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십승관법 十乘觀法 의 실천행법
- 상근기를 중심으로 -
차 례 | ||
Ⅰ. 들어가는 말 Ⅱ. 바른 인식(觀不思議境) Ⅲ. 큰 자비의 서원(起慈悲心) Ⅳ. 올바른 실천행(巧安止觀) Ⅴ. 나가는 말 |
Ⅰ. 들어가는 말
十乘觀法은 十境을 비추어 보는 열 가지 방법이다.
방대한 摩訶止觀의 논술은 십승관법의 설명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이것이 제시된 연유는 불교에서 말하는 이상의 경지가 아무리 뛰어나고 숭고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이루는 방법이 명확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상누각과 공염불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종에서 대체로 이론적인 부분을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는데, 최소한 자기의 수행이 완성되었는지
알아볼 수 있는 교학의 지식은 필수적이다. 그리고 평범한 수행자가 조그마한 경지를 얻고서 쉽게 만족해버리는 것에 대한 경책과 또한 궁극적인 경지에 이르러서는 불법에 대한 집착마저 버려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십승관법은
觀不思議境ㆍ
起慈悲心ㆍ
巧安止觀ㆍ
破法遍ㆍ
識通塞ㆍ
道品調適ㆍ
對治助開ㆍ
知次位ㆍ
能安忍ㆍ
無法愛이다.
초심자는 십승관법을 陰入界境에 적용하여 수행하면 初住位에 들 수 있다. 그런데 여전히 초주위에 못드는 경우는 煩惱ㆍ病患ㆍ魔事 등의 쌓인 습기가 발동하여 지관을 방해하기 때문이므로, 다시 아홉 가지 對境에 십승관법을 적용하여 이러한 장애를 없애야 한다. 이와 같이 十境에 각각 십승관법이 있는 것이므로 十乘을 百法成乘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백법의 내용을 모두 살펴보려면 너무 방대하므로 본고에서는 그 핵심이라 생각되는 것만을 들어 보기로 한다. 즉 수행규정에 관해 마하지관의 본문을 통해 智顗의 眞意로 확인된 상근기의 세 가지 법에 대해 살펴보겠다. 특히 이들 관법의 구체적인 내용과 의의 그리고 세 관법 사이의 상호관련성을 살펴보면서 상근기가 한 법이 아니라 왜 그 세 가지 관법을 갖추어야 하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Ⅱ. 바른 인식(觀不思議境)
관부사의경은 하나 하나의 不思量底를 思量하고 思議할 수 없는 경계를 思議諦觀하는 一念三千의 妙觀이 설해져 있다. 이 명칭은 金光明經의 「散脂鬼神品」 제10의 ‘我現見不可思議智光 不可思議智炬 不可思議智行 不可思議智聚 不可思議智境’이란 문장이나 혹은 涅槃經ㆍ請觀音經에서 채용한 것이라 한다. 관부사의경은 ‘觀心是不思議境’ 즉 ‘마음은 바로 불가사의한 경계임을 관하는 것’이다. 천태의 止觀에 있어서 마음은 삶의 총체를 지시하는 말이다. 부사의란 모든 사물을 개념이라는 감옥에 가두고 그 고착화된 개념에 의해서만 사물을 한정적으로밖에 파악할 수 없는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것을 초월한 것으로 不可得, 不可稱量, 非思量과 동의어가 될 것이다.
그런데 이 부사의는 기적적이라거나 또는 보기 드물다는 의미가 아니고 모든 상대적인 개념을 초월하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는 데서 얻어지는 諸法의 實相이다. 境은 여기 관부사의경에서는 먼저 陰入界 3科의 압축으로서의 마음의 對境으로 규정된다. 그리고 관부사의경은 십승관법의 전체 속에서 가장 중요한 觀法이며 나머지
九乘觀法의 觀體라고도 말한다. 이와 관련하여 인용문을 살펴보겠다.
그러므로 이 妙境은 모든 법의 근본이 되고 그러므로 이 妙觀은 모든 行의 원천이 된다. 이와 같이 관조해야 바야흐로 작은 邪道外魔에 치우친 데서 벗어나게 되나니 따라서 이러한 관은 十法의 첫머리의 자리에 있게 된다.
라고 한다. 실제 이 관부사의경은 천태의 십승관법 아니 천태의 止觀行 중에서 최고의 수행법이며 이 법을 완성하기 위해 十境의 하나하나에 십승관법을 적용하는 것이다. 만일 제1의 對境인 陰入界境에 대해서 제1의 관법인 관부사의경을 적용하여 완전한 究竟의 성과를 거두면 다른 對境이나 기타의 구승관법은 불필요하다고까지 말한다.
지의는 이 관법을 설하는데 즈음하여 먼저 思議境과 不思議境으로 구분했다.
그리고 사의경은 藏敎, 通敎, 別敎에서 말하는 지관의 對境이고 소승의 ‘마음에서 六界가 생긴다(心生六界)’는 이치나, 대승의 ‘마음에서 十界가 생긴다(心生十界)’는 이치라고 규정했다. 여기서 六界說이나 十界說이 모두 藏通別敎의 對境은 心生이라는 공통점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心生이라는 理法에 대해 藏通別敎의 지관의 내용상 思議的 성격이 있다고 지적한다. 다음에 圓敎止觀의 對境은 부사의경이라 전제하고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마음은 교묘한 화가가 갖가지의 五陰을 만드는 것과 같다. 일체의 세간 속에서 마음 따라 만들어지지 않는 것은 없다.라고 한다. 전술했듯이 사의경이 心生인데 비해서 부사의경은 心具에 특색이 있다. 性具의 원리를 지관에 적용했던 것이다. 나아가 지의는 마음의 부사의함을 나타내기 위해서 유명한 一念三千說을 선보인다.
