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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스크랩 익산의 역사(익산 향토지 제1권)
이성도 추천 0 조회 61 12.05.30 22:20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익산문화원에서 발행한 익산향토지 제1권(2005)중 필자가 조사하여 정리한 부분입니다.

 

Ⅰ. 익산의 역사

 

우리 익산시는 전라북도의 서북단에 위치하여 노령산맥의 지맥에서 분기된 천호산과 미륵산이 동부에 자리하고, 북쪽의 용두산에서 출발하여 함라산을 거치는 줄기가 서북부로 이어지며, 남서로 향하는 구릉과 금강과 만경강을 비롯한 많은 하천으로 형성된 비옥한 평원에 자리하고 있다. 북으로는 금강을 경계로 충남의 논산시와 부여군에, 서로는 옥구평야의 군산시와 접하고, 남으로는 만경강을 경계로 김제시와 접하며 동으로는 완주군과 접하여 한국 최대의 평야인 호남평야의 북반부를 점하고 있다.

비록 506.98㎢의 작은 면적에 34만 인구의 중소도시이나 역사적으로는 청동기시대부터 이 지역 문화의 중심지로 발전하여 왔고, 특히 삼한시대와 백제시대에는 목지국의 도읍지였으며, 백제 말기에는 무왕의 정치적 중심지요, 백제멸망 후에는 한때 고구려 부흥군의 기지로 보덕국이 세워졌던 역사 깊은 고장이다.

우리 익산시는 1995년 5월 10일에 도ㆍ농 통합으로 이리시와 익산군이 합하여 새로운 익산시로 출발하였다. 통합된 지 어언 10년이 되었고 현재 1읍 14개면 14개동으로 행정구역이 개편되었다. 20세기 현대사로 접어들어 호남지방 최대의 교통의 중심지로, 농산물의 집산지로, 수출자유지역으로, 그리고 보석의 도시로 자리매김하여 왔으며 이제는 고속열차(KTX)의 중심지가 되었다. 또한 지방자치시대를 맞이하여 지역의 경제적 발전과 아울러 마한과 백제의 옛 문화를 오늘에 되살려 이를 계승 발전시키며 널리 알리는 지방문화발전을 위한 각종 행사가 크게 꽃피우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살고 있는 우리 익산시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지역의 역사를 이해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나 익산시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 이리시 지역과 구 익산군 지역의 역사를 아울러 이해하여야만 하기에 상당히 어렵고 복잡한 측면이 있다. 그 동안 간행된 익산시의 역사 관련기록들이 구 이리시와 구 익산군의 역사를 통합하여 기록하는 과정에서 구 익산군의 역사와 구 이리시의 역사를 명확히 구분하지 않고 간혹 뒤섞어 기술함으로써 시민들로 하여금 극히 혼란스럽게 하거나 오류 또한 적지 않아 시민들이 쉽게 이해하기에는 어려운 부분이 너무나 많았다. 따라서 익산시의 역사를 정리함에 있어 이 점을 충분히 고려하여 누구나 익산시의 역사를 보다 쉽게 이해함과 동시에 혼동이 없이 알 수 있도록 서술하고자 노력하였다.

 

1. 선사시대

(1) 구석기 시대

위로는 금강이요, 아래로는 만경강을 끼고 드넓은 호남평야의 북반부를 이루며 동으로는 노령산맥의 줄기와 맞닿아 기름진 옥토와 산자수명의 아름다움을 겸비한 우리 익산은 일직이 선사시대부터 인간이 거주하여 왔다. 아직까지 구석기 시대의 확실한 유적이나 유물이 발견되지는 않았으나 그 가능성은 충분하다.

그 동안 구석기 유적지가 발견되지 않았던 전북지역에서도 2000년도부터 금강유역권의 익산과 진안에서 새로운 구석기유적들이 계속 찾아지고 있다. 2000년 봄 국토연구원 조사팀이 강 유역 매장 문화재 지표조사를 통해 토기와 기와, 화살촉, 옹기, 석기류 등 한반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이래의 흔적들을 거의 전 지역에서 발견하였다. 특히 전주시 송천동 사근리, 효자동 봉곡리 등 전주천변에서 후기 구석기 시대에 해당하는 몸돌과 돌날이 발견되어 전북지역 최초의 구석기 세대의 유물을 확인하는 성과가 있었다.

익산에서는 창평, 율촌리, 신막, 영등동, 온수리 등 비교적 넓은 지역의 조사를 통하여 매우 다양한 구석기유적의 증거를 찾았다. 주로 지표채집에 의한 것이라는 한계는 있지만 전ㆍ중기구석기의 찍개, 주먹도끼와 격지석기, 후기구석기의 돌날석기와 세석기 몸돌이 수습되어 주목을 끈다.

(2) 신석기 시대

신석기 시대인들은 주로 해안이나 강가에 자리를 잡고 씨족사회를 바탕으로 부족사회를 형성하고 움집을 지어 정착생활을 시작하였다. 전북의 서해안에서는 1960년대에 선유도에서 패총이 확인되었지만 본격적인 패총 조사가 이루어지기는 1994년도에 군산 앞바다에 군장국가공단을 조성하면서이다. 이때 비응도, 노래섬, 가도, 띠섬, 오식도 등 거의 대부분의 섬에서 패총이 확인되고 발굴이 이루어졌다. 또한 금강 연안의 충적평야인 내흥동 사옥마을의 조개더미가 있다. 이곳에는 기원전 3,000-2,000년 정도의 조개더미가 마늘밭에 흩어져 있었고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군산지역 여러 곳에서 조개더미가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금강유역의 익산지역에서도 농경을 주로 한 당시 사람들의 주된 생활 터전이 되었을 것이다.

 

2. 청동기ㆍ철기 시대와 삼한

청동기시대에 이르러 인간은 그 삶의 무대를 구릉지대로 옮긴다. 따라서 구릉지대에 청동기시대의 유적 유물인 고인돌이나 돌방무덤이 군산에도 많이 남아 있다. 나포면과 성산의 야산, 군산대 뒷산 신관동과 나운동 등에서 발견되는 고인돌이 주목된다. 고인돌은 모두가 받침돌이 없는 무지석식(혹은 개석식)인데 어떤 경우는 3기나 4기가 모여 있는 것으로 보아 청동기시대에도 군산에는 이미 강력한 권력과 이를 뒷받침할 만한 농경의 발달이 있었다고 보여진다.

