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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아디라에 있는 교회의 천사에게(9)
말씀: 계2:18-29. 2024년 2월 25일 일요일 오전 11시
‘두아디라’는 “고통의 향기”란 뜻이 있습니다. 또한 이 단어는 두아의 “희생의 향기”와 디라의 “계속해서 나아가다”란 두 단어의 합성어입니다. 교회사적으로 적용할 때는 606-1517년에 해당됩니다. 마틴 루터가 독일, 비텐베르크 예배당 문에다 95개 조항의 반박문을 못 박은 사건이 일어난 해가 1517년 10월 31일이었으며 이 날은 교회 역사의 전환점이 됩니다. 이 시기는 세속사가들 조차도 역사의 가장 어두운 암흑시대라 말합니다.
캐톨릭교회는 교황을 중심으로 세속 권력, 정치적 권력을 가지고 있었고 포교(복음을 전한다는 명목으로) 무력으로 침략전쟁을 벌였습니다. 교황은 스스로 교회의 머리, 그리스도의 대리자를 자칭하며 온 세상의 왕들의 왕임을 선포하며 신적 권위를 지닌 권력자로 영광을 누렸습니다. 자칭 로마의 캐톨릭 교회가 유일한 교회요 우주적인 교회라고 주장하면서 성경에도 없는 새로운 교리를 마구 만들어 내기 시작했습니다. 이교도의 미신, 종교적 관습과 교리가 캐톨릭에 그대로 흡수되어 정통 교회교리로 선포되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의 참되고 유일한 사도적인 교회”라고 주장하며 교회법, 교회의 전통을 성경보다 위에 두기 시작했습니다. 성경 본문에 들어가기 전에 이 시대에 만들어진 몇 가지 캐톨릭 교리를 살펴보겠습니다.
⚫ 610 년 로마의 감독에게 최초로 교황(Pope)이란 칭호가 주어 졌음.
⚫ 709 년 교황의 발에 입 맞추는 의식이 시작 됨.
⚫ 750 년 교황의 정치권력이 시작 됨.
⚫ 788 년 형상들과 유품에 대한 경배가 승인 됨.
⚫ 850 년 성수(Holy water)가 승인 됨.
⚫ 890 년 성 요셉에 대한 숭앙이 시작 됨.
⚫ 995 년 죽은 성자의 시성이 시작 됨.
⚫ 1090년 은둔자 베드로에 의해 로사리오(염주)가 도입 됨.
⚫ 1184년 베로나(Verona) 공회에 의해 이단에 대한 종교 재판이 제정 됨.
⚫ 1190년 면죄부 판매가 시작 됨.
⚫ 1215년 교황 이노센트 3세에 의해 화체설이 교리로 선포 됨.
⚫ 1215년 이노센트 3세에 의해 사제에게 하는 고해성사가 교리로 선포됨.
⚫ 1220년 성병(host)을 찬미하는 것이 교리로 선포 됨.
⚫ 1229년 발렌시아(Valencia) 공회에서 성경을 금지도서 목록에 포함시킴.
⚫ 1251년 영국의 사이몬 스톡이 성의를 만들어 냄
⚫ 1414년 콘스탄스 공회 때 평신도들은 영성체 때 잔은 받을 수 없게 됨.
⚫ 1439년 플로렌스 공회 때 연옥이 교리로 확정됨
⚫ 1545년 트렌트 공회 때 교회의 전통도 성경과 동일한 권위로 인정됨
⚫ 1546년 트렌트 공회 때 외경도 성경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결정됨
⚫ 1560년 교황 피오 4세의 신조가 원래 신조 대신 공식 신조로 채택됨
⚫ 1854년 교황 피오 9세가 마리아의 무염시태(원죄 없이 잉태)를 선언함
⚫ 1864년 교황 피오 9세가 “유설표”를 공표하고 바티칸 공회가 인준함,
⚫ 1870년 바티칸 공회 믿음과 도덕적인 문제에 교황의 절대무오류성 선언.
⚫ 1950년 피오 12세가 마리아의 몽소승천 선언.
⚫ 1965년 교황 바오로 6세가 마리아를 “교회의 어머니”라 부름이외에도 로마 카톨릭 교회가 승인하지 않는 종교나 양심, 언론, 과학적 발견의 자유를 정죄했으며 교황이 세상 통치자들의 세속 권세 위에 권위를 가졌다고 인정함에 수많은 거짓 교리가 만들어졌음. (첨부한 <표>를 참조)
십자군 전쟁, 종교 재판 등이 모두 이 시대에 있었던 일입니다. 캐톨릭 교회사를 아는 사람들은 결코 캐톨릭이 될 수 없는지라 캐톨릭을 기독교로 오해하여 “나는 왜 기독교인(캐톨릭)이 아닌가?”(버트란트 러셀), 기독교 죄악사 등의 책들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이런 암흑시대에도 소수의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있었습니다. 아예 세속과 단절된 채 수도원으로 들어간 이들도 있었고 탄압과 박해를 피해 지하 동굴에 숨어서 신앙생활을 하는 성경 신자들도 있었습니다. 로마 캐톨릭은 이들을 이단으로 몰아 종교 재판을 통해 죽였고 이들에 대한 기록은 극히 적습니다. 우리는 폭스의 순교사나, 밀러(Miller)의 교회사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피흘린 믿음의 선배들의 발자취를 더듬어 볼 수 있을 뿐입니다. 로마는 결코 변하지 않는다는 말은 역사가 증명하는 진리입니다.
