急, 群臣皆懈, 惟共不敢失人臣礼, 是以先之.」於是趙北有代, 南并知氏, 彊於韓、魏. 遂祠三神於百邑, 使原過主霍泰山祠祀.18)
지백, 한씨, 위씨 세 나라가 진양을 공격한 지 1년이 넘도록 분수(汾水)의 물을 끌어다 성에 대니, 물에 잠기지 않은 성벽이 3판(三版) 높이에 불과했다. 성 안에서는 솥을 공중에 걸어둔 채 음식을 만들었으며 자식을 서로 바꾸어 먹었다.
신하들은 모두 딴마음을 품고 예절에 더욱 소홀해졌으나 오로지 고공(高共)만은 감히 예의를 흐트러트리지 않았다. 겁이 난 양자는 밤중에 재상 장맹동(張孟同)을 파견해 비밀리 한씨, 위씨와 내통하게 했다. 그리고는 한씨, 위씨와 함께 결탁해 3월 병술일에 세 나라가 반대로 지씨를 멸하고 그 땅을 나누어 가졌다.
이에 양자가 논공행상을 할 때, 고공을 일등공신으로 쳤다. 그러자 장맹동이 “진양이 난을 당했을 때 오직 고공만이 공로가 없습니다.”라고 하니, 양자가 “진양이 가장 위급했을 때 모든 대신들이 모두 나태해졌으나 오직 고공만은 감히 신하로서의 예의를 잃지 않았으니 그를 제일로 친 것이다.”라 했다. 이때 조씨는 북쪽으로 대(代) 땅을 차지하고 남쪽으로는 지씨를 합병해 한씨, 위씨보다 강대해졌다.
이에 마침내 백 개의 성읍에 삼신(三神)의 사당을 지어 제사를 지냈으며 원과를 파견해 곽태산 사당의 제사를 주관하게 했다.
其後娶空同氏,19) 生五子. 襄子為伯魯之不立也, 不肯立子, 且必欲傳位與伯魯子代成君. 成君先死, 乃取代成君子浣立為太子.20) 襄子立三十三年卒, 浣立, 是為献侯.
그 후 양자는 공동씨(空同氏)를 아내로 얻어 다섯 아들을 낳았다. 양자는 백로(伯魯)가 지위를 계승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의 아들을 태자로 세우지 않고 백로의 아들 대성군(代成君)에게 지위를 물려주려고 했다. 대성군이 일찍 죽자 대성군의 아들 완(浣)을 태자로 세웠다. 양자가 재위 33년 만에 죽고 완이 즉위하니 그가 바로 헌후(獻侯)이다.
각주
1 正義年表及(趙)[越]世家、(云)左傳越滅呉在簡子三十五年, 已在襄子元年前十五年矣, 何得更有越囲呉之事? 従此以下至「問呉王」是三十年事, 文(説)[脱]誤在此耳.
2 正義左傳云哀公二十年, 簡子死, 襄子嗣立, 以越囲呉故, 降父之祭饌, 而使楚隆慰問王, 為哀公十三年. 簡子在黄池之役, 與呉王質言曰「好悪同之」, 故減祭饌及問呉王也. 而趙世家及六国年表云此年晉定公卒, 簡子除三年之喪, 服期而已. 按:簡子死及使呉年月皆誤, 與左傳文不同.
3 集解徐広曰:「山在広武.」 正義括地志云:「夏屋山一名賈屋山, 今名賈母山, 在代州鴈門県東北三十五里. 夏屋與句注山相接, 蓋北方之険, 亦天下之阻路, 所以分別内外也.」
4 正義音斗. 其形方, 有柄, 取斟水器. 説文云勺也.
5 集解徐広曰:「一作『雒』.」
6 正義笄, 今簪也. 括地志云:「摩笄山一名磨笄山, 亦名為[鳴雞]山, 在蔚州飛狐県東北百五十里. 魏土地記云『代郡東南二十五里有馬頭山. 趙襄子既殺代王, 使人迎其婦. 代王夫人曰:「以弟慢夫, 非仁也;以夫怨弟, 非義也.」磨笄自刺而死. 使者遂亦自殺』.」
7 索隠或作「哀公」. 其大父名雍, 即昭公少子, 号戴子也.
8 正義括地志云:「王沢在絳州正平県南七里也.」
9 集解徐広曰:「在河東永安県.」
10 集解徐広曰:「脩, 或作『随』. 界, 一作『介』.」
11 正義穆天子傳云:「河宗之子孫(則)■柏絮.」按:蓋在竜門河之上流, 嵐、勝二州之地也.
12 正義音陌. 自河宗、休溷諸貉, 乃戎狄之地也.
13 正義趙南伐晉之別邑, 謂韓、魏之邑也.
14 正義亦戎国.
15 正義何休云:「八尺曰版.」
권43. 조세가(趙世家) 헌후(献侯)
献侯少即位, 治中牟.1)
헌후는 어린 나이에 즉위해 치소(治所)를 중모(中牟)에 설치했다.