우리 익산에는 임상동에 고인돌이 있었다고 전하지만 현재는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함열의 다송리의 돌널무덤 유적에서는 다양한 청동제품과 검은간토기 및 민무늬토기 등이 발견되었다.

또 망성면 무량리와 낭산면 석천리 유적에서는 독무덤이 발견되었다. 이밖에도 왕궁 평장리 유적과 부송동과 영등동 유적에서는 청동기 및 철기시대의 많은 유물이 발견되었다. 이와 같은 모습을 볼 때 이 시기의 익산지역에는 발전된 문화와 상당한 세력의 군장층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후한서 동이전 한조》에는 고조선의 마지막 왕이었던 준왕이 위만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그 무리 수천을 이끌고 바다로 달아나 韓의 땅에 이르러 나라를 세웠는데 그곳이 바로 금마를 중심으로 한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이때가 BC194년의 일인데 익산지역에는 이 시기에 선진적인 북방문화를 지닌 유이민들이 일찍부터 이주하여 정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철기문화가 발달하면서 기원을 전후하여 한반도의 남부지역에서는 마한ㆍ진한ㆍ변한의 삼한이 형성되었는데 그 중 우리 익산지역은 마한에 속하였다. 마한은 현재의 경기도와 충청도 전라도에 걸쳐 있던 연맹왕국으로 모두 54개국이었고 그 중심은 목지국이었다. 목지국은 처음에는 성환ㆍ직산ㆍ천안지역을 중심으로 발달하였으나, 백제국의 성장과 영역확대에 따라 익산지역으로 그 세력이 옮겨 왔다. 정약용의 《아방강역고》에는 ?마한은 지금의 익산인데 마한 총왕의 도읍지이다?라고 한데서 이를 증명한다. 따라서 준왕의 이동과 목지국의 이동이 이루어진 익산이야말로 바로 마한지역의 중심이었다는 것을 여실히 증명하여 주고 있다. 마한의 큰 나라는 만여호였다 하니 마한의 중심지인 익산지역의 대표적 나라인 건마국도 만여호를 거느린 큰 나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하겠다.

삼한시기에 마한의 54개국 중 익산지역에 존재했던 나라는 다음과 같다.

■감해국(感奚國:함라) ■건마국(乾馬國:금마) ■여래비리국(如來卑離國:여산)

■아림국(兒林國:낭산) ■불사분야국(不斯?耶國:왕궁ㆍ봉동)

 

3. 백제시대

(1) 백제의 발전과 변천

익산지역은 삼국시대에 백제에 속한 땅임은 우리 역사를 공부한 사람이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마한의 54개국 중 온조에 의해 건국(BC18)되어 한강 유역에 자리한 백제는 3세기 고이왕을 거쳐 4세기 후반 근초고왕 때에는 직산ㆍ성환ㆍ천안 지역을 아우르며 차츰 익산지역까지 차지하게 되었을 것으로 보여지고 있다.

백제는 5세기 장수왕의 남진정책에 밀려 한성(현 서울)을 잃고 문주왕(475)때에 웅진(현 공주)로 서울을 옮긴다. 그 후 성왕 때(538)백제의 부흥을 위해 충청도 서남부와 전라도 전역의 물산을 집결시키기에 알맞은 사비(현 부여)로 서울을 옮기게 되는데 이미 마한세력의 중심지로 성장했던 익산지역의 목지국세력은 나주지역으로 이주하여 간 것으로 보이나 7세기 들어 무왕(600 ~641)에 이르러 비로소 다시 백제의 중심으로 나타나게 된다. 우리 익산이 백제문화의 중심지로서 발전하고 경주와 부여 및 공주와 함께 고대 역사문화의 지역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면서 2005년에 고도(古都)로 지정된 근원도 바로 무왕에서 찾을 수 있다 하여도 과언이 아니므로 이에 무왕에 대하여는 좀 더 자세한 설명을 하고자 한다. 우리 익산에는 전북유일의 왕릉이 있으니 바로 백제의 무왕릉이요, 그 옆의 또 하나의 큰 무덤 하나가 선화공주의 능이니 지금까지 쌍릉으로 알려져 왔던 그 무덤이다.

 

(2)서동요와 무왕

오늘날 ?서동요?라는 제목으로 드라마가 제작되어 방영됨으로써 이제 모든 국민들이 알게 된 서동요를 통하여 무왕의 존재에 대한 보다 현실감 있는 접근을 할 수 있다.

 

서동요(薯童謠)

 

善化公主主隱 선화 공주님은

他密只嫁良置古 남몰래 정을 통해 두고

薯童房乙 맛둥방(서동)을

夜矣卯乙抱遣去如 밤에 몰래 안고 간다

삼국유사에서 보이는 서동요의 유래는 다음과 같다.

- 무왕(옛 책에는 무강왕(武康王)이라 하였으나 틀린 것이다. 백제에는 무강왕이 없다) 백제 30대 무왕의 이름은 장(璋)이다. 그 어머니가 남편을 여의고 백제 서울 남쪽 못가에 집을 짓고 살던 중, 그 연못의 용과 결혼하여 장을 낳고, 아명(兒名)을 서동이라 하였는데, 그 도량이 커서 헤아리기가 어려웠으나, 어려서는 마(薯)를 캐어 팔아서 생활하였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맛둥(薯童)이라 불렀다. 신라 진평왕의 셋째 공주 선화가 아름답기 짝이 없다는 말을 듣고 머리를 깎고 서라벌로 가서 중의 행색을 했다. 마를 가져가 서라벌 근방의 동네 아이들에게 주자 여러 아이들이 가까이 따랐다. 이내 노래를 지어 여러 아이들에게 부지런히 부르게 하였다. 동요가 장안에 퍼져 궁중까지 알려지니 신하들이 공주의 잘못을 규탄하기에 이르렀고, 왕은 공주를 먼 곳에 귀양 보내기에 이르렀다. 공주가 떠나려할 때 왕후가 순금 한 말을 주어 보냈다.