18절입니다. [두아디라에 있는 교회의 천사에게 쓰라. 불꽃 같은 눈과 정제된 놋 같은 발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이 이것들을 말하노라.](18).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두아디라에 있는 교회의 천사”는 두아디라 교회를 현현하는(나타내는) 천사로서 두아디라 교회를 일컫는 말입니다. 왕의 사신은 왕이 자신을 대신 보낸 사람이지만 왕을 예표, 현현하는 존재인 것과 같이 교회의 천사는 교회를 예표하고 현현하는 존재입니다. 정부는 자기 나라를 대변하는 대사관을 다른 나라에 파견합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천사는 교회의 목사, 감독, 장로 등의 실제 사역자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이 교회를 향해 자신을 “불꽃 같은 눈과 정제된 놋 같은 발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18)이라고 하십니다. 아가서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의 눈은 비둘기의 눈과 같고 신부의 눈 역시 비둘기의 눈입니다(아1:15, 4:1). 신랑이신 [그분의 눈은 물 많은 강가에 사는 비둘기의 눈 같아서 젖으로 씻은 것 같고 알맞게 박혔도다.](아5:12).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님의 눈은 슬픔과 눈물로 젖은 눈이었습니다. 그분은 슬픔의 사람이었고 고통과 질고에 익숙한 사람이었으며 강렬한 부르짖음과 눈물로 기도와 간구를 드리시는 분이셨습니다(히5:7). 그런데 본문에는 주님의 눈이 불꽃같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분의 왕좌가 맹렬한 불꽃같다(단7:9)는 말씀은 구약에서 이미 읽어 보셨을 것입니다.
다니엘서에 “그의 얼굴은 번개 모양 같으며 그의 눈은 등불 같고” (단10:6)란 말씀이 있습니다. 요한은 그분의 두 눈이 불꽃같다고 했는데(계1:14) 우리 주님께서 친히 자신을 표현하실 때도 동일하게 “불꽃같은 눈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십니다(계2:18).
주의 날 성령 안에서 요한이 본 주님의 모습은 복음서에 나타난 초림 때 예수님의 모습과 너무나 다릅니다. 지상 재림의 주님은 [그분의 눈은 불꽃같았고 그분의 머리 위에는 많은 왕관이 있었으며 또 그분께 기록된 한 이름이 있었으나 그분 밖에는 아무도 그것을 알지 못하더라.](계19:12). 했습니다.
불꽃같은 눈은 말 그대로 불이 타오르는 모양입니다. 대부분의 이교도 신상의 신들의 눈이 사람들과 달리 좌우로 열려 있지 않고 상하로 열려 있는 ‘불, 불꽃 모양’의 눈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런 눈을 가진 형상을 신이라 부르며 경배하지만 ‘불꽃같은 눈’을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이 계심을 모릅니다.
“정제된 놋 같은 발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18). 이 부분 역시 다니엘이 본 것과 같습니다. 다니엘은 “그의 팔과 발의 색깔은 연마한 놋 같으며”(단10:6)라고 했습니다. 정제된 놋이나 연마한 놋은 같은 것입니다. 요한이 처음에 주님을 보았을 때도 “그분의 발은 용광로에서 달군 듯한 정제된 놋 같으며......”(계1:15)라고 했는데 이 모습은 우리 주님이 심판하시는 주이심을 보여 줍니다. 나무나 돌이나 청동 조각의 우상들로 가득 찬 이교도들의 도시에서 크리스천들은 우리 주님의 발이 ‘정제된 놋’ 같으신 분이심을 알고 있습니다.
19절입니다. [내가 네 행위와 사랑과 섬김과 믿음과 네 인내와 네 행위를 알며 마지막 것이 처음 것보다 더 많음을 아노라.](계2:19). 주님은 두아디라 교회의 행위, 사랑, 섬김, 믿음, 인내, 행위를 아신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행위”는 두 번이나 반복하고 있습니다. 일꾼이 부지런히 일하는 것은 칭찬받아 마땅합니다. 때로 어린 형제들은 일(works)을 주님 자신보다 앞에 두기도 합니다. 일이 사람(형제)보다 더 중요할 때도 있습니다. 사역(일)을 우선하는 이런 자세는 아무 일을 하지 않는 것보다는 훨씬 좋습니다.
주님은 “내가 네 행위.......를 알며”(19) 여기에 사랑의 행위가 있습니다. 사랑(charity)은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일어나는 최상의 열매이며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선물입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며(롬13:10), 사랑은 형제를 세워주며(고전8:1), 완전하게 매는 띠입니다(골3:14).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고(벧전4:8) 두려움을 내어 쫓습니다(요일4:18). 주님은 두아디라 교회의 사랑을 아신다고 하십니다. 사랑이 없으면 우리는 무엇을 해도 아무 것도 아니며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섬김”(service)은 사랑으로 하는 일입니다. 성도들은 사랑으로 서로를 섬기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갈5:13). 하나님이 여러 가지 은혜의 선물을 주신 것은 그 선물로 서로를 섬기라고 주신 것입니다(벧전4:10). 두아디라 교회는 행위, 사랑, 섬김이 모두 다 있는 교회였습니다.
“믿음(faith)”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오는 것입니다(롬10:17). 믿음은 소망의 실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에 대한 영적인 반응입니다.
