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겨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언젠가 그들이 사는 곳을 방문해보고 싶다.
주간한국 에서 퍼옴.
전북대 김인희 연구원
고구려가 멸망(668년)한 뒤, 보장왕을 비롯한 20만 명에 이르는 고구려 유민이 당나라로 끌려갔다. 그중 10만 이상으로 추정되는 고구려인은 다시 중국 남방으로 이주해야 했다.
이들 고구려 유민은 어떻게 되었을까?
역사 속 기록으로만 존재하며, 까맣게 잊고 지냈던 고구려인이 1300년이 지나 되살아났다. 과거의 역사가 아닌 '현재의 역사'로, 중국 소수민족인 먀오(苗)족을 통해서다.
김인희(43) 전북대 쌀·삶·문명 연구원 전임연구원은 최근 출간한 저서
<1300년 디아스포라, 고구려 유민>(푸른역사)에서 먀오족의 뿌리가 고구려 유민이라고 밝혔다.
"고구려가 멸망한 이듬해 20만 명의 고구려 유민이 당나라로 끌려갔죠. 그들은 한족(漢族)에 동화되지 않고 하나의 민족을 형성했어요. 중국 남방의 소수민족인 먀오족으로, 고구려 유민이 주축이 돼 주변의 여러 민족과 결합해 형성된 민족입니다."
먀오족은 중국 56개 소수민족 가운데 인구가 다섯 번째로 많은 민족으로, 구이저우(貴州)성 등 남부 지역을 중심으로 중국에 800만 명이, 동남아시아와
미국,
캐나다, 프랑스 등에 200만 명이 거주하고 있다.
김인희 연구원은 책에서 먀오족이 고구려 유민의 후예라는 근거로 역사학, 고고학, 인류학, 신화학, 복식학 등 다양한 연구방법을 동원해 19가지 증거를 제시하고 있다.
김 연구원은 그러한 결론을 얻기까지 10여 년간 먀오족과 고구려와의 관계를 연구하면서 고문헌을 뒤지고 수차례 현지를 답사했다.
그가 먀오족과 인연을 가진 것은 1990년 대 중후반에
베이징에서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하는 과정에서이다. 중국 소수민족의 창세신화를 연구하던 중 먀오족의 것이 우리의 거인신화, 난생신화 등과 공통적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 그리고 먀오족에 대한 연구를 심화해 <한국과 먀오족의 창세신화 비교연구>로 중국 베이징 중앙민족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가 먀오족과 고구려 유민과의 관계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2000년 중국 광시좡족(廣西壯族) 자치구에서 열린 국제학술대회였다. 학술대회 중 들른 먀오족 마을에서 고구려인의 바지인 '궁고'를 입은 먀오족(흰바지야오족)을 발견한 것이다.
"중국 남방 민족들은 무덥고 습한 날씨 때문에 고대에는 경의(脛衣)라고 하는
다리 부분만 감싸는 바지를 입었습니다. 지금은 한족의 영향을 받은 바지를 입구요. 그런데 먀오족인 흰바지야오족은 가랑이에 큰 천을 덧대
엉덩이 부분이 풍성한 궁고를 입고 있었어요. 남방 민족 중 '왜 먀오족만 궁고를 입을까?'하는 의문을 갖게 됐죠."
그가 고구려 유민과 먀오족의 관계에 결정적인 확신을 가진 것은 중국 문헌에 나타난 고구려의 흔적에 기인한다.
"2000~2005년 국내에서 고문헌을
번역하던 중 고구려 유민이 남방으로 끌려간 지 40~80년 이후에 쓰인 <광이기(廣異記)>란 책에 후난성(湖南省) 일대에 '고려'라는 지명이 등장하고, 당나라 작품인 '기고희(寄故姬)라는 시에 후베이성(湖北省) 남부에 고려라는 지명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먀오족과 고구려 유민이 관련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됐죠. 틈나는 대로 먀오족 지역을 방문하곤 했는데, 문헌을 통해 확신을 하고는
2006년 아예 중국으로 들어갔습니다."
김 연구원은 먀오족의 기원부터 찾아 후베이성의 우한(武漢)에 1년, 산둥성(山東省)에 2년 반을 머물며 연구를 하였다. 이후 다시 윈난성(雲南省)으로 가 1년간 머물며 그동안 답사하지 못한 지역을 현장 답사했다.
98년부터의 답사와 2000년대 문헌 연구, 2006년부터 새로운 지역을 답사하면서 먀오족과 고구려 유민의 연계성은 더욱 분명해졌다.
