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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신년 제2강
너는 외쳐 노래할지어다
말씀/사54:1-17
요절/사54:1 “잉태하지 못하며 출산하지 못한 너는 노래할지어다. 산고를 겪지 못한 너는 외쳐 노래할지어다. 이는 홀로 된 여인의 자식이 남편 있는 자의 자식보다 많음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
오늘날 우리 주변을 보면 현실은 힘들어 보입니다. 나라경제도 정치현실도 힘들고 취준생들은 취업도 힘듭니다. 우리가 섬기는 캠퍼스의 영적현실도 시간이 갈수록 척박해져만 갑니다. 학생들은 성경공부에 대한 소원이 없고 이 세상의 죄악은 날로 깊어만 갑니다. 이런 가운데 우리가 목자라고 하지만 마음이 좁아지기 쉽고 비전이나 도전을 꿈꾸기 쉽지 않습니다. 이사야 시대에도 비슷했습니다. 이사야는 남유다 웃시야 왕 때부터 히스기야 왕 때까지 섬긴 선지자입니다(사1:1). 이 시기 북이스라엘은 극심한 영적타락으로 앗수르에게 멸망당했습니다. 남유다는 그래도 하나님을 섬기는 왕들이 몇몇 있어 나라의 명맥은 유지했지만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 때부터는 극도의 타락의 길로 행하였습니다. 이사야는 남유다도 결국 멸망하여 많은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는 환상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100여년 후, 망국의 한을 품고 포로생활을 하게 될 후손들에게 이사야서 53장 말씀으로 고난 받는 종 예수님으로 인한 구속의 은혜를 예언하고 선포합니다. 그리고 54장에서는 수치를 당하는 이스라엘에게 ‘너는 외쳐 노래할지어다!’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동일한 말씀을 주십니다. 이 시간 우리가 외쳐 노래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인지 깨닫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Ⅰ. 외쳐 노래할지어다 (1-10)
1절을 보십시오. “잉태하지 못하며 출산하지 못한 너는 노래할지어다. 산고를 겪지 못한 너는 외쳐 노래할지어다. 이는 홀로 된 여인의 자식이 남편 있는 자의 자식보다 많음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 아담이 범죄 하고 나서 하나님께서 하와에게 주신 사명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수고하여 자식을 낳으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 순종하여 모든 여인들은 때가 되면 결혼을 하고 자녀를 낳습니다. 고통이 있지만 자신의 몸을 통해 태어난 아이를 보는 것은 여인에게 있어 특별한 기쁨입니다.
그런데 결혼 후 자녀가 생기지 않으면 여인들은 깊은 상실감과 좌절, 고독감을 갖게 됩니다. 이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만약 여인이 임신하지 못하면 아무런 소망이 없었습니다. 여인들은 자녀들이 있어야 남편의 사랑을 받고 또 아이들이 있어야 땅을 상속받을 수 있었습니다. 또 아이가 없는 것은 하나님께 저주 받은 것으로 인식이 되기도 했습니다. 본문에서도 이 여인은 버려져 홀로 과부가 되어 이제는 나이도 많습니다. 자식도 없고 남편도 없습니다. 그런 여인에게 ‘너는 외쳐 노래할지어다’ 이사야는 말합니다. 원어성경을 직역하면 ‘강렬한 기쁨으로 크게 노래하라’입니다.
그러면 홀로 된 여인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외쳐 노래할 수 있습니까?