“인내”(Patience)는 소망 중에 믿고 오래 참는 가운데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한 뒤에 그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해 필요한 것이 인내입니다(히10:36). 인내는 믿음의 단련을 통해 이루어집니다(약1:3). 환난은 인내를 이룹니다(롬5:3). 성경은 “오직 인내를 완전히 이루라”(약1:4)고 말씀합니다.
자, 본문을 잘 보십시오. [마지막 것이 처음 것보다 더 많도다.](19).
“네 행위, 사랑, 섬김, 믿음, 인내, 네 행위”로 두 번의 행위가 나오는데 처음 행위와 나중 행위입니다. 처음 행위는 주님을 위해 뭔가를 했던 행위라면 나중 행위(마지막 행위)는 주님처럼 행하는 것, 주님을 통해서 일하는 행위입니다. 우리가 주를 위해서 일하는 것도 좋지만 주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일하시는 것은 더욱 좋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 일하는 것, 우리가 주님과 함께 일하는 것, 우리가 주님을 통해서 일하는 것, 주님께서 내 안에서 일하시는 것은 같아 보여도 그 결과나 열매는 전혀 다릅니다. 두아디라 교회는 영적 성숙, 성장을 통해 처음보다 나중 행위가 더 많았고 좋았습니다. 육신의 행위는 처음에 많다가 점점 식어지고 마침내 없어집니다. 믿음의 행위는 처음에는 적고 미약하지만 갈수록 점점 커지고 강해지고 많아집니다.
20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너를 책망할 것이 몇 가지 있으니 이는 네가 이세벨이라는 그 여자를 용납하기 때문이라. 그 여자가 자기를 여대언자라 하며 내 종들을 가르치고 꾀어 음행하게 하고 또 우상들에게 희생물로 바친 것들을 먹게 하는도다.](계2:20).
주님은 두아디라 교회의 행위, 사랑, 섬김, 믿음, 인내, 행위를 알고 칭찬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는 책망할 것도 있었는데 이세벨이란 그 여자(특정인)를 용납한 것입니다. 이세벨이란 그 여자는 성경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유명한 인물입니다.
이세벨은 아합 왕의 아내로서 시돈 사람들의 왕 엣바알의 딸인데 바알을 섬기며 경배하는 여자(왕상16:31)로서 이스라엘에 바알교를 수입하고 널리 보급했습니다. 그녀는 주의 대언자들을 끊어 버렸고(왕상18:4) 죽였습니다(왕상18:13). 결국 하나님께서는 예후를 왕으로 삼아 그녀를 죽이셨습니다.
두아디라 교회가 이세벨이란 그 여자를 용납했다는 것은 마치 이스라엘이 바알 종교를 용납하고 마침내 완전히 이교도 화 되어 버린 것과 같습니다. 이세벨이란 여자는 단순히 정치인이 아니라 바알과 하늘의 여왕을 숭배한 여자 대언자로 종교 지도자이기도 했습니다(왕상16:29-32).
◆ 우리는 여기서 잠깐 ‘이세벨이란 그 여자’와 관련하여 몇 가지 역사적 사실을 추적해 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이스라엘의 12 아들의 열두지파 중 단 지파는 가장 먼저 배교한 지파입니다. 창세기49:17절에서 야곱은 단을 일컬어 ‘뱀’이라고 말합니다. 신명기 33:22에서 모세는 단을 ‘사자 새끼’라고 합니다. 뱀과 사자는 마귀를 일컫는 말입니다.
사사기 17:10을 보십시오. “......나에게 아버지와 제사장이 되라.”(삿17:10). 아버지와 제사장이란 말에 주목하십시오. 장로, 감독, 제사장이 아니라 어떤 사람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종교가 탄생합니다. 미가의 집에서 레위 지파 중 한 사람을 데려다 ‘아버지와 제사장’으로 삼았는데 이 사람은 곧 한 지파의 ‘아버지와 제사장’이 됩니다.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조용히 하고 네 손을 네 입에 대라. 우리와 함께 가서 우리에게 아버지와 제사장이 되라. 네가 한 사람 집의 제사장이 되는 것이 더 낫겠느냐, 혹은 이스라엘 안의 한 가족 곧 한 지파의 제사장이 되는 것이 더 낫겠느냐? 하니](삿18:19). 단 지파는 한 젊은이를 자신들의 아버지와 제사장으로 삼았습니다. 이 아버지라 불린 사람은 우상들을 예배의 보조 도구로 사용합니다(삿18:20). 단 지파는 페니키아와 시돈에 정착 하게 되며(삿18:28), 거의 천년 동안 형상을 세워 우상 숭배를 합니다(삿18:30,31). 이세벨은 이곳 시돈 출신의 여자입니다.
오늘날 로마 캐톨릭은 이들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그들은 하늘의 여왕(마리아)에게 분향하고(렘44:17-19,25) 태양신 축제일(크리스마스)을 즐기고(렘10:1-5), 제사장을 아버지라 부릅니다. 성경은 [땅에 있는 어떤 자도 너희 아버지라 부르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한 분 곧 하늘에 계신 분이시니라.](마23:9)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이 한 마디로서 이 땅에 있는 캐톨릭 교회를 완전히 부정하셨습니다. 이 여인의 정체는 ‘음녀’로 계시록 17-18장에 잘 나옵니다. 두아디라 교회는 이세벨이란 그 여자를 용납했습니다.
