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택동과 쟝칭[江靑]의 사진
모택동과 강청[쟝칭, 문화대혁명시기 4인무리 중 하나, 중공중앙 문화대혁명영도소조 조장, 모택동의 부인]의 사랑,
과연 지금 외계에서 평가하듯이 강청은 모택동을 이용하기만 했던가? 아니면, 강청은 모택동의 의사를 왜곡했던가?
암튼 모택동과 강청사이는 풀수없는 수수께끼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들 사이에 진지한 사랑이 있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여인으로서 강청을 놓고 말하면 평생 자기의 이상과 사업과 사랑을 추구하는 과정에 모택동과 지울 수 없는,
낭만적이고 행복하고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을 사랑이 있었던 것이 사살이다. 30년대 상해에서 연극배우를 했었던
강청은 열혈청년들과 당시 중공의 근거지였던 연안으로 찾아와 모택동과 사귀게 되고, 또 사랑을 하게 된다.
강청이 모택동에 대한 사랑은 불과 같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강청은 사랑하기에 앞서 모택동을 숭배하기를
먼저 했던 것이다. 시인적인 기질과 영수의 사명을 타고난 모택동은 국민당군과 일본침략군과의 항전, 그리고
4억 인구를 반제반봉건반식민지 상태에서 구해낼 일념으로 그 낭만적인 면은 자연 마음속 깊이 잠자게 되었다.
그러나 느닷없이 다가선 강청이 나타남으로 모택동 심령 깊은 곳에 있는 낭만과 사랑의 싹이 돋아 나기 시작했고,
모택동에 대한 숭앙과 격정, 그리고 강청의 청춘의 생기가 흘러넘치는 아름다움은 모택동의 혈관속에 잠자던 낭만
의 사랑을 깨워주었다.
엄격한 중공 당의 삼엄한 조직기률앞에서 오로지 모택동과 같은 사나이 기질을 가진 사람만이 강청의 그 격정으로
충만된 낭만의 사랑을 받아 들일 수 있었으리라. 전하는데 따르면 모택동은 자기의 사직을 조건부로 그둘 둘의 결혼을
반대하는 당내 원로들로부터 강청과의 결혼을 얻어냈다고 한다. 모택동과 강청의 애정이야말로 특정된 시대의 격정적
인 사랑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모택동과 강청의 저 순진하고 티끌하나 없이 깨끗한 미소를 보라, 이들의 혼인을 반대했던 친구들도 그 미소에
기쁨을 금치 못하리라. 어려운 상황에서, 모택동과 같은 위인과 영수마저도 손수 물레로 실을 뽑아 천을 짜 옷을
지어 입어야 했던 중공의 어려운 시대, 그러나 강청이 모택동에 대한 사랑은 극악한 상황에서도 이어져갔다.
연인이 함께 공무를 처리하고 있는 중이다. 모택동은 성질이 굴강하고 일에 독립적이어서 다른 사람과 함께
사무를 보는 것을 싫어 한다고 한다. 그러나 모택동의 표정에서 우리는 그 안온하고 생활을 향수하는 만족됨을
볼 수 있고, 강청의 모습은 더 없이 진지하고 열심하는 모습이다. 모택동에 대한 숭배와 사랑과 존경에서일까?
사랑하는 연인 앞에서 더 아름다운 자태를 보여주고 싶어서일까?
강청의 행복에 젖은 미소와 모택동의 만족해하는 모습에서 이들의 마음을 얼마든지 읽을 수 있다. 이들의
미소는 그처럼 진실하고 솔직하고 해맑은 것 아니던가. 단순한 실리적인 목적에서라면 이렇지는 못하리라.
[님과 손을 잡고, 님과 해로하리!], "주석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의 학생이며 당신의 전사가 당신을 찾아
왔습니다." 이는 강청이 1991년 5월 13일, 자살하기 4시간 전에 침대보에 쓴 유일한 유언이다. 1976년 9월 6일,
강청, 장춘교, 왕홍문, 요문원 이 4인을 비롯한, 후에 중공 사학계에서 [4인무리]라고 하는 사람들은 중공 원로
들과 화국봉[당시 국무총리, 중공 부주석]에 의해 감금되고 당에서 청산되었다. 그 후 문화대혁명시기 저지른
죄과로 사형 유예집행을 선고받은 강청은 죽는 날까지 감옥에 갖혀 있다가 1991년 5월 13일, 침대보를 찢어 목을
매 자살했다.
이제 사진은 낡아 고색이 창연하다. 오로지 그 사진에 담긴 미소와 사랑과 낭만과 연정만이 사라지지 않고
향긋한 내음을 풍긴다. 모택동과 강청, 풀수없는 수수께끼요, 그 사랑은 영원히 미스터리로 남아 있을 것이다.
이들의 사랑을 얘기하며 [강청이 정치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더면]하고 애석해 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슬프게도
역사는 가설할 수가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