첫째, 현실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이 있을 때 노래할 수 있습니다. 버림받아 홀로 된 과부에게 ‘너는 강렬한 기쁨으로 크게 노래하라’는 것은 잔인한 말 같습니다. 사실 사람은 기쁨의 원천이 있어야 흥이 나고 노래가 나옵니다. 그래도 이 여인이 노래한다면 어떤 노래하겠습니까? 술에 취해 슬픔에 젖어 인생을 한탄하는 노래일 것입니다. 하지만 1b절을 보십시오. “이는 홀로 된 여인의 자식이 남편 있는 자의 자식보다 많음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 이사야는 놀라운 선포를 하고 있습니다. 남편 없는 과부의 자식이 남편 있는 자의 자식보다 많아진다고 합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이 여인이 외간 남자와 눈이 맞아 많은 자식을 낳게 된다는 말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이 약속은 누가 하신 것입니까? 사람이 한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이 불쌍한 여인에게 역사하셔서 그녀의 자손들이 많아지게 하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임신하지 못하고 버림받아 홀로 된 이 여인은 바벨론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을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 결혼한 여인 같았습니다. 성경에서 자주 하나님과 이스라엘을 부부관계로 표현합니다. 하나님은 아내 된 이스라엘을 통해서 하늘의 뭇별과 같이 허다하게 많은 자녀들을 허락하시고 풍성한 모든 은혜를 누리기를 원하셨습니다. 그것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입니다. 그런데 아내 된 이스라엘이 우상숭배로 온갖 간음죄를 저질렀습니다. 당시 아내가 잘못이 없는데 이혼당하는 경우에는 이혼증서를 써주면 그 여인은 재혼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내가 간음죄를 범하면 돌로 쳐 죽이거나 남편에게 버림받는 것이 일반적인 일이었습니다. 간음죄로 버림받은 여인은 더러운 여인으로 낙인찍혀 다른 남자와 재혼도 할 수 없었습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의 모습이 남편에게 쫓겨난 여인과 같았습니다. 이런 이스라엘에게는 아무런 희망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외쳐 노래하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복음사역이 처한 현실도 이와 같습니다. 캠퍼스 복음역사도 과거에 비하면 갈수록 척박해져 가는 것을 우리는 많이 느낍니다. 1년 내내 수고하고 헌신해도 옛날처럼 많은 열매가 잘 맺히지 않습니다. 양들이 오더라도 제자로 성장하는 것이 더디고 시간이 지나면 취업이나 졸업 후 고향으로 돌아가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이런 현실이 몇 년째 반복되어 오다보니 역사를 섬겨도 좀처럼 흥이 나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더 나아가 임신하지 못하고 출산하지 못하는 본문의 여인처럼 슬픔과 깊은 상실감이 마음속에 찾아옵니다. 목자로서 존재감이 사라지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외쳐 노래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하나님은 외쳐 노래하라 말씀하십니다. 남편 없는 자의 자식이 남편 있는 자의 자식들보다 많아지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 남편 있는 자는 바벨론이나 앗수르 같은 강대국들을 말합니다. 지금 버림받아 홀로 된 여인 같은 이스라엘이 바벨론이나 앗수르 같은 강대국들보다 오히려 더 번성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우리 삶의 현실이나 복음역사의 현실 상황에 적용해보고자 할 때 믿음이 없이는 어려운 것 같습니다. 말씀은 이렇게 주어졌어도 주어진 현실은 당장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쳐 노래하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앞으로 그렇게 해주실 것을 믿음으로 바라보고 소망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논리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일어나지 않은 것을 일어날 것으로 믿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은 말씀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여기 실상이라는 말은 ‘실체, 또는 바라는 그 자체’를 말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약속, 그리고 미래에 있을 일을 내가 이미 소유하고 이루어진 것처럼 믿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실제로는 아직 소유를 못했는데, 실제로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실제로는 이루어질 기미가 보이질 않는데, 소유한 것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믿는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볼 때 그것은 꿈에 불과하고 미래에 그대로 될지 안 될지도 모릅니다. 당장 눈에 보이지도 않습니다. 뭔가가 잡히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실재요, 현실’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 현실은 바벨론의 포로생활입니다. 그런데 실상은 포로에서 회복되는 것입니다. 현실과 실상 사이에 너무나도 큰 괴리감이 있습니다. 현실은 눈에 보이는데 실상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눈에 보인다면 그것은 실상이 아닙니다. 실상이 보이지 않으니까 낙심하고 절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믿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으로, 보이는 현실과 보이지 않는 실상의 간격을 메꾸는 사람입니다.