공주가 귀양 가는 길에 서동이 나와서 절을 하고 모시고 가겠다 하였더니, 공주는 그가 어디에서 온 사람인지 알지는 못하지만 공연히 미덥고 즐거웠다. 그래서 따라가다가 상통하게 되었다. 그런 뒤에 서동의 이름을 알고 동요가 맞는다 하여 함께 백제로 가서 어머니가 준 금을 내놓으며 이것으로 생활을 영위하자 하였다. 서동이 크게 웃으며 ?이것이 무엇이냐?? 하니 공주는

?황금인데 백 년 동안 부자로 살 수 있을 것입니다.?하였다. 서동은 그 말을 듣고 ?내가 어려서 마를 캐던 곳에는 이것이 진흙처럼 쌓였었다.?하였다. 공주가 듣고 깜짝 놀라 ?이것은 천하의 보배인데 당신이 금이 있는 곳을 알았으니 이 보배를 우리 부모의 궁전으로 보내는 것이 어떠합니까??하였다. 서동이 "좋다." 하고 금을 모았는데 그것이 구릉처럼 쌓였다. 용화산 사자사 지명법사가 머무는 곳에 가서 금을 보낼 계책을 물으니 ?금만 가져오라?고 하여 공주는 편지를 쓰고 금을 법사에게 가져다주었다. 법사는 신통한 힘으로 하룻밤에 신라 궁중으로 실어다 놓았다. 진평왕이 그 신통한 변화를 이상히 여겨 더욱 존경하고 항상 서신으로 안부를 물었고, 서동은 이로 인해서 인심을 얻어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하루는 무왕이 부인과 사자사에 가려고 용화산 밑 큰 못가에 이르자 미륵삼존이 못에서 나타나 수레를 멈추고 경의를 표하였다. 부인이 왕에게 ?이곳에 큰 절을 세우는 것이 소원입니다.?하니, 왕이 허락하였다. 지명법사에게 나아가 못을 메울 일을 묻자 법사는 신통한 힘으로 산을 무너뜨려 하룻밤 사이에 못을 메워 평지를 만들었다. 이에 미륵법상 3개와 회전, 탑, 낭무를 각각 세 곳에 세우고 절 간판을 미륵사(국사에는 왕흥사라 했다)라 하였는데, 진평왕은 많은 공인들을 보내어 도왔다. 지금도 그 절이 있다. (삼국사에는 법왕의 아들이라 하고 여기서는 과부의 아들이라 하니 알 수가 없다) -

무왕이 과부의 아들로 태어나고 익산에서 가난하게 살았으나 왕이 된 것으로 보아 그가 몰락한 왕족이거나 또는 위덕왕의 아들임에 틀림없다. 무왕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단서는 성왕(523-554)에서부터 찾을 수 있다. 왕권강화와 백제 중흥을 위해 공주에서 부여로 천도(538)한 성왕은 당시의 지배세력을 재편하고 국가체제를 정비하는 등 일련의 개혁을 추진한다. 부여로 옮긴 후 성왕은 신라와 연합하여 고구려에게 빼앗긴 한강유역을 되찾고 딸을 신라에 시집보내는 등 동맹체제를 강화하려하지만 바로 진흥왕의 배반으로 신라에게 빼앗기고 만다. 그리고 그는 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신라정벌에 나섰다가 관산성(옥천)에서 전사하고 만다.

왕의 죽음으로 왕권은 급속히 약화되고 귀족들이 정국운영의 주도권을 잡는다. 그리고 「관산성 전투를 주도했던 성왕의 아들이 왕위에 오른 후 귀족들에게 심하게 추궁을 받았다」는 기록이 일본서기에 남아 있다. 이 아들이 바로 위덕왕(554-598)으로 재위기간 내내 귀족들의 기세에 눌리다가 죽은 후 혜왕(598-599) 과 법왕(599-600)이 그 뒤를 잇지만 둘 다 단명하여 겨우 2년씩 재위했고 왕권은 더욱 약해졌다. 법왕이 죽은 후 실권귀족들에 의해 무왕은 추대된다. 귀족들의 권력유지와 국정운영을 위해 추대된 이가 바로 익산에 살던 왕족 서동이었던 것이다. 관산성 전투 이후 신라가 삼국의 주도권을 쥐었고 나제동맹은 와해되었으며 두 나라는 내내 적대관계였다. 그런 외교상황 속에서 무왕과 선화공주의 결혼은 과연 어떻게 가능했던 것일까? 그러나 적대국 왕실간의 결혼은 전쟁 중에도 있었다. 삼국사기에는 즉 관산성 전투가 있기 전해인 553년 7월, 신라가 동북변경을 빼앗고 신주를 설치하였는데도 「성왕은 자신의 딸을 진흥왕에게 시집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무왕이 신라의 왕실과 혼인을 추진했던 것은 안으로는 귀족세력을 누르고, 밖으로는 일시적으로나마 신라와의 대립을 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연유에서 무왕과 선화공주의 결혼을 노래하는 서동요는 탄생한 것이며, 서동요 속에는 당시 백제와 신라의 팽팽한 줄다리기를 늦추려는 정략적인 화해가 담겨 있다. 서동과 선화공주의 이야기는 비단 서동요에서만이 아니라 다른 전설에서도 엿볼 수 있다. 거창 월성계곡에는 백제왕자 서동이 신라의 선화공주를 꾀어서 백제의 도읍 부여로 돌아가던 길에 쉬어 갔다는 전설이 있고, 함양군 안의면의 원학동 계곡에도 서동이 선화공주를 데리고 지나갔다는 갈기숲의 전설이 남아 있다.

그런데 무왕은 풍채가 좋아 체격이 크고, 영특하며 기개가 호방하고 기상이 걸출하였다 한다. 그래서 그의 시호도 무(武)로 하였다. 그의 아들로 왕위를 이은 사람이 바로 의자왕(641-660)으로 아비의 뒤를 이어 신라를 무섭게 공격하였으나 외교적 실패로 나라는 멸망하였다.(660)

 

(3) 무왕의 익산경영과 천도계획

평화롭던 양국관계는 무왕 초기부터 긴장관계로 바뀐다. 여기에는 진평왕의 둘째 공주 천명의 남편인 김용춘의 계략이 있었다. 김용춘은 진평왕이 아들이 없기 때문에 진평왕 사후 왕위계승권을 놓고 무왕과 자신이 다툼이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무왕의 왕위계승권을 차단하기 위해 이미 불문에 입문하여 승려가 된 덕만공주를 환속시켜 왕태녀로 삼게 하고, 신라 역사상 처음으로 여왕을 등극시킬 계획을 치밀하게 세웠다. 그리고 김용춘 자신은 진평왕의 신임을 독차지하여 국정을 총괄하였다. 호방한 무왕은 김용춘의 계략을 알아차리고 602년(무왕 3년)8월 김용춘을 죽이려 병력을 동원하여 아막산성(지금의 운봉)을 공격하였다. 신라는 지금의 덕유산에 4개의 성을 쌓고 방어하니 치열한 전투 끝에 백제가 패퇴하게 된다. 이른바 동서(同壻) 전쟁으로 불리는 이 전쟁 이후 백제와 신라는 그 관계가 급속히 악화되고, 이전의 동맹관계를 끝내 회복하지 못한다. 두 나라간의 싸움은 무왕이 죽기 전까지 무려 12차례나 된다. 혼인동맹으로 맺어진 무왕과 선화공주의 인연은 오히려 그것 때문에 적대관계로 바뀌었으나, 양국간의 이런 전쟁 관계로의 반전에도 불구하고 부부의 금실은 좋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무왕은 왕권강화의 차원에서 수(581-618) 및 당(618-907)나라와의 외교를 통하여 고구려를 견제하며 신라를 압박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나온 것이 바로 익산경영이다. 무왕이 익산을 경영하게 된 배경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익산은 무왕과 깊은 인연이 있었던 곳이라는 것이다. 왕족이었으나, 몰락 왕족이었기 때문에 익산에서 마를 캐며 사는 생활이었다. 마룡지는 바로 그가 익산에서 생활하던 곳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익산의 금마지역은 그가 왕이 되기 전까지 살았던 곳이다.

