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4.10.火. 지금은 맑음이나 저녁에는 흙비가 내린다하네
04월08일, 일요법회 늬우스 데스크.
여보세요, 일요법회 앵커맨 밸라거사입니다.
이제는 계절적으로 조금 늦어버렸지만 그래도 인도는 여행하기에 매우 매력적인 곳입니다. 인도의 계절은 대략 삼분법으로 나누어 3,4,5월을 혹서기酷暑期, 6,7,8,9월을 우기雨期, 10,11,12,1,2월을 건기乾期로 분류한다면 혹서기는 여행을 하기에 조건이 가장 나쁜 경우가 될 것이고, 우기는 그런대로 좋을 수도 있을 것이고, 건기가 아무래도 한국 사람들에게는 생활하기에 좋은 환경이 될 것 같습니다만 인도라는 땅덩어리기 워낙 넓다보니 이런 분류가 모든 지역에서 일률적으로 통하지는 않는다는 것이 또한 매력입니다. 일 년 내내 봄이나 초여름 같은 남부 지역 바닷가도 있고, 또 일 년 내내 겨울 같은 히말라야 지역도 있으니까요. 대개 한국 사람이나 일본 사람들이 많이 가는 인도 중북부를 중심으로 혹서기에는 섭씨50도를 육박하는 더위가 심하기는 심한 모양으로 예전에 인도유학을 하던 동학들이나 친구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가만 앉아있어도 땀이 줄줄 흘러내려 공부고 끼니고간에 만사萬事가 귀찮아져서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시원할 수 있을까 요모조모 궁리를 해보았으니 뾰족한 수가 생각나지 않아 그만 잔머리 굴리기를 포기하고 핫한 더위에 백기白旗로 투항投降을 해버렸더니 그나마 눈곱만큼 나아지더라는 것이었습니다. 나도 그런 고행의 4,5월 혹서기에 인도에 간적은 없었지만 우기인 8월말에는 가본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기후가 좋은 건기에는 볼 수 없는 흥미로운 풍경이나 인간적인 상황에 접해보고는 내심 만족하게 생각을 했습니다. 혹서기나 우기에는 관광객이 거의 없기 때문에 항공료나 호텔, 버스 등 여행 관련 비용들이 세일을 하거나 저렴해져서 ‘8,90년대 당시 인도와 우방이었던 구소련의 가난한 여행자들이 무리지어 들어와 인도에서 저렴한 여행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소련의 서커스단이 여러 단체 인도에 들어와 공연을 하고 있었습니다. 상황이 그러다보니 텅 빈 호텔에서 소련 여행객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그럭저럭 영어로 대화를 나누면서 기념품도 주고받았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인도의 우기는 우리나라의 장마에 비해 규모가 조금 달랐습니다. 비가 많이 오고, 오래 오고, 끊임없이 내리는지라 여행이나 순례일정을 잡기가 쉽지가 않았습니다. 창밖의 풍경이 그러하니 주로 실내 활동으로 방향을 바꾸어 왕궁이나 박물관, 미술관, 연주회 등 문화탐방으로 진행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원래 일정과 예비 일정의 두 가지로 짜놓은 일정 중에서 원래 일정은 간 곳이 없고 예비 일정도 날마다 바뀌는 판국이라 기이한 인도 순례 일정이 되어버렸지만 철철 넘쳐나는 호텔에서의 대기시간들이 싫지만은 않았습니다. 빡센 일정으로 쉼 없이 이동하면서 기운껏 여행지를 돌아보는 스파르타식 여행도 본전에 값하는 맛이 있겠지만 느리게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을 스스로 진행하며 보내는 텅 빈 공간과 시간의 여행도 나름 즐거움이 있었습니다.