다시 20절입니다. [......그 여자가 자기를 여대언자라 하며 내 종들을 가르치고 꾀어 음행하게 하고 또 우상들에게 희생물로 바친 것들을 먹게 하는도다.](20). 이세벨은 자신을 ‘여대언자’라고 했습니다. 성경에 여자 대언자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신약 성경에서도 몇몇 여대언자가 있습니다. 이를 빌미로 오늘날 개신교도들이 여자 목사를 세우기도 합니다. 누군가 자신을 가리켜 대언자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그 사람을 시험해 보아야 합니다. “감독은 반드시 책망 받을 것이 없고 한 아내의 남편이며......” (딤전3:2)
성경에는 거짓 대언자들의 출현에 대해 반복해서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때에 {주}께서 내게 이르시되, 대언자들이 내 이름으로 거짓을 대언하는도다. 내가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고 그들에게 명령하거나 그들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는데도 그들이 너희에게 거짓 환상 계시와 점술과 허무한 것과 자기 마음의 속이는 것을 대언하는도다.](렘14:14).
구약 시대에 그러했듯이 이 시대에도 수많은 거짓 대언자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들은 표적을 행함으로 자신이 참 대언자인 것처럼 인정받으려고 합니다. 그들은 성경을 가르침으로써 자신이 주의 종이니 성령의 인침을 받은 것처럼 주장합니다. 주님은 이런 거짓 대언자들에 대해 경고하셨습니다. [거짓 대언자들을 조심하라. 그들은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오지만 속은 약탈하는 이리니라.](마7:15). 거짓 대언자는 양의 옷을 입고 오지만 속은 약탈하는 이리입니다.
[많은 거짓 대언자가 일어나 많은 사람을 속일 것이며](마24:11). 거짓 대언자는 속이는 자입니다. 24,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대언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들과 이적들을 보여 할 수만 있으면 바로 그 선택 받은 자들을 속이리라.](마24:24). 거짓 대언자들의 주된 무기는 큰 표적들과 이적들입니다. 주의 말씀이 아닌 표적과 이적을 보여 주면서 믿으라고 하는 이들은 거짓 대언자들입니다. 오늘날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표적들을 더 좋아하고 따릅니다. 이는 마지막 때에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합니다.
(20). “내 종들을 가르치고 꾀어” 이세벨이란 그 여자는 두아디라 교회로 들어와 크리스천들을 가르쳤습니다. 이세벨이란 그 여자를 용납하는 것이 명백한 불법임은 성경 자체가 증언하고 있습니다. 마귀는 에덴동산에서부터 여자를 속이고 또 여자들을 이용하여 많은 사람들을 속입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던 솔로몬은 사랑하는 이방 여인들의 유혹에 의해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신들을 따랐습니다. 많은 믿는 남자들이 믿지 않는 여자를 아내로 얻게 되면 그 아내의 꼬임에 넘어가 믿음을 버리는 일은 흔한 일입니다.
여자들이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에 대해서 성경은 침묵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이 부분에 대한 분명한 교리, 주의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의 여자들은 교회들에서 잠잠히 있을지니 이는 말하는 것이 그들에게 허락되지 아니하였고 율법도 말하는 바와 같이 그들은 순종하도록 명령을 받았기 때문이라. 만일 그들이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들이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니라.](고전14:34-35).
신약교회에서 여자들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분명히 말씀합니다. 해석이 전혀 필요하지 않는 분명한 구절들입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진리가 아닙니다. 세상의 남녀평등, 여성의 인권신장, 여성의 지위 향상, 시대상황 변화 등이 주의 말씀을 바꾸거나 폐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여자 목사를 세우는 등의 일은 주님께 책망 받을 일입니다. 감독은 분명히 “한 아내의 남편”(딤전3:2, 딛1:6)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는 사람들의 편견이 아니라 주님의 명령입니다. [여자는 전적으로 복종하며 잠잠히 배울지니라. 더욱이 나는 여자가 가르치거나 남자에게 권위를 행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여자는 잠잠히 있을지니라.](딤전2:11-12).
벌써 20여 년 전의 일입니다. 제가 사랑하는 후배목사에게 “너희 교단에서는 여자목사를 안수하던데 이는 성경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 했더니 그 친구 하는 말이 “교계에 흐르는 추세가 다 그렇습니다. 이를 외면하면 목회하기 힘듭니다.” 목회가 누구를 위한 것이며 누구의 일입니까? 하나의 직업으로 먹고 살기 위해서 진리의 말씀을 버리는 것입니다.
(20) ‘내 종들’은 신약교회 성도들이 아니라 환란 성도들입니다. 만약 본문을 현 시대에 적용하자면 대부분의 캐톨릭 교회 교인들이 회개하지 아니하면 큰 환란 속에 던져질 것입니다. 몰몬교, 여호와의 증인, 안식교 등은 말할 것도 없고 수많은 사람들이 자칭 크리스천이라고 자부하지만 큰 환란 속으로 던져질 것입니다. 개신교회의 많은 이들이 구원 받지 못한 상태로 살다 회개하지 않음으로 큰 환란 속에 던져질 것입니다.
(20).“음행하게 하고 또 우상들에게 희생물로 바친 것들을 먹게 하는도다.”
자신을 여대언자라 하는 이세벨이란 그 여자는 성도들에게 무엇을 가르쳤습니까? 음행하게 했습니다. 우상들에게 희생물로 바친 것들을 먹게 했습니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서 행한 일과 똑같은 것입니다(14). 순서만 바뀌었습니다. 발람은 먼저 우상들에게 바친 희생물을 먹게 한 뒤에 음행하게 했지만 이세벨은 음행하게 하고 우상들에게 희생물로 바친 것들을 먹게 합니다.
