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필시대 2010년 7,8월호 평
읽고 싶은 수필, 쓰고 싶은 수필
권대근
문학박사,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I.
문학의 위기가 심심찮게 거론되고 있는 때다. 새로운 그 어떤 것보다 존재적 의미와 가치가 충분히 있다고 판단되지 않는 한, 문학의 전도는 더 어두울 수밖에 없다. 무조건적으로 시류에 따라 변화한다고 위기가 극복되는 것은 아니다. 문학성을 인정받을 수 있는 작가의 진지한 노력만이 위기를 타개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줄 것이다. 무엇보다도 매력적인 문학적 분위기의 창출을 위해 문장 하나에서부터 전체적인 구도까지 소홀함이 없어야 하고, 주제 지향적 측면에서 인간성의 모습과 인간애의 정신을 담아내어야 한다. 마침 이번 호 계간평은 김규련, 강천형, 엄현옥, 송명화 등 네 작가의 작품을 평하게 되어 기대가 크다. 김규련은 교과서에 수필이 실려 이미 전국적으로 지명도가 높은 수필가이고, 강천형 역시 오래 전에 MBC 방송문예로 문단에 나와 부산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중견수필가다. 엄현옥은 수필과 비평으로 나와 큰 활약을 보여주고 있다. 마지막으로 송명화는 거의 완벽에 가까운 수필을 쓴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기량이 뛰어난 작가다. 이들 작가의 작품을 논하는 데는 윤오영의 “쓰고 싶고 읽고 싶은 글”을 인용하며 서두를 열어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윤오영의 수필관을 이들 작품에 빗대어 보면 어떨까해서다.
“문인들이 흔히 대단할 것도 없는 신변잡사를 즐겨 쓰는 이유는 무엇인가. 인생의 편모와 생활의 정회를 새삼 느꼈기 때문이다. 속악한 시정잡사도 때로는 꺼리지 않고 쓰려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인생의 모순과 사회의 부조리를 여기서 뼈 아프게 느꼈기 때문이다. 자연은 자연 그대로의 자연이 아니요, 내 프리즘을 통하여 재생된 자연인 까닭에 새롭고, 자연은 주관적인 자연이 아니요, 응시해서 얻은 객관적인 자신일 때 하나의 인간상으로 떠 오르는 것이다. 감정은 여과된 감정이라야 아름답고, 사색은 발효된 사색이라야 정이 서리나니, 여기서 비로소 사소하고 잡다한 모든 것이 모두 다 글이 되어지는 것이다. 깊은 못 위에 연꽃과 같이 뚜렷하게 나타나면서도, 바닥에 찬 물과 같은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물 밑의 흙과 같이 그림자 밑에 더 넓은 바닥이 있어 글의 배경을 이룸으로써 비로소 음미에 음미를 거듭할 맛이 나는 것이다. 그리고는 멀수록 맑은 향기가 은은히 퍼지며, 한 송이 뚜렷한 연꽃이 우아하게 떠오르는 글이다. 이런 글을 쓰고 싶고, 이런 글을 읽고 싶다.”
II.
