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객 바뀌면 생사와 열반 꿈 같아
청허휴정 스님의 시문 ‘삼몽사’
주객 한 몸 돼 몽중일이라 노래
꿈 실체 아니기에 미망이자 미몽
주를 알면 부처 놀이 하다 불사
강릉 청학사 종무소. 글쓴이 석정 이재병(石丁 李財秉 1946~ ).
主人夢說客 客夢說主人
주인몽설객 객몽설주인
今說二夢客 亦是夢中人
금설이몽객 역시몽중인
(주인은 나그네와 꿈을 이야기하고/ 나그네는 주인에게 꿈 이야기를 말하네./ 지금 꿈을 말하는 두 나그네여/ 이 역시 꿈속의 사람들이지.)
삼몽시(三夢詩)로 널리 알려진 이 시의 원제는 삼몽사(三夢詞)다. 조선 중기 청허휴정(1520~1604) 스님의 시문이다. 스님은 임진왜란이 일어나 나라가 풍전등화처럼 어려울 때 선조가 내린 팔도십육종도총섭이라는 직첩을 받아 73세의 노구를 무릅쓰고 승병장으로 활약하였다. 세간에는 서산대사로 알려진 고승이며 묘향산 보현사 원적암에서 입적하셨다.
들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서산대사가 길을 가다가 주막집 툇마루에 앉아 쉬게 되었는데 안쪽에서 어느 두 사람이 주고받는 꿈 이야기를 듣고 즉석에서 지은 시다. 그러므로 삼몽사는 세 사람의 꿈 이야기라는 뜻이다. 좌담하는 두 나그네와 더불어 이를 듣고 시를 지은 서산대사를 포함하여 세 명이 된다. 시문은 격조 높게 문장이 흐르므로 그 내막을 골똘히 파악하는 지혜가 있어야 시흥(詩興)이 일어난다. 내용으로 먼저 주(主)와 객(客)을 나누어 놓고, 객(客)을 이끌어 들여 이를 빗대어 주가 객이 되고, 객이 주가 되다가 결국 주와 객이 한 몸이 되어 모두가 몽중의 일이라고 노래하기 때문이다. 시는 ‘청허당집(淸虛堂集)’, ‘동사열전(東師列傳)’, ‘대동영선(大東詠選)’ 등에 실려 있다.
인생사에 있어서 주인은 누구이고 길손은 누구인가? 삼계는 주인이 없기에 머무르다 가는 것이므로 객(客)이 되기에 이를 삼계여박(三界旅泊)이라 하기도 한다. 그러나 중생은 집착심이 강하여 마치 어린아이가 꼬챙이로 줄을 그어서 자기 것이라고 여기듯 중생의 일들이 몽중사(夢中事)가 되는 것이다. 성인은 취한 바 없이 취하여 삼계의 주인이 되기에 부처님을 삼계주(三界主)라 한다.
나그네가 주인에게 이야기함이라고 하여 주에서 객으로 슬쩍 문장을 바꾸었다. 그러나 주객이 바뀌었다고 해서 문사(文詞)의 흐름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이러나저러나 꿈속의 일들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헛것을 보고 헛것에 속아 집착하는 것이 꿈속의 일들이다. 이를 허망하다고 하여 진망(塵妄)이라고 한다. 또 이를 모르고 헤매므로 미혹(迷惑)하다고 하는 것이다.
꿈속의 일들을 말하는 두 나그네는 곧 우리의 모습이다. 꿈은 실체가 아니기에 미망(迷妄)이며 꿈에 빗대어 말하면 미몽(迷夢)이다. 까닭에 범부는 미혹된 꿈으로 인해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만 알고 보면 지금 이순간도 생로병사와 성주괴공은 늘 이어지고 있다. 따라서 나그네가 주인으로 바뀌게 되면 생사와 열반이 간밤의 꿈과 같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는 법이다. 인생사 주(主)를 알지 못하면 객유(客遊)하다가 객사(客死)하고, 주(主)를 알면 주인공이 되기에 만물과 더불어 하나가 되어 부처 놀이를 하다가 불사(佛死)하는 것이다.
서산대사의 ‘각몽(覺夢)’이라는 시를보면 ‘한단침구(邯鄲枕具)를 높이 베고 도를 구하고자 성(城)을 순례하였으나 깨어나 보니 한바탕 꿈이었다네. 기울어 가는 달만 누각에 밝게 떠 있음(高臥邯鄲枕 周流百十城 遽然開一夢 殘月半摟明)’이라고 하였다.
꿈속의 사람들은 꿈을 말하지만 각몽(覺夢)하면 주가 객 노릇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법화경’에서는 불자(佛子)의 아들인 줄 모르고 가난한 비렁뱅이인 궁자(窮子)로 살지 말라는 것이다.
법상 스님 김해 정암사 주지 bbs465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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