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 네 어머니시라 (요19:25~27)
오늘은 사순절 세 번째 주일입니다.
첫째 주는 눅23:34 말씀을 통하여 “용서하시옵소서” 라는 말씀으로 은혜를 나누었고 두 번째 주는 눅23:43 말씀을 본문으로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다시 요약해 보면 “용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특권 중의 특권이 됩니다.
예수님은 주기도문을 가르치면서 중요한 기도를 말씀해 주셨는데 바로 용서입니다.
마6:12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용서하는 만큼 용서를 받는 것이 하나님의 법칙이 되는 것입니다.
남의 허물은 용서하지 않으면서 나의 허물을 하나님께 용서받으려는 것은 자기 모순이 됩니다.
믿는 만큼 믿음의 상급을 받고 사랑한 만큼 사랑을 받고 행한대로 보웅하시는 하나님의 법칙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있는 무리를 용서하는 기도를 하나님 아버지 앞에 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용서해야 하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낙원에 가기 위함입니다.
나의 죄를 용서받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목적입니다.
용서를 받아야 모든 저주가 풀리고 형통한 자가 되며 낙원에 있는 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회개는 용서를 전제로 합니다.
용서하는 사람이 평강을 누리고 평강을 가진 사람이 모든 범사가 형통하게 됩니다.
오늘은 세 번째 시간으로 “보라 네 어머니라” 라는 말씀을 통하여 은혜를 받겠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사망의 고통을 겪고 있는 그 자리에 누가 있었는가 하면 세분의 마리아가 예수님의 임종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요19:25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라는 말씀으로 보아 성모 마리아,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 그리고 막달라 마리아 세 사람이 있음을 알게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자신의 어머니를 사랑하는 제자에게 “네 어머니” 라고 소개하는 이유는 무슨 뜻이 있을까요?
첫째로 아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머니 앞에서 비참한 모습으로 십자가에 매달려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 엄청난 고통 속에서도 자신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아픔을 위로하고 계신 것입니다.
요19:26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라고 말씀하십니다.
자기 자식이 십자가에서 모진 고통을 당하며 죽어가고 있는 모습을 보는 어머니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아마도 죽어가고 있는 예수님의 아픔보다 더했을 것입니다.
몸부림치며 안타까이 울고 계신 어머니에게 두 가지 의미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첫째는 어머니의 아들은 나 하나가 아니라 나를 따르는 모든 이들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라고 소개하고 있는 것이고
두 번째는 나를 위하여 울지 마시고 낙원에 이르지 못하는 아들들을 위하여 울라고 하는 뜻이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대목은 “여자여 보소서” 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요2:4]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가나안 혼인 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말하는 어머니를 향하여 하신 말씀입니다.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예수님은 지금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하나님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하는 선지자요 대제사장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10:36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마10:37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마10: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부모나 형제나 자식으로 인한 정 때문에 사명이 방해받아서는 않된다는 확고한 의지가 있는 말씀입니다.
아들을 잃는다고 생각하지 말고 더 많은 믿음의 아들을 얻는 다고 생각하라는 의미도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제자에게 어머니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요19:27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라고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제자에게 사랑하는 어머니를 모시라고 당부하시는 말씀입니다.
이는 믿음의 모든 여인이 어머니요 누이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막3:32 무리가 예수를 둘러 앉았다가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
막3:33 대답하시되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 하시고
막3:34 둘러 앉은 자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
막3:35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육신의 혈육 관계를 앞세우는 친족이 형제자매가 아니라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 사람이 진정한 형육이요 형제요 부모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제자에게 네 어머니라고 소개하는 이유가 충분한 것입니다.
세상 정에 마음을 빼앗기면 구원받을 사람이 없습니다.
유교와 불교 사상이 각별한 우리나라의 전통으로 보아 우리는 모두 유황불에 던져질 멸망의 자녀들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부모 형제를 떠나 이 나라에 복음을 전하며 피 흘려 죽어간 선교사들에 의하여 우리에게 복음이 전해졌고 구원의 길이 열린 것입니다.
눈앞에서 죽어가는 자식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마음과 어머니 앞에서 죽임을 당하는 자식의 심정이 어떠하겠습니까?
하지만 그런 이런 감정을 앞세우면 이 지옥의 세상이요 멸망의 저주를 어떻게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한 여인의 아들이 되면 예수 한 사람으로 머물게 되지만 만민의 어머니요 만민의 구세주가 되어야 하겠기에 “여인이여” 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내 아들이 나의 아들로 머물지 아니하고 세상의 아들이요 온 인류의 아들이 되는 과정이 되는 것입니다.
세번째로 하나님의 아들의 자리로 돌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어머니 마리아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 그리고 막달라 마리아 세 여인이 그 앞에 있습니다.
한 여인은 아들의 죽음을 보고 있고, 한 여인은 자신이 믿고 따르던 주님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 있고, 한 여인은 자신의 일곱 귀신을 쫓아주신 선지자가 자기 앞에서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비웃으며 즐기고 있는 패역한 무리가 예수님이 죽어가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개인적 감정으로는 다스릴 수 없는 복잡한 심경으로 예수님은 괴로움이 더했을 것입니다. 자기를 사랑하므로 울고 있는 사람들, 자기를 미워하여 시기 질투로 십자가에 못 박고 있는 무리들, 미음 다툼 시기 질투가 가득한 이곳에 있는 모두를 끌어안고 가야하는 것이 지금 주님께 주어진 숙제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감정을 앞세운 사람의 자리에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고귀한 아들의 자리와 랍비인 선생님의 자리,
그리고 귀신을 물리치고 질병을 고쳐주는 선지자의 자리에 머무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는 인류의 구원을 위해 택함을 받은 하나님의 어린 양의 자리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요1:36 예수의 다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벧전1: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그렇습니다.
그는 아들의 자리도 좋고 선생님 자리도 좋고 선지자의 자리도 좋지만 하나님의 어린 양의 자리로 돌아가야 하는 선택받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요일4: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아멘입니다.
그는 멸망 당해야만 하는, 이 세상의 죄악을 감당해야 하는 화목제물이 되셔야만 했습니다.
나를 위해 누가 화목제물이 되어 주겠습니까?
나의 가족을 구원하기 위해 누가 화목제물이 되어 줄 것입니까?
예수님은 아무도 나서지 않는 이 일을 위하여 스스로 그 길을 택하시고 스스로 고난의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갈1:4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멸시와 천대가 비웃음과 조롱이 빗발치는데도 불구하고 어머니의 사랑을 눈물을 외면해야 했고 따르는 여인들의 눈물을 피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말씀합니다.
“네 어머니이시니라”
이는 너의 가족이요 또한 나의 가족이라는 구원의 메시지가 되는 것입니다. 아멘
https://youtu.be/oBrNmWnI4j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