김규련의 <돌이 나를 보고 웃는다>는 관조의 세계가 빛나는 수필이다. 이런 수필을 두고 읽고 싶은 수필, 쓰고 싶은 수필이라 해야 할 것이다. 자연과의 대화를 통해 순일한 정감을 주고받는 관조의 세계를 높게 살 수밖에 없다. 제목부터 수필의 창작 과정과 주제를 유추할 수 있게 잘 지었다. 수필은 발단의 예술이다. 그러므로 수필이 시작되는 첫 한 문장만 봐도 수필의 깊이와 폭을 가늠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수필은 처음부터, ‘돌에도 정이 오가는 것일까?’라는 의문형으로 시작한다. 조사 하나에도 작가의 사상은 여지없이 드러나게 되어 있다. 그래서 수필은 곧 그 사람이고, 그 사람이 곧 수필이 아닌가. 이 수필의 핵심 제재인 돌이란 체언에 붙는 ‘에도’라는 조사에는 제 만물을 유정물로 보려는 작가의 생태적 세계관이 엿보인다. 돌이 아닌 다른 것과는 이미 대화를 나누었으며, 그 과정에서 ‘정’이 오감을 느꼈음직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돌들을 벗 삼아 곁에 두고 한 나절을 앉아 있었다. 돌들을 조용히 들여다보면서 저마다 감춰진 비밀 같은 것을 발견하고, 돌이 던지는 무언의 교훈을 자신의 삶 속에 용해시키면서 세상의 위선자를 향해 부드럽게 충고하길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다 돌 앞에 원점으로 돌아와 다시 앉는다. 좌선의 세계에서 번져오는 희열이 자신을 반성적 성찰대 위에 세운 것이다. 세상의 위선을 향해 정조준하던 방아쇠를 자신을 향하게 하면서, 그는 돌들을 껄껄 웃게 한 부끄러운 인간의 형태들 속에 변신한 자신의 모습을 끼워 넣는 것이다. 자괴감이 드는 순간 돌들이 자신에게 보내는 따가운 메시지를 경청한다. 그러면서 자성은 절정을 향해 치닫는다. 자신은 드디어 ‘그동안 말이 많았으며, 마음 속 깊은 곳에 자존심도 숨겨 두었고, 욕심 많은 촌로였다’는 고백을 쏟아 낸다.
김규련 자신의 말처럼, ‘그의 수필은 언제나 관조 끝에 얻어진 상의 조각이다. 그리고 그 상의 조각에는 항시 아픔이 있다.’ 이런 것이 바로 수필이다. 그의 수필은 스스로를 드러내는 독백이라는 수필의 성격과 특성에 절묘하게 부합한다. 그의 수필론과 수필은 한 치의 오차 없이 정확히 일치하는 데서 놀라움마저 느껴졌다. 그는 평소 자신의 수필론을 피력하면서, ‘세상의 큰 스승인 것처럼 사람들을 깨우치고 교화하려면 수필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이 수필 속에는 마음과 행동과 말이 따로 노는 잔재주꾼들이 스스로 겨레의 스승이나 된 것처럼 큰소리 쳐댄다‘는 위선에 대한 작가의 강한 거부감이 나타나 있다. ’자신의 흠과 미숙함을 바라보는 자화상의 독백, 욕심이나 번뇌를 씻는 세심(洗心) 작업에 대한 독백, 이 세상 모든 사물이 다 자신의 언어를 가지고 있는데 이들의 묵언(默言)을 듣고 잠언을 캐는 독백, 고별 분비를 하는 독백, 수필은 이런 독백을 통하여 자기를 낮추고 다스리는 문학‘이라고 한 그의 문학관을 이 한 편의 수필이 그대로 증명하는 것 같다. 자신도 다스리지 못하면서 많은 사람을 교화시키려는 위선자에 대한 비판이 유독 많은 것은 그가 얼마나 수필가의 진실한 삶을 바랐는지 알 수 있게 해준다.
자신에 대한 뜨거운 관조를 통해, 자신을 사물에 투사해 보고 돌아오는 반사의 자화상을 쓰면서 사물과의 대화를 통해 스스로 반성을 통해 인생의 의미를 구도자적인 시각으로 해석해 가는 것이 김규련 수필의 독특한 맛이다. 수필의 향기라고나 할까. 자연이나 사물을 마음으로 바라보면서, 의미를 부여하고, 의미를 발견하는 등의 관조적 수법은 오랜 기간을 수필을 써오면서 터득한 수필은 진실의 문학이라는 결론에 이른 데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사물을 객관적으로 보지 않고 감성의 영토 안으로 끌어들여 사물을 의인화하여 생명을 부여하고, 그로부터 교훈을 듣는 동화의 수법은 사물을 심안으로 본다는 측면에서 본격수필 창작론의 삼 단계 조치다.
