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비토벌 작전
1. 개요
국군과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퇴로가 차단된 패잔병들이 지방공비들과 합세하여 호남지역과 경북 내륙지역에서 아군의 병차선 차단, 식량 약탈, 관공서 습격, 살인, 방화 등 온갖 만행을자행하였다.
이에 군이 '50.10월 중순부터 11월 말까지 대대적인 소탕작으로 일부 공비만 지리산으로 도두하였을 뿐 대부분 소탕되었다.
그런데 '51. 1월초에 중공군의 신정공세로 제천남쪽으로 진출했던 인민군, 특히 안동으로 진출한 인민군 제10사단 패잔병들이 주변 사악으로 도주하여 지방공비들과 합류하면서 부터 이들에 의한 후방지역 교란활동이 재연되기 시작하였다.
2. 작전 경과
가. 호남지역 소탕전
(1) 개요
중공군의 참전으로 지리산을 중심으로 백운산, 덕유산, 회문산, 불갑산, 화학산, 일대의 은거한 공비들이 '51. 1월 말에 이르러 대대적인 조직을 완료하고 유격활동을 기도하게 된다.
이들은 2월 8일 인민군 창설 기념일을 계기로 지하조직을 강화하고 살인, 방화, 약탈, 등 만행을 자행하면서 치안을 교란하고 2월 중순부터는 100명 이상이 대규모 병력으로 집단적으로 출물하였다.
이에 따라 이 지역의 소탕작전을 전개해온 국군 제11사단(사단장 최덕신 준장)은 제9연대를 전남, 제13연대를 전북, 제20연대를 지리산 부근에 두고 있었으며, 배속된 일부 경찰 및 청년방위대가 주보급로와 통신망 확보에 임무를 부여받고 있으면서 공비 소탕작전을 벌이게 된다.
(2)작전 경과
(가) 호남지역 게릴라 형성과정
1950. 7월 초 한강을 도하한 북한군은 온양-예산-장항-군산을 경유하여 광주와 목포를 점령한다는 계획으로 7월 11일 공주-대전 축선으로 남진하던 북한군 제6사단을 호남지역을로 우회시키는 명려에 따라 13일 예산을 출발하여 공주 금강을 건너 호남지역에 진입하여 10여 일 만에 호남지역을 장악했다.
북한군의 호남지역 남하계획을 접한 육군본부는 시급히 국군 제5사단을 재편성하여 서해안지구 전투사령부를 설치하였다. 그러나 기간 병력이 대부분 전방으로 차출된 상황에서 잔여병력과 신병, 그리고 학도병으로 편성된 서해안지구 전투사령부는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을 대항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서해안지구 전투사령부는 7월 22일 장성지구에서 퇴각하고 23일 광주에서 퇴각하여 26일 여수를 거쳐 부산으로 향했다.
이렇게 되자 북한군은 조선노동당의 지역당 조직과 인민위원회의 복구 작업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이러한 당조직의 재건은 북한정권이 점령지역에서 가장 역점을 두고 진행한 사업이었다. 이를 위해 조선 노동당 중앙위원회는 월북하여 북한에서 교육받은 대부분 이전에 남로당원으로 활동하던 인물들이다.
북한군 점령지역 내에서의 당조직 체계는 당중앙위원회(평양)-당중앙위원회 서울지도부(서울)-서울시 및 각도당위원회-시.군당위원회-읍.면당위원회-리.동 세포로 조직을 강화하고 시.군당위원회에눈 도당학교, 읍.면당위원회에는 대규모 직장세포, 리.동 세포에는 소규모 직장세포로 인원을 확충하였다. 각 도당학교에서는 약 100명 가량을 수용해 1주일간 단기 강습을 실시한 후 당원으로 배출하였다. 당 간부의 인선은 대부분 중앙당 지시에 이해 이루어졌으며 군당까지도 중앙당에서 당책을 임명하였다.
이에 따라 군인민위원회는 108개 균에 3,878명, 면인민위원회는 1,186개 면에 22,314명, 리인민위원회는 13,654개 리에 77,716명이였다.
당시 인민위원회 선거에서는 북한에서 파견돈 공작원들이 상당수 선출되어 실권을 행사하는 서지장직을 맡고 지역출신자들이 위원장직을 맡았다.
이와 동시에 전남 서남해안의 도서지역에도 인민위원회가 결성된다. 이 도서지역의 인민위원회는 내륙의 인민위원회와는 또 다른 구성상의 특징을 보였다. 그것은 도소지역 인민위원회가 전적으로 토착 좌익세력에 의해 형성 되었다는 점이다. 당시 북한군 정규군 주 단 한 명도 도소지역에 정식 퍄견된 적이 없으며, 지역 출신의 "게릴라" 또한 인민위원회 구성에 직접 관여한 흔적이 없었다.
