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송 아이스클라이밍 월드컵은 국내 등반 경기 중 가장 큰 규모의 대회로, 올해로 10년을 맞이했다. 제1회 대회 때부터 루트세터로 참여하고 있는 김종헌(안양 김종헌 클라이밍센터), 민규형(대전 월드컵경기장 인공암벽장)씨와 필자가 이번 대회에도 루트세터로 참여했다. 이번에는 서종국(서종국 클라이밍센터)씨도 루트세팅을 함께했다. 서종국씨는 지난해까지는 선수로서 월드컵에 참여했다가 올해 처음으로 루트세터로서 참여하게 되었다.
루트세터가 지녀야 할 역량
등반 경기가 펼쳐지는 벽 뒤쪽에는 각종 등반 장비와 잡동사니가 쌓여있는 루트세팅 공간이 있다. 가운데에는 전선을 감을 때 사용하는 틀을 테이블로 사용하고 있고, 테이블 위로 전동그라인더, 아이스엑스, 전동 임펙트드릴, 모카포트, 컵라면, 퀵드로우, 스크류피스 등이 어지럽게 널려져 있다.
겨울철 외부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즐겨 입는 원피스 작업복을 입고, 코팅된 빨간 장갑을 끼고 있는 사람들이 그 주위에 둘러앉아 무언가 진지한 얘기를 나누고 있다. 대회 운영을 모르는 사람들이 볼 때는 그저 공사장 작업에 대해 얘기를 나누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루트세터들은 선수들의 명단을 확인하고 루트 수를 결정한다. 예선전은 오픈 경기(다른 선수들의 경기를 보고 자신의 차례에 등반함)이므로 속도전이 되지 않도록 루트의 난이도가 높아야 한다. 결승전에서는 아이스캔디(벽에 매달아 사용하는 얼음)를 사용하는데, 어디에 몇 개를 달아야 하는지도 신중하게 결정해야 한다. 또한, 선수들의 등반선은 어떻게 잡아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장소를 옮겨가며 의견을 나눈다.
루트세팅 전, 루트세터는 크레인을 이용해 지난 선수권대회에서 사용했던 아이스캔디와 볼륨, 홀드를 벽에서 남김없이 제거한다. 등반벽을 빈 도화지 상태로 만드는 동안, 다른 루트세터들은 아래에서는 예선전에 사용될 홀드를 골라 청색 스프레이를 뿌린다. 청송 아이스클라이밍 월드컵에서는 일관되게 예선전에는 청색, 준결승에는 은색, 결승에는 금색 스프레이를 홀드에 뿌려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규칙은 김종헌 루트세터가 만들었다. 그는 UIAA 국제 루트세터로서, 국내 아이스클라이밍 대회뿐만 아니라 유럽과 북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세계 월드컵경기에서 루트세팅 경험이 있다. “루트세팅에서 홀드 하나하나를 배치하는 것은 자신의 철학을 벽에 수놓는 것과 같다”라고 말하는 그에게서 진중하고 신중한 자세를 엿볼 수 있다.
필자가 생각하는 그의 가장 탁월한 능력은 루트 전체를 읽어 내는 것이다. 그는 루트 난이도와 시간을 조정해 경기마다 한두 명의 완등자가 나오게 한다. 그것는 다년간의 경험과 감각이 없으면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등반 시간이 길어 너무 많은 완등자가 나오거나 어려운 루트로 인해 초반에 많은 선수가 떨어지게 되면 관중과 선수들의 흥미를 떨어뜨리기 때문이다. 이러한 조율능력은 루트세터가 가져야 할 중요한 역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