김규련의 수필은 안정적인 구도를 가진다. 수필은 특히 조형성을 요구하는 문학이다. 앞 중간 끝이 한 눈에 들어 와서 수필다움을 드러내어야 한다. 이런 면에서 김규련의 수필은 한 치의 오차도 없다. 표준 구성으로 된 수필은 발단과 전개 결말이 육안으로도 확연히 구분된다. 전개부가 주제의식이 구체화된 부분이라면, 결말은 은은한 여백의 미학을 보여준다. ‘창 밖에는 땅거미가 깔리고 있다. 오늘 따라 왜 자꾸만 흘러온 삶의 유역들이 뒤돌아 보이는 것일까’ 라고 하면서 결말의 첫 문장을 전개부 마지막 단락과 연계성을 가지게 배치한다. ‘전화벨이 들여오고, 홀연히 명상에 깨어난다’는 문장 역시 인과관계가 분명하다. ‘내일은 팔공산 나뭇잎새에 가을빛이 깃드는 소리나 들으러 가 봐야겠다.’는 마지막 문장 역시 이 수필의 제재인 돌 다음에 붙인 조사 ‘에도’와 관련이 있다. 관조 미학의 정수를 보여주는 수작이며, 전통 한국 서정수필의 맥을 보여주는 수필이라 하겠다.
강천형의 수필 <효의 길> 역시 눈길을 잡아끈다. 효 사상이 희박해져 어른 되기가 두려운 시대에 이와 같은 주제의식을 수필화한 것은 작가의식의 발로라 여겨진다. 언뜻 보면, 제목이 ‘효의 길’이라고 되어 있어, 효의 생활을 역설하는 훈화적인 글이 아닐까 하는 오해를 받기 십상이지만, 읽어 보면 제목에 나타난 길은 효를 실천하는 방향이면서 동시에 글자 그대로의 ‘길’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 수필은 갈등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 더욱 흥미를 끈다. 작중 화자가 갈등을 어떻게 풀어나갈지도 궁금하게 한다. 조동일이 말하는 좋은 수필의 조건으로서 토론을 유발하는 수필이다. 혈육의 정에 끌리는 현상은 현대사회의 특성상 개인 수필에서 필연적으로 자주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도시 생활의 정신적 긴장이나 공동체 의식의 상실이나 비인간화와 같은 도시적 병리 현상으로 인하여 파생될 수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이 수필은 이야기 수필의 전형이다. 한 직장에서 같이 근무한 친구와 등산을 갔다 내려오다가 소주잔을 앞에 놓고 혼 빠진 사람처럼 창공을 응시하고 있는 한 사람과 작가가 만나면서 수필은 전개에 돌입한다. 처가 노모를 모시지 않으려 하는 데서 받은 스트레스를 한 잔의 술로 풀며, 작중 인물은 난제의 해법을 모색하고 있는 참이었다. 괘심한 아내와 헤어질 수도 없고, 그렇다고 노인을 양로원으로도 보낼 수 없는 딜레마에 빠진 한 남자에게 효심이 지극한 친구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으로 이 남자의 고민을 들어주는 이야기가 단순하지만 훈훈한 정감을 자아낸다. 수필은 구원의 문학이다. 남을 구원하는 일은 일종의 아름다운 의식의 성찬이다. 그것은 함께 하는 공동체 의식을 위해서도 보람 있는 일이지만 아름다운 삶의 영토 확장에도 바람직한 일이다. 또한 그것은 자기중심의 일상생활에서 애타적인 삶을 누리는 희열이라고도 할 수 있다. 여기에는 필시 작가 정신이 개입되어 작용하고 있다. 특히 효와 같은 것은 근본에 속하는 문제로 인간의 도덕적 인식을 구성하는 요체다. 아들이 오갈 데 없는 어머니를 모셔야 하는 것은 절대 절명의 명제다. 여기서 유교 이데올로기는 아내에겐 없다. 작중 화제가 사회적 통념을 지킬 혜안을 얻기를 작가는 바란다. 그 남자의 아내는 며느리로서의 전통적 지위와 역할을 거부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 효의 길에서 뜨겁게 솟구친다.