인민위원회의 복구와 함께 민청, 농민동맹, 부녀동맹 등 옛 남로당 산하조직이 복원되고 북한군 지원을 위한 조국보위후원회도 결성되었다.
이렇듯 당조직과 인민위원회의 구성이 1950년 7월 말경 완료되자 8월부터는 우익인사에 대한 철저한 검거령이 내려졌다. 그 대상에는 낙오된 군경이나 우익정당 및 단체의 임원, 재산가 등이 포함되었다.
이러한 우익인사에 대한 검거와 탄압은 북한 내무성 산하의 경찰조직인 정치보위부와 북한군 점령지역의 주민들로 구성된 자위대가 담당하였다.
정치보위부에서는 북한에서 교육된 요원들을 시,도,군 단위가지 파견하여 도에는 내무성 지도부, 시.군에는 내무서를 설치하고 면 단위에는 그 분소를 설치하였다.
이 내무서와 자위대(혹은 치안대)에 의해서, 상부에서 내려온 대상자 선정기준과 그들의 자의적 판단에 따라 우익인사 등을 검거하여 인민재판이나 즉결처분 등의 형태로 학살을 자행하게 된다.
일례로 전북 옥구에서는 9월 27일~29일 사이에 소위 반동분자 및 그 가족 574명을 학살하였다. 전남 광주에서는 광주형무소에 수감된 2,000명 중 500여 명이 북한군 후퇴시에 학살한다. 목포에서는 산전동에 있던 구형무소 목포역에 있던 미곡 창고 등에 감금된 1,000여 명중 300명 이상이 학살되고, 무안에서는 우익 인사로 분류된 80여 명이 불에 타 죽기도 한다
가-1 : 국군 제11사단 창설경과
1950년 9월 이후에 유엔군과 국군의 총반격으로 북으로 전선이 올라가자 퇴로가 차단된 북한군의 패잔병이 후방 산악지역에서 지역 게릴라와 합세하여 아군의 병참선을 습격하고 전투근므지원 시설을 파괴하는 등 위협이 증가되었다.
그 당시에 미 제8군은 원활한 북진작전을 위해 군예비로 후방지역에서 활동하던 미 제9군단을 청천강 전선에 투입하게 된다. 이에 육군은 '50. 10월 15일 후방지역 작전을 전담할 제3군단을 창설하고 6개의 유격대대로 구성된 유격군사령부와 제2사단, 5사단, 그리고 신편 중인 제9사단과 제11사단을 배속하였다. 이중 호남지구 게릴라 토벌작전을 제11사단이 전담하게 된다.
제11사단(사단장 준장 최덕신)은 '50. 9. 25일부로 편성을 완료하고 육본 명에 따라 '50. 10. 10일 대구를 출발하여 10. 14일 남원에 도착하였다. 당시 제11사단은 제9연대(김희준 대령), 제13연대(유흥수 대령), 제20연대(박기병 대령)를 비롯하여 제3,5,6,7,8경비대대 등 5개의 경비대대를 배속받았다.
제9연대는 9월 30일 대구에서 총병력 2,979명으로 창설되고, 제13연대는 9월 26일 진해에서 3,000명으로 창설되었다. 제20연대는 9월 25일 삼랑진에서 제6훈련소를 개편하여 창설한 후에 10월 1일 제주도 제5훈련소로부터 장교 87명, 사병 1,500명을 보충받았다.
이렇게 하여 호남지구 공비토벌작전 임무를 부여받은 사단은 제9연대가 전남에, 제13연대가 전북에, 제20연대가 지리산지구에 분산 배치되었다. 배속된 경비대대와 경찰, 그리고 청년방위대는 주보급로 및 주요시설 경계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게릴라들의 주요활동은 적이 후퇴하고 있을 당시는 산악지역에 은거하여 있다가 중공군의 압로강 도하 시기에 맞추어 아군이 후퇴하게 되자 지역별 연대를 이루며 약탈, 방화, 기습 등의 활동을 전개하게 된다. 그 한 일례로 1월 16일 약 800명의 게릴라가 광양읍을 공격하여 경찰관 4명과 민간인 11명이 죽고, 같은 날 군산에서는 미 공병대대 4명이 습격으로 전사한다. 22일에는 약 300명의 게릴라가 정읍 운암발전소를 공격하게 된다.