나는 주로 러시아 여행객들과 많이 시간을 보냈는데, 자신들을 루스키예라고 부르는 러시아인들의, 특히 젊은 여성들의 뽀얀 피부와 푸른 눈은 아주 매력적이었습니다. 러시아 라고하면 닥터 지바고와 시베리아의 하얀 설원雪原밖에 생각나지 않는 나에게 그렇게 생생하도록 살아있는 분위기는 완전한 새로운 세상이었습니다. 그리고 규모가 좀 큰 호텔에는 기념품 상점이 보통 일이십 개가량은 있어서 기념품을 파는 상점으로서만이 아니라 인도 상인들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했습니다. 한 상점에서는 몇 차례 들르다보니 약간 친숙해지게 되었는데, 30대 후반의 상점 주인이 내가 신고 있던 면양말에 무척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루는 내가 신고 있는 양말을 주면 자신도 선물을 하겠노라고 해서 신고 있는 양말을 선물로 주는 법은 있을 수 없으니 꼭 맘에 들어 한다면 새 양말을 갖다 주겠노라고 하자 아주 좋아하는 모습이었습니다. 다음날 면양말 두 켤레와 면 런닝셔츠 두 벌을 가져다 선물로 주었더니 수제품이라는 초승달처럼 휜 전통 인도칼을 칼집과 함께 선물로 나에게 답례를 하였습니다. 가만있자, 칼집에는 기하학 문양文樣이, 손잡이와 칼날에는 꽃문양文樣이 들어있는 인도칼이 너무 고가품으로 보여서 사양을 했더니 정색을 하면서 선물을 사양한다는 것은 자신의 성의를 무시하는 일이라면서 흥미로운 말을 들려주었습니다. ‘선물은 물건의 크기가 아니라 마음의 크기’ 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는 힌두교도인 상점 주인의 전직前職이나 종교관宗敎觀 같은 것이 궁금해졌으나 시간과 영어가 거기까지 허락하지는 않았습니다. 요즘 같으면 그런 고가의 수제품 칼을 선물로 받더라도 한국으로 가져오기가 쉽지 않겠지만 그때만 해도 대충 대충이던 시절인지라 그냥 덜렁덜렁 공항을 통해 들고 들어왔습니다. 이제 생각해보면 날씨가 좋은 원래 인도 순례일정이었다면 철저히 계획대로 움직여야하기 때문에 단순한 일정 따라잡기 여행만으로는 겪어볼 수 없었을 여행의 참맛을 일깨워주는 시간들이었습니다.
한국에서 올림픽을 치룬 1988년도부터 해외여행 자유화가 실시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도 일본과 대만을 다녀와 보고나서는 1989년도부터 인도를 다녔습니다. 그리고 1990년 8월인가 인도에 팸투어 성격의 순례여행을 또 가게 되었습니다. 아무래도 팸투어 성격이라 구성원들도 각양각색各樣各色이고, 시기도 계절적으로 우기雨期에 걸려있어서 순례와 관광 사이에 어중간하게 끼어있는 여행이었습니다. 호텔은 아쇼크 호텔인데 장소는 델리인지 아그라인지 기억이 확실하지는 않습니다만 그들이 델리대학원 학생들이었으니까 아마 델리였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날 일정을 마치고 호텔에 들어가 저녁식사를 하고 있는데 일행 중 한 분이 저쪽에 한국학생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대여섯 명가량 식사를 하고 있더라는 말을 전해주었습니다. 그래서 식사를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나 그쪽으로 가보았더니 척보면 다 알만한 이들을 예기치 않게 만나게 되었습니다. 모두 델리대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공부하고 있는 후배들이었습니다. 그들이 한 달에 한 번 이렇게 모여 모처럼 고급스럽게 저녁식사를 하면서 회포도 풀고, 정보도 교환하는 자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식사를 하면서 저쪽에서 떠들썩한 한국말이 들려와서 아마 한국 순례일행이 왔나보다 라고 생각을 했다고 했습니다. 그들에 의하면 그때만 해도 인도에는 중국인 여행객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호텔이나 관광지에서 시끄러운 여행객은 한국의 여행 단체였다고 했습니다. 아무튼 반가운 마음에 내가 지니고 있던 여행비 일부와 우리 일행이 가지고 갔던 팩소주 세 박스를 몽땅 후배들에게 건네주고 열심히 공부하라고 격려를 한 후에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세월이 지나고 한 삼 년쯤 흘렀을까 인도에서 학위를 딴 후배들이 속속 귀국을 했는데 이번에는 그들이 선물을 들고 나를 찾아왔습니다. 전단栴檀 나무로 정교하게 깎은 아쇼카 석주의 사사자상四師子像 둘레에 네 분 부처님을 모셔놓고 유리 케이스에 넣어온 무척 고가의 선물이었습니다. 내가 분에 넘치는 그 선물을 사양하자 가장 친했던 후배가 나에게 이렇게 말해주었습니다. “형님, 선물은 물건의 크기가 아니라 마음의 크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