수필의 본령은 인간 구원에 있다는 허드슨의 정의처럼 강천형은 득실거리는 사회의 군중 속에서 무엇보다도 갈등의 형장을 포착하여 렌즈 밑에 정착시키고 그것을 멋스럽게 확대시키고 있는 점에서 역시 중견 수필가로서 사명을 다하고 있다. 이 수필에서 보이는 또 하나의 거대한 관점은 우리 사회의 어두운 그림자다. 인간 속에서 살아가면서 부부의 인연을 소중하게 여기고, 남편의 가족을 심장에 쌓아두는 일은 가치 있는 일이다. 그런 사랑을 통해서 살아가는 지혜를 배우기도 하고, 그 가운데 자신을 반성하기도 하고, 사람답게 사는 방법을 독자에게 일러두기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런지 이 수필이 주는 전반적인 인상은 눈물겨운 따스함이다. 그러기에 이 수필은 인간의 아름다운 마음이야말로 가장 고귀한 것으로 삶을 윤택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해준다.
인간에게 소중한 것은 자신의 삶이 갖는 의미에서 스스로 만족하는 것이다. 그 충족의 기쁨 없이 삶은 무의미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단지 살아있는 것만으로 기뻐할 수 있는 것은 엄숙하게 운명을 받아들이려는 마음 씀에 기인하는 것이다. 삶을 원망하고 현실에 불만을 토로한다고 해서 삶의 질이 어느 한 순간에 돌변하여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 수필은 에고이즘에 빠져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거부하는 한 여인을 고발하는 사회수필이기도 하다. 어머니를 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 자식에게 있어 부모의 헌신이 그만큼 절대적이며, 애틋하고 간절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서 가장인 남성의 삶 앞에 놓인 무게를 다시 한 번 일깨워 주고자 한다. 부부지간의 정이 예전 같지 않은 요즘이라 이런 글이 더욱 가슴에 와 닿는다.
엄현옥의 수필 <꾼>도 간단한 수필이나읽고 싶은 수필의 하나다.수필은 글로 그리는 그림이다. 잊고 있던 기억 저편의 모습을, 눈앞에 보이는 풍경을 드러내는 여러 일들을 서정어린 그림처럼 펼쳐 보일 수 있는 것이 수필이 갖는 또 하나의 매력이다. 이런 면에서 보면 수필은 자기 자신의 내면을 그린 풍경화라 할 수 있다. 수필가 엄현옥이 그린 풍경화는 ‘꾼’에 대한 이야기다. 인생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 하는 열정인 것이다. 훌륭한 수필가는 방랑자요, 구경꾼이어야 한다고 했다. 작가는 어느 날, 친구 따라 라이브의 명소에 와 있다. 그리고 모처럼 일상의 권태를 벗고 흐르는 음악에 자신을 맡긴다. 이 업소의 간판 가수인 H의 무대를 기다려온 작가는 자신의 일에 달인의 면모를 보이는 그녀 특유의 카리스마에 관심을 보인다. 여기서 수필은 정점을 맞이한다.
작가는 가수의 작은 체구에서 발산되는 끼의 원천에 대해 궁금히 여기면서, 그녀가 사람들을 사로잡는 이유를 추적해 나간다. 여자라는 자리를 홀가분하게 박차고 주어진 상황에 완전히 몰입된 자아 상태에서 한 마리 자유로운 새가 되어 낭만의 시간을 가졌기 때문이란 결론을 내린다. 요즘은 누구나 주어진 일에 열정을 보이면 인정받는 세상인 것이다. 수필의 주제의식을 의식해서 ‘달인’이란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인용한 것은 바람직했다. 주부로서의 여성은 한국적 현실에서 마음대로 삶을 즐길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환경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라이브의 명소에서 삶을 라이브하게 살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는다. “내가 언제 그녀처럼 내 삶을 마음껏 즐겼는가. 주어진 상황에 온전히 몰입했는가”를 되물으면서 작가는 이 가수를 통해 적극적인 삶의 자세를 얻었던 게 사실이다. 라이브 쇼 관람은 결국 작가에게 한 편의 수필을 선사한 것일 뿐만 아니라 한 편의 멋진 인생 교훈을 준 셈이 되었다. 온갖 것의 유혹에 반응해 보고 싶은 것이 여심인데, 시간과 사회의 관습이 발목을 잡고 있다면,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삶을 온전히 즐긴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할까. 작가에게 자기만의 시간을 갖는 데 큰 방해물이 없길 빌어본다.