무릇 한마음에 十法界를 구비하며 一法界에도 십법계를 구비하여 백법계이다. 一界에 30가지 世間을 구비하며 따라서 백법계에 삼천가지 세간을 구비한다. 이 삼천은 一念의 마음에 있다. 만일 마음이 없으면 몰라도 극미의 마음이라도 있으면 바로 삼천을 구비한다.
라고 한다. 이 일념삼천은 일념즉삼천의 변증법을 나타내는 것이다. 환언하면 실상은 한편으로는 주체적 의식적으로 자기를 한정하고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삼천세간으로 하여 자기를 한정한다. 삼천세간이 존재하는 것은 동시에 주체적 의식과정이 거기에 응하여 전개되는 것이고 양자는 항상 동시적인 것이다.
삼천세간을 구성하는 기본 개념은 십법계와 삼세간, 十如是이다. 십법계란 지옥ㆍ아귀ㆍ축생ㆍ수라ㆍ인간ㆍ천상의 여섯 가지 범부세계(六凡)와 성문ㆍ연각ㆍ보살ㆍ부처의 네 가지 성인세계(四聖)이다. 이 열 가지를 법계라고 하는 뜻을 지의는 다음의 세 가지로 말한다.
법계라고 함은 세 가지 뜻이 있다. 첫째 ‘열’이라는 수는 의지하는 주체(能依)이며 ‘법계’는 의지하는 대상(所依)이니 주체와 대상을 합하여 ‘열 가지의 법계’라고 부른다. 또 이 열 가지 법은 원인과 결과가 각각이어서 서로 섞이거나 넘치지 않으므로 ‘열가지 법(十法)의 구분(界)’이라 한다. 또 열 가지 법은 각각의 바탕 그대로가 모두 법계이므로 ‘십법계’라 한다.
라고 하고 있다. 여기서는 십법계가 각기 독특성을 가지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물론 지의는 그의 사상 전체가 具를 기반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십법계 각각의 독립과 독특성은 내면적인 포용성과 공통성을 전제로 하고 있다. 지의는 또 법계를 ‘菩提’ ‘不可思議境界’ ‘般若’ ‘不生不滅’ 등으로 이름 붙이고 있다.
法華玄義에서는 위의 세 가지 뜻을 다시 空假中의 三諦에 배대하여 해석한다. 하지만 그것은 다만 알기 쉽게 하려고 셋으로 분별한 것일 뿐 그 뜻으로 보면 空이 곧 假中이어서 하나도 둘도 셋도 없다고 하였다.
湛然은 다시 이 뜻을 정리하여
止觀輔行傳弘決에서 ‘十의 法界’ ‘十法의 界’
그리고 ‘十法界’의 세 가지 방법으로 읽으며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다.
첫째는 眞諦의 뜻에 의거한다. 열 가지 모습이
모두 法界의 空함에 의지하므로 열 가지를 모두 法界라 한다(所依釋).
둘째는 假諦에 의거한다. 열 가지 법이 모두 나름의 성격이 분명하게
구분되므로 열 가지 법(十法)으로 나눠진다(界)는 뜻이다(隔異釋).
셋째는 中道의 뜻에 따른다. 열 가지가 모두 眞如法界 아님이 없으므로 십법계라 한다(法界釋).
이와 같이 열 가지 法界 각각에 모두 三諦의 이치가 圓融하게 갖춰져 있다고 보는 것이다.
다음은 삼세간이다. 세 가지 세간은 五陰世間, 衆生世間, 國土世間이다. 오음세간은 세계를 구성하는 요소인 물질을 말하는 것이고 중생세간은 거기에 안주하는 인간과 생물을 가리키는 것이며 국토세간은 그 인간과 생물이 살고 있는 환경을 말하는 것이다.
다음은 십여시이다. 십여시는 法華經 「方便品」 제2에 나오는 교설이다. 모든 존재의 참모습인 諸法實相을 설명한 것이다. 그런 까닭에 십여시설은 법화경의 제법실상 사상과 더불어 南岳慧思 이래로 天台에서 존재를 설명하는 중요한 방법이 되어왔다. 십여시는 如是相, 如是性, 如是體, 如是力, 如是作, 如是因, 如是緣, 如是果, 如是報, 如是本末究竟等이다. 相은 외면의 형상을 말하고 性은 내면의 본성, 體는 사물의 주체, 力은 잠재적인 힘, 作은 드러난 작용, 因은 직접적인 원인, 緣은 간접적인 원인, 果는 직접적인 원인의 결과, 報는 간접적인 원인의 결과, 如是本末究竟等은 형상에서 결과까지를 포괄하는 평등의 원리이다.
