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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이사야 41장 10-20절
제목 : 두려워 말라
서 론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를 특징짓는 정신적 현상 가운데 한 가지는 두려움입니다. 예전보다 더욱 편리한 문명 속에 살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두려움을 느낍니다. 여러분은 어떤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까? 북한의 김정일이 이판사판으로 핵전쟁을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까? 세상에 갖가지 암 질환이 만연한데 혹시라도 불치의 병에 걸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없습니까? 아니면 IMF로 인해 입었던 엄청난 경제적 손실이 다시 찾아오지는 않을까 두려워하지는 않습니까? 혹시라도 내 가족이 교통사고를 당하는 것은 아닐까, 자꾸 기억력이 감퇴하는데 치매에 걸리는 것은 아닐까 두려워하지 않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이와 같은 실패, 재난, 질병 등의 문제를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리사 히메네스라는 사람이 쓴 ‘두려움을 정복하라’는 책을 보면 사람은 실패에 대한 두려움뿐만 아니라 성공에 대한 두려움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성공해서 높은 위치에 올라갔다가 추락하면 어떡하나 하는 두려움입니다. 혹은 성공해서 높은 위치에 올라갔는데 사람들이 자신을 헐뜯고 비난하지는 않는지, 자신을 배반하지는 않을지 두려워합니다. 결국 사람이란 실패에 대해서도, 성공에 대해서도 두려움을 갖는 존재입니다.
1. 두려움은 인간의 공통적인 문제다
두려움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공통적인 문제 가운데 하나입니다. 심지어 성경에 등장하는 영적인 거성들조차도 때로는 두려움에 시달렸습니다. 모세는 전혀 두려움을 모르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히브리서 12장 21절을 통해 자신이 시내산에 올라갔을 때, 몹시 두렵고 떨렸다고 고백합니다. 바알 선지자 450명, 아세라 선지자 400명과 갈멜산에서 대결하여 대승리를 거뒀던 엘리야 선지자도 아합의 왕비인 이세벨이 자신을 죽이겠다고 협박하자 두려워서 도망을 갑니다. 열왕기상 19장 4절을 보면 로뎀나무 밑으로 도망간 엘리야가 두려움과 실망에 가득차서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라고 고백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또한 욥은 기상천외한 재앙을 겪고서 욥기 3장 25절을 통해 ‘나의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나의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라고 탄식합니다. 이 구절은 욥이 평소에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을 상기해줍니다. ‘내가 이렇게 건강한데 혹시라도 건강을 잃으면 어떡하나? 나의 열 명의 자식을 잃으면 어떡하나? 내가 지금 부자로 잘 먹고 잘 살고 있는데 이 재산을 잃으면 어떡하나?’ 그리고 욥의 이와 같은 두려움은 결국 현실이 되었습니다. 골리앗을 물리친 용맹스러운 다윗왕도 원수와 악인들이 압제하고 사망의 위험이 이르게 되자 두려움을 고백했습니다. ‘두려움과 떨림이 내게 이르고 황공함이 나를 덮었도다(시 55:5).’ 이처럼 우리가 영계의 거성으로 여기는 모세, 엘리야, 욥, 그리고 다윗도 두려움이라는 공통의 문제를 안고 있었음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 잘 알 수 있습니다.
이사야 40장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유다 백성들이 비록 바벨론의 포로로 살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복역의 때가 끝나면 해방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그러나 이 예언을 들은 유다 백성들은 여전히 마음속에 있는 두려움 때문에 하나님께 불신의 질문을 던집니다. “하나님! 우리를 바벨론의 포로에서 해방시키시면 바벨론의 귀신들이 우리를 가만히 놔둘까요?” 하나님께서는 이에 대해 ‘그 앞에는 모든 열방이 아무 것도 아니라 그는 그들을 없는 것 같이, 빈 것 같이 여기시느니라 그런즉 너희가 하나님을 누구와 같다 하겠으며 무슨 형상에 비기겠느냐(사 40:17-18)’고 대답하십니다. 바벨론 귀신은 하나님과 상대가 되지 않으니 걱정하지 마라는 말씀입니다. 그래도 유다 백성들은 또 질문합니다. “하나님! 우리를 바벨론에서 실제로 구원해낼 능력을 가지고 계십니까?” 이 질문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각각 그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사 40:26)’고 대답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의 능력과 보존하시는 능력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유다 백성들을 바벨론에서 구줄 하는 일쯤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대답입니다.