믿음은 미래에 이뤄질 일을 절망적인 현실로 당겨 와서 현실에 지배당하지 않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바벨론의 포로 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향한 이 믿음이 없으면 그들은 화려한 바벨론 문화와 우상의 종이 되어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더 이상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 바벨론 신들의 종이요, 바벨론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현실을 외면할 수는 없지만 현실이 우리 삶을 지배하도록 해서는 안됩니다. 현실이 우리 삶을 지배하도록 놔두면 우리는 현실의 종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현실을 우상처럼 섬기며 살아가는 현실주의자가 될 것입니다. 그런 자들에게는 신앙생활의 신비가 사라집니다. 영적인 하나님의 세계가 살아집니다. 현실에 굴복해서 살기 때문입니다. 말씀에 대한 믿음으로 미래를 꿈꾸지 못하는 사람은 현실세계에서 물질과 육신의 종 된 삶이 전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실에 묻혀 살기보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야겠습니다. 그럴 때 외쳐 노래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사람은 고난의 현실 속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노래만 하는 자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말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고 하고 입으로는 외쳐 노래하지만 실제 행동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사람은 사실 믿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것을 믿고 구체적으로 역사 환경을 만들고 예비하는 사람입니다.
2절을 보십시오. “네 장막터를 넓히며 네 처소의 휘장을 아끼지 말고 널리 펴되 너의 줄을 길게 하며 너의 말뚝을 견고히 할지어다.” 장막터를 넓히는 것, 휘장을 아끼지 말고 펴는 것, 줄을 길게 하는 것, 말뚝을 견고히 하는 것, 여기에 나타난 4가지 일들의 공통점은 많은 사람들을 수용할 공간을 만들라는 것입니다. 자식들이 많아지면 집이 좁아 넓은 집으로 이사 갈 준비를 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현재 버림받은 여인과 같은 현실입니다. 자식도 낳지 못하고 남편도 없는 그런 여인의 모습과도 같은 처지가 바로 이스라엘의 현실 상황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이렇게 하라는 것입니까? 속도 모르고 하나님이 너무하는 것 아닙니까?
3절을 보십시오. “이는 네가 좌우로 퍼지며 네 자손은 열방을 얻으며 황폐한 성읍들을 사람 살 곳이 되게 할 것임이라.” 여기 ‘퍼진다’는 말씀의 원래 의미는 ‘깨뜨리고 나온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마치 세포분열을 연상하게 합니다. 세포가 분열되듯 순식간에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될 것이고 온 땅을 뒤덮어 열방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재 주어진 어려운 현실상황만 바라보지 말고 적극적으로 장막의 공간을 넓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시편 81편 10b절은 말씀합니다.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하나님이 가득 채우실 것을 믿고 입을 넓게 벌리라는 것입니다. 물론 현실의 삶을 무시하면서 살기는 힘듭니다. 하지만 현실에 매여 살아가는 것은 믿음의 삶이 아닙니다. 자꾸 현실만 바라보다보면 하나님이 주신 비전들은 축소되고 제한을 받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신뢰하고 적극적으로 입을 넓게 벌리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현재 이스라엘의 현실상황은 비전을 가질 수 있는 형편이 아닙니다. 포로 된 그들이 무슨 꿈을 꿀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비전을 갖고 퍼져나가고 정복하고 개척하는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손발이 오그라들고 우리의 처지가 이런데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우리 형편, 우리 상황, 우리 현실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하기 쉽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말씀이고, 현실은 현실이다’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무한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기준으로 마음대로 축소하거나 재단해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어려운 현실 속에 우리의 마음과 생각이 갇혀버린데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비록 포로로 살지만 그 포로라는 현실상황 속에 갇히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포로 되었지만,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이요, ‘거룩한 나라, 제사장 백성’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해야 할 민족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좌우로 퍼지며 열방을 얻을 것을 믿고 적극적으로 마음의 생각과 깊이를 넓혀야 되는 것입니다. 실제적인 장막공간을 넓히기 전에 먼저 좁아지고 움츠려든 우리 마음의 공간을 넓혀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꿈 꿀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허황된 꿈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붙드는데서 생겨난 확실한 비전입니다.
