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포 영감 이야기
고모네 과수원과 울타리를 맞대고 대포 영감네 과수원이 있었는데 대포 영감님은 큰아버지의 손위 처남(강릉 양조장 집 아들)이 되니 대포 영감님은 나에게 큰어머니의 오빠로 사돈이 되는 셈이다.
대포 영감님은 몸집이 매우 뚱뚱하고 머리도 허옇게 세었는데 항상 쇠 지팡이를 절렁거리며 짚고 다녔다. 강릉 읍내에서 아버지로부터 양조장을 물려받아 운영하다가 처분하고 우리 마을로 와서 과수원을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읍에서 이사 왔다고 ‘읍엣집 영감님’이라고 불렀다는데 그런데 하도 큰소리를 잘 치고 믿기지 않는 허풍을 잘 떨어서 언제부터인가 허풍쟁이라는 의미로 ‘대포 영감’으로 별호(別號)가 바뀌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영감님은 우리 동네 과수원을 사서 이사를 왔는데 제대로 돌보지 않으니 무성한 수풀 속에 복숭아며, 사과나무가 제멋대로 서 있는 것 같았다. 다양한 잡초(雜草)는 물론, 엄청나게 따가워서 만질 수도 없는 엉겅퀴(쐐기풀)도 너무나 많았다.
‘그게 어디 과수원인가, 풀밭이지.....’, ‘그 과수원 풀숲 속에 호랑이가 새끼를 쳐도 모르겠더라....’
동네 사람들은 대포 영감네 과수원을 보고 모두 혀를 찼지만, 대포 영감이고 그 아들이고, 과수원에는 별 관심이 없는 듯 무슨 볼일이 그리 많은지 읍내만 들락거렸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녔다는 대포 영감의 큰아들은 동네 사람들을 보면 무식한 촌놈들이라고 깔보기가 일쑤고, 같이 말도 잘하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 또한, 대포 영감네 큰아들은 농사일도 할 줄 모르고 맨날 빈둥거리며 일도 할 줄 모르는 건달(乾達)이라고 흉을 보았다.
서울에서 여고를 다녔다는 며느리는 농사할 줄 모르기는 매한가지였는데 언젠가 부뚜막에 앉아 신문을 보더라고 동네 여자들은 별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수군거리기도 했지만, 성격이 원체 소탈해서 이따금 이웃 아낙네들과 어울려 수다를 떨기도 하고, 마실도 잘 다녀서 동네 사람들은 그 집 며느리 한 사람만은 괜찮다고들 하였다.
이따금 그 과수원 가운데 있는 원두막에서 대포 영감 큰아들이 트럼펫(Trumpet)을 불곤 했다.
뜨거운 오뉴월 햇살 속에 구슬땀을 흘리며 밭고랑에 엎드려 일하다 보면 과수원에서 꿈결처럼 아련히 트럼펫 소리가 들려온다. 그러면 마음은 두둥실 떠올라 먼 이국땅을 헤매게 되곤 하였다.
그럴 때마다 마을의 젊은이들은,
‘젠장, 어떤 놈은 그늘에 자빠져 나팔만 불어도 잘 먹고 잘 살고...’
‘에라, 이까짓 꺼 내 패대기치고 어디 먼데루 도망이나 칠까......’
하고 넋두리를 늘어놓곤 하였다.
어느 해 늦가을, 대포 영감님이 읍내에 나갔다가 경찰서장하고 술을 몇 잔 마시고 나서 마을까지 10리 길을 걸어오는데 날이 저물었다고 한다.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외진 곳이라 낮에 다니기도 으스스한 봉화재(烽火峙) 고개를 막 들어서는데 황소만 한 호랑이 한 마리가 눈에 시뻘건 불을 켜면서 멀찍이 따라오더란다.
고개를 거의 다 넘어와서 마을이 가까워지자 녀석은 좌우로 빙빙 돌며 해칠 기세를 보이더란다.
대포 영감은 짚고 다니던 쇠 지팡이로 길옆의 바위를 힘껏 내리치며 벽력같은 소리를 내질렀더니 호랑이가 깜짝 놀라서 땅바닥을 한 바퀴 나뒹굴고는 물똥을 한 동이나 내깔기고 쏜살같이 도망을 가더라고 했다. 마을 사람들은 아무도 그 말을 곧이듣지 않았음은 물론 그때부터 영감님을 허풍쟁이 영감이라는 뜻의 ‘대포 영감’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과수원(사과밭) / 엉겅퀴(쐐기풀) / 야학(夜學)
어느 해였던가, 대포 영감 며느리가 야학(夜學)을 연다고 하여 동네가 술렁거렸다.
한글을 못 배운 사람들은 누구든지 오면 한글을 가르쳐 준다고 하였다.