이 작품은 밤의 어둠 속에서 온갖 술 취한 남자들로부터 수모를 겪으며 힘겹고 어렵게 밤무대를 서며 살아 왔지만, 짓궂은 환경에 굴하지 않고 그 진가가 인정되어 소담스러운 꽃을 피우는 한 무희의 이야기가 드라마틱하게 전개되고 있다. 밤을 낮 삼아 산다는 것은 여러 유형 중에서 쉽게 선택할 수 있는 삶의 한 형태가 아니다. 시대를 변화시키고, 보다 나은 생을 창조하기 위해서는 안이한 태도로는 역사적인 결과를 기대할 수 없다. ‘꾼’이란 가치를 구현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고 언덕을 오르는 사람이다. 당연히 칭송해야 마땅할 것이다. 엄현옥의 눈은 이를 놓치지 않고 있다. ‘일상에 방전되었던 작가의 에너지가 그녀에게 빼앗긴 동안, 어느새 재충전되어 녹색불이 깜박였다’는 작가의 마무리 멘트가 멋지다. 한마디로 예리한 인식이 돋보인다. 죽은 과거를 되살려 내고자 하는 회고조의 작품이 아니라 어두운 밤의 여인을 그려내는 작품이라 더욱 새롭다. '현재'와 '여기'를 작품의 시공으로 놓고 그려내고 있어 심금을 울리는 맛을 준다.
안도현 시인의 '너에게 묻는다'는 시를 보면,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언제 누군가에게 뜨거웠던 적이 있었느냐'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 시의 주제가 어떤 일에 열정을 다 바치는 사람에 대한 칭송이라고 한다면, 이 수필도 어떤 일에 열정을 다하는 직업의식을 주제로 내세운 수필이다. 자신의 주어진 운명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며 밤무대에 서는 가수를 장인정신이란 주제로 겨냥하고, 그 의미를 '꾼'으로 이화하여 '밤의 승자'로 연결시키는 수법이 돋보인다. 여기에 등장하는 한 여인은 여기서 우리 시대가 요구하는 열정의 상징이다. 라이브 밤무대는 이 시대의 어려운 현실 배경이 되기에 충분하다. 작가는 진정 우리 시대가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 형상을 담아 우리로 하여금 보게 한다. 중요한 것은 인생을 즐길 줄 아는 ‘꾼’의 모습이다. 돈에 웃음을 파는 게 아니라 진정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해 열정을 바치는 신념에 찬 인물을 추앙하고자 하는 것이다.
송명화의 수필 <마침표>는 읽고 싶은 수필이면서 동시에 쓰고 싶은 수필이다. 자신이 운영하는 매장 직원의 상가에 들러 술을 따르고 절을 하면서 느끼는 죽음에 대한 단상이 담담하게 그려져 있어 감동을 준다. ‘마침표'를 제재로 해서 죽음이란 무거운 문제를 다루고 있지만, 탁월한 인식과 차별화된 문장력으로 수필이 잘 형상화되어 있어 어떤 수필보다도 산뜻한 쾌감을 준다. ‘마침표’로 함축된 죽음은 인간사 중에서 가장 절실한 관심사 중의 하나다. 대부분의 문학은 ‘사랑’아니면 ‘죽음’이라는 문제와 조우하게 되어 있다. 전자는 살아있는 상태에서 삶의 온기를 가늠할 수 있는 확실하고도 유일한 방법이고, 후자는 누구에게나 어떠한 형태든 다가올 수밖에 없는 필수적인 코스다. 한 생명이 세상에 태어나면 모든 이들이 기뻐하고 축하해 준다. 그러나 오랫동안 정들었던 이가 세상을 떠나면 슬퍼하며 통곡한다. 탄생과 소멸은 이렇게 극명한 대조를 이루며 인간사에 공존하는 것이다. 송명화가 다른 사람과 다른 점이라면, 그녀는 죽음을 애도하는 선에서 끝내는 것이 아니라 조문의 의의를 하나하나 밝혀내며 삶의 방향을 제시해 주는 데 있다.