사도들은 이 부분에 대해서 분명하게 가르쳤습니다. 할례를 행하거나 모세의 율법을 지키는 따위는 할 필요가 없는 것은 물론이고 복음을 듣고 믿은 이방인들이 지켜야 할 세 가지를 지정해 주었습니다. [믿는 이방인들에 관하여는 우리가 편지를 써서 결론을 내리되 그들이 그러한 것을 지키지 말고 다만 우상들에게 바친 것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피하라고 하였느니라, 하니](행21:25).
이세벨이란 그 여자는 이 결론의 말씀과는 전혀 다르게 가르치고 성도들을 꾀었습니다. 성경과 다르게 가르치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그가 누구이든 잘못 된 것이며 오류입니다. 우상들에게 바친 희생물(제사, 고사 음식 따위)에 대해서는 우리에게 지식이 있습니다(고전8:4, 10:19-20,28). 누가 우리에게 음식을 대접하고자 할 때, 이 음식은 우상들에게 바친 제물이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그 음식을 먹지 말아야 합니다.
(20). “음행하게 하고...” 현대 교회는 간음, 음행, 색욕 등에 대해 매우 관대합니다. 음행은 구약의 율법 뿐 아니라 신약에서 더욱 엄격히 금지됩니다. 구약의 율법은 몸에 관한 것이지만 신약은 마음에서 음욕을 품는 것조차 금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덧 자유연애, 혼전 섹스, 성인간의 상호 합의 아래 이루어지는 음행을 모두 ‘사랑’이라고 외칩니다. 그리스도인들조차도 혼전 동거나 결혼 전 임신을 “가장 좋은 혼수”라고 말하는 세상입니다. 이런 것들이 거짓 대언자들이 가르치고 꾀는 내용입니다.
영적으로 음행은 우상 숭배를 말합니다. 배교한 이스라엘을 향해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이 자기 조상들의 [하나님]께 범법하여 [하나님]께서 자기들 앞에서 멸하신 그 땅 백성의 신들을 따라 음행의 길을 갔으므로](대상5:25). 이스라엘이 다른 신들을 따르고 섬기는 것이 음행입니다.
성경은 성도들이 세상과 친구가 되는 것, 세상에 동화되고 일치되는 것, 세상을 사랑하는 것을 음행이라고 하며 그런 사람을 간음하는 남자들, 간음하는 여자들이라고 부르십니다. [너희 간음하는 남자들과 간음하는 여자들아, 세상과 친구 되는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인 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누구든지 세상의 친구가 되려는 자는 [하나님]의 원수니라.](약4:4).
이세벨이란 여자는 교회가 세상과 일치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교회는 세상으로 나아가고 세상은 교회 속으로 들어와서 서로 변화를 주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이 바로 “음행하게 하고”란 뜻입니다. 교회가 세상의 빛이 되고 본이 되어야 하는데 세상을 받아들이는 도를 넘어 세상을 앞장서서 리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세상과 일치하지 말라, 세상에 동화되지 말라, 세상과 친구가 되지 말라, 세상에 속하지 말라, 세상을 위해 기도하지 말라(요17:9),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크리스천과 세상은 십자가에 못 박히고 못 박는 관계입니다.
주님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한 것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나이다.](요17:16). 세상에서 불려냄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소속이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또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사악함 가운데 있음을 우리가 알며](요일5:19). 이세벨이란 그 여자가 성도들에게 가르치는 것, 꾀는 것을 우리는 말씀을 통해 분별하고 용납하지 말아야 합니다.
21절입니다. [내가 그녀에게 그녀의 음행을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나 그녀가 회개하지 아니하였으므로](계2:21). 주님은 이세벨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엘리야를 통해 누가 참 하나님인지를 알려 주셨습니다. 또한 그녀가 멸망할 것을 선포했습니다. 그런데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또 이세벨에 관하여도 {주}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개들이 이스르엘 성벽 옆에서 이세벨을 먹으리라.](왕상21:23). 대언자 엘리야를 통해 이세벨에 대한 심판이 선포되었지만 이세벨은 여전히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며 도리어 엘리야를 죽이려고 애썼습니다. 시간은 흘러 10년이 더 지나도 이세벨이 잘 먹고 잘 살았습니다. 그러다 예후가 일어나 혁명을 일으켰고 아합의 집을 완전히 멸해 버렸습니다.
