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민자 수필원고 -우리는 열다섯 소녀-.hwp
우리는 열다섯 소녀
임민자
거실에 나란히 누운 친구들 얼굴에 팩이 덮여 있다. 만날 때마다 하나 씩 늘어가는 잔주름이 안타깝다. 모처럼 만난 친구들은 자정이 넘도록 수다들을 떨고 있었다. 세월을 훌쩍 뛰어 오늘 밤만이라도 열다섯 소녀들로 돌아가고 싶다.
학교를 다니면서 고향친구들 모임에 빠지는 횟수가 잦아졌다. 서로들 시간을 맞추다보면 많이 참석하는 쪽으로 날짜를 잡았다. 그때마다 아쉬우면서도 미안함을 금치 못했다. 올 해는 수업 시간표를 총무에게 카톡으로 찍어 보냈다. 사월 달에 모임 잡으면 시험기간이라고 은근히 협박을 했다.
사월 달은 내가 바쁜 줄 아는 친구들이 번개팅으로 뭉쳐 우리 집에 놀러왔다. 시합에 참석하는 각도 대표처럼 전주, 공주, 성남 그리고 운전해준 친구는 서울에 살았다. 가끔 전화로 소식을 주고받아도 반년 넘도록 못 본 친구들 얼굴에서 고향 냄새가 솔솔 풍겼다. 집안에 들어서자마자 부둥켜안고 깔깔거리며 그동안 참았던 수다들이 술술 터져 나왔다.
사춘기 때 헤어져 중년에 다시 만난 고향까마귀 들이다. 일 년에 서너 번 씩 모임을 갖고, 때로는 경조사 때 만나기도 한다. 여러 번을 만나도 서로 보듬는 것이 우리들 인사이기도 하다. 보릿고개 시절을 겪으며 어렵게 학교 다녔던 친구들이다. 만날 때마다 이야기보따리를 풀어 놓으면 한 편의 소설책이 된다. 우리들의 풋풋한 인연들이 반세기를 넘어 이제는 헤어 질 날이 머지않았다. 그래서 그런지 예전에는 의견차이로 가끔 언쟁을 벌렸다. 지금은 마음을 내려놓고 친구가 보고 싶으면 여럿이 뭉쳐 여행 삼아 찾아간다.
이른 새벽부터 우리 집에 오려고 끼니도 걸렀을 친구를 생각하며 정성껏 음식을 준비했다. 지글지글 굽는 고기보다 어린 시절 먹던 토속적인 음식을 만들었다. 찜 솥에 갓 찌어 낸 찰밥과 가을에 말려 둔 나물을 볶아 놓았다. 그리고 도토리묵과 북어 찜, 얼려놓은 굴을 녹여 부침으로 해 놓으니 그런대로 먹을 만했다. 또 냉장고에 아껴두었던 실치 구이까지 내놓아도 내 눈에 부족해 보였다.
어렵던 시절이 떠올라 나는 음식을 듬뿍 담는 버릇이 생겼다. 친구들은 내가 차려놓은 상차림을 보더니 모두 입을 다물 줄 몰랐다. 그런데 아쉬움이 있었다. 아무리 산해진미가 많다한들 이제는 소화를 못시키는 나이가 되었단다. 또 만나면 항상 노래방에서 꾀꼬리가 되었던 친구들도 어느 순간부터 움직이는 것보다 수다를 더 좋아했다. 한 해가 다르게 푸석해진 피부에 늘어나는 잔주름, 점점 쇠약해 가는 친구들과 세월 탓만 하고 있었다.
오래 전 교통사고로 친구하나를 잃었다. 그 충격으로 서로 애틋한 마음들이 커져만 갔다. 그런데 몇 년 전 성남 친구가 병원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병문안을 갔던 적이 있었다. 예쁘장한 얼굴에 한 쪽머리를 박박 깎아놓아 가슴이 메어 할 말을 못하고 병실을 나왔었다. 그랬던 친구가 지금은 나를 태우고 장거리 모임에 운전을 하고 갈 정도로 건강해 졌다.
처음 만났을 때는 우리들은 불행한 어린 시절 상처를 서로 털어 놓으며 위안을 받았었다. 그러다 사십 대 중반에는 자식 키우는 재미와, 남편들 흉을 보며 맘껏 웃었다. 오십 대부터는 자식들 결혼 걱정과 손자 손녀의 재롱을 화제로 삼았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우리들 미래를 생각하면 즐거웠던 마음들이 착잡해 진다. 우리 모두 한결같은 염원을 하고 있다. 요양원에 안 가고 잠자다 떠나고 싶다고 모두 한 입이 된다.
친구야! 오늘 하루만이라도 맛있는 것 먹고, 분단의 아픔이 서린 철원도 둘러보자. 그리고 못 다한 이야기보따리 다음 모임 때 맘껏 풀어 놓자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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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수필 2011년 9월호 등단
철원문인협회 전 지부장
갈말 도서관 모을동비 현 회장
세종시 문학나눔 우수도서선정(2016년)
강원 작가상수상(2018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