요즘 우리가 자주 이야기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UBF와 한국교회 내에서 자주 들리는 말이 무엇입니까? 복음역사가 어렵다, 제자양성이 힘들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꾸 우리의 비전을 현실에 맞추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더 퍼져나갈 것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우리는 현실에 맞게 비전을 축소해 버립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가 처한 현실상황이나 형편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제한하고 있지는 않은가 돌아봐야겠습니다. 그러고 있다면 회개해야 합니다. 제가 이런 마음이 있음을 회개합니다. 우리 모두가 새해에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굳게 믿고 좁아진 마음의 공간부터 넓히고 실제 행동으로 순종하므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몰려올 양들을 섬길 준비를 하고 복음의 터전을 넓히며 힘써 전도하는 한 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현실보다 주님에 대한 영원한 자비와 크신 긍휼 때문에 노래할 수 있습니다. 바벨론 포로생활을 하고 있는 이스라엘은 여전히 두려움 가운데 있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4절을 보십시오.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라. 놀라지 말라. 네가 부끄러움을 보지 아니하리라. 네가 네 젊었을 때의 수치를 잊겠고 과부 때의 치욕을 다시 기억함이 없으리니”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푸실 것이기 때문에 더 이상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제 그들이 다시는 수치를 당하지 아니할 것이요, 부끄러움을 보지 않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이렇게 수치와 부끄러움을 당하게 된 것은 그들이 과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홀로 된 과부가 되었다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받았음을 말합니다.
그러면 그들이 왜 이렇게 비참한 과부가 되었을까요? 출애굽기 24장에 보면,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이스라엘과 결혼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말씀과 율례를 선포하시고 이스라엘에게 그대로 준행하겠는가 물으십니다. 이것은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결혼서약입니다. 이스라엘은 그 서약을 충실히 지키겠다고 맹세합니다. 그리고 짐승의 피를 뿌리고 언약을 맺습니다. 그런데 신실하지 못한 이스라엘은 출애굽기 32장에 가면, 하나님을 버리고 금송아지 우상을 숭배하며 간음하기 시작합니다. 결혼서약한지 겨우 40일이 조금 지났을 때입니다. 이스라엘은 마치 결혼예식 치르고 신혼여행 가서 다른 남자와 눈이 맞아 간음하고 있는 여인 같습니다. 한 번 우상에 눈이 돌아간 이스라엘은 시도 때도 없이 우상에게 마음을 빼앗겨 간음합니다. 그들은 신실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하나님은 진노로 그들에게서 눈을 돌려버립니다. 그리고 그들을 버리셨습니다. 그랬을 때 이스라엘은 홀로 된 과부가 되었습니다. 결국 바벨론에 멸망당해 포로가 됩니다.
6-8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이런 이스라엘을 다시 부르십니다. 큰 긍휼로 이스라엘을 다시 모으십니다. 영원한 자비로 이스라엘을 긍휼히 여기십니다. 이를 누가 합니까? 5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의 지으신 이요, 이스라엘의 참 남편이요, 이스라엘의 구속자요, 거룩하신 이요, 온 땅의 하나님이요,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죄로 인해 한번 버림받아 본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죄와 연약함으로 인해 또 버림 받을까봐 얼마나 불안하겠습니까? 9,10절을 보십시오. 그런데 하나님은 이것까지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노아의 홍수 심판 이후 다시는 홍수로 심판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신 것처럼 이스라엘에게도 이처럼 맹세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산들이 움직이고 언덕들이 옮겨져도 하나님의 영원한 자비와 크신 긍휼은 변함이 없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은 흔들림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로써 정죄 받고 심판 받을 것 같은 두려움을 제거해 주시고 우리 마음에 평강을 주십니다.
