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테 일기/조혜경
전기톱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마당을 가로막고 누운 소나무 한 그루를 정리하는데 삼일 정도 걸린다고 했다. 동네 사람들은 아침상을 서둘러 물리고 모여들었다. 훈수 두기에 절대 빠질 수 없다는 듯 각자 살아온 대로 한 마디씩 거들었다. 그들은 노송이 쓰러진 안타까움에 혀를 차면서도 공치사도 서슴지 않았다. 큰 둥치를 몇 개 자른 후, 다시 작은 가지로 토막을 내어야 했다. 남편은 연신 뚝뚝 흐르는 굵은 땀을 팔뚝으로 훔쳐냈다. 오후가 되자 동네 사람들은 필요한 것을 하나둘 챙겨 갔다. 다음 날,집게 차가 와서 큰 둥치들을 실어 가기로 했다.
아름드리 소나무였다. 예고 없이 쏟아지는 폭우로, 세계 곳곳이 공포에 휩싸인 해였다. 우리 동네도 예외가 아니었다. 밤새 거친 비바람의 심술로 늦잠이 든 아침, “까똑” 소리에 잠을 깼다. 나무가 쓰러져 주차장을 가로질러 누워있는 우리 집 앞마당 사진이었다. 얼른 창문을 열어 재꼈다. 차 뒤쪽에 길게 누운 소나무가 보였다. 남편은 너무 놀라 창을 닫는 것도 잊은 채 옷을 주워 입었다. 서늘한 바람이 훅 들어왔다. 나도 덩달아 뜰로 나갔다.
소나무 정원에서도 제일 키 큰 소나무가 주차장 마당을 가로질러 뻗어있었다. 솔잎 더미는 사과나무와 배나무 사이 틈에 묘하게 박혔다. 세워두었던 차를 피해, 가는 가지를 팔처럼 버티고 있는 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앞마당에 풍채 늠름하게 서 있던 대장 소나무였다. 우리는 두 팔로 안을 수도 없이 굵은 그 소나무를 ‘대장 소나무’라 불렀다. 그제야, 그 나무가 주차장 쪽으로 삐딱하게 기울어져 있었음을 기억해 냈다.
소나무 10여 그루였다. 이사 오던 날, 나를 처음 반긴 것은 황금 들판도 아니고 언덕 위에 오뚝한 시골집도 아니었다. 풍성하면서도 날렵한 솔숲은 시원한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상큼하게 정리된 나무 아래 탁자는 식구들의 카페였고 동네 사람들의 사계절 사랑채였다. 바다 내음 실어오는 바람을 맞기에 그만이었다. 해먹에 누워 낮잠을 즐기기도 했다. 사계절 품어대는 솔 향기는 식구들의 매연에 찌든 코를 뚫어주었다. 가끔, 무리 지은 까치들이나 나무 쪼는 딱따구리는 경쾌한 노래로 카페 손님들을 웃게 했다. 겨우내 숨었던 양지꽃 더미나 봄까치 바람꽃의 푸른 꽃바구니는 봄의 전령이 되어 찾아왔다. 맥문동이 보랏빛 꽃을 피울 때면 텃밭에서 캔 고구마로 수다스러운 어깨를 쉬었다.
월급날이나, 거나하게 술을 마신 날이면, 아버지의 손에 먹거리가 들려있었다. 아버지의 귀가가 늦어지는 날이면 우리 형제는 덮이는 눈꺼풀을 비비며 아버지의 두 손에 들린 봉지를 기다렸다. 사과, 통닭, 과자, 국화빵……. 먹거리가 귀하던 시절이었다. 잠을 자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고전 문학을 읽었다. 늦은 밤 라디오에 귀를 기울이던 소녀의 겨울밤도 봉투 속에서 엉긴 닭꼬치와 붕어빵이 함께 했다.