어쨌든 인간의 죽음이란 최대의 난제이며,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죽음을 두려워한다. 또한 죽음을 이긴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왜 많은 작가들이 무엇 때문에 죽음의 문제를 다루게 되었을까. 현대문학은 죽음의 고찰에서 비롯되었으며 현 세기의 문학 세대를 식별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의 하나가 바로 죽음의 사실에 반응하는 그 방법 여하에 달려 있다고 한 루이스의 지적을 평자는 이쯤에서 상기해 본다. 지올로우스키는 현대문학의 차원에서 죽음은 바로 사회적인 붕괴의 시대에 있어서 가장 격렬해진다고 보고 있다. 말하자면 전통적인 가치가 붕괴되면서 신념의 갈등과 마주치게 되면 죽음의 의식은 개개의 인간 정신에 불안하게 다가오게 된다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 삶이 끝나면 어찌 되는가에 지대한 관심이 있으나 인생에서의 죽음이 특수한 관계성이므로 어느 누구에게서도 어느 곳에서도 시원한 답변을 구할 수 없을 것이다. 언젠가는 헤어져야 한다는 사실, 그 시간이 눈앞에서 전개된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많은 것을 말해 줄 것이다. 과연 송명화도 이런 차원에서 이 수필을 썼을까? 해답은 ‘노’다.
수필은 현실과 언제나 밀접한 관계를 지닌다. 수필이 체험적 이야기이건 아니건 간에 수필과 현실은 상호 밀착되면서 수필적 화자를 자기 속에 밀어 넣는다. 송명화 수필은 언제나 현실을 반영하면서도 새로운 질서를 창조한다. 이 수필의 의의는 죽음을 어떻게 맞이하는 게 좋은가를 통해서 인간답게 사는 길을 연다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존재론적 해명이면서 새로운 삶과 역사 진전의 지평을 가시화시켜 인간과 삶과 역사를 상승시킴으로써 새로운 현실을 전개함을 말한다. 문학이 사회나 역사성의 수용에 의한 전파적 성격을 가지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죽음의 문제를 화소로 수필을 풀어내고 있는 송명화는 일차적으로 문학의 사회적 성격을 잘 인식하고 있다고 하겠다. 이 수필은 죽음의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죽음을 인생의 한 과정으로 인식해야 함을 말해 주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여기서 마침표는 죽음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어떻게 죽을 것인가 하는 문제도 내포하고 있어 다의성을 지닌다. 작가는 그것을 ‘마침표’가 ‘온점’으로 불린다는 데서 착안해 낸다. 탁월한 상상력이질 않는가.
일반적으로 인간은 누구나 한 번은 죽게 마련이다. 인간은 누구나 혼자 왔다가 혼자 간다고 한다. 그러나 혼자 가는 죽음의 유형이 다 다르다는 것이 작가의 시각이다. 천수를 누리고 가는 자연사가 있는가 하면, 있을 수 없는 일인 돌연사나 사고사도 있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자살도 있다. 이상과 같은 죽음의 현상들이 빈번히 목도되는 이때, 송명화의 수필이 죽음에 대한 강박 관념을 버리고 삶에 대한 비극적인 감각을 반성적 성찰로 극복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현상이라 하겠다. ‘맺고 끊음은 분명히 할수록 좋지 않겠는가.’ 군더더기 없이 단정하고 원만한 모양의 문장부호에 마음을 싣는다.‘는 진술에는 작가가 유한한 삶에서 어떻게 인생을 영위해 나갈 것인가 하는 것이 잘 암시되어 나타난다고 하겠다. 마지막의 멘트는 이 수필이 보여주는 쾌미다. ’오늘 찍는 마침표의 무게가 천근처럼 느껴지는 것은 왜 일까‘라는 의문을 통해 그녀는 직원 가족의 슬픔을 같이 누리고자 한다. 인간다운 작가의 모습이 아닐 수 없다.
