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베트남의 1972년 춘계공세는 어느 의미에서는 닉슨에 대한 북베트남의 과감한 도전이라고 볼 수도 있었다. 그것은 첫째로 닉슨의 베트남화 정책에 대한 도전이었다. 이미 미군 지상전투부대는 거의 철수시킨 상황에서 남베트남군이 결정적으로 패퇴한다면 남베트남의 존립 자체가 불가능하게 되어 닉슨의 베트남화 정책은 완전히 실패하게 되는 것이다.
두 번째로는 닉슨의 외교정책에 대한 도전이었다. 지금까지 적극적인 외교활동으로 군사적 대립을 지양하고 전 세계적인 평화질서를 구축하려는 데탕트 정책을 추구한 결과 이미 중국을 방문하여 중국과의 관계를 개선하였고 소련을 방문하여 미, 소 정상회담에서 각종 군비제한 협정을 체결하려는 시점에서 북베트남군의 춘계공세는 이와 같은 닉슨의 대외정책에 찬물을 끼얹는 것이기 때문이다.
세 번째로는 닉슨 개인에 대한 도전이었다. 닉슨은 1972년 1월 5일에 재선에 출마하기로 공식발표를 한 바 있으므로 베트남화 정책이나 외교정책이 실패할 경우에 닉슨의 재선은 불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북베트남의 춘계공세에 대하여 닉슨은 과감하게 응징하도록 지시하였다. 남베트남군에 대한 항공지원은 물론 지금까지 유례를 볼 수 없는 강력한 북폭을 실시하도록 명령하였다. 닉슨은 그의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그 당시 심정을 피력하였다.
“나의 이러한 적극적인 응징책에 비해서 펜타곤은 너무나도 소극적이었다. 연 200대의 항공기를 동원한다는 것이 고작이었다. 나는 군부가 더 강력히, 더 위협적으로, 그리고 효과적으로 밀고 나가도록 키신저(Kiisinger)에게 지시하였다. 이 정도의 북폭은 존슨 시대의 ‘정기적인 우유배달’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적을 응징하는 데 이 정도로는 어림없는 일이다. 강경한 결정을 내린 이상 이를 강력하게 실행해야 한다. 나는 존슨과 다르다. 그의 약점을 되풀이 할 의사는 조금도 없다. 우리는 거듭 경고만 발했을 뿐이지 막상 실행단계에서는 부드러운 방법 밖에 취하지 않았다.”
“EC-121기가 북한에 의해 격추당했을 때 우리는 즉각적으로 행동으로 옮겨 북한을 폭격했어야 했다.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우리를 깔본 것이다. 캄보디아에 침공했을 때에도 동시에 북베트남을 폭격했어야 했다. 그렇게 했더라면 이 어리석은 전쟁은 이미 끝장이 났을 것이다.”
북베트남에 대한 북폭은 북베트남군이 DMZ를 돌파하여 공세를 개시하자 즉각 재개되었으나 북베트남 내륙 지역에 대한 B-52폭격은 4월 12일부터 시작되었다. 미 합참은 괌으로부터 재급유 없이 폭격을 할 수 있는 B-52G 28대를 추가 배치하여 1일 75쇼티의 B-52폭격이 가능하게 되었다. 공격표적에는 군사시설 외에 발전소, 공장, 보급품 집적소, 교량, 보급로, 철도 등도 포함되었다.

1972년 베트남 상공에서 찍힌 F-4D

교차로의 물자 집적소를 집중타격하는 장면

북베트남 공군의 격납고가 집중 공격을 받는 필름

북베트남 인근의 벤 투이 발전소의 폭격후 모습

집중폭격을 받는 북베트남군 비행장들.... 롤링선더 초기의 경우 정치적인 이유에서 주요시설의 공격을 제한했지만 만만치 않은 적의 반격에 제한은 대부분 풀렸다. 더구나 이 필름이 찍힌 무렵인 라인배커 당시에는 무제한으로 폭격이 가능했다.
4월에 남베트남의 상황은 닉슨도 남베트남의 완전붕괴를 우려했을 정도로 심각하였었다. 북베트남이 5월 2일 회담을 갖자고 제의하여 키신저와 레 둑 토(Le Duc Tho)가 파리에 대좌하였다. 키신저는 현재의 불리한 상황을 감안하여 북베트남이 휴전에 동의하고 미군 포로만 석방한다면 미군은 무조건 4개월 이내에 철수하겠다고 양보하였다. 그러나 의기양양해진 레 둑 토는 즉석에서 이를 거부하고 현 남베트남 정부를 해체하고 연립정부를 수립하지 않으면 휴전에 동의할 수 없다고 강경하게 요구하였다. 북베트남의 요구를 수락하는 것은 그들의 전쟁목표를 성취시키는 것이 되며 미국은 완전한 패배를 인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미국으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인 것이다.

키신저와 레둑토
닉슨은 하노이와 하이퐁 항을 폭격하고 하이퐁 항과 기타 6개의 항구에 대하여 기뢰를 부설하여 봉쇄하도록 명령하였다. 북베트남의 전쟁계속 능력을 말살하기 위한 조치를 취한 것이다. 소련에는 사전에 통고하였다. 5월 8일에 북베트남 항구에 대한 기뢰봉쇄를 선언하고 5월 11일까지 항구를 떠날 선박은 모두 출항하도록 3일 간의 여유를 준 후 기뢰를 부설하였다. 70대의 B-52G를 추가로 배치하여 B-52폭격은 1일 105쇼티까지 가능하였다.
이와 같은 닉슨의 과감한 조치에 대하여 미 의회, 언론, 반전운동가들의 비난이 빗발쳤음은 물론이다. 에드워드 케네디(존 F. 케네디의 막내동생)는 절망 속에서 나온 무익한 군사적 조치라고 비난했고 NBC TV는 미, 소 정상회담 가능성은 사실상 사라졌다고 보도하였다. 그러나 닉슨은 예정대로 5월 22일 소련에 도착하였다.
대대적인 북폭이 감행되었다. 항구가 봉쇄되고 적재된 물자가 소진되었다. 공장, 발전시설들이 점점 파괴되었으며 중국과의 육로도 봉쇄되고 공세를 계속시킬 보급지원도 제한을 받았다. 라인배커(Linebacker)로 명명된 이 북폭작전은 과거의 롤링썬더(Rolling Thunder)와는 확실히 달랐다. 적의 의지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전쟁수단으로서의 구실을 할 수 있는 북폭이었다. 전설적인 신화까지 만들어진 북베트남지역 송마(Song Ma) 강에 있는 탄호아(Thanh Hoa) 교와 철교도 레이저 빔으로 정확하게 표적으로 유도되는 스마트 폭탄에 의해서 5월 13일 절단되고 말았다.

용의 턱은 탄호아 철교의 별명이다. 초창기부터 집중적으로 미군이 공략해온 이 철교는 주변의 대공포 수가 월등히 많아 마치 용이 불을 토하는것 같다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5월 개시된 라인배커 작전이 미공중전력을 최대한 집중시켜 물량공세로 북베트남을 제압한다는 계획인 점에서 탄호아와 같은 중요거점은 반드시 파괴시켜야만 했다.

파괴된 탄호아 철교
북베트남지역의 보급원도 소진되고 전장에 추진된 보급도 소모되거나 정확한 스마트 폭탄에 의해 소진되었고 병력손실도 엄청나 북베트남은 더 이상 공세를 계속할 수가 없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