동네 사람 중 여자들은 대부분이 한글을 몰랐고 한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사람은 국민학교에 다니는 우리 또래뿐이었던 시절 이야기이다. 대포 영감네 행랑채 제일 큰 방이 글방으로 꾸며졌다.
칠판도 달고 백묵(白墨/Chalk)도 있고, 마을 사람들에게는 모두 신기한 것들뿐이었는데 물론 무료(無料)였을 뿐만 아니라 공책과 연필도 무료로 나누어 주었다. 몰려오는 사람들 대부분은 동네 아주머니들과 처녀들, 그리고 학교에 다니지 않는 조무래기 계집아이들이었다. 저녁마다 호롱불을 앞세우고 깔깔거리며 모여들면 2, 30명씩이나 되었다.
낮에는 논밭에서 일하느라 솜처럼 피곤하련만, 어두컴컴한 남포(램프)불 밑에서 방바닥에 엎드려 연필에 침을 묻혀가며 읽고, 쓰고 하면서 한글을 익히느라 여념이 없었다.
‘가갸거겨..., 가 자에 기역하면 각, 나 자에 행(이응)하면 낭.....’
야학(夜學) / 말타기 놀이 / 당시 등잔 받침
나는 이따금 씩 어머니와 누님을 따라 글방을 가곤 했는데 글방 한쪽 벽에는 커다란 책꽂이가 있고, 벼라 별 신기한 책들이 가득 꽂혀있어 너무나 흥미로웠다.
난생처음 보는 다른 나라의 그림도 있고, 특히 옆에 그림(삽화)이 그려져 있는 시집(詩集)이 마음에 들었다.
그 시(詩)들을 읽으며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나의 어린 시절의 기억이 되살아난다.
우리 어머니와 누님들은 이때 야학에 다니며 한글을 깨쳐서 책도 읽고 편지도 쓸 수 있게 되었다.
대포 영감은 밭 가나 논두렁에서 마을 사람들을 보면 일도 못하게 아무나 붙잡아 놓고는 며느리 자랑을 하느라 입에서 침을 튀기곤 했다.
‘그러기에 옛사람들이 뭐라고 했는가? 남자나 여자나 사람은 그저 배워야 하는 게여. 지랄병 빼놓고는 뭐든지 배우라고 안 했는가? 무식이 고질병이여, 흠 흠...’
그러나 정작 대포 영감은 한글을 모른다는 소문도 돌았다.
전쟁 중이던 1951~2년은 북적(北赤:북한 빨갱이) 치하라 저녁마다 회의가 많았는데 교양을 한다고 했다. 공산주의 선전이 주된 내용이었을 터이고, 매일 저녁 북한 노래도 배웠다는데 고모네 큰 누나들과 우리 누님 또래 야학 다니던 7~8명이 함께 몰려다녔다. 언젠가 구정(邱井)초교 교정에서 열린 노래대회에서 누님은 북한찬양 노래를 불러 상을 타기도 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런 누나들을 보고 말(馬) 만한 지즈바(계집애)들이 겁도 없이 몰려다닌다고 혀를 차시고, 또 그러다 진짜 빨갱이가 되는 게 아니냐고 야단을 치시곤 했는데, 전쟁이 끝나고 진짜로 빨갱이가 되어 북한으로 가거나, 사상(思想)에 걸려 곤욕을 치르는 사람도 제법 있었다.
내가 인천교대를 졸업, 교사 발령을 받고 몇 년쯤 후에 강릉에서 큰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와서 시간을 내어 조문을 가게 되었는데 당시 큰어머니는 강릉 도깝재(도깨비 고개)에서 막내딸과 함께 살고 있었다. 저녁을 먹고 서먹서먹한 큰어머니 친정 조문객들과 수인사를 나누는데 큰댁 형님이 나한테 슬며시 다가와서,
‘자네 금광평에 살 때 야학을 하던 읍엣집 영감 며느리 기억나나?’ 한다.
‘아 알다마다요. 그 천사처럼 예쁘던....’ 그러자 형님은 나한테 저기 저 할머니라고 귀띔을 한다.
부뚜막에 앉아 신문을 보더라고 흉보던,
얼굴이 뽀얗고 손가락이 누에처럼 곱던,
칠판 앞에 서면 천사처럼 우러러 보이던,
언젠가 나무 한 움큼 머리에 이고가며 뒤뚱거린다고 마을 아낙들이 웃던....
방 아랫목에 머리가 하얀, 얼굴에 주름살은 잡혔지만, 아직도 뽀얀 살결이 남아있는 조그마한 할머니가 앉아 있었다.
너무도 반가워서 달려가 손을 잡으며, ‘제가 그 과수원 앞에 살던 백○○입니다.’
‘엉? 자네가 그 공부 잘하던 사돈 학생?’ 하시며 인자한 미소를 얼굴 가득 머금으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