III.
위에서 집중적으로 다룬 네 편의 수필 외에도 읽고 싶은 수필이 더러 눈에 띈다. 도한오의 <새 봄>은 김지하 시인의 짧은 시 ‘새 봄’에 대한 해석을 상생과 조화의 주제의식으로 연결시켜 좋았다. 류동림의 <곡선의 문화와 직선의 문명> 역시 좋은 수필이다. 곡선과 직선이 주는 각기 다른 맛의 차이를 문명과 문화라는 대립항에 놓고 잘 그려 내었다. 윤주홍의 <두고온 여심>은 여심과 여행을 대립적 구도에 놓고 거기에 체험을 얹어 쓴 수필이다. 이창년의 <인생은 여행이다>는 여행의 묘미를 경험에 비추어 설파하고 있는 수필이다. 이경자의 <대보름의 새벽시장>은 신토불이의 서정적이고 향토적인 연가가 세파에 찌든 우리 도시민의 영혼을 청량하게 씻어 줄 것 같은 한국적 수필이다. 방인숙의 <고향의 겨울 냄새>는 겨울 시골에서 맛볼 수 있는 한국의 전통적인 음식 냄새를 통해 한국의 맛과 우리의 얼을 되새겨보게 하는 수필이지만, 읽고 나니 대화체를 간접 화법으로 전환했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양정숙의 <피고 지는 꽃처럼>은 생성과 소멸의 미학을 ‘꽃’이란 시를 빌어 잘 표현하고 있다. 한인자의 <나뭄의 미학>은 ‘나의 일 퍼센트가 누군가의 백 퍼센트가 될 수 있다’는 주제의식을 통해 작은 나눔의 실천을 촉구하는 내용이다.
결론적으로 수필은 두 가지의 매력을 가져야 한다. 하나는 읽고 싶은 수필이고, 다른 하나는 쓰고 싶은 수필이다. 위의 수필가는 우선 누구보다도 수필과 삶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듯하다. 인간에 대한 이해를 근본으로 하는 삶의 수필을 썼기에, 수필이 살고, 수필가가 빛나는 것이다. 이 논리는 읽고 싶은 수필은 인문학적 사고와 맞닿아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먼저 수필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것이 필요하고, 두 번째가 소통이 되어야 한다. 제대로 된 수필, 진실의 문학, 진리를 추구하는 수필가가 설 자리가 없는 곳에서는 진정한 소통이 불가능하다. 감동의 창출을 통한 소통을 위해서는 본격수필가가 많이 나와야 한다. 품격을 갖춘 수필만이 읽고 싶은 느낌을 줄 수 있고, 제대로 소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대중이 디지털 시대의 주인이 되고, 고급문화와 대중문화의 경계가 허물어졌다고 해도 우리가 지향해야 할 고지는 ‘고급’쪽이다. 그래야만 ‘수필’이 살 수 있다. ‘본격’이나 ‘고급’을 지향하지 않으면 수필은 정당하게 평가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즐기는 정도에서 수필을 써서는 안 되는 이유다. 누가 뭐라고 해도 수필은 문학이다. 예술의 한 분야다. 그러나 “수필은 문학이다, 예술이다”라고 명제화한다고 해서 문학이 되고, 예술이 되는 것은 아니다. 수필가의 치열한 수필정신 또는 장인정신에 의해 꾼이 되는 것이다. 삶을 잉태한 사회에 대한 이해는 물론이고, 인문과학이나 사회과학에 대한 지식은 수필가에게 필수라는 것도 명심할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