이상을 종합하면 지옥, 아귀, 축생 등의 십계가 互具 즉 서로 상대를 갖추거나 포함하면 백법계가 된다. 오음, 중생, 국토의 삼세간이 여시상, 여시성 등의 십여시와 互具하면 삼십세간을 이룬다. 호구된 백법계와 호구된 삼십세간이 다시 호구하면 삼천세간이 된다. 존재의 내외, 인과 등의 실상을 나타내는 십여시 그리고 요소, 주체, 환경을 나타내는 삼세간의 호구적 수가 삼천을 나타낸다. 그러나 이 삼천이라는 숫자는 곱하기의 상징적 표현일 뿐이다. 지의는 현전의 一心 또는 一念을 이 삼천세간과 동일시한다. 그래서 일념삼천설에는 호구라는 말과 세간과 마음을 동일시하는 철저한 唯心造의 사상이 전제되어 있다그런데 먼저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그것은 삼천세간이 실재하는 것으로서 미묘한 지혜의 관찰의 경계가 되는 것인가 아니면 관념적으로 사유되는 것인가 하는 점이다.
마하지관은 이 점에 대해 한 생각에 삼천세간이 동시동격으로 구비되어 있다
고 하는 것이 부사의경 자체이고 삼천세간이 관찰의 내용은 아니라고 말한다. 즉 法華玄義 권9상이나
三觀義 권하를 인용하면서 ‘부사의경은 圓融한 四諦나 十二緣起의 이법이며 따라서 圓融三諦의 미묘한
이법이 부사의경의 주체일 뿐이며 결코 삼천세간의 차별적인 事相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지의의 부사의한 마음으로 나타나는 唯心造 사상은 唯色이나 유물과 대립된 것이 아니라 物心을 다 포용하는 것이므로 법계가 唯心造된 것이라고 하거나 唯色造된 것이라고 해도 그 뜻에 아무런 차이가 없게 된다. 色과 心에
어떤 차이가 있어야만 唯心思想과 唯物思想이 대립된다. 그런데 너무도 철저하게 마음과 세간이 같기 때문에 삼천이라는 숫자가 상징할 정도의 모든 단계의 성취나 실패, 행복이나 불행, 깨달음이나 미혹의 세계들이 있는 그대로 한마음일 뿐이다. 또한 지의는 마음과 인간 現前法界의 등식관계를 설명한다.
또한 一心이 앞에 있고 一切法은 뒤에 있다고 말하지 말라. 일체법이 앞에 있고 一心이 뒤에 있다고도 말하지 말라……만약 一心으로부터 일체법이 나온다고 하면 이것은 縱이요 만약 마음이 일시에 일체법을 포함한다고 한다면 이것은 橫이다. 종도 옳지 않고 횡도 옳지 않다. 다만 마음은 일체법이요 일체법은 마음일 뿐이다. 그래서 종도 아니고 횡도 아니고 一도 아니도 異도 아니다. 그래서 이것은 不可思議境이라고 부른다. 뜻이 바로 여기에 있다.
라고 한다. 일체법과 一心은 존재의 전후를 가릴 수가 없다는 설명이다. 종이라는 시간적 범주 안에서 一心으로부터 일체법이 나왔다고 한다거나 횡이라는 공간적 범주 안에서 마음이 일시에 일체법을 포함한다고 할 수도 없다. 일체법은 마음, 마음은 일체법일 뿐이다. ‘法性은 스스로 그러해서 일부러 지은 바가 아니다. 마치 한 작은 티끌에 시방의 전체를 질적으로 양적으로 사진찍어 담아 있는 것과 같다.’ 마음과 일체법의 구조가 성품의 바탕에서 본래적으로 동일해서 부사의경을 관함에 의해서 그렇게 체험해야만 새롭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부사의경을 관한다는 말은 一心과 법계가 본래 스스로 하나임을 있는 그대로 諦觀함을 뜻할 뿐이다.
지의의 강설을 종합적으로 살펴본다면 四念處에서는 다만 ‘信順不思議一實四諦’라하고 법화현의에서도 ‘부사의경을 一實四諦’라 규정하고 사제의 하나하나를 一心三觀의 입장에서 파악해야 함을 설하고 있다.
大部四敎義에서는 ‘善識不思議十二因緣’이라 하고 있다.
또 三觀義에서도 ‘善識不思議境’이라 하고 있으며 달리 특수한 觀法으로 설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三觀義 권하에서 십승관법을 열거한 후에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어떤 사람이 일심삼관을 닦는다면 십법을 구족하게 되고 자연히 薩婆若의 바다에 유입하여 깊은 선정을
얻을 것이다.라고 하고 있으며 또한 마하지관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비추는 바는 三諦이고 일으키는 바는 三觀이며 관이 이루는 것은 三智이다.
라고 하고 있다. 이러한 文에 의거하여 볼 때 일심삼관이 관부사의경의 관법 즉 부사의관의 본질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지의는 다시 유명한 삼제게를 들며 불가사의한 일심삼관을 직접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만약 法性과 無明이 합해져서 일체법, 陰界入 등이 있게 되면 이는 바로 俗諦(假)이다.
일체의 음계입이 一法界가 되면 이는 바로 眞諦(空)이다.
非一非一切가 되면 이는 바로 中道第一義諦(中)이다.
이와 같이 일체법을 두루하면 不思議三諦 아닌 것이 없다.
만약 一法이 일체법이 되면 이는 因緣所生法으로 假觀이다.
만약 일체법이 一法이 되면 我說卽是空으로 空觀이다.
만약 一法도 아니고 일체법도 아니게 되면 이는 바로 中道觀이다.
一空이 一切空이면 假와 中으로서 空 아님이 없으니 전체적으로는 空觀이다.
一假가 一切假가 되면 空과 中으로서 假 아님이 없으니 전체적으로는 假觀이 된다.
一中이 一切中이 되면 空과 假로서 中 아님이 없으니 전체적으로는 中觀이 된다.
