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시하더래도, 냉정히 대처하고... 화내지 말자.
자식들이 내몰라라 하더라도 심각 하게 생각 하지 말자.
무슨 일이든 자기 힘으로 하자."ㅡ
위글은 나의 생활 지침서다.
낼 모래면 70(현제69세>이니께 늙은이가 분명하다.
나는 나이를 먹엇어도 마음만은 언제나 청춘이다.
나는 일년내내 바쁘다.
이런 나이에 일거리가 있다는 것은 최고의 행복이다.
오늘도 봄볕 그을리며 몸과 마음은 하늘을 날 듯!
11층 고층 닥트공사를 박쥐처럼<밧줄을 타고>건물벽에 찰삭 붙어서,
건장한 체력을... 뽑내며 마음 거뜬하게 현장<닥트>
밧줄타기 공사를 말끔히 끝냈다.
실은즉슨 밧줄<외줄>을 타고 함마드릴로 건물벽에 구멍을 뚫고<앙카>닥트관을 설치하는
공사는 무지하게 힘이 드는 작업이다.
외줄에 몸이 대롱 대롱 매달리는 상태로,
버팀목이 없는 상황에서... 가벼운 바람에도 요리 저리 흔들리는
건물 콩크리트 벽에 공조닥트관을 고정시키는 앙카 구멍을 뚫는 작업은,
숙련된 기술과 강인한 정신력과 버텨내려는 괴력의 팔힘이 있어야 한다.
"사장님! 대단하십니다 요,
대한민국에서 사장님 연세에? ...
고층 빌딩에서 밧줄을 타신 분은 눈꼽을 씻고 찾을라고 해도 없을 겁니다 요,
크레인,을 불르면 될거구먼 은...
"임마야!
'크레인'을 불르면 돈이 얼만데?
자그마치 70만원이야!
내가 왜? 닥트공사 일이 많은 줄 알간?
공사비가... '크레인'을 빌린값 만큼 싸고,
사장님이 직접 밧줄을 탄다고, 믿음이 가고 신뢰가 있기 때문이 얏!
대한민국에서 닥트일을 3대까지 가업승계 하는 사람있음,
눈꼽 씻고 봐도 없을 텡께!...
ㅡ"언젠가는 기술자가 큰소리 칠 시대가 올텡 께,
기술을 배워야 한당께!"ㅡ
아버지는 기술자가 큰소리 칠 시대가 올것이라면서 아들 다섯명을 몽땅 다ㅡ아...
닥트 기술자를 만들었다.
아버지는 왜정 때 강제 징용을 피하려고 만주로 일본 대판으로...뜨내기로 떠돌아 다녔다.
독립군 어쩌구 하는 <아버지를 미화시키려는...의도로,> 쓰달데기 없는 변명은 않겠다.
아버지는 왜놈들의 강제 징용을 피하려고 만주벌판에서 오랜 세월을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
배 고품을 뼈저리게 경험했었다.
아버지는 배 고품을 해결할 수 있는 것으로는 어떤 기술이라도 배워야 한다는
결심을 하고,
만주에서 일본으로 밀향했다.
일본 시모네쎄끼<下關>에서 철판 함석<양철>으로 물동이,수대,<다라이,바께쓰,>등을
만들어내는 기술을 무심히 지켜보다가 결심한다.
집안의 식수를 아나넥들은 무거운 옹기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지고 날르던 시대에,
옹기물동이 보담 십분지 일도<10대1>안되는...양철 물동이는 획기적인 발명품이었다.
~"옳다구나, 바로 저런 기술을 배워야 한당께!~
그러나 단번에 거절을 당한다.
'조센징'이라는 신분적인 결함도 있었지만 작은 가네공업사 에서는 인원에 한계가 있었다.
그래도 포기하고 단념할 수가 없었던 아버지는,
~"밥만 먹여 주십시요,"~
떼를 쓰다시피 일본인 사장에게 매달렸다.
자존심 따위는 문제가 되질 못했다.
이 기술을 배워야 겠다는 결심은...이기술을 배워야만 산다는 <생사生死>
죽고살기로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아니다...애절하게 간절하게 매달렸다.
몇날 몇일을 유심히 지켜보던 일본인 사장은, 아버지의 진심을 확인하게 됩니다.
시다바리<아랫사람>로 취직이 된것입니다.
부레키야 양철 공장에서 제작하는 물품은 <바케스, 삭구, 다라이,>등 다양했다.
