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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개혁주의 마을 원문보기 글쓴이: grace
피조물의 탄식 소리(롬 8:19-22)
들어가면서
“삼한사온”을 대체한 최근 신조어는 “삼한사미”(三寒四微)이다. 3일은 춥고, 4일은 미세먼지가 발생한다는 뜻이다. 삼천리 금수강산이 미세강산이 되고 말았다. 2013년 세계보건기구(WHO)는 미세먼지를 1급 발암물질로 규정했다. 2017년 예일대와 컬럼비아대의 공동 발표에 의하면, 한국의 공기질은 180개국 중 173위였다. 아황산가스, 질소산화물, 납, 오존, 일산화탄소를 포함하는 대기오염물질인 미세먼지 중 상당량은 중국에서 유입되며, 화력발전소, 석유화학단지, 경유차, 공사장, 먼지가 쌓인 도로, 그리고 조선소도 원인이다. 하지만 미세먼지 발생의 근본 원인은 인간의 근시안적 탐욕과 편리를 위한 개발만능주의로 보아도 무방하다. 설상가상으로 미국 중심주의를 표방한 트럼프대통령은 파리기후변화협약(2015년)을 2017년에 탈퇴했는데, 그에게 신자유주의 맘몬은 환경보존보다 더 중요하다. 게다가 부산은 미세먼저제거차량 구입을 위한 예산을 거의 편성하지 않았고(2018년), 미세먼지 비상저감조치(非常低減措置)를 제대로 취하지 않는다. 신기하게도 미세먼지 경고가 발효되더라도 많은 시민들은 마스크조차 착용하지 않아 불감증을 보인다. 실내놀이터가 흥행하고, 공기청정기가 잘 팔릴 뿐 아니라, 산소를 사서 마시고, 집집마다 마스크를 넘어 방독면을 구비해야 할 날이 올 수 있다. UN이 정한 환경의 날(World Environment Day)인 6월 5일 전후에, 교회마다 환경주일을 지킴으로써 성경적인 환경보호의 중요성을 알리고, 생태계의 청지기로서 구체적인 실천을 독려해야 한다. 공공신학은 크리스천의 생태계 보존을 위한 역할을 중요하게 여긴다.
요지: “하나님의 구원과 새 창조의 대상인 환경을 보호하자.”
첫째로, 왜 우리는 환경을 보호하고 변혁시켜야 하는가? 피조물은 하나님의 구원과 새 창조의 대상으로서 예수님의 재림 때 까지 구원과 자유를 선취하여 맛보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홍수로 다시는 온 세상을 심판하시지 않으시며, 대신 파종과 추수 그리고 추위와 더위 그리고 낮과 밤을 예수님의 재림의 날까지 보존하신다(창 8:21-22). 따라서 사람과 피조물은 영원한 노아언약의 수혜자다. 하지만 인간의 개발지상주의와 난개발과 탐욕은 지구온난화를 초래하여, 살기 어려울 정도의 더위나 추위가 가속화하고 있다(참고. 기독교강요 2.1.5). 피조물의 탄식과 고통은 자연 속에 사는 사람의 탄식과 고통으로 이어진다. 롬 8:19-22에서 사도 바울은 생태계를 만유이신 그리스도의 구원과 통치의 관점에서 조망한다.
롬 8:19는 창 9:12-13의 하나님께서 세상을 보존하신다는 노아언약을 배경으로 한다. 롬 8:19의 피조물이 고대하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남은 성도의 미래적 영화를 가리킨다(롬 8:23; 갈 5:5; 빌 3:20; 골 3:4). 이런 미래적 소망에도 불구하고, 롬 8:20에 의하면, 예수님의 재림 이전에 피조물은 허무한데 굴복하고 있다. 그렇게 굴복하게 만드신 분은 아담이나 사탄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왜냐하면 20절의 “굴복되었다”(ὑπετάγη)와 21절의 “자유하게 될 것이다”(ἐλευθερωθήσεται)라는 두 신적수동태 동사가 이를 지지하기 때문이다. 20절의 “허무함”은 창조된 목적대로 결실하지 못한 저주 받은 상태(부패, 무기력, 미와 활력을 상실함 등)를 가리키는 창 3:17-19와 전 1:2-3을 떠올리게 하고, 롬 8:22의 “탄식하다”([συ]στενάζω)는 동일한 단어로 욥의 끔찍한 탄식을 연상시킨다(욥 31:38-40 LXX). 그런데 하나님은 피조물을 허무한데 굴복시키실 뿐 아니라, 썩어짐의 종노릇으로부터 해방시키시기 원한다.