지난 한 해를 돌아볼 때 우리의 모습은 어떠했습니까? 우리의 죄와 연약함으로 인해 본문의 이스라엘처럼 살아오지는 않았습니까? 하나님과 관계성이 파괴되어 온갖 죄의 수치와 모욕 속에 살아오지는 않았습니까?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으로 살지는 않았습니까? 하나님은 새해를 시작하는 우리에게 영원한 자비와 크신 긍휼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나아오라 말씀하십니다. 우리를 화평으로 부르시고 모으시고 평강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와의 관계를 회복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고 하나님의 영원하신 자비와 크신 긍휼을 의지해 나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Ⅱ. 이스라엘의 영광 (11-17)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현재 이스라엘의 형편은 어떠합니까? 11a절을 보십시오. ‘곤고하며 광풍에 요동하여 안위를 받지 못한 자’입니다. 포로생활로 인해 그들의 마음은 마치 광풍에 요동하는 파도처럼 어디에도 정붙이지 못하고 위로를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그들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회복시키는지 보십시오. 11b,12절을 보십시오. “보라! 내가 화려한 채색으로 네 돌 사이에 더하며 청옥으로 네 기초를 쌓으며 홍보석으로 네 성벽을 지으며 석류석으로 네 성문을 만들고 네 지경을 다 보석으로 꾸밀 것이며” 이것은 계시록 21장에 나오는 어린양의 신부요, 아내인 교회를 상징하는 예루살렘 성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어린 양의 아내를 보여주신다고 하시면서 12가지 보석으로 꾸민 예루살렘 성을 보여주십니다. 얼마나 반짝이고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장차 보석처럼 아주 화려하고 가치 있는 존재로 하나님이 직접 변화시키시고 회복시키실 것이라는 말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들을 보석처럼 만드십니다. 현재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이스라엘의 모습은 형편없어 보이지만, 회복되면 아주 영광스럽게 변화될 것입니다. 또한 성으로 묘사된 것은 하나님이 친히 그들을 지키시고 보호자가 되어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13,14절을 보십시오. 과거에는 두려움과 고통이 그들의 마음을 지배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들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교훈을 받고 큰 평안이 임하게 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나 이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이런 그들에게는 더 이상 두려움이 가까이 오지 못합니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의가 그들을 견고하게 세우기 때문입니다. 죄로 가득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의롭게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때 그들에게는 큰 평안이 임하게 됩니다.
15-17절도 보십시오. 이스라엘을 공격하고자 대적자들이 모일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누구든지 이스라엘을 공격하면 망하게 될 거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전쟁을 주관하셔서 대적을 패하게 하십니다. 또한 대적자들은 이스라엘을 송사하여 분쟁을 일으키고자 하지만 이런 대적들의 송사도 무익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변호자가 되시고 이스라엘을 의롭다고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이, 택한 이스라엘을 얼마나 사랑하시는가 알 수 있습니다. 이 모든 일들은 53장에 예언된 고난 받는 종,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지는 일들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하면서 하나님 앞에 어떤 존재들인가를 잊고 살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현재 내 모습만 생각하면 나라는 존재가 그렇게 귀하게 보이지 않은 것처럼 생각됩니다. 매번 죄로 넘어지고 깨지다보니 쓸모없는 존재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면 우리는 말할 수 없이 귀한 존재들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보석들입니다. 하나님께서 화려하게 색칠하여 빛을 내는 보석들입니다. 이 모든 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으로 이루어진 놀라운 은혜입니다. 이 은혜가 우리의 모든 죄와 연약함을 능히 이길 수 있게 합니다.
결론적으로, 어려운 현실일지라도 우리에게는 외쳐 노래할 수 있는 기쁨의 근원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입니다. 불안하고 평안이 없기 쉬운 이 시대, 우리가 어려운 현실에 눌리기보다 주의 약속의 말씀과 영원한 자비와 크신 긍휼을 의지해 외쳐 노래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주의 약속의 말씀에 의지해 사역을 준비하고 양들을 섬길 준비를 하고 복음의 터전을 넓히고 힘써 전도하는 한해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