바로 中論에서 설한 바 不可思議一心三觀이다. 일체법을 두루 응용해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지의는 먼저 陰入界의
一切法적인 면,
一法적인 면,
非一非一切적인 면을 들어 三諦를 말하고
다시 一法과 일체법의 관계를 반복해서 中道偈를 들며 배대시킨다.
이어서 假와 中을 總空觀으로 空과 中을 總假觀으로 空과 假를 總中觀으로 만들어서 관부사의경 속에서 三諦가 있고 三諦 속에 다시 전체를 엮는 三諦가 있음을 거울 속에 있는 거울처럼 관하게 한다. 五陰ㆍ十二入ㆍ十八界가 펼치는 세계와 一心을 不思議觀으로 일치시키고 동시에 일심삼관하는 데서 자유자재한 침묵과 언어의 雙遮雙照와 雙破雙立이 가능하게 된다. 온종일 말해도 온종일 말하지 않는 것이 되고 온종일 말하지 않아도 온종일 말하는 것과 같으며 온종일 침묵과 언어를 이중으로 차단하는 것이 바로 온종일 침묵과 언어를 이중으로 폄과 같으니 破하는 것이 바로 세우는 것이요, 세우는 것이 바로 파하는 것이다. 미혹을 일으키고 업력에 시달리는 現前의 마음을 관하는 관부사의경의 일심삼관에서 마음과 세계, 언어와 침묵, 있음과 없음, 씀과 지움 사이에 있는 벽이 무너지고 이쪽과 저쪽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대자유, 대해탈이 나타난다.
미혹과 세계의 일치, 세계와 마음의 일치, 미혹과 세계와 마음의 부사의한 일치, 일체법인 마음과 마음인 일체법과 空假中 三諦를 일치시키는 태도는 지의에게 있어서 한결같다. 觀境이 陰入界境으로부터 煩惱境이나 業相境 등으로 바뀌어진다고 해서 마음과 세계를 부사의한 하나로 보는 기본적 지관의 자세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부사의한 마음의 모습을 관함에는 크게 두 가지 의의가 있다.
첫째, 자신의 현실 특히 마음의 참모습을 바르게 인식하는 것이다. 마음은 어떠한 제한이나
결정된 모습이 없이 일체 세계의 일체 존재의 모습을 모두 갖추고 있음을 如實히 아는 것이다.
둘째, 자기 마음의 참모습을 알게 됨으로써 자연히 일체 존재의 온갖 현상에 대한 바른 이해가 생긴다.
또 십승관법 가운데 관부사의경의 의의를 마하지관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이 부사의한 경계로 어떤 법을 거두지 못할 것이며 이 경계로 지혜를 일으키면 어떤 지혜가 일어나지 않겠는가? 이 경계에 의지하여 서원을 일으키거나 나아가 법에 대한 애착을 없앤다면 어떤 서원이 갖춰지지 않으며
어떤 행이 이뤄지지 않겠는가?
이 내용에 의하면 관부사의경이란 수행의 출발점이고 동시에 귀결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다른 觀心法이 성립하는 공동의 기반을 밝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천태지관법의 핵심인 일념삼천설, 부사의경의 논리, 일심삼관 등을 망라하고 있는 관부사의경을 통하면 여타의 십승관법도 다 통하는 것이 된다. 그것은 마음과 법계의 부사의한 동일성과 일념삼천설의 호구성을 일심삼관의 자세로 일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관부사의경은 바른 존재론이며 인식론이다. 하지만 실천론은 아니다.
즉 마음과 세계에 대한 바른 인식으로부터 중생에 대한 자비의 서원을 세우고 그것을 이루는 바른 실천을 행하게 되는 것이다. 바른 인식 없이는 바른 실천이 될 수 없으며 바른 인식 없이는 중생에 대한 올바른 자비의 마음도 가질 수가 없다. 또한 바른 실천 없는 인식이나 서원 또한 공허한 것이다. 이런 뜻에서 觀陰入界境에서의 관부사의경ㆍ기자비심ㆍ교안지관은 서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상근기의 행자도 관부사의경을 수행해서 바로 圓理를 證悟해서 入住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먼저 관부사의경을 수행하여 일념삼천의 理法을 잘 알고 이것을 信順하며 이어서 自行化他의 서원을 발기한다. 다시 지와 관을 실천해서 이 원리에 마음을 편안히 하는 행을 수행하는 것에 의해서 처음으로 입주할 수 있다고 했던 것이다.
이미 인용한 마하지관의 교안지관의 항에 ‘모름지기 수행하여 그 서원을 충족하여야 하는 것인데 그 수행이란 바로 지관인 것이다.’라고 하고 있다. 그리고 법화현의 권9상에 ‘이미 존재의 바탕을 완전히 이해하고 보리의 마음을 모두 일으켰다면 어찌 못에 이르러 물고기만 바라보며 기꺼이 그물을 당기지 않으며 양식을 싸고 다리를 묶어 채비하고서 가만히 앉아 있어 (길을) 나서지 않는가? 수행의 요체는 선정과 지혜를 벗어나지 않는다.’라고
설하는 것도 실은 이러한 이유에 의거한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이를 토대로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수행자의 근기를 살펴보았을 때 상근기는 적어도 교안지관까지는 수행해야 하는 것이다. 그 가운데 관부사의경은 십승관법의 첫걸음(初步)으로서 놓여져 있는 것이다. 아울러 관부사의경과 기자비심은 교안지관의 전단계로서 수행되어야
하는 것이고 실천행으로서의 교안지관이 십승관법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다.
