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산 성지(竹山聖址)
한국 천주교회의 순교 사적지.
경기도 안성시 일죽면 죽림리 703-6 소재.
병인박해(丙寅迫害) 때 22명의 신자들이 죽산 관아로 끌려와
혹독한 형벌과 심문을 받은 뒤
이곳 형장에서 교수형과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박해와 순교지 탄생]
조선 태종대 죽산은 광주 부사의 관할하에 ‘현감’이 다스리는 작은 고을이었다.
하지만 이 지역은 고려 시대 이래 삼남 지방으로 내려가는 주요 교통 요지로,
분행역(分行驛)·좌찬역(佐贊驛)·대평원(太平院)·장항원(獐項院) 등 여러 역원(驛院)들이 있었다.
또 임진왜란 당시 도성 수호의 주요 전략지로 파악되어 1595년(선조 29) 도호부로 승격되었다.
이후 인조는 1635년(인조 13) 여주(驪州)에 세웠던 수어후영진영(守禦後營鎭營)을 죽산으로 옮겨
죽산 도호부사가 수어후영장과 토포사(討捕使)를 겸하게 하였다.
토포사란 도적을 잡는 직책이며, 영장은 지방에 주둔하고 있는 군대의 우두머리이다.
따라서 병인박해 당시 죽산 도호부사는 토포사와 영장을 겸하고 있었기 때문에
막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천주교인들을 체포할 수가 있었다.
병인박해가 시작되자 전국에서 다수의 천주교 신자들이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작은 고을이었던 죽산에서는 22명이나 되는 신자들이 순교하였는데,
이들에 대한 기록은 《치명일기》와 《병인 치명사적》, 《박순집 증언록》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자료들을 근거로 하였을 때 병인박해 당시 죽산에서 확실히 순교한 신자는 18명이며,
죽산 포교에게 체포된 것은 분명하나 어디서 죽었는지 불분명한 신자들은 4명이다.
또한 죽산 포교에게 체포되었으나 인근 수원에서 순교한 사례도 발견된다.
이들이 체포된 지역을 살펴보면, 죽산 이외에 양지·용인·성남·음성·직신 등
죽산 인근 지역에까지 넓게 분포되어 있다.
이처럼 죽산 포교들이 넓은 지역으로까지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죽산의 도호부사가 토포사를 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죽산 도호부사는 토포사의 직위를 이용하여
인근 여주·이천·용인·안성의 포졸들까지 동원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들을 동원하여 다른 지역보다 많은 천주교인들을 체포할 수가 있었다.
죽산으로 끌려온 신자들은 진영 동헌 앞에서 심문을 받고 고문을 당하였으며,
옥에 수감되어 배교를 강요당하기도 하고 교수형에 처해지기도 하였다.
따라서 진영 동헌 앞이나 옥 터와 같은 경우도 중요한 성지(聖地)이지만
옥 터만이 현 죽산 면사무소 위치라는 것이 알려졌을 뿐
진영 동헌 앞은 위치조차 확인되지 않고 있다.
현재 죽산 성지로 개발된 곳은 당시 신자들의 처형지로 알려진 곳으로,
오늘날 ‘잊은 터’라고 불리는 장소이다.
현재는 평평한 땅이지만 당시에는 노송이 우거진 숲으로
삼남 지방에서 서울로 가는 큰 길가에 접해 있었다.
나라에서는 행인들이 많이 다니는 이곳에서 신자들을 죽임으로써
사람들에게 경계하는 마음을 심어 주고자 하였다.
또한 이곳은 고려 시대에 몽고군이 쳐들어와
송문주(宋文胄) 장군이 지키던 죽수산성을 공략하기 위해 진을 친 장소로,
오랑캐가 진을 친 곳이라고 하여 ‘이진 터’라고 불렸다.
이러한 유래를 지닌 이진 터는
병인박해 당시 ‘거기로 끌려가면 죽은 사람이니 잊으라’고 하여
‘잊은 터’로 바꾸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죽산에서의 천주교 신자에 대한 처형은
1866년에서 1869년 사이에 집중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참수형이나 교수형으로 처형당하였다.
1866년에 처형된 신자들로는
여기중, 이희서, 홍천여(洪千汝), 한치수(프란치스코) 등이 있다.
1868년에는 문 막달달레나, 여정문 일가(부인, 아들), 정덕구(바오로)가 처형되었으며,
1868년에는 방 데레사, 김 우보로시나, 조치경(혹은 조치명, 타대오), 최 안드레아,
오 마르가리타, 박 프란치스코, 최성첨과 그 아들, 이진오 등 9명이 처형을 당하였다.
이듬해에는 유 베드로, 김 도미니코, 김인권이 처형되었으며,
1871년에는 마지막으로 홍치수가 처형당하였다.
한편 이곳에서는 같은 날·같은 장소에서 한 가족이 처형된 경우가 여러 번 발견된다.
1867년 처형된 여정문 일가, 1868년의 조치경·김 우보로니시나 부부와
박 프란치스코·오 마르가리타 부부 및 최성첨과 그의 장남이 그러한 예이다.
본래 이 같은 일은 조선의 국법상 금지 사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차례 자행된 것으로 보아, 병인박해에 당시 천주교 신자들이
얼마나 참혹하게 죽음을 맞이 했어야 했는지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이처럼 죽산에서는 천주교 신자들의 처형이 있은 후
이 지역에 공소가 세워진 1932년까지 단 1명의 교우도 없었다고 알려진다.
죽산에 다시 신자들이 모이게 된 것은
안성에 본당이 설립되고 죽산 공소가 세워지면서부터였다.
[성지 개발 과정]
죽산 성지 개발은 1979년 12월 안성 구포동 본당에서
‘병인년 순교 성지 죽산 성당 건립 추진위원회’가 결성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이후 1994년 11월부터 성지 매입을 시작하여 2000년 9월까지 총 열한 차례에 걸쳐
22,727평의 부지를 매입하고 성지 조성 작업을 계속적으로 추진하였다.
그 결과 1997년 6월에는 성당 및 피정관 신축 공사를 시작하여 같은 해 12월 14일
최덕기(崔德基, 바오로) 주교를 모시고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특히 죽산 성지는
순교 신심· 성모 신심· 성체 신심· 순교 신심을 함양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성지에서는 이를 위해 2000년과 2002년 순교자 묘역, 순교자 현양탑, 로사리오의 길,
묵주알, 성모상, 성체 조배실, 예수 성심상을 조성하여
이곳으로 순례오는 신자들의 신앙심을 북돋아 주게 하고 있다.
또한 1999년부터는 죽산 성지를 담당하고 있는 이용남(李龍南, 골롬바노) 신부는
정결하고 관상적인 느낌이 들 수 있게 성지 조경 공사를 실시하여
이곳을 찾는 순례객들이 경건한 마음으로 신심을 다질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사회적으로 주5일 근무제가 확산되자,
죽산 성지에서는 성지 뒤뜰과 과수원 등을 정리하여
신자들이 주말에 가족과 함께 성지에 와서 뜻깊은 시간을 보내거나
구역 소공동체 모임 등을 가질 수 있도록 배려도 해 주고 있다.
첫댓글 [수원교구] 죽산성지에 대한 영상과 설명 감사합니다.
또한 최주봉 요셉 형제님의 죽산성지의 순교 역사를 전삼용 요셉 신부님과 함께 한 영상도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