둘째, 익산지역이 가지는 경제적 측면이다. 앞의 삼국유사에서 보이듯 황금을 산더미처럼 쌓아 놓았다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서동이 어머니를 지성으로 섬겼는데 마를 캐던 땅에서 갑자기 오금을 얻었다. 뒤에 그는 임금이 되어 그 땅에 절을 짓고 오금사라 하였다」고 하였다. 이러한 기록은 익산지역이 금이든, 쌀이든 풍부한 경제력을 가진 곳이라 할 수 있다.

셋째, 지리적 이점이다. 익산은 대부분이 구릉과 충적층으로 이루어진 평야지대이다. 북서쪽으로 금강을 경계로 부여와 곧 닿아있고 동북은 논산으로 연접하며 동쪽으로는 미륵산, 천호산등의 산지로 막혀 있어 평야와 산지가 잘 어울리는 지형으로 교통상으로나, 방어상으로 아주 유리한 입지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익산경영을 통해 왕권의 지지기반을 확대한 무왕은 드디어 익산으로의 천도를 추진하게 되고, 왕궁리에 새로이 왕궁을 조영하고 백제의 최대사찰인 미륵사가 창건되었다. 그러나 구 귀족들의 반대로 천도는 단행되지 못하고 마는데 이것이 무왕의 정치적 한계성이라 하겠다.

1998년부터 우리 익산의 오랜 역사와 백제문화의 향기를 이어가기 위해 익산시는 일찍부터 서동과 선화공주를 주인공으로 하는 뮤지컬을 공연하고 신라의 천년고도인 경주시와 자매결연을 맺고 상호교류하며, 매년 가을에는 《익산 서동축제》행사를 주최하여 각종 공연행사, 체험행사, 부대행사 및 상설행사를 개최하게 됨에 따라 서동과 선화공주에 대한 사랑이야기가 널리 알려지게 되고 우리 익산문화의 상징이며 문화축제로 자리 잡게 되었다.

2005년 9월 5일부터 SBS에서 역사드라마 《서동요》가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고 부여와 우리 익산의 두 곳(신흥공원과 여산면)에 촬영현장이 마련되어 있는데 익산에 촬영장을 설치하기까지에는 시당국의 많은 노력이 따랐으며 무왕과 우리 익산의 문화를 널리 알리는 좋은 기회를 맞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무왕이 태어나 자란 연동리 일대와 무왕릉 일대가 연계되는 관광지 개발이 늦어지고 있음은 못내 아쉬한 일이다.

 

(4) 백제시대의 익산지역 소재군현

백제의 지방행정은 크게 5방이 있었다. 5방중에 동방의 중심지는 은진지역(현 논산군)의 득안성이었다. 우리 익산지역의 고을들은 바로 동방 득안성의 관할에 속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백제시대의 익산지방에 있던 고을은 다음과 같다.

■소력지현(所力只縣:구 이리시 지역) ■금마저(金馬渚:금마) ■감물아현(甘勿阿縣:함라) ■지량초현(只良肖縣:여산) ■알야산현(閼也山縣:낭산) ■우소저현(于召渚縣:왕궁ㆍ봉동)

 

4. 통일신라시대

(1) 보덕국과 익산

백제가 660년에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한 뒤 666년에는 고구려마저 나당연합군에게 멸망당하게 된다. 670년부터 고구려의 왕족인 안승과 장군 검모잠은 고구려 부흥운동을 시작한다. 그들은 고구려의 부흥을 도모하여 당군과 싸우면서 한편으로는 신라의 변방국이 될 것을 청하였다. 이에 신라는 4천여호의 안승의 무리를 금마저로 옮기게 하고 안승을 고구려왕으로 봉하게 되는데, 이는 약속과는 달리 백제지역과 고구려지역뿐만 아니라, 신라마저도 복속하려는 당의 야심에 대항하여 나당전쟁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고구려의 유민을 받아들여 당의세력을 한반도에서 축출하려는 이유에서였다. 안승은 그 뒤 674년에는 보덕왕의 칭호를 받게 된다. 그러나 안승이 경주로 옮겨가고(683) 금마에 남은 아들 대문이 신라에 반하자 이를 토벌하고 그 땅은 뒤에 금마군으로 격하된다. 이때 군사적인 요충지로 가꾸어진 완산은 이후 이 지역의 중심지로 크게 발전하는 계기가 된다. 즉 마한시대와 백제시대에는 금마가 이 지역의 중심지였으나 이제 그 역할은 지금의 전주로 옮겨가게 되는 것이다.

 

(2)통일신라시대의 익산지역

통일신라시대의 지방행정구역은 9주 5소경인데 우리 전라북도지역은 처음에는 완산주라 하였다가 경덕왕 때에 전주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직할시 격인 소경으로는 남원에 남원경이 설치되었다. 이 때 전라남도 지역은 무주로 불리었다. 익산지역은 금마군과 그 영현인 옥야현(沃野縣:구 이리시), 야산현(野山縣:낭산), 우주현(紆洲縣:왕궁ㆍ봉동?삼례 각 일부지역)이 있고, 여량현(礪良縣:여산)은 덕은군(은진)의 영현이었으며 함열현(咸悅縣:함라)은 임피군의 영현에 속하고 있었다.