Ⅲ. 큰 자비의 서원(起慈悲心)
기자비심(發眞正菩提心)은 관부사의경의 관법을 닦고 일념삼천의 부사의경을 알며 스스로도 이 부사의경을 완전하게 체증함과 동시에 일체중생들이 이 이익을 수용하려는 보리심을 발하는 것이다. 보리심은 지혜와 자비를 내용으로 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지혜에 기초한 자비심의 발로를 중시한다. 그리고 자비심을 일으키는 것에 의해서 一心의 三諦를 三觀하는 사의를 뛰어넘은 마음의 정당성이 보증된다. 藏通二敎의 사람들은 自行을 앞세우고 灰身滅智를 구하기 때문에 그들의 發心은 자리적 성격을 지닌다. 반면에 別圓二敎의 사람들은 自行뿐만 아니라 化他를 서원한다. 그 점에서 마하지관은 특히 圓敎止觀의 행자가 발하는 보리심의 化他的 성격을 나타내기 때문에 제2의 관법을 기자비심이라 명명했다. 그러나 그 본질은 넓은 의미의 發菩提心이다.
기자비심의 자비란 拔苦與樂이며 이 발고여락의 심정을 자비심이라 말한다. 일체의 중생에 대한 발고여락의 심정이 보리심으로 구체화된 것을 四弘誓願이라 한다. 지의에 의하면 발고를 생각하는 大悲心에서 衆生無邊誓願度와 煩惱無盡誓願斷의 두 가지 서원이 생기고 여락을 생각하는 大慈心에서 法門無量誓願學과 佛道無上誓願成의 두 가지 서원이 생겼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사홍서원은 圓敎의 행자가 발해야 할 서원이므로 衆生ㆍ煩惱ㆍ法門ㆍ佛果에 대해 하등의 偏執도 일으키지 않고 卽空ㆍ卽假ㆍ卽中의 圓融三諦의 실상에 상즉한 진정한 발심이라 말한다. 이러한 내용을 지의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크게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일으켜 두 가지 서원을 세우니 곧 중생이 가없으나 모두 제도하길 서원하며 번뇌가 셀 수 없으나 모두 끊기를 서원함이다. 마음의 부사의한 모습을 바르게 인식함으로써 하나의 즐거운 마음이 곧 모든 즐거운 마음임을 안다. 그리하여 크게 자비하는 마음을 일으켜 두 가지 서원을 세우니 곧 법문이 한량없으나 모두 알길 서원하며 위없는 佛道를 모두 이루기를 서원함이다.
이와 같이 ‘자비의 서원을 일으킴’(기자비심)을 지의는 또한 ‘참되고 바르게 보리의 마음을 일으킴’(발진정보리심)이라 말한다. 그리고 보살이 수행위에서 발하는 서원을 네 가지로 하는 것은 예로부터 행해졌는데
道行般若經에서는 아직 건너지 못한 것을 건너도록 하고, 아직 해탈하지 못한 것을 해탈케 하며,
공포스러운 것은 공포스럽지 않게 하고, 般涅槃하지 못한 것을 반열반하도록 하는 것 등으로 정해져 있다.
법화경에서도 건너지 못한 것을 건너도록 하고, 요해하지 못한 것을 요해하도록 하며, 안정되지 못한 것을
안정케 하고, 열반하지 못한 것을 열반토록 하는 것이 설해져 있는데 대체로 내용은 동일하다.
그런데 瓔珞經에서는 四諦에 맞추어 네 가지 서원을 세우고 있다.
苦諦를 건너는 것,
集諦를 이해하는 것,
道諦를 닦는 것,
滅諦를 얻는 것을 서원의 내용으로 하였다.
지의는 영락경의 四諦에 맞춘 四種誓願을 채용하였는데 法界次第初門 등에서는 이것을 들고 있다. 그런데 초기의 강의인 次第禪門에서 衆生無邊誓願度ㆍ煩惱無盡誓願斷ㆍ法門無量誓願學ㆍ無上佛道誓願成이라는
사홍서원이 설해지기 시작한다. 사홍서원의 원형은 大智度論에서 나오고 있지만 사홍서원이 중국에서 최초로 설해진 문헌은 차제선문이라는 것이 확실하다.
이 사홍서원을 이전의 서원과 그 내용을 비교한다면 대승보살의 왕성한 自行化他의 의지를 현저하게 표현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부사의경의 일념삼천을 관하여 煩惱卽菩提, 諸法卽實相의 妙理를 알 때 도리어 현실세간의 迷妄을 슬퍼하고 自他가 함께 이 미망을 벗어나려는 굳은 결의를 지니게 된다. 따라서 기자비심은 관부사의경과 밀접한 관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이러한 부분을 마하지관의 본문을 통해 살펴보겠다.
