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은 지난번에 요셉이 말한 대로 형제들이 베냐민을 데리고 요셉과 2차 재회하는 장면입니다. 이 재회는 그 동안 무수한 마음의 고난과 갈등 속에서 내려진 야곱의 결단이었습니다.
청송 감호소와 서울 구치소에서 교도관 생활을 오래 하셨던 박효진 장로님의 간증에서 그 분은 생일이 세 번 있다고 합니다. 첫 번째 생일은 육신의 나이로 51세라는 육의 생일이 있고, 또 한 번은 청송 감호소에 있을 때 “너의 몸이 거룩한 성령의 전인 것을 알지 못하느냐?”는 말씀을 읽고 지금까지 신앙과 삶이 따로였던 이중적인 신앙을 바로 잡은 날이고, 세 번째는 서울 교도관으로 있으면서 윤도영이라는 사형수가 영생의 확신을 가지고 죽음조차 의연하게 맞이하는 것을 보고 받은 충격으로 순교적 결단을 한 날을 또 다른 생일로 지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이 시간에 신앙의 큰 결단이 있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본문 배경에서 신앙생활이란 무엇인가를 보여줍니다.
1. 신앙생활이란 선택이 아니라 절대적인 사항입니다.
1절에 “그 땅에 기근이 심하고 그들이 애굽에서 가져온 곡식을 다 먹으매”라는 구절에서 야곱이 애굽에 다시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다가옴을 보여줍니다. 아무리 베냐민을 보내고 싶지 않아도 보낼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그 동안 두 번이나 다녀와야 할 기간이었는데 가져온 양식을 늘려 먹고 또 늘려 먹어 버텼지만 더 이상 그리할 수 없어 가지 않으면 굶어 죽는 상황입니다.
이처럼 신앙생활은 생과 사의 문제입니다. 한양대학교 교수 한 분이 어느 병원 영안실에 열 명의 시신을 조사한 결과가 있는데 그 중 여섯 명은 살짝 웃으면서 죽었고 네 명은 얼굴이 일그러진 상을 하고 죽어 있더랍니다. 종교를 조사해 보니 웃으면서 죽은 여섯 명은 예수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왜 그렇게 죽었을까요? 원리는 간단합니다. 불신자들은 지옥으로 귀신이 끌고 가기 때문이고 예수 믿는 사람들은 천사들이 천국으로 영접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은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겨우 복 받으려고 하는 신앙생활 그 정도가 아니에요. 신앙생활하지 않으면 죽어요. 지옥 가요. 신앙생활을 감정 따라 기분으로 하시는 분들도 정신 차리세요. 신앙이란 취미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 역시 절대적입니다. 택한 백성에게 하시는 섭리는 공식과도 같이 정확합니다. 순종하지 않으면 끝없는 고통과 고난일 뿐입니다. 그러나 순종하는 자에게는 고난은 없습니다. 주님 만나 손해 볼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께 순종하여 잘못될 것이 무엇입니까? 항상 순종하는 결단이 여러분께 있기를 바랍니다.
2. 신앙생활이란 우리의 마음을 드리는 것입니다.
5절에 “너희 아우가 너희와 함께 하지 아니하면 너희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한 대로 하나님께 우리의 가장 귀한 것을 드리지 않으면 하나님을 만나볼 수 없습니다. 그것이 아무리 베냐민을 애지중지 붙들고 있다 해서 이익될 것 없습니다. 아무리 귀해도 데리고 가야 합니다. 베냐민 없이 백 번을 가도 요셉이 환대해 줄 리 없듯 마음 드리기 전에는 하나님의 대면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그럼 가장 귀한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마음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신6:4-5에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했습니다. 우리가 마음을 바쳐 하나님을 섬기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숨결에도 응답해 주시고 생각만 해도 이루어주시고 하나님도 온전히 우리에게 함께 하여 주십니다. 그래서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구하면 이루어주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 드리기 전에는 그 놀라우신 함께 하심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마음으로 하나님 섬기는 법이 십계명에도 이미 나와 있습니다. 출20:3-6을 보면 하나님 말고 다른 신 섬겨서는 안 되어요. 다른 신 섬기면 하나님께서 가만 두실 것 같아요? 시16:4에 “다른 신에게 예물을 드리는 자는 괴로움이 더할 것이라” 했습니다.
다음에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했어요. 골3:5에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했어요. 세상 사랑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보다 더 귀한 것이 없기를 바랍니다. 자식을 더 사랑하면 그것이 자식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해치는 것이에요.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출20:5)이라.
그리고 하나님 망령되이 일컫지 않고, 주일 지켜 하나님께 예배하고 봉사하는 것도 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속지 않으십니다. 마음으로 섬기지 않으면 절대 함께 하시지 않아요. 마인드 컨트롤이라는 것이 알고 보면 우리 신앙 세계의 이야기입니다. 진정한 마음 가지고 하나님 섬기면 다 통한다는 말입니다.