멀리는 아담의 타락(창 3:17-19), 가까이는 이스라엘의 범죄로 인한 자연의 썩어짐을 구약 선지자들이 예고했는데(사 24:4-7; 호 4:1-3), 바울과 로마서의 독자들도 이 예언을 알고 있었다(참고. 롬 8:22의 “우리가 안다”). 그러나 구약과 유대문헌은 썩어짐에서 멈추지 않고 새 에덴동산의 회복 곧 지구의 갱신을 소망했다(사 11:6-9; 65:17; 66:22; 1에녹 24-25; 희년서 1:29; 레위의 유언 18:10-11, 4에스라 13:26). 노아언약, 자연의 회복 그리고 신천신지를 소망한 바울에게 있어 피조물의 탄식과 썩어짐이 마지막 스토리가 될 수 없었다.
이런 구약과 유대문헌이 가르치는 지구 갱신에 대한 사상 이외에, 바울과 로마서의 독자는 로마제국의 팍스 로마나가 약속한 새로운 세상의 회복에 대한 선전도 알고 있었다. BC 17년에 아우구스투스는 경기를 개최하여, 번영의 새 시대의 탄생을 홍보했으며, 아우구스투스 당시의 버질(BC 70-19)은 인간의 불경건함이나 사악함이 더 이상 지구를 오염시키지 않는다고 보면서 아우구스투스의 황금시대를 칭송했다. 또한 AD 54년에 Calpurnius Siculus는 네로가 이룬 황금시대를 찬양했다(Eclogue 1.33-99; 4.6-8). 로마제국의 Priene에서 발굴된 비문에 의하면, 아우구스투스는 썩어짐으로부터 이미 이 세상을 자유케 했다. 그리고 로마제국의 “평화의 제단”에 새겨진 지구의 여신 Tellus 상(像)에는 두 아이가 그 여신과 함께 하고, 그 여신의 무릎에 무성한 과일이 있으며, 식사 후 휴식을 취하는 동물들이 등장한다. 하지만 이런 평화와 풍성함은 제국의 선전 구호였기에, 로마제국의 군사 정복으로는 불가능하다.
바울은 피조물이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현재 능동태 직설법 동사 συστενάζει καὶ συνωδίνει) 것을 알고 있다(22절; 참고. 1에녹 9:2). 롬 8:22에서 피조물과 함께 고통당하며 탄식하는 주체는 다른 피조물이지 구원을 선취(先取) 중인 성도가 아니다. 여기서 질문은 “지금부터 2000년 전인 바울 당시, 로마제국의 생태계가 탄식할 정도로 지금처럼 오염되고 황폐화되었는가?”이다. AD 1세기경 상아 채취를 좋아했던 로마황제 때문에 아프리카의 코끼리가 멸종 위기에 처한 적은 있었지만, 피조물 전체가 탄식하고 고통을 겪었는가? 분명한 것은 팍스 로마나 선전에도 불구하고, 바울 당시에 로마 제국민 전체가 평화와 번성을 누린 적은 없었다. 오히려 지중해 연안 국가들은 로마제국의 야망과 군사 정복으로 인해, 경제적 약탈이 횡횡했고, 정복당한 도시는 폐허로 방치되고, 산의 숲은 잘려나갔고, 강은 오염되었고, 들은 황폐화 되었다. 바울이 피조물의 탄식 소리를 들었다면, 우리는 피조물의 비명과 절규를 들어 마땅하다. 로마제국의 생태계 파괴는 환경을 파괴하면서 부를 축적하는 오늘날 다국적 자본이나 제국적인 신자유주의를 연상시킨다.
피조물의 갱신이 중요한 것은 아브라함에게 약속의 땅이 상속으로 주어졌듯이, 아브라함의 참 자손에게는 구속된 세계가 주어지기 때문이다. 이런 차원에서 피조물의 구원에 아브라함 언약이 암시된다. 사람만 구원의 대상이 아니라, 피조물도 구원과 새 창조의 대상으로서 선취하기 원한다.
둘째 마지막으로, 우리는 왜 환경을 보호하고 회복해야 하는가? 교회가 만유를 새롭게 하시는 예수님의 사역에 동참함으로써, 자연에게 영광스러운 자유를 누리게 하기 위해서 이다.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라”(창 1:28)는 문화명령은 생태계 훼손을 감수하고서라도 개발에 몰두하라는 말씀이 아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자연 훼손을 위한 면죄부를 주신 바 없다.
하나님은 바벨론 포로까지 감행하시면서 까지 땅의 안식을 원하셨다(레 25:1-7; 대하 36:21).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하는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기를 원한다(21절). 여기서 썩어짐의 종노릇과 영광스러운 자유가 대조된다. 피조물이 썩어짐의 종노릇에서 해방될 것을 학수고대하는 것은 창 3:17이 밝히듯이 피조물이 저주 하에 있음을 전제로 한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죄와 죽음과 부패로부터 부분적으로 자유롭게 되었는데, 이런 선취를 피조물도 경험하기 원한다.