그러나 유다 백성들은 여전히 질문합니다. “하나님! 우리를 구출하실 때, 어떤 방법으로 구출하실 겁니까?” 이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이 본문 2절입니다. ‘누가 동방에서 사람을 일으키며 의로 불러서 자기 발 앞에 이르게 하였느뇨 열국으로 그 앞에 굴복케 하며 그로 왕들을 치리하게 하되 그들로 그의 칼에 티끌 같게, 그의 활에 불리는 초개 같게 하매.’ 이 말씀에 등장한 동방에서 불러 일으키는 사람의 정체는 이사야 44장 28절에 나타난 바사 왕 고레스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고레스가 바벨론을 멸망시키기 160여년 전에 벌써 고레스의 이름까지 정확하게 예언하였습니다. ‘고레스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그는 나의 목자라 나의 모든 기쁨을 성취하리라.’ 유다를 포로로 삼고 괴롭히던 원수 바벨론은 이사야의 예언대로 주전 539년에 페르시아 왕 고레스에 의해서 멸망합니다. 바벨론을 멸망시킨 후, 고레스는 칙령을 발표하고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온 유다 백성들이 가나안 땅으로 돌아가도록 선포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페르시아 왕 고레스를 일으켜서 유다 백성들이 두려움의 대상으로 삼았던 바벨론을 징벌하고 그들을 포로에서 건져 내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두려움 많은 유다 백성들의 질문에 친절하게 대답해 주신 후에 중요한 권면을 반복해서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에 세 번이나 등장하는 말씀인데, 바로 ‘두려워 말라’는 권면입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10).’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도우리라(13).’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 두려워 말라(14).’ 오늘 여러분의 마음속에도 어떤 두려움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특별한 명령, 두려워 말라는 명령에 순종하시고 두려움은 모두 쓰레기통에 던져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다섯 이유
왜 우리가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까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다섯 가지 이유를 본문 10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첫 번째 이유는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입니다.
세 번째 이유는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입니다.
네 번째 이유는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입니다.
다섯 번째 이유는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입니다.
본문 10절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일인칭 단수를 써서 사용하신 말씀인데, 이 말씀을 제가 3인칭으로 바꾸어서 정리해보겠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하십니다.
둘째,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셋째, 하나님은 나를 강하게 해주십니다.
넷째, 하나님은 나를 도와주십니다.
다섯째, 하나님은 나를 붙들어 주십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다섯 가지 근거입니다.
이 말씀을 방향의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하나님께서 사방팔방으로 나를 둘러싸며 보호하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니 하나님은 내 옆에 계신 것입니다(by me). 하나님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시니 하나님은 내 위에 계신 것입니다(over me). 하나님께서 나를 강하게 하시니 하나님은 내 안에 계신 것입니다(inside of me). 하나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하나님은 내 주위에 계신 것입니다(around me). 하나님께서 나를 붙들어 주시니 하나님은 내 아래에 계신 것입니다(under me). 이처럼 하나님께서 사방팔방으로 나와 함께 하셔서 나를 강하게 하시고 지키시며 보호하시므로 우리는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사방팔방으로 둘러싸고 계신다 해도 만약 하나님께서 무능하시고 아무런 도움도 안 되는 분이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기에 이사야 41장의 전반부는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소개합니다. ‘섬들아 내 앞에 잠잠하라 민족들아 힘을 새롭게 하라 가까이 나아오라 그리하고 말하라 우리가 가까이 하여 서로 변론하자(1).’