이세벨은 심판이 없는 줄로 알거나 더딘 줄로 여겼겠지만 심판이 선포된 지 13년 째 예후가 왕궁에 들이 닥쳤습니다(왕하9:36,37). 내시들은 그녀를 창밖으로 던져 버렸고 그녀의 온 몸은 부서지고 개들이 와서 그녀의 사체를 핥았습니다. 주님은 음녀 이세벨, 여대언자 이세벨에게 13년이란 기간 동안 그녀의 음행을 회개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회개하지 않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오래 참고 회개할 기회를 주십니다. [[주]께서는 자신의 약속에 대해 어떤 사람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디지 아니하시며 오직 우리를 향해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모두 회개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3:9). 우리는 이 구절을 통해 구원 예정론이 얼마나 잘못된 교리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이세벨이란 여자에게 조차 회개할 기회를 주십니다. 그녀가 구원 받지 못한 것은 죄를 지어서가 아닙니다. 사악함과 불법을 많이 자행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미리 선택하지 않으셨거나 예정하지 않으셨기 때문도 아닙니다.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나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지옥에 떨어지는 모든 죄인들 역시 그러합니다. 선택받지 못해서, 예정의 은총을 입지 못해서 구원 받지 못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믿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기 때문에 구원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셔서 자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 주셨습니다. 주님은 회개하지 않는 도시들(벳새다 vs 두로와 시돈, 가버나움 vs 소돔과 고모라)을 꾸짖으셨습니다(마11:20). 주님은 “......그러나 너희가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그와 같이 멸망하리라.”(눅13:3,5)고 엄중히 경고하셨습니다. 큰 환란 때 역시 완악한 죄인들은 심각한 재앙을 받으면서도 회개하지 않습니다(계9:20,21, 16:9,11).
22절입니다. [보라, 내가 그녀를 침상 속으로 던질 것이요 그녀와 함께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자기 행실을 회개하지 아니하면 큰 환난 속으로 던질 것이며](계2:22).
“내가 그녀를 침상 속으로 던질 것이요.”(22)라고 하십니다. 지옥도 아니고 무덤도 아니며 큰 환란도 아니고 ‘침상속’에 던진다니 이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문맥상 분명히 심판을 집행하시는 것입니다. 침상은 일반적으로 잠을 자는 곳, 휴식을 취하는 곳을 나타내거나 부부 사이(잠자리)를 나타내는 말로 “잠자리(bed-침상)는 더럽히지 말아야 할지니”(히13:4). 하셨습니다.
그럼 본문에서 “침상”은 무슨 의미입니까? 침상에 누워서 내려오지 못한다고 하면 깊은 중병이 들렸다, 또는 죽었다는 말입니다. 침상은 질병으로 눕거나 죽음으로 눕는 곳입니다. 그렇다면 본문에서 주님은 이세벨을 질병이나 죽음으로 징벌하신다는 뜻입니다.
(22). “만일 자기 행실을 회개하지 아니하면 큰 환난 속으로 던질 것이며” 주님은 이세벨을 벌하실 뿐 아니라 그녀와 함께 간음한 자들도 벌하십니다. 주목하십시오. 재앙과 심판을 피하는 길은 ‘회개’하는 것뿐입니다.
“만일 자기 행실을 회개하지 아니하면...”(22) 주님께서는 합당한 징벌을 내리시는데 “큰 환란(대 환란)” 속에 던져 넣는다고 하십니다. 주님은 이세벨 그 여자를 침상에 던져 넣으시고 그녀의 자녀들을 사망으로 죽이시겠다고 하십니다. 신약 교회의 성도들이 큰 환란 속으로 던져진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큰 환란 전에 들림을 받고 이 땅에 거하지 않습니다.
23절입니다. [또 내가 사망으로 그녀의 자녀들을 죽이리니 그러면 모든 교회들이 나는 곧 속 중심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리라. 또 내가 너희 행위에 따라 너희 각 사람에게 주리라.](계2:23).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들이 있습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므로 너희 아비의 욕망들을 행하려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자였고 자기 안에 진리가 없으므로 진리 안에 거하지 아니하였으며 거짓말을 할 때에 자기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이기 때문이라.](요8:44).
주님은 하나님에게서 난 자와 마귀에게서 난 자를 분명히 구분하셨습니다. 크리스천은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난 자들입니다. 이것은 생명의 문제입니다. 불신자들은 마귀에게서 난 자들입니다. [이것에 의해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드러나나니 누구든지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며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도 그러하니라.](요일3:10).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 이것은 피부색이나 언어나 종교적 교파로 구분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내가 사망으로 그녀의 자녀들을 죽이겠다고 하셨는데 이는 문자 그대로 사실입니다. 심판의 집행을 통해 모든 교회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속 중심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 것입니다(23). 큰 환란이 시작되면 많은 사람들이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환난성도들은 주님으로부터 인을 받고 초자연적인 보호를 받습니다(계7:3).
전 3년 반 환란 때에 내려지는 많은 자연 재앙이 있지만 주의 환난 성도들은 보호를 받습니다(계9:4). 그들은 주의 심판이 집행되면서 음녀 이세벨의 자녀들이 사망으로 죽어나가는 것을 보며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 깊이 깨닫게 됩니다. 주님은 사람의 속 중심과 마음을 살피시는 분이십니다. [오 사악한 자들의 사악함은 끝내시되 의로운 자는 굳게 세우소서. 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마음과 속 중심을 시험하시나이다.](시7:9).
큰 환란 때 주님은 사악한 자의 사악함을 끝내십니다. [그러나, 오 의롭게 심판하시고 속 중심과 마음을 시험하시는 군대들의 {주}여, 내가 내 사정을 주께 드러냈사오니 주께서 그들에게 원수 갚으시는 것을 내가 보게 하소서.](렘11:20). 환란 때 의로운 자들은 주께서 원수 갚으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23). “또 내가 너희 행위에 따라 너희 각 사람에게 주리라.” 믿음에 따라 주는 것은 선물입니다. 행위에 따라 주는 것은 보상(삯)입니다. [보라, 내가 속히 가리니 내가 줄 보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할 행위대로 주리라.](계22:12). 모든 사람은 각자 자신의 행위에 따라 심판을 받고 결과에 따라 보상을 받습니다. 주님은 음녀에게 그녀의 행위에 따라 두 배로 갚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계18:6).
