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에서 학위를 준비할 때, 함께 준비하는 동기들과 그랜드 캐년에 갔었습니다. 참으로 웅장했습니다. 눈 앞에 펼쳐진 그랜드 캐년을 바라본 느낌은, 그동안 말로만 듣고, 화면으로 본 것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그 곳에서 만났던 미국인 부부는 우리가 신학생임을 알고는, 자신들도 크리스챤이라며, 그 곳에서 함께, 하나님을 찬양했었습니다. 이렇게, 미국의 그랜드 캐년이나 나이아가라 폭포 또는, 중국의 장가게를 구경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눈 앞에 펼쳐진 자연의 크고 웅장함 앞에서, 하나님에 대한 경외감을 갖습니다. “경외”라는 말은, 성경에서 171번 나오며, 그중 시편과 잠언에서만, 61번 나옵니다. “경외”는 히브리어로 “야레”로, “심리적 압박이나 공포감에서 비롯된 두려움이 아니라, 도덕적, 윤리적, 신앙적 의미가 함축된 두려움을 표현”하는 단어입니다. 그 의미는, “두려워하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무서워 하나님 앞에서 움츠러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우러러 떠받들다, 하나님을 기리어 찬송하다”는 의미입니다. “주님은 나의 최고봉”이라는 묵상집을 쓴 “오즈월드 체임버스”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즈월드 체임버스의 죄를 씻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을 믿음으로 확신하고는 성령체험을 경험합니다. 그랬기에, “하나님을 향해 두려운 마음을 가지면 아무 것도 두려울 것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이 두렵다.”라고 했습니다. 본문을 비롯하여, 여러 시편을 기록한 다윗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였습니다. 그는 자신은 물론,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권면합니다. 본문 9절에서도 다윗은,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고 합니다. 여러분, 교회를 다니는 성도들 가운데,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다고 말할 사람이 있을까요? 어떤 이들은, 자신의 직분을 말하며, 자신은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생활 속에서 고난을 겪거나 교회가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가지 않으면, 장로든, 권사든, 안수집사든, 직분에 상관없이 교회를 떠나는 경우들이 허다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말을 너무 쉽게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는 겁니다. 찬 95장 “나의 기쁨 나의 소망되시며”의 1절 가사를 보면, “나의 기쁨 나의 소망되시며 나의 생명이 되신 주 밤낮 불러 찬송을 드려도 늘 아쉰 마음뿐일세”라고 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삶이 어렵거나 힘들 때, 또는 자신이 섬기는 교회의 상황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해도, 그 속에서 하나님을 찾으며,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겁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들여다보면, 그는 자신의 욕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한다거나 하나님을 바라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직, 하나님 앞에 엎드렸을 뿐이며, 오직 하나님께 기도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삶의 어느 한 순간에서만 하나님을 기뻐하거나 하나님을 찾는 것으로는,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성도된 우리의 신앙생활이 삶의 어느 한 순간이 아니라, 삶의 전체가 하나님을 찾으며,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 43: 7절을 보시면,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지음을 받았고, 또,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지음을 받은 하나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우리에게 놓여진 상황이 아무리 힘들고 어렵더라도, 그 속에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보호와 구원을 믿으며,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본문에서 약속한 하나님의 복이, 우리의 삶 속에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7절을 보시면, “여호와의 천사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 치고 그들을 건지시는도다”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하나님의 보호와 구원을 받습니다.
본문의 시작을 보시면, “여호와의 천사”를 말합니다. 천사란, 하나님에 의해 파견된 영적 존재를 가리키는 것으로, 천사의 사명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든 자들을 둘러 진을 치고, 그들을 보호하고 구원하는 것”입니다. 이어, “그들을 건지시는도다”는 말은, “어려운 환경이나 상황에서 끌어내다, 해방하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이는, 전쟁에서 포로가 되거나 억류 또는 감금된 자를 해방하는 것을 나타내는 군사용어입니다. 즉, 다윗은, 하나님의 천사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를, 대적들의 압제로부터 건져내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하심이라고 말합니다. 이렇듯 다윗의 믿음은, 신본주의적 믿음에 기초함으로, 자신의 구원이나 주를 경외하는 자들의 구원이 인간적인 요인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를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에서 비롯된 것임을 분명하게 밝힙니다. 여러분, 우리는 누구나가 환난을 당합니다. 이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기에, 환난을 당할 때, 대처하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그것을 자기가 해결하려고 몸부림치면, 그는 오히려, 그 환난 속으로 깊이 함몰되어, 더욱 심한 고난을 당하게 됩니다. 야곱은 형 에서를 만나기 앞서서, 얍복강 나루에서 하나님께 간절함으로 간구했습니다. 또, 히스기야는 병으로 인해 죽음을 눈 앞에 두었을 때, 벽을 향해, 통곡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사무엘은 이스라엘이 미스바에 모였을 때, 블레셋이 공격함으로 위태로워지자, 이스라엘을 위해 하나님께 간절함으로 간구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어려움이 닥쳤을 때, 그에 대해 하나님께 간구하며, 하나님께 피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 간구하며 피하는 자에게, 천사를 보내어 보호와 구원을 베푸십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께 간구할 때,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할 수 없는 놀라운 방법으로 응답하십니다. 그러기에, 신앙생활은 지식이나 이론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또, 우리의 욕심으로, 우리의 야망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숙한 신앙생활을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성경 지식이 필요하지만, 성경의 내용을 머리로만 알고 이해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됩니다. 많은 이들이, 성경공부를 원하고 강조합니다. 왜? 성경공부를 원합니까? 혹시, 성경에 대한 지식을 갈망하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잘못된 겁니다. 매 주일 예배를 통해, 설교를 듣고 성경을 읽음으로, 기본적인 성경지식을 쌓고, 그것을 토대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삶 속에서 만나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을 믿지 못하면, 건강한 성도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된 우리도 본문을 기록한 다윗과 같이, 우리의 삶이 흥할 때나 쇠할 때, 삶의 환경에 좌우되지 않고, 언제 어디서나 한결같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간구하며, 하나님께 피함으로, 하나님의 보호와 구원의 은혜가 우리의 삶 가운데 가득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8절을 보시면,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경험한 자는 하나님을 경외합니다.