여기서 섬이란 5대양 6대주를 말합니다. 하나님께는 아프리카도, 미국도, 아시아도 모두 큰 섬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세상의 모든 민족들이 심판주 되신 하나님께 나와서 재판을 받으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열방을 심판하시는 심판자 하나님이십니다.
또한 2절 말씀을 보면 ‘누가 동방에서 사람을 일으키며 의로 불러서 자기 발 앞에 이르게 하였느뇨 열국으로 그 앞에 굴복케 하며 그로 왕들을 치리하게 하되’라고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고레스를 일으켜서 다른 왕을 정복하시고 지배하시며 다스리시는 만왕의 왕이십니다.
세상의 왕들도 모두 하나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미국의 조지 부시 대통령도,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도, 대한민국의 노무현 대통령도 모두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존재들입니다.
그리고 4절은 처음이요, 나중이며, 영원무궁토록 자존하시고, 역사를 움직이시는 주권자 하나님을 증거합니다. ‘이 일을 누가 행하였느냐 누가 이루었느냐 누가 태초부터 만대를 명정하였느냐 나 여호와라 태초에도 나요 나중 있을 자에게도 내가 곧 그니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열방의 우상을 누르시고 업신여기십니다. ‘목공은 금장색을 장려하며 마치로 고르게 하는 자는 메질군을 장려하며 가로되 땜이 잘 된다 하며 못을 단단히 박아 우상으로 흔들리지 않게 하는도다(7).’ 고레스가 열방을 침략하자 열방 국가들은 그 동안에 섬겼던 우상들을 리모델링하기 시작합니다. “우리의 우상의 페인트가 벗겨져서 그만 고레스가 침략했구나! 우상의 못이 흔들리는 바람에 고레의 침략을 받게 됐구나!” 우상을 깨끗하게 수리해서 세워놓고 거기에 절하며 살려달라고 부르짖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열국의 모든 종교와 우상을 비웃으십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희 우상들은 소송을 일으키라 야곱의 왕이 말하노니 너희는 확실한 증거를 보이라 장차 당할 일을 우리에게 진술하라 또 이전 일의 어떠한 것도 고하라 우리가 연구하여 그 결국을 알리라 혹 장래사를 보이며 후래사를 진술하라 너희의 신 됨을 우리가 알리라 또 복을 내리든지 화를 내리라 우리가 함께 보고 놀라리라(21-24).’
열방의 우상들이 과거사와 미래사를 진술하고, 복과 화를 내릴 수 있다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신으로 인정해주시겠다는 조롱입니다. 그러나 결국 열방의 우상들은 아무 것도 아니며, 우상을 택한 사람들은 가증하다 여김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열방의 심판주요, 열국의 왕들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이요, 역사의 주권자시요, 우상을 멸하시고 업신여기시는 참되고 유일한 하나님이십니다. 이런 하나님께서 사방팔방으로 둘러싸며 우리를 도와주시겠다고 말씀하시는데 왜 두려워하십니까? 오늘 이 시간 이후로 두려움은 모두 쓰레기통에 갖다 버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이 약속의 대상
이 다섯 가지의 위대한 약속은 아무에게나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이 약속의 대상은 이사야 41장 8-9절에 등장합니다. ‘그러나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 나의 택한 야곱아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 내가 땅 끝에서부터 너를 붙들며 땅 모퉁이에서부터 너를 부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나의 종이라 내가 너를 택하고 싫어버리지 아니하였다 하였노라.’ 이 약속의 대상은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부르시며 싫어서 버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종들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종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지 마귀의 종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물론 이들은 육신적으로는 유다 백성들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우리를 가리키는 말씀인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미리 아신 자들을 미리 정하시고, 미리 정하신 그들을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의롭다 하시며, 의롭다 하신 그들을 싫어 버리지 아니하시고 영화롭게 하십니다. 이런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바로 성도들이요, 천국에 갈 하나님의 백성들이며, 두려워하지 말라는 약속의 대상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인정하지 않은 사람들은 이 약속과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도 이 땅에서 살아갈 때는 어려운 처지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11-12절을 보면 하나님의 백성을 향하여 노하던 자들, 다투던 자들, 치는 자들, 그리고 싸우는 자들이 등장합니다. 