3. 신앙생활이란 하나님의 소원대로 사는 것입니다.
11절에 “아비 이스라엘이 그들에게 이르되 그러할진대 이렇게 하라 너희는 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그릇에 담아가지고 내려가서 그 사람에게 예물을 삼을지니 곧 유향 조금과 꿀 조금과 향품과 몰약과 비자와 파단행이니라” 알고 보면 얼마나 웃긴 이야기입니까? 아들 요셉의 연극 연출로 인해서 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모르고 아버지 야곱은 혹시라도 애굽의 총리 비위를 거슬러서는 안 되니 최선의 선물을 준비하고 또 준비합니다. 그러나 요셉이 과연 그것을 원할까요? 그 선물을 본 요셉의 마음 더 아플 뿐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우리 자신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우리에게 보내신 것은 우리들을 얻으시기 위함입니다. 다른 것 없어요. 우리들을 얻으시는 것 말고는 없어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을 많이 하는 것도 필요하고 좋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나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마치 신랑이 가장 원하는 것은 신부 자신이듯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첫째가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만나 그 분의 말씀을 듣고 깊이 대화하고 사랑을 나누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예배와 기도입니다. 예배 절대 빠지지 마세요. 기도 역시 많이 하세요. 오래 기도하세요. 오래 하되 마음을 다해 기도하세요. 주님은 기도 속에서 우리를 껴안아 주시고 위로해 주시고 따뜻한 자기 사랑을 주시려고 하십니다. 그런데 자꾸만 하나님의 일 하나님의 영광을 핑계로 하나님 멀리 돌면 하나님께서 속상해 하십니다. 하나님의 일도 좋지만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더 기뻐하십니다. 기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해야 하는데 이것을 가리켜 성령의 감동이라고 합니다. 성령의 감동 따라 사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앞으로 하나님께서 한국교회에 북한선교를 위한 감동을 많이 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북한 동포들을 생각하며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언제까지입니까? 하며 울부짖습니다. 북한 동포들은 통일이 되면 남한의 새로운 문화에 대해서 호기심이 큽니다. 이 때 복음으로 먼저 그들을 정복하지 않으면 세상 풍조가 와서 그들을 정복하고 맙니다. 요즘 탈북자들이 남한에 오자말자 우리 기독교인들이 전도하여 90%가 기독교인들이 된 이 사실에서 북한 동포에게 초기선교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증명해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통일이 됐다 하면 먼저 한 교회마다 한 지역씩 맡아서 교회 세우고 복음 전해야 합니다. 최소한 통일 후 3년 이내에 북한인들을 다 전도할 태세를 갖추어야 합니다.
4. 신앙생활이란 일사각오 속에서 비로소 시작됩니다.
14절에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 했습니다. 이 구절은 불과 십여 자에 불과한 말씀이지만 야곱의 비장한 결심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베냐민을 데려 가지 못한다고 그토록 고집하며 두 번 이상 갔다 올 시간이지만 가지 않고 가져온 곡식을 아껴먹고 늘려먹으며 버티고 버티면서 지체하던 야곱이 결심하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다 죽기 때문입니다. 자기는 물론 아들들과 자부와 수십 명의 손자들 그리고 아끼고 아낀던 베냐민까지도 죽어요. 흉년 2년째에 그랬는데 앞으로 5년이 남아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야곱은 죽으면 죽으리라는 일사각오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 모습이 바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신앙생활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지요? 요12:25에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그러므로 예수 믿다가 혹 죽어도 혹 망해도 좋다는 마음 가지고 신앙생활해야 진짜 신앙생활이 됩니다. 자기 목숨 내 걸기까지는 신앙생활은 예행연습일 뿐입니다. 더 이상 발전이 없습니다. 어느 깡패 두목이 회개하여 집사가 되었는데 가서 보니까 키도 작고 몸집도 볼품없어서 어떻게 해서 두목이 되었느냐고 물으니 목숨 내걸면 아무도 대항하지 못한다고 하더랍니다. 그리고 목숨 내건 그런 신념에 찬 사람을 사람들은 믿고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목숨 걸고 신앙생활할 때 두 눈에서는 빛이 나고 그의 발걸음에 하나님이 동행하시며 그의 말에 하나님께서 역사해 주십니다.
초대교인들은 모두 목숨 걸고 신앙생활했기에 예수 영접하자말자 하나님을 경험하고 하나님과 동행 동역했습니다. 우리는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 사람 아닙니까? 야곱처럼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 것 하나님께 한 번 모험 거세요. 죽어도 신앙생활 멋있게 하다가 죽겠다고 말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죽고자 하는 성도는 삽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앙생활이란 절대적인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드리십시다. 우리 자신을 드립시다. 하나님의 소원대로 하십시다. 우리의 목숨을 다해서 하나님을 섬기십시다. 우리 주님이 그 참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우리 모두 우리 주님 따라 하나님과 함께 동거 동행 동역하시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