襄子弟桓子2)逐献侯, 自立於代, 一年卒. 国人曰桓子立非襄子意, 乃共殺其子而复迎立献侯.
양자의 동생 환자(桓子)가 헌후를 내쫓고 대(代) 땅에서 스스로 자리에 올랐으나 1년 만에 죽었다. 백성들은 환자가 즉위한 것은 양자의 뜻이 아니라고 하며 다 함께 환자의 아들을 죽이고 다시 헌후를 맞이해 즉위하게 했다.
十年, 中山武公初立.3) 十三年, 城平邑.4) 十五年, 献侯卒, 子烈侯籍立.
헌후 10년, 중산국(中山國)의 무공(武公)이 처음으로 즉위했다. 13년, 평읍(平邑)에 성을 쌓았다. 15년, 헌후가 죽자 그의 아들인 열후(烈侯) 조적(趙籍)이 즉위했다.
각주
1 集解地理志曰河南中牟県, 趙献侯自耿徙此. 瓚曰:「中牟在春秋之時是鄭之疆内也, 及三卿分晉, 則在魏之邦土也. 趙界自漳水以北, 不及此. 春秋傳曰『衛侯如晉過中牟』, 按中牟非衛適晉之次也. 汲郡古文曰『斉師伐趙東鄙, 囲中牟』, 此中牟不在趙之東也. 按中牟當漯水之北.」 索隠此趙中牟在河北, 非鄭之中牟. 正義按:五鹿在魏州元城県東十二里, 鄴即相州蕩陰県西五十八里, 有牟山, 蓋中牟邑在此山側也.
2 索隠系本云襄子子桓子, 與此不同.
3 集解徐広曰:「西周桓公之子. 桓公者, 孝王弟而定王子.」 索隠按:中山, 古鮮虞国, 姫姓也. 系本云中山武公居顧, 桓公徙霊寿, 為趙武霊王所滅, 不言誰之子孫. 徐広云西周桓公之子, 亦無所拠, 蓋未能得其実耳.
4 集解地理志曰代郡有平邑県.
권43. 조세가(趙世家) 열후(烈侯)
烈侯元年, 魏文侯伐中山, 使太子撃守之. 六年, 魏、韓、趙皆相立為諸侯, 追尊献子為献侯.
열후 원년, 위 문후(魏文侯)가 중산국을 함락시키고 태자 격(擊)을 파견해 지키도록 했다. 6년, 위씨, 한씨, 조씨가 모두 서로 제후가 되고 조씨는 헌자(獻子)를 헌후(獻侯)로 추존했다.
烈侯好音, 謂相国公仲連曰:「寡人有愛, 可以貴之乎?」公仲曰:「富之可, 貴之則否.」烈侯曰:「然. 夫鄭歌者槍、石二人,1) 吾賜之田, 人萬畝.」公仲曰:「諾.」不與. 居一月, 烈侯従代來, 問歌者田. 公仲曰:「求, 未有可者.」有頃, 烈侯复問. 公仲終不與, 乃称疾不朝. 番吾君2)自代來, 謂公仲曰:「君実好善, 而未知所持. 今公仲相趙, 於今四年, 亦有進士乎?」公仲曰:「未也.」番吾君曰:「牛畜、荀欣、徐越皆可.」公仲乃進三人. 及朝, 烈侯复問:「歌者田何如?」公仲曰:「方使択其善者.」牛畜侍烈侯以仁義, 約以王道, 烈侯逌然.3) 明日, 荀欣侍, 以選練挙賢, 任官使能. 明日, 徐越侍, 以節財倹用, 察度功徳. 所與無不充, 君説. 烈侯使使謂相国曰:「歌者之田且止.」官牛畜為師, 荀欣為中尉, 徐越為内史,4) 賜相国衣二襲.5)
열후는 음악을 좋아해 재상 공중련(公仲連)에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에게 존귀한 지위를 주어도 될까?” 하고 묻자, 공중련이 “부유하게 해주는 것은 괜찮지만 존귀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안 됩니다.”라 했다. 열후가 “옳은 말이오. 정나라 가수 창(槍)과 석(石) 두 사람에게 나는 전지(田地) 각 만 무(畝)씩을 하사하겠소.”라 했다. 공중련은 “좋습니다.”라고 대답만 하고서는 주지 않았다.
한 달이 지나 열후가 대(代) 땅에서 돌아와 공중련에게 가수에게 전지를 하사하기로 한 일에 대해서 물었다. 공중련은 “마땅한 곳을 물색하고 있는데 적합한 곳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얼마 지나서 열후가 다시 물었다. 끝내 주지 않았던 공중련은 병을 핑계대며 조회에 나오지 않았다.