이와 같이 자비의 서원과 不可思議한 境智는 전후가 없이 동시에 함께 일어난다. 자비는 바로 지혜이며 지혜는 바로 자비이다. 無緣, 無念해서 두루 일체를 가리고 자유롭게 발고하고 자연스럽게 여락한다. 毒害와 같지 않고 但空과 같지 않으며 愛見과 같지 않는다. 이것을 진정으로 보리를 발심한 뜻이라 이름한다. 스스로 자기를 슬퍼하고 중생을 슬퍼한다는 뜻임은 모두 다 위에서 설한 觀心과도 같으니 가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라고 말한다. 이와 같은 자비의 서원과 부사의한 境智(지혜)는 앞도 없고 뒤도 없으며 동시에 일어난다는 것이다. 우리들 자신이 이 서원을 가지고 지혜를 만들어 냈을 때 비로소 고가 없는 낙을 받는 것이다. 자기로의 절대집착을 끊고 菩薩道에 태어나는 서원을 가진 것 만이 고를 끊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다. 한번 번뇌에 해를 입으면 점점 고뇌의 深淵으로 들어간다. 인간이 가진 번뇌는 결코 즐거운 것이 아니라 반드시 고로 타락해가는 습성을 가진 것이다. 고뇌의 流動에서 한없는 낙의 세계로 자기를 전환해 가기 위하여 진정한 보리심을 발하는 것이 자기와 他者의 구제론으로서 전개된 것이다. 세계의 실상이 자기 마음 가운데 顯現되면 부사의한 마음에 감사드리게 된다. 그러므로 번뇌에 해를 입은 마음이 진정한 보리심을 발하도록 자기의 마음을 전환해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진정한 發菩提心이라 하듯이 부사의경을 알고 이러한 이상을 사모하는 맹렬한 서원이 발보리심이다. 그래서 발보리심을 특히 마하지관만이 기자비심이라고 명명한 것은 彼我ㆍ自他가 함께 미망에 속박되는 것을 슬퍼하기 때문이다. 만약 자리만을 구하는 보리심을 발하면 이것은 진정한 보리심이 아니라 菩提心魔라는 것을
無行經이나 涅槃經에서 말하고 있다.
Ⅳ. 올바른 실천행(巧安止觀)
교안지관은 지관에 의해 마음을 법성에 편안히 머무르는 것을 의미한다. 마음도 법성이라는 점에서는 엄밀하게는 법성을 법성에 안주하게 하는 定慧를 말하는 것이다. 부사의경을 깊이 인식하고 널리 자비의 서원을 세웠다면 이제 그 내용을 바른 실천을 써서 수행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 행이 바로 교안지관이다. 圓頓止觀의 실질적 실천인 이 ‘교안지관’을 달리 ‘善巧安心止觀’이라고도 말한다. 곧 ‘지관을 적절히 잘 운영하여 법성에 편안히 머무른다.’는 뜻이다. 이 부분을 인용문을 통하여 살펴보겠다.
선교안심은 훌륭하게 지관으로서 법성에 안주하는 것이다. 위로는 깊게 불가사의한 경계의 淵 속의 미묘한 비밀에 도달하여 널리 자비를 운용하니 걸치고 덮음이 이와 같은 것이다. 모름지기 수행하여 그 서원을 충족하여야 하는 것인데 그 수행이란 바로 지관인 것이다. 무명이나 우치나 미혹은 원래 이것이 법성이다. 어리석은 미혹 때문에 법성은 변하여 무명으로 되고 모든 뒤집혀진 善이나 不善 등을 일으키지만 마치 추위가 와서 물을 얼게 하고 변하여 굳은 얼음이 되게 하는 것과도 같다.……다만 망상을 가리킨다면 모두 다 이것이 법성인 것이니 법성으로써 법성을 묶고 법성으로써 법성을 염하는 것이다. 그러니 항상 이것이 법성인 것이며 법성으로 하지 않을 때가 없다.
라고 하고 있다. 즉 무명즉법성이라는 圓理를 體證하고 정신을 이 법성에 집중시켜서 무명과 법성을 구별하는 분별의식에서 완전히 자유롭게 되는 것이 교안지관의 목적이다.
안심지관법의 핵심은 네 가지 지와 네 가지 관이다. 네 가지란 좋아함에 따르거나[隨樂欲], 편리함에 따르거나[隨便宜], 상황을 대치하거나[隨對治] 혹은 으뜸가는 이치에 따르는[隨第一義] 것이다. 이 네 가지 방법으로 알맞게 지나 관을 써서 마음을 편안히 한다. 그런데 이것은 바로 차제선문 6장의 內方便 가운데 安心禪門의 내용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차제선문에서는 안심법으로 다음의 다섯 가지를 설하였다. 즉 좋아하는 바에 따르며[隨樂欲], 편리함에 따르고[隨便宜], 대치함에 따르며[隨對治], 혹은 순서대로 행하며[隨次第], 혹은 존재의 참모습 그대로에 따라[隨第一義] 마음을 편안히 가지는 것이다. 그 가운데 지금 원돈지관의 관법으로는 수차제를 제외한 네 가지를 모두 채택하였다.
마하지관에서는 더 나아가 이 네 가지 안심법을 각각 四悉檀에 배대하여 다음과 같은 의미를 부여한다.
즉 수낙욕은 爲人悉檀이며
수편의는 世界悉檀이고
수대치는 對治悉檀이며 수제일의는 第一義悉檀이다.
이와 같이 선교안심지관은 안심이라는 명칭이나 그 실제 내용에 있어서
차제선문의 내방편인 安心門을 원돈지관의 행법으로 재해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를 다시 다음과 같이 사실단과 마하지관의 네 가지 교안지관으로 표시해 볼 수 있다.