 

5. 고려시대

고려시대의 지방행정 구역은 경기와 5도 양계였다. 성종 때에는 전북지역은 강남도라 하고 전남지역은 해양도라 하는 등 10도를 두었다가 현종 때에 경기와 5도 양계로 개편하면서 오늘날 이름인 전라도라는 명칭이 생기는데 이는 전라북도 지역의 중심지인 전주와 전라남도 지역의 중심지인 나주를 합하여 만들어진 이름이다. 이 전라도는 전주목과 나주목으로 크게 나뉘어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지방관이 직접 파견되는 주현보다는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는 속현이 더 많았다. 속현은 지방관이 파견되는 주현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중앙정부의 통제를 받았다.

우리 익산지역의 군현인 금마군은 전주목의 속군이 되었으며 옥야현(구 이리시), 낭산현(낭산), 우주현(왕궁, 봉동?삼례 각 일부지역), 여량현(여산), 함열현(함라)은 전주목의 속현이 된다. 이밖에도 고산현(고산), 김제현(김제)등 10개의 현이 전주에 속하게 되는데 이들 군현들은 모두 사수(泗水:만경강)에 연한 평야부에 속하는 고을들이었다.

이들 군현들은 차츰 독립된 군현으로 분리되어 나가게 되는데, 여량(여산)과 낭산(낭산)은 조선시대의 현감격인 감무 한 사람이 겸하였고, 옥야(구 이리시)와 함열은 명종 6년(1176)에 감무가 두어진다. 다만 우주(왕궁ㆍ봉동?삼례 각 일부지역)는 두 이성현(이서와 공덕에 있던 두개의 다른 이성현이다)과 함께 곧바로 전주에 소속시켜 버린다. .

옥야현은 언젠가 감무를 파견하지 않고 다시 전주에 소속시켜버렸는데 지방관을 거두고 다시 전주에 소속시킨 이유는 옥야현에서 어느 집의 하인이었던 유돌만이 주인을 죽인 살해사건 때문이라고 전한다.

금마군은 충혜왕 5년(1344)에 익주로 승격하게 되는데 이는 원나라 순제의 제2왕후가 된 기왕후의 외가(익산 이씨)가 있는 곳이라 하여 이루어 진 일이며 익산이라는 명칭의 근원이 되었다.

그리하여 고려말에는 우주현과 옥야현은 사실상 전주에 소속되어 버리고 익주(금마)와 여량현(여산), 낭산현(낭산), 함열현(함라)만 독립현으로 남게 되었다.

 

6. 조선시대

조선조에 들어와 지방 행정구역은 태종 3년(1403)에 8도를 처음으로 정하고 그 이하 지방행정 체제를 정비하였다. 전국은 8도 아래 약 330여개의 군현을 두게 되었는데 전라도는 삼국통일 이래 이 지역의 중심이 된 전주에 방백(관찰사)이 주재하고 그 이하 부ㆍ목ㆍ군ㆍ현으로 편제되었다. 부에는 부사, 목에는 목사, 군에는 군수, 현에는 현령과 현감이 파견되었다. 이때 파견되는 부사는 정삼품 내지 종삼품이요, 목사는 정삼품이다. 군수는 종4품이며 현령은 종6품, 현감은 종7품이었다. 전라도 지역은 초기에 전주부와 4목 7도호부 12군 31현을 두었는데 우리 익산지역은 대체적으로 익산군(금마), 여산현(여산), 함열현(함라), 용안현(용안)등 4개의 군현으로 되어 있었으며 이후 각 군현의 변천을 보면 다음과 같다.

■익산군(益山郡) : 고려 말에 익주로 승격하였음을 앞에서 언급하였는데 태종 13년(1413)에 다시 익산군으로 변경되었다. 조선시대 익산군의 10개면은 군내면, 제석면, 율촌면, 지석면, 용제면, 춘포면, 두촌면, 두천면, 구문천면, 미륵면 등 10개면이었다. 오늘날 금마면, 삼기면, 춘포면, 왕궁면, 옛 팔봉면 지역이다.

광무 3년(1899)에는 전주부에 속해있던 6개면이 익산군에 편입되는데 옛 옥야현 지역(구 이리시)인 동일면, 남일면, 남이면, 서일면, 북일면 등 5개면과 옛 우주현 지역의 우북면(현 왕궁면 동부지역)을 합하여 6개면이 늘어나서 모두 16개면이 되었다. 이때 오늘날의 구 이리시 지역과 오산면, 춘포면 일부, 왕궁면 일부지역까지 포함하게 된 것이다. 1914년에는 여산군, 함열군, 용안군과 합쳐져서 오늘날의 익산시 영역이 이루어진다. 다만 여산군에 속해있던 황화면이 1963년에 충남 논산군으로 편입되어 떨어져나가는 변화가 있었다. 익산군에는 군수가 파견되었다.

■여산부(礪山府) : 정종2년(1400)에 여량현(여산)과 낭산현(낭산)을 합쳐 두 현의 한 글자씩을 따서 여산현이라 하였다. 세종 18년(1436)에 태종의 왕비인 원경왕후 민씨의 외향이라 하여 군으로 승격하여 충청도에 편입하였다가 세종 26년(1444)에 다시 전라도에 속하게 하였다. 숙종 25년(1699)에는 단종비 정순왕후 송씨의 관향이라 하여 도호부로 승격시켰으며 고종 32년(1895)에 다시 군으로 고쳤다. 그러므로 때에 따라 군수 또는 부사를 두었다. 여산부는 부내면, 천동면, 서이면, 서삼면, 서사면, 북일면, 북삼면, 합광면, 피제면, 공촌면 등 10개면이 있었다. 오늘날 여산면, 낭산면, 망성면, 옛 황화면 지역이다.

■함열현(咸悅縣) : 태종 9년(1409)에 용안현과 합하여 안열현으로 부르다가, 태종 16년(1416)에 다시 함열현과 용안현으로 분리되었다. 그리고 두 현은 고종 32년(1895)에 군으로 승격하였다. 함열현에는 현내면, 동일면, 동이면, 동삼면, 동사면, 남일면, 남이면, 서일면, 서이면, 북일면, 북이면, 북삼면 등 12개면이 있었다. 함열현은 현감이 파견되었다. 오늘날 함열읍, 함라면, 황등면, 웅포면, 성당면 지역이다. 함열은 고려 때부터 함라라고도 불렀다 한다.

■용안현(龍安縣) : 본래 함열현에 속해있던 도내산은소(은 생산지)마을인데 이 고장 사람 백안부개가 원나라에서 본국에 공이 있다 하여 충숙왕 8년(1320)에 비로소 현이 되었고, 공양왕 3년(1391)에는 전주에 속해있던 풍제현(현 용동면 지역)을 복속하였다. 조선 태종 9년(1409)에 함열현과 합치어 안열현이 되었다가 태종 16년(1416)에 다시 갈라서 용안현이 되었고 고종 32년(1895)에 군이 되었다. 용안현에는 현내면, 동면, 북면 등 3개면이었으며 현감이 파견되었다. 오늘날 용안면, 용동면 지역이다.

