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일 별세한 양재봉 대신증권 명예회장은 ‘금융보국’의 신념아래 50여년간 금융 외길을 걸어왔다. 여러 번의 시련에도 보란듯이 재기한 ‘부도옹(不倒翁)’으로 광주·전남 출신의 대표 금융인이었다.
월급쟁이 은행원으로 출발해 대신증권을 비롯 대신생명보험, 대신경제연구소, 대신개발금융, 대신투자자문, 대신정보통신, 대신송촌문화재단, 대신팩토링 등 대신을 종합금융그룹으로 성장시킨 ‘대신그룹 성공신화’의 주인공이다.
1925년 나주에서 태어난 고인은 목포상고에서 거상의 꿈을 키웠고, 졸업하자마자 한국은행의 전신인 조선은행에 입행하면서 금융계에 첫발을 디뎠다. 전남대 상대를 졸업했으며, 한일은행 청량리 지점장으로 재직하던 1970년대 초 단자사를 설립해 금융업 경영자로 처음 나섰다.
1973년 미원그룹 임대홍 회장, 해태제과 박병규 사장과 함께 대한투자금융을 설립한 후 1975년 대신증권의 전신 중보증권을 인수했다.
대신증권은 재무구조 건실화와 국공채 위주의 상품 구성으로 5대 증권사 중 유일하게 1997년 금융위기를 무리없이 극복했고, ‘업계 최초’의 증권 전산화 투자로 1999년 이후 온라인 증권거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던 시기에 대신증권을 도약으로 이끌었다. 하지만 그의 경영 이력에는 긴 족적만큼 굴곡도 많았다.
양 회장의 최초 사업인 양조사업은 실패로 끝났고, 1977년에는 대신증권 사장 취임 넉 달 만에 당시 영업부장 ‘투자원금 보장 차용증’ 사태로 인해 손실을 본 투자자들에게 폭행을 당하기도 했다. 2001년에는 부실 계열사 편법 지원 혐의로 4500만원의 벌금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양 회장은 2001년 현업에서 물러난 뒤에는 사회공헌활동에 주력했다. 증권업계 최초의 순수문화재단인 대신송촌문화재단을 설립해 고향인 나주의 인재들을 위한 장학사업과 학술단체 연구활동비 지원, 소년소녀가장 및 사회복지시설 지원 사업 등에 공을 들였다.
/박정욱기자 jwpark@
첫댓글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
훌륭하신 선배님께서 별세하셨네요 ㅠㅠ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 ...아 우리학교 선배님이셨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