四悉檀 | 爲人悉檀 | 世界悉檀 | 對治悉檀 | 第一義悉檀 |
巧安止觀 | 隨樂欲 | 隨便宜 | 隨對治 | 隨第一義 |
次第禪門 | 隨樂欲 | 隨便宜/隨次第 | 隨對治 | 隨第一義 |
이 교안지관에는 두 가지의 구체적인 방법이 있다. 총체적인 교안지관과 개별적인
교안지관이다. 총체적인 교안지관이란 심원에 돌아가 일체 망상의 流動을 초탈하고 분명하게
法界眞如의 理法을 체증하는 방법이다. 이러한 부분을 마하지관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미 體達하게 되면 망상과 법성을 얻지 못하고 근원으로 돌아가고 근본으로 돌아가면 법계가 모두 적멸해진다. 이것을 이름하여 지라 한다. 이와 같이 지할 때 일체의 유동이 모두 그친다. 관이란 無明心은 위로는 법성과 같아서 본래가 모두 공이며 아래로는 일체의 망상과 선악이 모두 허공과 같아서 두 가지가 없고 딴 것도 없음을 관찰하는 것이다.
라고 하여 지관이 모두 一行에 구비된다고 말한다. 즉 무명이 바로 법성이라는 원리를 總觀하는 것만으로
근원으로 돌아가고 근본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 총체적인 교안지관이다.
개별적인 교안지관이란 원리를 총관하는 것만으로는 마음을 법성에 안주시킬 수 없다는 점을 實修하는 관법이다. 본문을 통하여 살펴보겠다.
부처님께서 세상을 떠난 뒤에 이러한 스승은 매우 얻기가 어렵다. 눈먼 거북이가 무엇으로 말미암아 물위로 올라와 뜬 나무의 구멍에 합치할 것이며 겨자를 떨어뜨려서 어떻게 내려와 바늘 끝으로 꿰뚫을 수 있을 것인가.
어렵고도 어렵다.
라고 하여 총체적인 교안지관의 목적을 달성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탄식하고 있다. 따라서 보다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개별적인 교안지관이 수립되게 되었다. 개별적인 교안지관에는 自行과 敎他의 部門이 있다. 우선 自行의 부문에 대해 말하자면 機類의 根性을 信行과 法行으로 구분한다. 옛부터 신행을 鈍, 법행을 利라고 하는 통례가 있지만 지의는 오히려 利鈍은 양자에게 모두 있다고 말한다. 다만 신행은 思慧는 둔하더라도 聞慧는 銳利하다고 보고 법행은 思慧는 예리하나 聞慧는 둔하다고 하여 양자를 동격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이들은 각각 여덟 가지의 안심법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먼저 법행의 自行의 안심방법은 다음의 여덟 가지가 있다. 자기의 마음을 반성해서 무엇을 구하면서 관찰할 때 스스로 이 여덟 가지의 전환이 있다는 것이다.
1) 망상을 떠나서 寂定을 바란다.
2) 일체의 망상이 마음에서 나온다는 것을 오직 聽聞할뿐만 아니라 다시 이 망상을 止息하려고 한다.
3) 心源을 관조하고 實相寂然함을 안다.
4) 지관의 공부가 정체될 때 책려하고 정진한다.
5) 정신이 산만할 때 특히 지를 닦아서 이것을 대치한다.
6) 정신이 昏睡할 때 역으로 관을 닦아서 이것을 대치한다.
7) 오랫동안 지를 닦아서 開悟하지 않을 때는 관으로 전환한다. 8) 오랫동안 관을 닦아도 闇障을 제거할 수 없을 때는 지로 전환한다. 이상이 법행의 자행의 여덟 가지의 지관이다. 이 여덟 가지를 선교해서 안심을 얻는다고 한다.
신행의 자행의 안심법에도 다음의 여덟 가지가 있다.
1) 적정을 욕구할때는 止法을 듣는다.
2) 관에 의해 속히 번뇌를 파할때는 관을 듣는다.
3) 오랫동안 관을 듣고서 정신이 산만할때는 지를 듣고서 정신통일을 행한다.
4) 오랫동안 선정의 법을 듣고서 지에 치우쳤을 때는 역으로 관을 듣고서 이것을 修正한다.
5) 掉擧해서 散心에 빠졌을 때는 지를 듣는다.
6) 昏沈해서 정신상태가 몽롱해졌을 때는 관을 듣는다.
7) 지를 듣고서 정신상태가 豁豁해졌을 때는 오로지 지를 듣는다.
8) 관을 듣고서 정신상태가 朗朗해졌을 때는 오로지 관을 듣는다.
이것이 신행보살의 자행의 여덟 가지 안심법이다.
이상은 신행보살 및 법행보살의 자행에 대해서 서술하였다. 그런데 根性에 의해서는 신행보살도 실제로 좌선을 필요로 하는 자가 있다. 또한 법행보살도 청법을 필요로 하는 자가 있다. 이 근성의 사람은 신행에서 법행으로 전환하는 자가 있다. 법행에서 신행으로 전환하는 자도 있다. 다시 전환하지 않는 자도 있다. 또한 신행과 법행이 서로 도우며 작용해서 지관을 성취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개별적인 교안지관의 제2부문인 敎他는 중생제도를 목적으로 하는 보살행이다. 교안지관이 지관 중의 지관이며 圓行의 중심인 이상 교타의 일면을 지니지 않을 수 없으므로 교화가 지관의 일부라 한 것이다. 교타를 행하는 데도 우선 상대의 근성을 잘 관찰하고 교묘하게 적절한 지도를 하여 마음을 법성에 안주시켜야만 한다. 그리고 상대의 근성을 역시 신행과 법행으로 구분하고 각각 여덟 가지 안심법이 있다고 말한다.