주방기기 용기를 만들어내는 기술은 손재주 뿐만 아니라,
설계 도면을 읽고 풀이해서 재단을 할 줄 알아야...완전한 기술자가 될 수 있었다.
또, 건축 닥트 분야가 있다.
일본 주택은 지붕 용머리에 치장을 다양하게 한다.
일본은 습기가 높고 여름이 무더운 나라로 유명하다.
그래서 개방적인 주택 특징으로는 여름 형 주택 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창이 많고 천정고가 높다보니 높게 솟아 있는 지붕의 용머리에 탑모양의
망사를 다양하게 치장을 한다.
망사 제작은 닥트<양철기술자>기술자들의 자존심이자 어쩜 예술의 경지에까지
승화시키고자...심혈의 작품인것이다.
1940년,
아버지가 <부레끼야>기술을 배우려고 입문한거이 어언 10년이 되었다.
30세다.
당시 총각나이로는 늙은이...노총각이다.
어느날,
일본인 사장의 부름이 있었다.
일본인 사장은 의미심장한...어쩌면 어색한 표정을 짖고 있었다.
일본인 사장은 인근 지역에서 내노라하는 부자였지만 덕망이 느껴지는 분이셨다.
"오, 상<씨>금년 나이가 몇인가?"
"30셉니다."
"오, 상<씨>이 우리 공장에서 일한지가 십년도 넘었지?"
"아,....네, 어언 십년이..."
"근데?...오 상<씨>은 장가 안갈란 가?"
"???...제 주제에 장가는 요, 기술을 배울려면 아직도 당당 멀었능디 요,"
"오 상<씨>이 조센징이 아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싶네,
내게 아들은 없고, 딸래미만 줄줄이 셋씩이나 있잖은 가,
아들이 있으면 공장을 물려줄 수 있으련만,..."
일본인 사장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깊은 시름에 잠긴다.
아버지는 일본인 사장과의 면담이 있은 후부터 걱정이 가득했다.
일본인 사장의 의도를 대강 예측이 되는 봐,
과년한 딸들이 셋이나 있음에...
잘 못되면, 아니다 잘 되면 일본인 사장의 재산을 거머쥐는 사위가 될 수도 있는
철호의 기회였다.
그러나 아버지 생각은 단호했다.
ㅡ"나는 조선의 남아닷!"ㅡ
일본인 사장의 의도를 파악이 되는 상황에서 더 이상 방관하고 머뭇거릴 수 없었다.
굳은 결심을 하고 떠난다.
또다시 방랑의 길을 떠나게 된다.
오사카<대판>에서 교토(경도) 후시미 성(복견성)에까지 갔다가 다시 되돌아와선
대판(大阪) 방직공장에서 얼마간 부레키야<닥트>일을 하였다.
대판이면 일본에서 그 당시에 공장지대다.
고국에선 오사카 대판에 방직공장에 취직 시켜 준다고,
매국노 면장등을 동행시켜 빈곤한 농부의 딸들을 간호부, 軍간호보조원 모집등의 명목으로 꾀었다.
아버지,<오삼석>는 개인신분으로 방직공장 설비<닥트>팀에 취직이 되었기에,
고국에서 강제 동원되어 갓들어온 동포들과 가끔 애환을 나눌 수 있었다.
왜놈들의 침략으로 가난으로 피페해진 슬픈민족,
동포들은 열악한 방직공장 노동현실에서 너무나 힘들어 하며 같이 부등켜 안고 울곤하였다.
아버지는 격어봐서 안다.
십년을 하루같이 직장동료 일본인<부레키야,덕트,>들에게 악질적인 괴롭핌을 당했다.
조센징은 더럽다고, 폄하하고 망령된 폭력을 무던하게 견뎌냈었다.
단지, 조센징이라는 이유에서다.
아버지는 이곳에서 운명처럼 어머니<김평님>를 만나게 된다.
방직공장에 강제징용된 조선인 여성들 수백명 중에서 어머니와 정분을 맺은 것이다.
설비<덕트>개인자격 직종으로 취직이 되었던 아버지는 강제징용된 동포들 보담,
출퇴근이 보장되는 자유로운 신분이었다.
1942년 이른봄,아버지는 32세, 어머니는 17세, 15년차다.
감사합니다.
곧 다음편에서... 우두봉/ 오명원,
첫댓글 정감있는 글 잘 보았습니다.
항상 감사하고 고맙습니다.
강산이 두번 변한 인생입니다.
아름다운 인연으로 모임에 참석하여
맛있는 음식도 사주셔서 감사합니다.
항상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