파오군(番吾君)이 대(代) 땅에서부터 와서 공중련에게 “그대는 진실로 선정을 베푸시려는 마음이 있으시기는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방법을 모르고 계십니다. 지금 공중련 그대가 조나라 재상의 지위에 있은 지 4년이나 되었는데 일찍이 인재를 추천한 적이 있습니까?” 하고 물으니 공중련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파오군이 “우축(牛畜), 순흔(荀欣), 서월(徐越)은 모두 추천할 만합니다.”라고 해 공중련은 이 세 사람을 추천했다. 공중련이 조정에 나가자, 열후가 다시 “가수의 전지는 어떻게 되었는가?”라고 물었다. 공중련이 “마침 좋은 곳을 고르게 하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우축은 열후를 모시면서 인의(仁義)의 도리를 충고하고 왕도(王道)로써 제약하기를 권유하니 열후는 흔쾌히 동의했다. 다음날 순흔이 열후를 모시면서 뛰어나고 현명한 인재를 등용하고 관리로 임명할 때도 재능 있는 사람을 쓸 것을 건의했다. 그 다음날, 서월이 열후를 모시면서 재물을 절약하고 씀씀이를 절제하며 신하들의 공적과 덕행을 살펴 헤아릴 것을 건의했다. 그들이 건의한 말은 충분한 일리가 있어 열후는 매우 기뻐했다. 열후는 사람을 재상에게 보내 “가수에게 전지를 하사하는 일은 잠시 중단하라.”라 했다. 그리고는 우축을 사(師)에, 순흔을 중위(中尉)에, 서월을 내사(內史)에 임명하고, 재상에게 옷 두 벌을 하사했다.
九年, 烈侯卒, 弟武公立.6) 武公十三年卒, 趙复立烈侯太子章, 是為敬侯. 是歳, 魏文侯卒.
9년, 열후가 죽자 동생 무공(武公)이 즉위했다. 무공이 재위 13년 만에 죽자, 조나라는 다시 열후의 태자 장(章)을 즉위시키니 그가 바로 경후(敬侯)이다. 이해에 위문후(魏文侯)가 죽었다.
각주
1 索隠槍, 七羊反. 槍與石二人名.
2 集解徐広曰:「番音盤. 常山有番吾県.」 正義括地志云:「番吾故城在恆州房山県東二十里.」番蒲古今音異耳.
3 正義逌音由, 古字與「攸」同. 言牛畜以仁義約以王道, 故止歌者田. 攸攸, 気行貌, 寛緩也.
4 正義漢書百官公卿表云:「(少府)内史, 周官, 秦因之, 掌治京師.」
5 集解単複具為一襲.
6 索隠譙周云:「系本及説趙語者並無其事, 蓋別有所拠.」
권43. 조세가(趙世家) 경후(敬侯)
敬侯元年, 武公子朝作亂, 不克, 出奔魏. 趙始都邯鄲.
경후 원년, 무공의 아들 조조(趙朝)가 난을 일으켰다가, 성공하지 못하고 위(魏)나라로 도망갔다. 조나라는 처음으로 한단에 도읍을 정했다.
二年, 敗斉于霊丘.1) 三年, 救魏于廩丘, 大敗斉人. 四年, 魏敗我免台. 築剛平2)以侵衛. 五年, 斉、魏為衛攻趙, 取我剛平. 六年, 借兵於楚伐魏, 取棘蒲.3) 八年, 抜魏黄城.4) 九年, 伐斉. 斉伐燕, 趙救燕. 十年, 與中山戦于房子.5)
2년, 영구(靈丘)에서 제나라 군대를 물리쳤다. 3년, 늠구(廩丘)에서 위(魏)나라 군대를 구원하고 제나라 군대를 대파했다. 4년, 위(魏)나라 군대가 토대(兎臺)에서 조나라 군대를 무찔렀다. 조나라에서는 강평(剛平)에 성을 쌓아서 위(衛)나라 공략의 근거지로 삼았다. 5년, 제나라와 위(魏)나라가 위(衛)나라를 대신해서 조나라를 침공해 조나라의 강평을 점령했다. 6년, 초 나라에서 병력을 빌려서 위(魏)나라를 공격해 극포(棘蒲)를 점령했다. 8년, 위(魏)나라의 황성(黃城)을 함락시켰다. 9년, 제나라를 정벌했다. 제나라가 연(燕)나라를 공격하자 조나라는 연나라를 구원했다. 10년, 중산국과 방자(房子)에서 교전했다.
十一年, 魏、韓、趙共滅晉, 分其地. 伐中山, 又戦於中人.6) 十二年, 敬侯卒, 子成侯種立.
11년, 위(魏), 한(韓), 조(趙) 세 나라가 공동으로 진(晉)나라를 멸망시키고 그 땅을 나누어 가졌다. 중산국의 도성을 공격했고, 또 중인(中人)에서 교전했다. 12년, 경후가 죽자 아들 성후(成侯) 조종(趙種)이 즉위했다.
각주
1 集解地理志曰代郡有霊丘県.
2 正義免台、剛平並在河北.
3 正義今趙州平棘県, 古棘蒲邑.
4 集解杜預曰:「陳留外黄県東有黄城.」 正義括地志云:「故黄城在魏州冠氏県南十里, 因黄溝為名.」按:陳留外黄城非随所別也.
5 正義趙州房子県是.
6 集解徐広曰:「中山唐県有中人亭.」 正義括地志云:「中山故城一名中人亭, 在定州唐県東北四十一里, 春秋時鮮虞国之中人邑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