■옥야현(沃野縣) : 고려 말에 전주에 소속되었다가 조선초기까지 전주부의 속현이었는데 이때 전주부의 속현인 네 고을 沃野(구 이리시), 紆州(왕궁ㆍ봉동 ㆍ 삼례 일부), 伊城(이서), 利城(공덕)중 태종 9년(1409)에는 옥야만 유일한 속현으로 남고 나머지는 폐현이 된다. 1899년에 옥야현으로 전주에 속했다가 익산군으로 편입된 지역은 남일면(중앙동, 인화동 등 시내 중심부와 마동, 동산동,목천동), 남이면(오산면 남부), 동일면(신흥동, 금강동, 석탄동, 대장촌 일대), 서일면(오산면 북부지역), 북일면(남중동, 신동, 모현동, 영등동 일대)인데 1914년에 남일면과 동일면이 합하여 익산면이 되고, 남이면과 서일면이 합하여 오산면이 되며, 북일면은 그대로 북일면이 되었다.

옥야현은 오늘날 구 이리시를 중심으로 오산면과 춘포면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우주현(紆洲縣) : 태종9년(1409)폐현되어 전주에 완전히 예속되게 되는 것이나 오늘날 우주 황씨가 이 고장에 뿌리를 내리고 살고 있어 그 이름은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우주현은 현재 완주군의 삼례읍, 봉동읍, 익산시의 왕궁면 지역으로 우동면, 우서면, 우북면 등 3개면이 있었는데 1914년 부ㆍ군ㆍ면의 통폐합시에 우동면은 봉상면과 합하여 봉동면이 되고 우서면은 오백조면과 병합하여 삼례면이 되고 우북면은 1899년에 익산군에 편입된 후 1914년에 익산군 제석면과 합하여 오늘의 왕궁면이 되었다.

 

7. 한말ㆍ일본 강점기 시대

1895년 을미개혁으로 조선 8도는 23부 331군으로 개정하였으나 이듬해인 1896년 다시 개정하여 13도로 하였다. 그 후 1899년에는 조선시대 내내 전주에 속해있던 옛 옥야현 지역이 익산군으로 편입되는데 그 지역은 다음과 같다.

-남일면(중앙동, 창인동, 갈산동, 주현동, 인화동, 평화동, 마동, 동산동 등 구 이리시 중심부와 목천동)

-동일면(석탄리, 대장촌리, 금강리, 신흥리 일대)

-남이면(오산면 남부지역으로 남전리, 신지리 일대)

-서일면(오산면 북부지역으로 오산리, 송학리, 장신리, 영만리 일대)

-북일면(구이리시 북부지역으로 영등리, 어양리 신용리, 현영리, 만석리, 남중 리, 고현리, 모인리 일대)

이상 5개면이며 옛 우주현 지역에서는 우북면(왕궁면 북부지역)이 역시 익산군으로 편입되었다.

근대화시기의 익산의 발전은 고려후기 이래 전주에 예속되어 있다가 광무3년(1899)에 익산군에 편입된 옛 옥야현 지역에서부터 시작된다. 일본인들은 호남평야의 중심부요, 교통의 요지인 점을 감안하고 만경강 유역의 황무지 개척에 눈독을 들이고 모여들었던 것이니 익산의 근대적 발전은 일인들에 의하여 출발하였는데 1906년 전중부차랑(田中富次朗)이 군산에서 이곳으로 이사 온 것이 효시이다.

1909년 말 호남선을 부설하기 위한 측량이 시작되자 익산의 명칭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또한 1911년에는 철도공사가 착수되고 이에 따라 익산군청, 우편소, 익산 헌병 분대, 익산 변전소 등이 금마에서 옛 옥야현 지역의 남일면으로 옮겨오자 이주자가 불어나고 대교농장 대표인 지길원신(枝吉元信)등 34인의 일인들은 익산번영조합을 조직하여 시가지의 계획, 도로의 개착, 교육ㆍ 경비기관 등의 시설 및 기타 관공서의 이전 등에 공헌하였다. 1912년 호남선 개통이 있게 되자 익산역보선구와 기관구가 개청되었으며 궁벽한 농촌이었던 이곳이 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1912년에 익산공립소학교(중앙초등학교의 전신)가 세워지고 1913년에는 익산공립보통학교(이리초등학교 전신)와 익산공립농림학교(익산대학 전신)가 세워지게 되었다.

일제는 국권강탈 이후에도 대체로 지방행정제도는 이전의 제도가 유지되었다가 1914년에는 부ㆍ군ㆍ면의 통폐합이 이루어지는데 이때 모두 97개 군을 폐하게 되었다. 이해 2월에 남일면과 동일면을 합하여 익산면(이리, 마동리, 동산리, 석탄리, 대장촌리, 신흥리, 금강리, 목천리)이라 이름하고 남이면과 서일면이 합하여 오산면이 되며, 북일면은 그대로 북일면이 되었다. 구 이리시는 익산면과 북일면 지역임을 알 수 있다. 그해 3월에는 용안, 여산, 함열의 3군이 익산군으로 통합됨에 따라 익산군의 행정구역이 넓어졌으며 그에 따라 중심지인 익산면으로의 집중력이 높아졌다.

이리하여 익산군은 일본 강점기인 1914년 이래 모두 익산면(1931년 익산읍), 함열면, 오산면, 황등면, 함라면, 웅포면, 성당면, 용안면, 낭산면, 망성면, 여산면, 금마면, 왕궁면, 춘포면, 팔봉면, 삼기면, 북일면, 황화면 등 18개면이 되었으며 익산군의 군청 소재지인 익산면이 1917년에는 지정면(중심면)이 되면서 북일면 남중리와 고현리를 편입시키고 거리가 먼 석탄리와 대장촌리는 분리하여 춘포면에, 신흥리와 금강리는 북일면에, 목천리는 오산면에 각각 편입시켰다. 1931년에 4월에 읍으로 승격하고 그해 11월에는 이리읍으로 개칭함으로써 1읍 17개면이 된다. 1933년에 이리읍은 12정(町)으로 나누어지게 되며 이때부터 아직도 잊기 어려운 이름인 《이리》라는 명칭이 공식적으로 널리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만경강 직강공사 이전에는 구시장 쪽에서 주현동 갈산동으로 올라가는 언덕받이에 있던 10여 호의 작은 한적한 시골마을인 솝리(속마을)가 익산면 시대에 한자 지명인 이리(裡里 : 인화, 갈산, 중앙, 주현, 창인, 평화동지역)로 바뀌어지고 이제 읍의 명칭이 된 것이다. 1938년 10월에는 이리방송국(JBFK)이 세워졌으며 상수도 시설도 갖추어졌다.