예수님은 만유의 머리시며, 만유로서 만유 안에 계신다(고전 8:6; 엡 1:22; 골 3:11).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은 주님의 것이다(롬 11:36; 고전 8:6; 10:26). 따라서 예수님은 자연 피조물을 청지기인 사람을 통해서 화목하게 하시는 방식으로 다스리신다.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 1:19-20). 자연은 세상사나 하나님의 구속사가 펼쳐지는 무대 그 이상이다. 자연은 하나님의 구속의 대상이자, 예수님과 화목하게 되어야 할 대상이다.
교회는 예수님의 재림 때에 세상이 완전히 새롭게 될 것을 소망하면서(행 3:21), 만물을 갱신하시는 예수님의 사역에 동참해야 한다(계 21:5). 자연을 자유케 하기 위해서, 성도는 물을 물 쓰듯 하지 말고, 차량이나 엘리베이터나 에스컬레이터를 이용하는 대신 좀 더 걷고, 교회 승합차의 경우 경유차를 지양하고, 겨울에 내복을 입어 난방 온도를 적절하게 유지하고, 조금 덥더라도 냉방 시에 절전해야 한다. 기성세대가 불편을 감수해야 다음 세대에게 물려줄 환경이 있다. 환경문제가 초래한 질병에 걸린 이들을 위한 목회적 상담과 돌봄 그리고 공동체적인 배려도 필요하다.
예수님 안에서 새 피조물이 된 칭의를 입은 성도는 개인과 만물과 화해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후 5:17-19). 바울의 신학의 중심에 예수님 안에서 만유의 변혁이 있다. 21세기 생태 위기 시대에 교회는 새로운 교회론을 정립해야 한다. 만유의 주님께서 교회를 통해서 만유를 충만하게 하시기 때문이다(엡 1:22-23). 기존의 악한 세상과 대척점에 서 있는 대안공동체로서의 교회론을 넘어서야 한다. 대신 세상 속에 그리스도의 새 창조와 변혁의 능력을 구체화하는 교회론이 필요하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새 창조는 교회당 안에서 즐기는 경건한 삶을 넘어, 온 피조물을 변혁시켜야 하는 소망이자 명령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자신을 내어주신 것을 모델로 삼아, 교회는 또 다름 구원의 대상인 자연을 돌보고 사랑해야 한다.
나오면서
롬 8:19-22는 아담의 타락과 그 결과인 실낙원, 노아언약, 아브라함 언약, 복락원에 대한 선지서의 예언, 팍스 로마나, 환경을 파괴한 로마제국에 대한 비판,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새 창조, 그리고 교회가 자연과 더불어 선취해야 할 구원을 복합적으로 담고 있다. 교회는 자연과 더불어 구원을 공유해야 한다. 그리고 성도는 자연이 구원과 자유를 선취하도록 도와야 한다. 그것은 제국주의와 같은 착취가 아니라, 만유이신 그리스도의 새 창조에 동참함으로써, 친환경적 개발과 보존을 통해서 가능하다. 개 교회와 가정과 개인은 구체적인 실천 사항을 캠페인으로 전개하여 구현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참고. 문영일, “개발만능주의와 친기업 정책이 키워낸 미세먼지,” 『진보평론』 73 (2017), 216-24; 최승혜, “대학생의 미세먼지 인식, 지식, 태도에 영향을 주는 요인에 대한 연구,” 『한국콘텐츠학회논문지』 18/12 (2018), 289; D. G. Horrell, C. Hunt and C. Southgate, Greening Paul: Rereading the Apostle in a Time of Ecological Crisis (Waco: Baylor University Press, 2010), 68-80; J. A. Fitzmyer, 『로마서』 (Romans, 김병모 역, 서울: CLC, 2015), 813; T. S. Schreiner, Romans (BECNT; Grand Rapids: Baker, 1998), 434-35; R. Jewett, Romans (Hermeneia; Minneapolis: Fortress, 2007), 514-16; R. N. Longenecker, Romans (NIGTC; Grand Rapids: Eerdmans, 2016), 724; T. Holland, Romans: The Divine Marriage (Eugene: Pickwick Publications, 2011), 276; J. M. Lawson, “Romans 8:18-25: The Hope of Creation,” Review & Expositor 91/4 (1994), 559; E. P. Barron, “The Pastoral Care of Environmental Disease Patients,” The Journal of Pastoral Care 38/1 (1984), 44-51; F. Thielman, Romans (ZECNT; Grand Rapids: Zondervan, 2018), 4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