어느 날, 개미들의 침범에 작은 소나무 하나가 잎을 떨구었다. 그날부터 대장 소나무는 더 큰 바람 소리를 냈다. 태어난 지 이년 밖에 안 되었던 아들이 열병으로 간 날처럼 폭풍우가 들녘을 덮친 날이었다. 지극정성으로 보살폈으나 더는 회생의 가능성이 없자 작은 소나무를 잘랐다. 그때부터 대장 소나무는 텅 비어버린 그곳으로 휘어졌다. 제 식구를 껴안기 위한 몸부림이었을까? 우리는 몰랐다. 소나무는 침엽의 푸름으로 가지가 찢기는 고통을 감추고 있는지를.
나의 결혼식은 내가 본 아버지의 첫 번째 눈물이었다. 생면부지의 날강도가 딸에게 하는 꼴을 몇 년 지켜보고서야 사위로 맞을 요량이었다. 그러나 결혼 10개월 만에 손자가 생겼다는 것을 알게 되자, 한걸음에 구청으로 달려갔다. 딸의 호주가 사위가 된 그 날도 아버지는 눈물을 훔쳤다. 아버지의 짓무른 눈가는 감춰진 삶의 증거였다. 아버지의 평생은 교통사고와 직장에서의 팔 부상, 반복된 사업 부도로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온전하지 못한 몸으로도 가족이라는 짐은 결코 벗어버릴 수 없었다. 비틀거리다 쓰러지면 다시 일어섰다. 자식들은 그런 아버지의 깊은 그늘에서 무사히 성장했고, 한 사람의 가장이 되어 나름대로 정원을 꾸려갔다. 어느 날, 아버지가 어깨에 멘 가장의 끈을 내려놓았을 때, 치매 걸린 아내와 암 덩어리의 몸이 덜렁 남아있었다.
지난여름 막바지, 아버지는 세 번째 응급실로 실려 갔다. 해가 거듭될수록 병원 신세를 지는 날이 늘어났다. 독한 항암 약으로 나날이 쇠약해졌고, 노화로 인한 심부전으로 호흡 곤란이 자주 왔다. 아버지는 투병하면서도 자식들에게 내색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누가 되지 않으려고 혼자 버텼다. 그러면서 참선에 들 수 있는 겨울을 간절히 기다렸다. 대장 소나무는 힘없는 가지를 빈 까치둥지에 감추었다. 너른 인심으로 내어주었던 뻐꾹새의 쉼터는 허공에 달렸다. 밤낮없이 재잘대던 맥문동도 푸른 방울을 매달고 휴식에 들었다. 함박눈 덮이는 겨울 꿈 준비를 했다.
쓰러진 소나무 그루터기에 앉았다. 100 개에 가까운 나이테에는 둥근 선을 따라 아버지의 큰 눈이 박여있었다. 굵은 이마 주름이 스쳐 갔다. 가늘어진 손 하나가 슬쩍 내 등을 토닥였다. 옹이는 부러진 가지의 심정을 담았다. 나이테에 쓴 아버지의 일기를 읽는다. 날개조차 펴보지 못하고 쓰러진 새끼 새의 기억도 있다. 아버지의 귀가를 기다리던 형제들의 눈 비비던 손과 투병으로 유난히 길었던 아버지의 노년을 읽었다.
소나무는 풍성한 열매를 주지는 않았다. 그러나 일어나려면 먼저 무릎을 굽힐 줄 알아야 한다는 삶의 진리를 가르쳐주었다. 높은 곳보다 평지일 때가 더 힘들 수도 있다고, 쓰러지면 다시 일어나는 거라고 말하고 있었다. 침엽의 푸름이 인내의 결과임을 알게 된 몸도 마음도 홀가분한 가을날, 맥문동 보랏빛 꽃은 유난히 사랑스러웠다.
첫댓글 자연의 울타리 소나무와 자신을 키워낸 아버지의 사랑이 일체가 되어 눈에 보는 가을을 만들어내고 있네요. 값진 부모와의 인연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훌륭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