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봄에 최규하 대통령은 양김씨가 민주 선거를 통해 정권을 승계할 것을 제안하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양김씨는 선거를 거부하고 서로 자기가 대통령 자리를 차지하려고 하였다. 당시 상황으로 돌아가 보면 최규하 대통령이 국민이 직접 선거를 통해 선출한 대통령에게 정권을 이양해 줄 뜻을 분명히 밝혔기 때문에 양김씨는 정권 승계 준비를 바쁘게 하고 있었다. 그러면 최규하 대통령 정부가 간선제 선거법을 직선제 선거법으로 개정하는 작업을 하고 있을 때 왜 양김씨는 선거법 개정을 방해하고 무조건 최규하 대통령이 당장 하야하라고 시위하였을까?
그것은 민주화 운동이라기보다 양김씨가 서로 자기가 민주화 투사라는 이미지를 국민에게 심어주기 위한 경쟁이었다. 4월에는 양김씨 지지자들이 각목 들고 서로 싸웠다. 그런데, 김대중은 문익환 목사와 이해찬 학생과 자기 아들 김홍일씨 등이 그 선두에 있던 재야 세력을 데리고 5월 22일로 그 거사일이 예정되었던 쿠데타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김대중이 그 쿠데타 명을 전국적 민중봉기라고 붙였다는데에 오늘날 일본의 역사 왜곡의 단서가 있다. 김대중이 쿠데타의 강수를 선택한 속뜻은 김영삼씨 견제였다. 워낙 김영삼씨 지지 여론이 높았기 때문에 선거로는 승산이 없었다고 여겼던 듯하다. 그러면, 김영삼씨 모르게 진행시킨 이 쿠데타 명칭 "전국적 민중봉기"라는 말은 어디서 유래한 것일까?
광주사태(그들 주장으로는 광주 민주화운동) 배후 세력 중 하나로 유공자 포상을 받았던 이해찬이 문교부 장관이 되었을 때 합법화를 지원한 전교조가 국사 교과서 왜곡 작업을 시작하였다. 그런데, 왜 우리는 전교조가 국사 교과서 왜곡을 시작한 때와 더불어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이 시작되었는지를 물어 보아야 한다. 광주사태 운동권이 누구였던가? 오늘날 노무현과 열우당처럼 극우였다. 단지 미국 문화원이 한국 땅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방화하며 "미국인은 한국을 떠나라"고 그들이 외쳤을 때, 사람들은 그런 국수주의적인 민족주의자들을 가리켜 극우라고 부른다.
자, 그러면 광주사태의 주류, 즉 한국의 극우들로 구성된 전교조가 막강한 파우어를 가지고 국사 교과서 왜곡을 시작하였을 때 왜 일본도 역사 교과서 왜곡을 시작하였는지 살펴보자. 한국에 전교조 등 극우 세력이 등장함과 더불어 일본에서 극우 세력이 고개를 들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일본의 극우는 친공산주의는 아닌데, 비해 한국의 극우는 친공산주의자들이다. 즉, 주사파와 전교조 등의 극우 단체들은 그들의 극수적 민족주의에 있어서는 극우이면서, 그들의 공산주의, 친공산주의 혹은 김일성 수령 숭배주의에 있어서는 좌익으로 분류된다. 해방 정국의 남로당의 후계자들이라는 점에서 그들은 흔히 좌익으로 알려져 있다. 소위 친북 좌파라고 불리는 이들이 그들이다.
무엇이 독도 문제인가? 김대중이 1998년에 노무현 시켜 일본과 신어업협정을 맺었다. 그리고 노무현 정부의 어용 언론들이 여론몰이로 시위를 부추겨 일본 극우들에게 막대한 이익을 가져다 준 것이 독도 문제이다. 사실, 대다수의 일본 국민들은 독도에 대해 아무런 관심이 없으며, 일본 극우가 여론의 관심을 끌 재간이 없다. 그래서 그들은 한국의 노사모를 이용하였다. 그리고 일본 극우를 위해 무보수 심부름을 하던 이들이 일장기를 붙태우는 장면이 일본에 그대로 생방송되었다. 전 일본 언론이 독도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러한 노무현의 여론몰이식 외교는 최악의 외교였다. 그러면 왜 이런 문제가 초래되었는가? 그 문제의 뿌리는 전교조의 국사 왜곡에 있다.
김대중이 1980년 5월 22일로 예정되어 있었던 쿠데타 명칭을 "전국적 민중봉기"로 정한 것은 민중이 역사의 주인이라는 좌익 사상의 반영이다. 80년대 좌익 운동권 노선은 NL, PD, CA 등 세 가지로 나뉘어진다. 이 중 NL은 주체사상파요, CA는 민중이 주인 되는 국가를 건설하자는 강경 좌파였다. 그리고, 이 CA 의 정신적, 이론적 지주가 김대중과 문익환 목사였다. 북한이 문익환 목사 기념우표를 발행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런 전후 관계를 모르는 이들이 광주사태는 민주화 운동이었다는 헛소리를 했지만, 사실 "전국적 민중봉기" 이론가는 문익환 목사였으며, 그의 민중봉기 이론은 사실 민주주의가 불가능하게 하는 이론이었다.