 

8. 대한민국 시대

1945년 광복을 맞이하고 미군정 시기에는 미군 장교들이 책임자로 부임하여 행정을 담당하였고 1947년에 이리읍은 이리부로 승격하면서 익산군에서 분리되었다. 비로소 도시인 이리부와 농촌인 익산군으로 분리되게 된 것이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에도 지방행정제도에는 큰 변화가 없이 이전의 제도를 그대로 운영하게 된다. 남북이 갈려 이북에는 다른 정부가 섰으므로 전국 13도는 8도로 축소되었으나 1946년에 이미 도로 승격한 제주도를 합하여 9도가 되는 것 외에는 큰 틀에서 보면 별다른 변화는 없고 이후 부분적인 개편만이 이루어지게 된다. 정부수립 이후 1949년에 이리부는 이리시로 명칭이 변경되어 익산군과 다시 통합되는 1995년까지 48년간 교통과 교육도시로 널리 알려지게 된다.

1931년 이래 유지된 1읍 17면의 행정체제는 1947년 이리읍이 이리부로 승격되어 익산군에서 떨어져 나가 익산군과 분리되면서 많은 변화를 가지게 된다. 익산군은 황화면이 1963년에 충남 논산군으로 편입되어 현재 연무읍에 속하게 되었다. 1974년에는 북일면이 이리시에 편입되고, 그 후 1979년에는 함열면이 함열읍으로 승격하고, 군청사를 이리시에서 함열읍으로 옮겨갔다. 1983년에 팔봉면이 이리시에 편입되고 1986년에는 용동출장소가 면으로 승격함에 따라 구 익산군 지역은 현재는 1읍 14면이 되었다.

이리시는 1951년 7월 1일 17개동이 25개동으로 분할되었다가 1961년 중앙동, 남중동, 송학동, 모현동, 동산동, 인화동, 갈산동, 주현동, 창인동, 마동, 목천동, 평화동 등으로 다시 개편하여 12개동이 된다. 1970년에는 남중동이 남중1가동과 남중 2가동으로 분리되고 1990년에는 북일동이 신동과 분리되는 등 분동과 익산군지역의 편입으로 인한 여러 차례의 많은 행정구역 조정과 1998년과 2003년에 있었던 행정운영동 통폐합에 따라 현재의 14개 행정동이 되었다.

한편 인접 군과의 작은 지역의 편입관계를 살펴보면, 1973년에는 옥구군 서수면 신기리를 황등면에 편입하고, 아직까지도 김제군에 속해있던 만경강 이북에 있는 김제군 백구면 삼정리 일부를 목천동과 동산동으로 편입하였다. 그리고 왕궁면 온수리 일부와 만경강 남쪽에 소재한 오산면 목천리 남전리 신지리의 일부가 김제군에 편입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만경강을 기준으로 한 김제군과의 행정지역의 분할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만경강 이북이 동산동 부근에는 김제시에 속한 농토가 있으며 만경강 남쪽에는 춘포면에 속한 구담마을이 김제시 백구면안에 자리하고 있다.

1995년 5월 10일 도농 복합도시 형태로 이리시와 익산군이 합쳐져 익산시로 새롭게 탄생하니 분리된 지 48년 만에 다시 합하여 새로운 명칭으로 출발하게 된 것이다. 현재 1읍 14면 14행정동 인구 34만의 도농복합도시로 발전하고 있다.

2005년 현재 익산시의 행정체제는 다음과 같다.

■1 읍 : 함열읍

■14면 : 용안면, 용동면, 성당면, 웅포면, 함라면, 황등면, 삼기면, 오산면, 춘 포면, 왕궁면, 금마면, 여산면, 낭산면, 망성면

■14동 : 중앙동(중앙동, 창인동, 갈산동), 평화동(평화동, 목천동), 인화동(인 화동, 주현동), 동산동(동산동, 금강동, 석탄동), 마동, 남중동, 모현 동, 송학동, 신동(신동, 신용동, 현영동, 만석동), 영등1동, 영등2동, 어양동, 팔봉동(팔봉동, 신흥동, 덕기동, 석왕동, 은기동, 석암동, 용 제동), 삼성동(월성동, 부송동, 정족동, 임상동)

※괄호안은 법정동 명으로 법정동은 모두 31개동이다.

이상으로 선사시대부터 현재의 익산시의 모습까지 요약하여 살펴보았으나 기존의 향토지들이 구 이리시와 익산군의 역사를 혼용하여 서술되었던 까닭에 이해가 어려웠던 점을 감안하여 구 이리시 지역과 구 익산군으로 구분하여 정리하여 보았다.

■ 통합이전 구 이리시의 역사

시 대

명 칭

비 고

삼한시대

 

마한 54개국 중 건마국에 소속

백제시대

소력지현①

 

통일신라시대

옥야현②

경덕왕 16년(서기 757년), 금마군 영현

고려시대

옥야현

처음에는 전주목의 속현이었다가, 명종 6년(1176)감무를 두어 다스렸으나 곧 다시 전주에 소속됨③

조선시대

옥야현

전주부 소속의 유일한 속현④

1899년

 

전주부 소속에서 익산군으로 편입⑤

1931년

익산읍→이리읍

처음에는 익산읍이었다가 연말에 이리읍으로 개칭⑥

1947년

이리부

익산군에서 분리됨

1949년

이리시

명칭 변경

1995년

익산시

익산군과 통합

①소력지현(所力只縣) : 소력지(所力只)란 질펀한 물이 항상 고여 있는 소늪지, 즉「沼瀝池」를 쉬운 한자로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沼란「늪 소」자요, 瀝은「스밀 력, 물흐를 력」池는「못 지」이다. 소력지(沼瀝池) 즉, 끝없이 넓고 넓은 들과 물이 흥건히 고여서 시원한 해원(海原)에 새들이 한가로이 떼 지어 나르는 한가롭고 평화로운 평원을 말한다.