우선 먀오족의 역사, 즉 동이-삼묘-남만-먀오족으로 이어지는 일목요연한 역사가 사실과 다른, 1950년대 이후 중국 학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역사'라는 사실이다. 먀오족은 송나라 때 문헌인 <노학암필기(老學庵筆記)>에 '가뤼(고려의 변형)'라는 민족으로 처음 등장하는데, 삼묘와는 3000년의 시차가 있고, 동이와도 관련성이 없다. 또 반호(개)를 숭배하는 역사를 지닌 남만과도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한다.
먀오족 여성들이 입는 치마에 그려진 두 개의 강과
장례식 때 부르는
노래(지로경)는 고구려 유민의 역사를 함축한다.
"서부 먀오족은 조상이 눈 내리고 얼음이 얼고 밤이 긴 곳에서 전쟁에 패해 두 개의 강을 건너 왔다는 전설이 있는데, 치마의 두 강은 중국 황하와 장강(양자강)을 뜻하는 것으로 고구려 유민의 이동 경로를 말해줍니다. 동부와 중부 먀오족은 죽으면 고향(고구려)으로 돌아간다고 믿는데 장례 때 부르는 노래에 '해 뜨는 동방의 끝', '조상이 사는 곳' 등 고구려를 상징하는 표현이 많아요."
김 연구원은 고구려 유민 중 랴오닝성(遼寧省) 일대 차오양(朝陽)의 고구려인은 중국 남방 서부 먀오족의 뿌리가 됐고, 평양을 출발해 산둥성 라이저우(萊州)에 집결한 고구려인은 동·중부 먀오족을 형성했다고 설명한다.
그밖에 먀오족은 남방 민족 가운데 유일하게 '쌀', '벼'와 같은 도작 용어를 사용하고, 고구려 주몽 신화와 마찬가지로 시조가 알에서 태어나는 난생(卵生)신화를 갖고 있다. 형이 죽은 후에 형수와
결혼하는 풍습, 나무로 깍은 신상을 동굴에 모셨다가 축제 때 모시고 와서 축제를 하는 것이 고구려와 마찬가지이고, 체질 인류학적 특징이 한국인과 흡사하다.
이러한 고구려 유민, 그리고 이들의 후예인 먀오족은 오늘날 어떤 의미가 있을까?
"고구려 유민은 한국 역사상 최초의 '코리안 디아스포라(Diaspora, 흩어진 사람들)'였고, 이 디아스포라의 역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고구려 유민들은 사라진 게 아니라 정체성을 갖고 살아 남았지만, 여전히 소수자이자 주변인, 이방인으로 중국과 세계 각지에서 흩어져 살고 있습니다."
김 연구원은 먀오족이 그저 중국의 수많은 소수민족 중 하나가 아니라 역대 중국 정부의 이민족 정책의 실상을 파악하게 해주는 거울이라고 말한다. 오늘날 중국의 소수민족, 먀오족에 대한 정책이 옛 당, 송, 원, 명, 청에 이르기까지 고구려 유민(먀오족)에 가한 몰아내기와 몰살로 일관한 것과 본질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또한 중국의
동북공정 프로젝트와 관련해서도 먀오족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김 연구원은 말한다. 중국이 고구려를 중국사에 포함시키는 주요 근거는 고구려가 중국 왕조와 조공책봉을 유지했다는 점과 고구려 유민이 한족에 융합됐다는 것인데, 먀오족을 형성한 고구려 유민은 청나라 초까지 1000년 동안 자치권을
행사하며 독립된 민족을 이뤘고, 지금도 중국 밖에 200만 명이 거주해 완전히 중국에 흡수된 것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그에 따르면 먀오족은 중국내 소수민족 중 조상숭배를 통해 확고한 정체성과 결속력, 자부심을 갖고 있으며, 중국 내에서 민족의식이 가장 강한 민족 중의 하나라고 한다. 특히 구이저우성 동부 먀오족은 '저항' 정신이 강하다고 하는데 평양 출신의 반골집단이 기반을 이룬 때문으로 해석된다. 예나 지금이나 고구려를 닮은 먀오족이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인류학자인 게디스는 "세계 역사상 수많은 고난을 겪으면서도 끝까지 굴복하지 않은 두 개의 민족이 있는데 하나는 유대인이고 다른 하나는 먀오족이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먀오족과 관련, 김 연구원은 향후 "동남아, 미국 등지에 있는 먀오족에 대한 연구를 해 고구려와의 연관성을 더 찾아보겠다"고 한다. 고구려 디아스포라가 과거사가 아닌 현재의 역사임을 그는 진지하게 전했다.
첫댓글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