문익환 목사는 민중이 역사의 주인이라는 주장을 하였는데, 이것은 기독교 신학에 정면 위배되는 주장이다. 기독교 신학에서 역사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시다. 그럼에도 그들은 이런 이단적 사상을 진보라고 부르는 뻔뻔스러움까지 보였으며, 그 사상이 그대로 386 대학생들과 청년들에게 먹혀 들어가 친공산주의적 좌익 운동권이 1980년대에 형성하게 되었으며, 그 흐름이 급기야 노무현 정권을 탄생시켰다. 김대중은 그의 후계자를 노무현으로 정했으며, 문익환 목사의 아들 문성근은 노사모를 조직하여 노무현 돌풍을 일으키며 그를 청화대에 입성시키는 일등 공신이 되었다.
좌익이 정권을 잡는데는 민중이 역사의 주인공이라고 주장한는 전교조의 왜곡 교과서도 한 몫을 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 두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 문제는 정치적 문제이다. 1980년에 그들은 자기네가 민중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김대중이 집권한 후에 민중은 누구인가? 민중이 주인이라고 했는데, 그 민중이 진권층이 되었을 때 민중이 없어졌다. 민중이 없어졌을 때 광주사태 정신도 없어졌다.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사모가 등장한다. 지금 노무현이 말하는 민중은 노사모이다. 그리고 노사모가 아닌 국민은 개혁 대상으로 매도된다. 친일파의 후손도 노사모에 가입하면 면죄부를 받고, 독립운동가의 자손도 노사모에 가입하지 않으면 친일파로 매도되는 세상이다. 이렇듯 노사모는 정당 아닌 정당의 역할을 하며, 노빠들의 여론몰이가 한국 정치를 움직이고 있으며, 이번 독도 문제도 노사모가 일본 극우를 위한 무보수 심부름을 하여 키운 것이다.
전교조가 민중이 역사의 주체라고 국사 왜곡을 할 때 생기는 또 하나의 문제는 국제적 문제, 세계사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의 문제이다. 만일 한국에서 민중이 역사의 주체라면 일본에서도 미국에서도 역사의 주체는 민중이란 말인가? 만일 일본이나 미국이나 유럽 국가들이 그렇게 가르친다면 우리가 그들의 학문성에 대하여 얼마나 실망할 것인가? 만약 민중의 역사의 주체요, 따라서 민중이 하는 일은 무조건 옳은 것이라며,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로 삼은 것도 일본 민중이 한 것이요 따라서 무조건 옳다는 말인가? 전교조의 이런 무식한 역사관의 관점은 국제 사회를 이해하는 눈을 흐리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이런 흐?눈을 가진 노무현 정부가 한국 외교의 시계를 백년 전보다 더 뒤로 돌려놓았다.
노빠들은 한국이 반미 국가가 되는 것이 애국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미국이 일본 편이 되게 하는 것이 애국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국제 사회에서 한국을 고립시키는 것이, 한국이 과거에 중국의 식민지였다는 중국의 주장에 손을 들어주는 중국사대주의가 애국이라고 주장한다. 이렇듯 노빠들의 극우 성향은 구한말 대원군의 쇄국 정책을 빼닮았다. 그런데, 백년 전에는 미국을 우리 편으로 끌어들일 희망이라도 있었지만 지금 이렇게 미국과 갈라지는 것은 영영 이별하는 것이다. 생각해 보라. 미국이 우리를 더 필요로 하는가? 아니면 한국이 미국을 더 필요로 하는가? 이렇게 노빠들이 바라는 대로 미국이 한국 편에서 일본 편으로 바뀌게 하여 손해를 보는 쪽이 어디이겠는가. 노빠들은 무조건 반미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전교조의 반미교육 그 자체가 실은 역사 왜곡이 아니던가.
