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일을 꾀할 때 내세우는 마땅한 이유나 구실을 대의명분이라고 한다. 자신의 정당성을 뒷받침하기 위해 사람들은 대의명분을 내세운다. 그리고 그 대의명분을 내세워 자기들과 함께하지 않는 사람들을 비난하고 변절자로 몰아간다. 대의에 따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대의란 겉으로 내세우는 명분일 뿐 깊이 들어가 보면 또 다른 속내가 숨어있다. 이렇게 이 대의명분에 의해 어떤 사람은 충신이 되고 어떤 사람은 변절자 혹은 배신자로 낙인찍히기도 한다. 하지만 누가 진정한 충신이고 누가 진정한 변절자인지는 시간이 가고 역사가 흐른 후에 새롭게 재평가되거나 뒤바뀌기도 한다.
조선의 역사 가운데 변절자의 대명사처럼 따라오는 이름이 있는데 신숙주라는 인물이다. 1456년(세조 2년) 6월 2일, 명나라 사신을 환영하는 연회장에서 세조와 세자를 제거하고 단종 복위를 계획했던 사육신들의 계획이 발각됐다. 박팽년·성삼문·이개·하위지·유성원·유응부 이 여섯 명을 死六臣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죽지는 않았지만, 세조의 권력에 항거하는 뜻으로 공직을 거부하고 낙향한 여섯 사람 김시습(金時習)·원호(元昊)·이맹전(李孟專)·조려(趙旅)·성담수(成聃壽)·남효온(南孝溫)을 生六臣이라고 부른다.
사건 후 세종과 문종의 총애를 입었고, 사육신 성삼문과 형제보다 두터운 우정을 나눴지만, 생육신에도 사육신에도 들지 못한 신숙주는 배신의 아이콘으로 두고두고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사람이 되었다. 오죽했으면 사람들이 나물 가운데 잘 쉬고 잘 변하는 나물을 숙주나물이라고 이름을 붙였겠는가?
그렇다면 과연 사육신과 생육신에게는 대의명분이 있고 신숙주에게는 대의도 명분도 없었을까? 500년이 지난 2024년의 눈으로 조선시대의 대의명분을 논하는 것이 어불성설(語不成說) 일 수 있으나 오늘날에 와서 신숙주를 변절자 혹은 배신자로 욕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이유는 그가 남긴 훗날의 공과 흔적이 너무 크고 위대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노래하며 처절한 죽음의 길을 걸었던 성삼문이나 세상 꼴 보기 싫다고 낙향해서 한양을 바라보며 비난과 조소로 한 세월을 살다 간 생육신들과 변절자의 오명을 뒤집어쓰고 살아남은 신숙주 가운데 누가 진정한 조선의 충신이며 대의명분을 가진 사람일까? 사육신, 생육신들이 그들의 임금에게 충신이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겠으나 어심이 천심이 아니라 민심이 천심이라고 믿었던 조상들의 생각으로 따져 봤을 때 신숙주에게 대의명분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당대에 일본과 명나라를 오가며 유능한 외교를 펼침으로 조선이라는 나라를 동북아의 책임 있는 나라로 만들었고 나라와 백성들을 위해 자신이 꿈꿨던 개혁과제들을 차근차근 실천해 갔다. 그는 “백성을 번거롭게 하지 않은 것은 인(仁)이요, 법을 어기지 않는 것은 의(義)요, 태만하지 않은 것은 근(勤)이요, 과감한 것은 민(敏)이다. 인의를 지키고 근면하게 행동하면 장차 무슨 일인들 이루지 못하겠는가?” 라며 그때까지 완전하게 구축되지 못한 조선의 법과 제도의 빈틈을 보완하고 시행규칙들을 정비해 나갔다. 그가 따르고 자신의 충심을 바치고자 했던 그의 임금은 단순히 한 사람 왕이 아니라 백성들이었다. 그의 정치는 백성을 위한 정치였다.
아무리 장렬하고 비장하다고 해도 그 비장한 결의가 국민들을 버리고 백성들을 번거롭게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인(仁)도 아니요, 의(義)도 아니며 더더욱 명분도 없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대의명분을 내세우면서 데모하고 투쟁을 외치지만 그들이 정작 있어야 할 자리는 백성들의 곁이며 백성과 함께 투쟁할 때 진정한 승리, 참된 목적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이겨도 이긴 것이 아니며, 결국은 사람들로부터 버림받고 외면받게 될 것이다.
백성과 함께한 싸움은 고난이 길어도 실패한 적이 없지만, 백성을 버리고 승리를 쟁취한 싸움은 마침내 몰락의 길에서 끝이 난다는 것을 우리는 역사에서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