본문의 후반부를 보시면,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합니다. 여기서, “피하다”는, 히브리어로 “예헤쎄”라고 하는데, “도피하다, 상징적으로 신뢰하다, 소망을 가지다, 피하다, 신뢰하다”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피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 자신을 맡긴다는 겁니다. 음식의 가치를 결정짓는 요소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모양과 향기와 맛입니다. 하지만, 이 중에서도 무엇보다, 맛이 좋아야 합니다. 아무리 보기좋고, 향기가 좋아도, 맛이 엉망이면, 아무도 그 음식을 두 번 다시 먹으려 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나, 모양과 향이 아무리 나쁘더라도, 맛이 좋으면 사람들은 시간과 돈을 들여서라도 그 음식을 다시 먹으려 할 겁니다. 그러기에, 맛있게 요리하는 음식점에는, 언제나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립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생활이 맛있게 느껴져야, 예배에 대한 열망과 기도에 대한 열정을 가질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후 1: 24에서, “우리가 너희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요 오직 너희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함이니 이는 너희가 믿음에 섰음이라”고 합니다. 즉, 본문에서와 같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맛을 보라는 겁니다. 이렇게 권하는 것은, 간혹 믿음의 참 맛을 보지 못하고, 신앙의 향기만 맡거나 겉모양만 보는 데서 그치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과 그에 대한 믿음과 신앙의 본질을 알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면, 교회에 출석하고자 하는 마음도 서서히 사라짐으로, 결국, 그의 신앙이 흐지부지되고, 믿음도 떨어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께 피하거나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기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함과 하나님께 피하는 것은, 비례합니다. 곧,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겼다면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은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험하고 만남으로 나타나는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의 출발점은 하나님을 만나는 데서 시작합니다. “맛을 보고 사세요”라는 광고문구가 유행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 뒤로는, 마트나 시장에 가면, 조금씩 시식코너들이 있어서, 그 곳에서 맛을 보게 합니다. 다윗은, 주변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권면하되, 이와 함께,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라고 합니다. 성도된 우리에게 있는, 최고의 버킷리스트가 무엇입니까? 우리의 생애에서 가장 이루어보고 경험하고 싶은 것이 무엇입니까? 세계의 절경을 돌아보는 겁니까? 아니면, 지구를 떠나 우주에서 지구를 감상하며, 달 표면을 걷는 겁니까? 이제는, 공상과학에서만 나오던 우주관광시대를 눈 앞에 두고 있습니다. 일부에서는 이미, 약 3억짜리 우주관광티켓이 600여장 예매가 완료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것보다 성도에게 있어서, 최고의 버킷리스트는, 다윗이 증거하는 것처럼,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경험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일평생 하나님을 믿었다면서, 또, 매 주일 한 번도 빠짐없이 예배에 참석했다면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지 않았다면, 얼마나 슬픈 일이며, 얼마나 허망한 일이 되겠습니까? 그렇다면, 그는 그동안 무엇을 믿은 겁니까? 다윗은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았기에, 평생을 일관되게,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았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자신의 의지대로 사는 것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지 않았다는 겁니다. 믿음을 가리켜, “영혼의 미각”이라고 합니다. 말씀과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는 것은, 신앙의 기본입니다. 이것은, 생활 속에서 말씀대로 살고, 기도하며 사는 가운데, 하나님의 응답과 역사를 체험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봄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10절을 보시면,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젊은 사자는 힘이 세고 날렵해서 먹잇감을 포획하는 것에 있어서, 어려움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먹잇감을 찾지 못해 굶주릴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자신의 능력을 의지하며 자랑하는 자는 “젊은 사자”와 같습니다. 모든 동물들 중에서 가장 강한 사자, 그 가운데서도 젊은 사자가 먹이를 얻지 못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부어주신 선천적인 강함으로 인해, 언제나 자신만만해 합니다. 그러나, 이런 젊은 사자도 때로는, “궁핍하여 주릴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찾는 자에게는 “모든 좋은 것”에 있어서 부족함이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보호하고 구원하기 때문입니다. 마 6: 33을 보시면,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하며, 딤전 4: 8에서는,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고 합니다. 그래서, 본문 앞의 9절과 함께 본문 10절에서, “부족함이 없다”는 것을, 2번이나 강조합니다. 또, 시 23: 1, 5절에서도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며 부족함이 없는 삶을 고백합니다. 다윗은, 도망자로서의 삶을 살았기에, 모든 면에서 궁핍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이런 고백이 가능하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다윗으로 하여금, 만족을 누리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다윗과 함께하심으로, 평안함을 누리게 했습니다. 이러한 다윗의 만족은 인간적인 능력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았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 빌 4: 19에서,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고 합니다. 이제, 우리도,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신 28: 6에서 약속하신 것처럼, 우리가 들어가든, 나가든 하나님의 복으로 가득하여, 부족함이 없는 삶을 누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