째 올케언니를 바라보며
원보숙
‘여자는 약하나 어머니는 강하다’라고 한다. 도시에서 곱게 자란 딸이 우리 집에 시집와 고생하며 산 넷째 올케언니를 생각해 본다. 조상 대대로 이어 온 고향 집은 우리의 꿈을 키운 곳이다. 그 집을 넷째 올케언니가 지켜주지 않았으면 어디 가서 어린 시절 모습과 친정의 정을 느껴볼 수가 있을까! 그간 어려운 일 다 이겨내고 고향 집을 꿋꿋하게 지켜 준 것이 고맙다. 덕분에 옛집에서 형제들과 마주 앉아 지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45년 전 일이다. 초록 물결 넘실대던 초여름이었다. 넷째 오빠 결혼 전 어느날, 천안에서 볼일을 보고 집에 가는 공주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버스가 막 떠나려 할 때, 넷째 오빠가 황급히 올라탔다. 반가움에 “오빠!”하고 불렀으나 듣지 못했다. 그는 자리도 앉지 않은 채 창밖을 내다보고 싱글벙글 웃으며 누군가에게 손을 흔들었다. 내 눈도 자연스럽게 창밖을 향했다. 단발머리에 흰 블라우스를 입은 아가씨가 미소 지으며 배웅을 하였다. 그들 모습이 아름답게 보였다. 잠시 후 오빠는 행복한 눈빛으로 옆에 와서 이야기보따리를 술술 풀었다. 데이트하고 온 그녀가 무척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얼마 전에 선을 본 사람이라고 했다.
단풍잎이 곱게 물드는 그해 가을, 그녀는 우리 집 식구가 되었다. 천안에서 살다 농촌으로 시집온 것이다. 그 무렵에 넷째 오빠는 친정에서 운영하는 정미소를 맡아 하겠다며 서울 직장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부모님은 같이 사는 것을 원하지 않았으나 그들 부부가 결정해서 어른을 모시고 큰집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부모님 모시고 산다는 자체와 도시에서 살다 농촌 생활을 한다는 것에 어려움이 있었으리라. 어른과 살다 보니 둘이 다정한 신혼의 시간도 없었다. 친정에 가 보면 시집온 지 얼마 안 되는 새댁이 큰살림을 항상 말없이 했다. 큰집이라 시할머니, 시부모에 딸린 손님이 끊이지 않았다. 교직 생활로 객지에 나가 사는 형들 대신 큰며느리 역할을 한 셈이다. 일 년에 여러 번 지내는 제사와 동네잔치를 해야 하는 어른들 생신 등 행사와 일이 많았다. 속으로는 힘들었겠으나 어려운 기색 없이 묵묵히 집안일을 하였다. 형제, 친척들이 자주 드나들어도 늘 웃는 모습으로 마음 편하게 대했다.
이런 모습을 보는 오빠 마음은 고맙지만 한편 미안하고 안쓰러운 생각도 들었겠지! 나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비슷한 또래인 언니를 볼 때마다 왠지 빚진 마음이었다. 그래서 물건 살 때 종종 언니네 가족 물건도 함께 사서 보냈다. 우리 집에 복덩어리가 들어왔다고 동네에서 칭찬이 자자했다. 부모님도 착한 며느리에 대한 사랑이 많았다. 부모님은 조카들 취학 전에 젊을 때 재미있게 지내라고 오빠네 가족을 분가시켰다. 그 후 5년쯤 지났을 때 아버지가 67세에 의료 사고로 갑자기 세상을 하직하였다. 오빠네는 심사숙고 끝에 큰 집으로 다시 들어왔다. 언제부턴가 오빠가 몸이 안 좋아지기 시작했다.
어느 날 장맛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여름! 사랑하는 넷째 오빠는 간이 안 좋아 몇 해 치료 중 끝내 중년을 갓 넘기고 생을 마감했다. 그는 결혼 후 일만 하다 초등학생인 자녀와 큰집 살림의 무거운 짐을 아내에게 남기고 떠났다. 언니에게 호강도 제대로 못 시켜주고 다정다감하게 대할 틈도 없었다. 그래도 언니는 오빠가 좋은 사람이었다며 많이 슬퍼했다. 무책임한 사람! 아내에게 진 빚 어떻게 갚으려고 떠나버렸나! 솔직히 오빠와의 이별보다 남아있는 언니가 가여워 마음이 더 아팠다. 남편을 하늘나라로 보내고도 혼자서 집안의 대소사를 여전히 도맡아 했다. 평범한 삶이 아니건만 싫은 내색 하지 않았다. 조카들과 자기 몸 돌보기도 힘들었을 텐데 어른 모시고 시댁 가족 행사도 예전처럼 거침없이 해냈다. 일찍 혼자 된 언니는 더 강한 모습을 보였다. 떠나간 사람이 왜 안 보고 싶겠고 세상이 힘들다는 걸 왜 느끼지 못하겠는가! 그러나 내색하지 않고 앞만 보며 살았다. 조카들을 가르치기 위해 일도 닥치는 대로 했다.
‘복 받을 거다, 우리 언니 꼭 복 받을 거다!’ 이런 생각을 하며 연민의 정으로 바라보는 마음뿐 도움은 되어 주지 못했다.
세월이 약이라고 올케언니의 슬픔은 옅어졌다. 열심히 산 보람으로 조카들도 잘 자랐다. 고진감래! 지금은 아들, 딸네 가족과 남부럽지 않게 국내외로 여행 다니며 재미있게 지낸다. 남편의 빈자리에 자녀들이 가져다준 새 가족과 행복을 누리고 있다. 이제는 당당하고 여유 있게 지내는 모습을 보면 다행스럽고 고맙다
‘언니! 고마워요! 남편도 없는 시댁에서 큰 며느리 역할 하며, 무엇보다 홀로 조카들 키우고 고향 지키느라 수고 많았어요. 남은 삶 건강하고 행복하게 사세요. 사랑합니다. 고맙습니다.’ 사랑의 마음을 담아 진실한 내 마음을 전한다.
신록이 푸르른 초여름이 되니 일찍 떠난 넷째 오빠와 올케언니 생각에 가슴이 뭉클해진다. 결혼 전 버스 터미널에서 두 사람이 손을 흔들던 모습이 그려진다. 흰 블라우스를 입고 오빠를 향해 웃던 올케언니의 모습이 얼마 전 일인 듯 떠오른다. 지금의 미소가 그때와 같아 보여 흐뭇하다.
그동안 홀로 열심히 삶을 산 언니를 생각해 본다. 고생 끝에 낙이 온 넷째 올케언니의 삶을 존경한다. 지난 시절 어려움 이겨내고 고향을 지켜 준 언니에게 고마움을 전하며 우리는 옛집에 마주 앉아 추억의 웃음꽃 피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