사실, 전교조의 국사 왜곡은 좌파 교수가 보아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너무 심하였으니 한 좌파 교수의 입을 빌려 두어가지만 사례를 살펴 보기로 하자. 건국대 신복룡 교수는 지난 1월 25일(2005년) 교과서 포럼이 주최한
『고등학교 '한국 근·현대사'교과서 이대로 좋은가?』라는 제목의 심포지엄에서 금성출판사의 '한국 근·현대사'를 읽고 그 왜곡을 이렇게 지적한다: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대하여 금성교과서가 사실과 다르게 기술한 것은 용서될 수 없는 과오임을 먼저 밝힌 신교수는 의도적인 여운형 띄우기가 지니는 역사 왜곡의 문제를 이렇게 지적한다:
<< 건국동맹-건국준비위원회-인민공화국으로 이어지는
여운형을 해방 후 건국의 주도세력으로 적은
이 교재는 균형을 잃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여운형이 카리스마를 갖춘 탁월한 감각의 소유자였고,
국내파 독립운동가로서 아베 노부유키 총독으로부터
수권(授權) 교섭을 받았다는 잇점을 가지고 있었으며,
미군정이 그의 유창한 영어실력과
대중적 지지기반을 인정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여운형은 임시정부나 해방정국의 주도적
법통(法統)은 아니었다.
해방정국 구도를 설명할려면 여운형의 상대방이었던
우파 민족주의를 똑같이 다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금성출판사 필자들은 여운형을 강조하기 위해 그의 실수와
결함을 은폐했다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
친일 청산을 주장하는 이 교과서가 여운형의 도를 넘은 친일 행적에 대하여 침묵하는 것도 역사 왜곡임을 신교수는 이렇게 토론한다:
<<그러면서도 여운형이 임정시절 일본밀정 아오키에게
임정기밀을 누설한 사실이라던지,
조선총독 고이소 구니아키를 찾아가서
대동아전쟁에 협력할 것과, 황국신민 선서를 한 사실,
조선총독으로부터 정권 인수를 교섭하면서
아베 노부유키로부터
지금 돈으로 20억원을 받았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있다.
일본군의 싱가포르 점령을 찬양하는 여류시인 노천명의 시를
소개하면서 여운형이 조선총독을 찾아가서 싱가포르 점령을
축하한 사실은 거론하지 않았다.
노천명을 친일파로 비판했다면 당연히 여운형도 친일파로
비판했아야 균형있는 역사 기록이라고 생각한다. >>
이 외에도 심한 국사 왜곡의 사례들을 지적한 신교수는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 가지 지적하고 싶은 것은 한국의 민중주의자들은 겸손하지 않다는 점이다. 민주화가 자신들의 투쟁의 결실이라고 바부하고 있는 그들은 향후 역사도 자신들이 주역이 되어야 한다는 미망에 집착하고 있다. '민중이 역사의 주인'이라는 데는 상당한 논리적 무리가 있다.> 이 심포지엄에서 신 교수의 논지는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사발전을 선박의 항진(航進)에 비교한다면, 민중은 선체의 기관일 수는 있어도 키(舵)는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국 현대사의 '민중주의'는 하나의 신화(神話)이며 우리는 이를 깨트려야 할, 하나의 미망(迷妄=착각, 환상)이다. >
역사를 왜곡해 온 이들이 과거사 청산을 주장한다. 그들은 민중이 역사의 주인이라는 주장을 해왔다. 그들은 민중이 역사의 주인이니깐 1980년 5월에 김대중이 전국적 민중봉기를 일으켜 집권하려고 했던 것은 정당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만약 한국에서 민중이 역사의 주인이면 외국에서도 민중이 역사의 주인인가? 만약 민중이 역사의 주인이라면 여론몰이에 있어서 노사모의 원조인 일진회가 구한말에 읋사보호조약 청원을 위한 백만인 서명 운동을 했던 일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리고, 만약 한국에서만 민중이 역사의 주인이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객관성 상실을, 따라서 한국인이 쓴 역사 서적은 국제사회에서 인정을 받을 수 없음을 의미한다.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을 시정하는 문제는 본래 역사학적 논리 대결의 문제이다. 민중이 역사의 주인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일장기 화형식 장면이 일본 뉴스에 보도되게 하면 된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이것은 일차적으로 정연한 역사 논리의 문제이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강만길 교수와 한홍구 교수같은 픽션 소설가들이 역사가를 자처할 때 국제사회에서 한국인이 쓴 역사가 정론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더구나 민중이 역사의 주인이라는 전교조의 역사 왜곡은 결코 국제학계에서 정론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하나의 사회과학으로서의 역사학은 객관적 사실을 요구한다. 그런데, 한국 좌익이 민중이 역사의 주인이라고 주장할 때 그것은 주관적 관념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렇게 왜곡된 교과서들이 한국에서 판을 칠 때 일본 역사학과의 논리 대결에서 스스로 불리해지는 것이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일본 역사 교과서 왜곡의 주범은 한국 좌익이었던 것이다.
* 5.18 군인 희생자 보상 문제 챙기기로 약속하신 원희룡 의원 을 클릭하시면 광주사태를 주제로 한 지만원 박사와 원희룡 의원의 팽팽한 토론을 들으실 수 있습니다.
* 북한의 공개총살 동영상 을 클릭하시면 지난 3월 16일 N-TV에 방영된 동영상 링크가 있습니다.
http://cafe.daum.net/issue21 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