이곳 일대는 1950년대를 전후하며 어디라 할 것 없이 토탄(土炭) 일명 갈탄(褐炭)이 파져서 추운 겨울을 무사히 견디었다. 이것만 보아도 오랜 옛날에 이곳이 소택지(沼澤池)가 많았다는 것을 나타낸다.

소 늪지를 이두식(吏讀식) 표기법으로 음만 따서 소력지(所力只)로 적은 것이다. 소는 순수 우리말로 물이 많이 고인 못을 가리키며 담(潭)?연(淵)자에 해당한다.

②옥야현(沃野縣) : 신증동국여지승람 제 33권 전주부편에는 속현조에 전주부의 유일한 속현인 옥야현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옥야현은 전주의 서북 70리에 위치한다. 본래 백제의 소력지현이었는데 신라때 옥야현으로 고치어 금마군의 영현으로 삼았다. 고려 초에는 전주에 내속시켰다. 명종 6년(1176)에 감무를 두었고, 뒤에 다시 내속시켰다. 군창이 있다)

위의 책 방면조에는 (옥야현은 동일도, 서일도, 남일도, 남이도, 북일도, 북이도등 6개면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남쪽으로는 泗水(만경강)과 연하고, 서쪽으로는 김제와 접한다)고 적혀 있다.

③고려시대에는 속현에는 지방관을 파견하지 않았다가 12세기부터 감무를 파견하게 된다. 감무는 조선시대의 현감으로 이해하면 된다. 지방관을 거두고 다시 전주에 소속시킨 이유는 옥야현에서 하인이 주인을 살해한 사건 때문이라고 전한다.

④조선시대 초기에 전주부에 속한 속현은 伊城(완주군 이서), 利城(김제시 공덕), 우주(왕궁?봉동), 옥야(구 이리)등 4개현이었는데 태종 9년(1409)에 도관찰사 윤향의 건의에 의해 옥야현은 속현으로 남고 나머지는 폐현되었다.

⑤1899년에 옥야현으로 전주에 속했다가 익산군으로 편입된 지역은 남일면(중앙동, 인화동 등 시내 중심부와 목천동), 남이면(오산면 남부), 동일면(대장촌 일대), 서일면(오산면 북부지역), 북일면(남중동, 신동, 모현동, 영등동 일대)인데 1914년에 남일면과 동일면이 합하여 익산면이 되고, 남이면과 서일면이 합하여 오산면이 되며, 북일면은 그대로 북일면이 되었다. 구 이리시는 익산면과 북일면 지역임을 알 수 있다.

그 중 남일면은 1908년 전군도로가 뚫리고, 1912년 호남선이 개통되자 급속히 발전하게 된다. 이미 일 년 전인 1911년에 익산군청이 이전해오고 1914년에는 동일면과 합하여 익산면이 되며, 용안군, 함열군, 여산군이 익산군에 편입됨에 따라 익산면은 중심도시로 발전하였다.

⑥?이리?명칭의 유래 :?이리?는 ?속마을?이란 뜻이다. 옛날 만경강 가에 갈대 우거진 속에 멀리 보이는 마을(구시장에서 주현동과 갈산동으로 올라가는 언덕받이에 있던 10여가호의 작은 마을)이라는 뜻에서 불리었는데 곧 ?솝리?또는?솜리?로도 불렸고 한자로 표기하게 되어 이리(裡里)가 되었다.

  

■ 통합이전 구 익산군의 역사

시대

명칭

비고

삼한시대

건마국, 감해국, 여래비리국, 아림국, 불사분야국

건마국(금마), 감해국(함라), 여래비리국(여산), 아림국낭산), 불사분야국(왕궁ㆍ봉동)

백제시대

금마저, 감물아현 지량초현 알야산현, 우소저현

금마저(금마), 감물아현(함라), 지량초현(여산), 알야산현(낭산), 우소저현(왕궁ㆍ봉동)

통일신라

시대

금마군, 야산현, 우주현, 여량현, 함열현

금마군(금마)

야산현(낭산), 우주현(왕궁ㆍ봉동)은 금마군 의 영현

여량현(여산)은 덕은군(은진)의 영현

함열현(함라)은 임피군의 영현

고려시대

금마군→익주, 낭산현,

우주현, 여량현, 함열현,

용안현

금마군은 전주목의 속군이 되었으며 충혜왕 5년(1344)에 익주로 승격①

낭산현(낭산), 우주현(왕궁ㆍ봉동), 여량현(여산), 함열현(함라) 용안현(용안)은 전주목의 속현이 됨.

조선시대②

익산군

여량현+낭산현→여산군

안열현→함열현→함열군

용안현→용안군

우주현은 태종9년(1409)에 폐현되어 전주에 예속되고

익산군(금마), 여산군(여산), 함열현(함라), 용안현(용안)등 4개의 군현으로 고정된다.

1914년

익산군

여산군, 함열군, 용안군이 익산군에 편입③

1995년

익산시

이리시와 통합

①고려시대에 금마군이 익주로 승격한 것은 원나라 순제의 기왕후의 외가가 있는 곳이라 하여 이루어 진 일이며 익산이라는 명칭의 근원이 되었다..

②조선시대 들어 정종 2년(1400)에 낭산현을 여량현과 합하여 여산현이라 하고, 세종 18년(1436)에 원경왕후의 외향이라 하여 군으로 승격하였다. 숙종 25년(1699)에는 단종의 정순왕후 송씨의 관향이라 하여 도호부로 승격시켰으며 고종 32년(1895)에 다시 군으로 고쳤다.

안열현은 태종 9년(1409)에 함열과 용안을 합하여 생긴 이름인데, 태종 16년(1416)에 다시 함열현과 용안현으로 분리되었다. 그리고 두 현은 고종 32년(1895)에 군으로 승격하였다. 우주현은 태종 9년(1409)에 폐현되어 전주에 예속되었다.

용안현은 함열현에 속해있던 마을인데 이 고장 사람 백안부개가 원나라에서 본국에 공이 있다하여 충숙왕 8년(1320)에 현이 되었고, 조선 태종 9년(1409)에 함열현과 합치어 안열현이 되었다가 태종 16년(1416)에 다시 갈라서 두 현으로 만들었다.

③일제 강점기(1914)에 이루어진 개편으로 4군이 통합된 이후 익산군 영역의 가장 큰 변화는 1963년에 황화면이 충남 논산군으로 편입된 일이다. 현재 황화면은 연무읍에 속해있으며 그 명칭은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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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2.06.28 11:01

    첫댓글 우리 지역 역사를 알아보는 소중한 공부시간~ 기회 제공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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