24절입니다. [그러나 내가 너희와 두아디라에 있는 남은 자들 즉 이 교리를 가지지 아니하고 그들이 말하는 대로 사탄의 깊은 곳을 알지 아니한 모든 자들에게 말하노니 내가 다른 어떤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리라.](계2:24). 두아디라 교회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귀의 자녀요, 그녀(이세벨)의 자녀들이었습니다. 그 중에 남은 자들이 있습니다. 역사는 언제나 소수의 남은 자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집니다. 주님은 다수를 기뻐하지 않으시고 남은 자들을 통해 일하십니다.
엘리야 시대의 7천명이 남은 자들의 예표입니다. [[하나님]의 대답이 그에게 무어라고 말하느냐? 내가 나를 위해 바알의 형상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 명을 남겨 두었노라, 하나니 그런즉 이와 같이 이 현 시대에도 은혜의 선택에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롬11:4-5). 주님은 이 시대에도 “남은 자가 있느니라.”고 하십니다. 구약에도 있었고 신약에도 있습니다. [이사야도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쳐 이르되, 비록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받으리라.] (롬9:27). 구원 받는 자가 남은 자입니다. 이들은 아주 적은 무리입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남은 자”란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은 남은 자가 아닙니다. [이것은 사람들 중에서 남은 자들과, 내 이름으로 불리는 모든 이방인들이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주]가 말하노라, 함과 같으니](행15:17). 성령께서 기록하신 말씀을 잘 보십시오. “남은 자들”(residue) (유대인들 중에 믿는 자)과 “모든 이방인들”로 구분합니다. 본문에서 “두아디라에 있는 남은 자들(residue)”이란 말은 두아디라 교회에서 이세벨의 교리를 가지지 아니하고 그들이 말하는 대로 사탄의 깊은 곳을 알지 아니한 모든 사람들입니다.
(24). “이 교리를 가지지 아니하고” 이세벨의 교리는 발람의 교리와 같습니다(14). 음행과 우상들에게 바쳐진 희생물을 먹는 것입니다. 이세벨의 교리는 혼합 종교, 대체 종교입니다.
(24). “사탄의 깊은 곳” 성경에는 사탄의 권세(행26:18), 사탄의 사자(고후12:7), 사탄의 활동들(살후2:9), 사탄의 회당인 자들(계2:9), 사탄의 자리(계2:13), 사탄의 천사들, 사탄의 사역자들이 나옵니다. 깊음(depth)은 사탄의 처소입니다. 군단 마귀들은 주님께서 자신들을 깊음 속으로 들어가라고 명령하지 말아 주실 것을 구했습니다(눅8:31). 깊음의 구렁은 천년 왕국 때 마귀가 묶여 있는 곳입니다.
높음이나 깊음(롬8:39). 깊음은 지옥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혹은, 누가 깊음 속으로 내려가겠느냐? 하고 말하지 말라, 하나니 (그것은 그리스도를 다시 죽은 자들로부터 위로 모셔 가려는 것이라.)](롬10:7). 두아디라의 남은 자들은 사탄의 깊은 곳과 상관없습니다.
(24). “내가 어떤 다른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리라.” 주님은 성도들의 짐을 맡아 주시는 분이십니다. [네 짐을 {주}께 맡기라. 그러면 그분께서 너를 붙드시고 의로운 자가 흔들리는 것을 결코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시55:22). 여러분은 어떤 짐도 질 필요가 없습니다. 걱정, 근심, 염려, 일, 짐, 길을 모두 주님께 맡기십시오. 주님은 무엇이든지 맡아 주십니다. [네 길을 {주}께 맡기고 또한 그분을 신뢰하라. 그분께서 그것을 이루시고](시37:5).
욥은 말하기를, [나는 [하나님]께 구하겠고 내 사정을 [하나님]께 맡기리라.] (욥5:8)고 합니다. 잠언에는 [네 일들을 {주}께 맡기라. 그러면 네가 생각하는 것들이 굳게 세워지리라.](잠16:3)고 말합니다. 우리 주님은 무엇이든지 맡아 주십니다. 그리고 혼에 쉼을 주십니다. 주께서 기록하신 말씀을 진심으로 믿고 맡기는 자에게 평안이 옵니다.
오늘날 어떤 형제들은 교회가 맡긴 여러 가지 책무, 직무, 일들로 인해서 고생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세상의 짐을 벗으러 왔다가 더 많은 짐을 진 채 혼이 괴로운 분들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쉼을 얻어야 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모든 자들아, 너희는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너희 위에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가 너희 혼을 위한 안식을 찾으리니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우니라, 하시니라.](마11:28-30).
우리는 주님께 나아가 모든 짐을 주님께 맡기고 겸손히 주님의 멍에를 메고자 할 때 주 안에서 안식을 누리고 평강을 누리며 주님으로부터 새 힘을 얻습니다. 이것이 크리스천들에게 주어진 주님의 은혜입니다. 주님은 두아디라의 남은 자들에게 어떤 다른 짐도 지우지 않으셨습니다.
25절입니다. [다만 너희가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내가 갈 때까지 굳게 붙잡으라.](계2:25).