또한 14절에는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 두려워 말라’고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도 이 세상을 살면서 ‘왜 내 신세는 지렁이처럼 비참한가?’라고 한탄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17절의 말씀처럼 물이 없어서 갈증으로 혀가 마르는 가련하고 빈핍한 자가 될 수도 있고, 18절의 말씀처럼 그 심령이 자산, 즉 나무 하나 없는 벌거숭이산과 같은 신세가 될 수도 있습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있던 유다 백성들의 심령이 이와 같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그런 어려운 상황에 처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지 말아야 할 말과 해야 할 말을 구분해야 합니다. 먼저 하지 말아야 할 말은 이사야 40장 27절에 기록되었습니다. ‘야곱아 네가 어찌하여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하여 이르기를 내 사정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원통한 것은 내 하나님에게서 수리하심을 받지 못한다 하느냐.’ 우리가 아무리 어려움을 당한다 해도 “하나님께서 내 사정을 모르시나? 내 원통한 것을 수리하지 않으시나? 하나님 믿어도 아무 소용없네”와 같은 말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내 문제를 모두 아십니다. 내 머리카락이 몇 개 인지도 모두 아시는 분께서 나의 사정을 왜 모르시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성도라면 어려움이 찾아올 때 다음과 해야 합니다. ‘가련하고 빈핍한 자가 물을 구하되(17).’ 물이 없으면 물을 구하고, 자유가 없으면 자유를 구하며, 몸이 병들었으면 치료를 구하면 됩니다. 이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는 오랫동안 한다고 해서 반드시 응답받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한 마디라도 진실한 마음으로 기도하여 하늘 보좌가 움직인다면 응답받는 것입니다. 어려운 상황에서 우리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주여! 내가 가난하고 빈핍하여 지렁이처럼 되었으니 날 도와주소서! 내게 두려움이 임했으니 날 도와주소서!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나에게 긍휼을 베풀어주소서!”라고 강력하게 기도하는 일입니다. 그러면 이사야 40장 17절 후반에 기록된 대로 ‘나 여호와가 그들에게 응답하겠고 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지 아니할 것’입니다.
결 론
우리의 인생 가운데 두려움이 일어나는 순간이 얼마나 많습니까? 수술을 받을 때, 내가 벗어놓은 저 신발을 다시 신을 수 있을지 두렵습니다. 나이가 들어 죽음의 사자가 가까이 오는 것을 느낄 때 두렵습니다. 계획한 일이 실패로 그칠 때 두렵습니다. 새로운 사업을 시작할 때, 이 사업이 과연 성공할 것인지 두렵습니다. 경제적으로 큰 손실을 보았을 때, 감당하기 어려운 두려움을 느낍니다. 저도 때로는 여러 가지 이유로 마음에 일어나는 두려움을 느낍니다. 그러나 두려움이 임할 때마다 ‘두려워 말라’는 주님의 음성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다섯 가지 이유를 기억하십시오. 또한 하나님께서 내 옆에 함께 계시고, 내 안에서 나를 강하게 하시며, 나를 받들어주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이 사실을 믿고 간절한 심령으로 “주여! 내가 두렵사오니 날 도와주소서!”라고 기도한다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시고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실 것입니다.
이제 시편 46편 1-3절까지의 말씀을 읽고 오늘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이 시는 흔히 ‘마르틴 루터의 노래’라고 불립니다. 종교 개혁가였던 루터가 두려움을 느낄 때마다 이 시편을 읽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든지 바닷물이 흉용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요동할찌라도 우리는 두려워 아니하리로다(셀라).’ 천지가 개벽할지라도 우리는 두렵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사방팔방으로 나와 함께 계시며 지키시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생각하시면서 오늘 이 시간에 두려움을 물리치시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강과 담대함으로 용기를 얻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피영민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