먼저 信行根性에 대한 교타의 여덟가지 방법을 살펴보겠다.
1) 갖가지 인연과 비유로서 교묘하게 지를 讚說하고 상대의 심정의 樂欲하는 바를 이용하면서
정신통일을 계획한다.
2) 갖가지 인연과 비유를 설해서 선정의 공덕을 찬탄하고 상대에게 선근을 생기게 한다.
3) 같은 인연과 비유를 이용해서 지를 찬탄하고 상대의 산심을 대치해서 정신을 明徹하게 한다.
4) 갖가지 인연비유를 이용해서 지를 찬탄하고 一切種智를 얻어 一如를 會得하게 한다.
5) 多聞을 기뻐하는 자를 위해 갖가지 인연비유를 이용해서 관을 설하고 道와 非道를 관찰하게 한다.
6) 관을 찬탄해서 그 공덕인 智의 發起를 재촉한다.
7) 널리 관을 설해서 미망을 벗어나게 한다.
8) 관을 설해 實相一如自體를 悟解케 한다.
다음은 法行根性에 대해서 살펴보겠다.
1) 지를 설해서 좌선하고 사유할 것을 설한다.
2) 지를 설해서 선근을 생하게 한다.
3) 산심을 탄식하는 것에 지를 설해서 정신의 안정을 얻게 한다.
4) 雙遮雙照하는 지의 奧義를 설해서 第一義諦를 會得하게 한다.
5) 寂靜을 좋아하지 않는 자를 위하여 관을 광설한다.
6) 관을 닦아서 信ㆍ戒ㆍ定ㆍ慧ㆍ解脫ㆍ解脫知見 등을 생하게 한다.
7) 관을 닦아서 破闇照道를 실행하게 한다.
8) 관을 행해서 能所未分의 第一義諦에 開示悟入하게 한다.
이것이 법행근성에 대한 여덟가지의 교타의 방법이다.
그 외에 不定根性의 사람이 있다. 이것은 법행에서 신행으로, 신행에서 법행으로 전환한다.
이와 같이 개별적인 교안지관의 방법은 매우 다양하다. 지의에 의하면 총 512門이다.
무명즉법성의 원리를 총관해서 이것을 체증하는 자는 一法만으로 충분하지만 그렇지 않은 자를 위해서 개별적으로 설하면 안심방법은 512개로 나뉘어진다.
그러나 그 512개도 自行敎他 각각 16개의 방법을 기본으로 조직된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단순한 숫자의 나열이 아니다. 지와 관을 조화롭게 행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수행자의 근기와 상황에 가장 알맞고 바른 이치에 들어맞아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그래서 이들 각종의 방법을 선교해서 공부하고 스스로 원리를 증득해서 마음을 편안하게 하며 다시 화타를 행해서 觀行位를 성취하기 위한 것이다. 이상의 내용을 도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總 | 自他 | 64 | 128 | 512 | |||
相資 | 64 | ||||||
別 | 空 | 自他 | 自行 | 信行 | 8 | 32 | |
法行 | 8 | ||||||
信行→法行 | 8 | ||||||
法行→信行 | 8 | ||||||
敎他 | 信行 | 8 | 32 | ||||
法行 | 8 | ||||||
信行→法行 | 8 | ||||||
法行→信行 | 8 | ||||||
相資 | 信資法 | 自行 | 32 | 64 | |||
法資信 | 敎他 | 32 | |||||
假 | 128 | ||||||
中 | 128 |
Ⅴ. 나가는 말
이상으로 원돈지관의 실천행법으로서
음입계경의 지관을 수행할 즈음에,
관부사의경과 기자비심, 및 교안지관의 세 가지 관법의 내용과 상호관계를 살펴보았다.
이 세 가지 관법은 상근기가 닦아야 할 실천의 내용으로 제시된 것이다.
관부사의경,
기자비심,
교안지관은 각각 제법실상에 대한 바른 인식과 그에 바탕한 자비의 서원
그리고 그 직접적인 실현방법의 의미를 갖는다.
그런데 상근기의 圓頓만을 지나치게 강조하게 되면 천태종이 자랑하는 ‘모든 근기의 多方便的 수용’이라는 특성을 잃을 염려가 있다. 원돈이냐 아니냐는 십경십승관법 가운데에 어느 觀境, 어느 觀法을 이용하느냐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法界의 부사의한 동일성과 일념삼천설의 호구성을 일심삼관의 자세로 일관되게
관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의해서 결정된다. 지의의 互具主義는 마음과 세계와 깨달음에도 다 응용되므로,
십경과 십승관법의 하나하나가 다른 구경과 구승관법을 포함하고, 그러한 觀心은 그대로 圓頓觀이 된다. 그렇지만 실제적 수행에 있어서 이러한 일심삼관의 자세로 일관되게 관하게 되는 것이 잘되는 수행인이 있을 것이고,
그렇지 못하는 수행인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차이를 지의는 자신의 체험을 통해서 예리하게 구별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상근기자는 세 가지 관법을 닦아야 한다는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지의가 전달하고자 하는 진의는 ‘모든 근기의 다방편적 수용’이라는 관점에서는 상근기자와 초보자의 구분은 무의미하고 모든 관법이 중요하다고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수행인의 근기를 살피고 상근기라면 적어도 교안지관까지는 수행해야 한다는 나침반을 제시하였다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