성도들이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것들, 우리에게 주신 것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건전한 교리의 틀을 붙들어야 합니다(딤후1:13). 우리는 가르침을 받은 전통들을 붙들어야 합니다(살후2:15). 우리는 믿음과 선한 양심을 붙들어야 합니다(딤전1:19). 우리는 선한 것을 굳게 붙들어야 합니다(롬12:9, 살전5:21).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붙들어야 합니다(딤전6:12). 이미 가지고 있는 것들을 굳게 붙들라는 말씀에 따라 우리가 붙들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말씀입니다. [자기가 가르침을 받은 대로 신실한 말씀을 굳게 붙들어야 하리니 이것은 그가 반박하는 자들을 건전한 교리로 권면하고 논박할 수 있게 하려 함이라.](딛1:9).
다음은 신앙 고백입니다. [그런즉 위대하신 대제사장 곧 하늘들로 들어가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계시니 우리가 우리의 신앙 고백을 굳게 붙들자.](히4:14). (참조-히3:6)
26절입니다. [이기고 나의 행위를 끝까지 지키는 자에게는 내가 민족들을 다스릴 권능을 주리니],
신약 시대에 이기는 자들은 이미 여러 차례 말씀드린 대로 믿음으로 구원 받은 성도들을 말합니다(요한4:4, 5:4,5). 큰 환란 때 이기는 자들은 계시록 15:2에 나오는 짐승의 표를 받지 않고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긴 사람들입니다. 환난에서 끝까지 견디는 자들(마24:13), 증언을 지키고, 믿음을 부인하지 아니한 자들, 죽기까지 신실한 자들입니다.
주목하십시오. “나의 행위(my works)를 끝까지 지키는 자에게는...”(26)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행위는 주님의 일, 주님의 사역입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민족들을 다스릴 권능을 주겠다고 하십니다. 천년 동안 주님과 함께 이 땅을 통치하는 권능입니다(계20:4). 큰 환란 때 이기는 자에게 주시는 복 중의 하나가 왕국에서의 ‘통치권’입니다.
27절입니다. [그가 쇠막대기로 그들을 다스리며 토기장이의 그릇같이 부수어 산산조각 내리라. 이것은 마치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받은 권능으로 하는 것과 같으니라.](계2:27).
이 구절은 시편의 [네가 그들을 쇠막대기로 부수며 토기장이의 그릇같이 내던져 산산조각 내리라, 하셨도다.](시2:9)란 말씀의 인용인데 본문 27에서 “그가”의 그(he)는 예수님이 아니라 남은(이긴) 자들입니다. 이기고 끝까지 지키는 자가 받는 통치권은 주님께서 아버지에게 받은 것과 같은 통치권입니다. 이 구절은 계시록 12:5절의 사내아이입니다.
[그녀가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이 아이는 쇠막대기로 모든 민족들을 다스릴 자더라. 그녀의 아이가 하나님께로 채여 올라가 그분의 왕좌에 이르더라.](계12:5). (그녀=이스라엘, 그녀의 아이=그녀(여자)나 사내아이에 관해서는 계12장에서 자세히 다룹니다.)
계시록 7:4에서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지파에서 이마 안에 인 맞은 하나님의 종 144,000명이 계12:5에서 올라가고 계14:1,3절에서 주님과 함께 시온산 위에 서 있습니다. 이들이 받게 될 통치권은 주님께서 받으신 것과 같은 것“철장으로 모든 민족들을 다스릴 자”라고 말합니다.
[그분의 입에서 예리한 검이 나오므로 그분께서 그 검으로 민족들을 치시고 친히 쇠막대기로 그들을 다스리시며 또 친히 [전능자]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즙 틀을 밟으시리라.](계19:15).
주님이 쇠막대기로 다스리는 것과 같이 이기는 성도들 역시 철장으로 민족들을 다스립니다.
28절입니다. [또 내가 그에게 새벽별을 주리라.](계2:28). 새벽별(단수)은 예수님 자신입니다(민24:17, 마2:2). [나 예수는 내 천사를 보내어 교회들 안에서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언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후손이요 빛나는 새벽별이니라.](계22:16).
새벽별들(복수)이라고 하면 천사들입니다(욥38:7). 하나님의 별들(사14:13)-천사들. 성경에서 별들이 천사를 나타내는 것은 자주 볼 수 있고 우리 주님께서 일곱별은 일곱 교회의 천사(계1:2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루시퍼는 새벽별이 아니라 아침의 아들입니다. [오 아침의 아들 루시퍼야, 네가 어찌 하늘에서 떨어졌는가! 민족들을 약하게 한 자야, 네가 어찌 끊어져 땅바닥으로 떨어졌는가!](사14:
이 구절에서 루시퍼란 단어를 제거하고 “아침의 아들”을 “계명성”으로(개역, 개정) 샛별(공동번역), 새벽별(표준, 현대어)로 번역한 것은 우리 주님과 사탄을 동일한 인물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1:19에 따르면 샛별은 우리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이기는 자들에게 쇠막대기로 다스릴 권능 뿐 아니라 새벽별을 주신다고 하십니다. 주님은 크리스천들에게는 이미 자신을 주셨습니다(갈1:4, 2:20, 엡5:25, 딤전2:6, 딛2:14). 환란 성도들은 이기고 끝까지 행위를 지키는 자들이 받는 최대의 선물은 새벽별이신 주님 자신입니다.
29절입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께서 교회들에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지어다.](계2:29). 우리는 이렇게 선포한 모든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 말씀들은 오늘날 교회들에서 다 들어야 할 성령의 음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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