그 당시 주한미군군사고문관 정보보고에 의하면 1월 20일 유엔 공군이 게릴라들의 활동 근거지인 전남 장흥의 유치면 일대에 항공 폭격을 가하여 511명의 게릴라가 사살되고, 제11사단의 지상작전으로 123명이 추가 사살되었고, 1월 31일에는 회문산 일대에서 총 429명을 사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가-1-1 : 작전 경과
제9연대가 1월 초순 지리산 남동부의 내외공리와 덕산 일대에서 활동중인 약 700명의 공비들을 추격하자 이들이 지리산으로 도주하였으며 35명을 사살하고 70여 명을 생포하였다. 지리산으로 도주한 이들은 2월 초에 지리산 북동부 함양 마천면 가흥리, 산청군 냉동면 사동, 함양 유리에 나타나 13일간의 투격으로 12명을 사살하고 180명을 생포하여 이 지역은 대부분 소탕되었다.
한편 담양, 순창, 화순, 장성, 나주 일대에서 공비 토발작전 중인 제20연대는 회문산에 1,350여 명의 공비집단이 거점을 확보하고 준동한다는 첩보를 입수하여 2월 13일부터 대대적인 소탕작전으로 이들을 재기불능 상태로 만들었으며, 2월 20일 함평 불갑산에 공비 350명을 포착, 섬멸하였다. 이들의 일부가 영광 대청산으로 잠입하자 3월 3일 격퇴하고 회문산작전을 완료하였다.
제13연대는 정읍 칠보, 운암발전소를 경찰과 합동으로 경계하였고 2월 하순 공비활동이 감소하자 대전으로 이동히였다.
한동안 뜸하던 공비들의 활동이 3월 중순부터 다시 활발해졌다. 이 지역 일대에 공비는 약 23,000여 명으로 추정되었다.
공비들의 활동은 주로 제9연대 지역으로 3월 13일 화순 백아산에 160여 명이 출몰하여 74명을 사살하고 21명을 생포하였다.
3월 17일에는 화학산 일대에 잠복중인 공비 250여 명을 식별하여 86명 사살에 16명을 생포하였다. 3월 22일에는 공비 500여 명이 순천을 급습한다는 제보에 긴급 출동하여 시가전을 통해 이들을 격퇴하였다.
제11사단은 '50. 10. 4일부터 실시한 공비토벌 임무를 4월 6일자로 제8사단에 인계하고 전방으로 투입된다. 기간동안 공비 사살 1,950명(추정), 생포 및 귀순 2,178명이고 전사는 531명, 실종 85명, 부상 843명이었다.
세칭 거창사건도 동 작전기간 중에 일어났다. '51. 2. 10~11일 간에 거창 신원에서 제9연대 제3대대가 신원지서의 협조를 받아 공비들과 내통했다고 판단되는 주민들을 집단으로 처형한 사건이다. 이에 관련된 지휘자들은 국회조사단의 현지 조사를 통하여 의법 처리 되었다.
한편 육군본부는 거창사건으로 사기가 저하된 제11사단을2월 횡성지구전투 이후에 대구에서 재편성한 제8사단과 교대시켰다. 제8사단의 주력은 4월 3일 전주로 이동하여 제1경비대대, 제18전투경찰대대, 충남 경찰토벌대, 청년방위대 제153지대를 배속받아 금산, 정읍, 부안지구에서, 제16연대는 진주로 이동하여 제2경비대대를 배속받아 백운산과 중산리 일대에서 공비토벌 작전을 시작하게 된다.
최영희 사단장(준장)은 대둔산에 은거지를 둔 1,380여 명의 충남 빨치산 소속 공비들이 논산 금산지역에 출몰하자 제21연대 1대대, 공병대대, 제18전투경찰 대대, 충남 경찰토벌대를 투입하여 4월 16일부터 대둔산, 운암산, 원등산 지역에서 토벌작전을 수행하였다.
잠시 소강상태를 보이던 공비들이 5월로 접어들어 국사봉 ,회문산일대에서 준동하여 5월 4일 국사봉과 회문산을 포위하여 1,200여 명의 공비들을 일망타진하게 되며 그 일부가 백양산, 내장산, 변산반도로 분산 도주하였다.
한편 진주로 이동한 제16연대는 거창, 산청, 하동에 배치하여 덕유산, 지리산, 백운산지역 공비를 토벌하였다.
가-2 : 제8사단의 작전 경과
국군 제8사단(사단장 최영희 준장)은 '51. 2월 횡성지구에서 중공군의 기습으로 사단이 와해되어 대구로 이동하여 전력을 보강한 후 육본 직할로 후방경계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사단은 '51. 4. 3일 대구에서 전주로 이동하여 4. 6일 제11사단과 임무교대하였다. 사단은 4월 16일 금산지구에서 게릴라 토발작전을 시작으로 5. 11일까지 금산, 국사봉, 부안 등지에서 작전을 수행하게 된다.
제21연대는 4월 16일 사단 공병대대와 논산 벌곡 662고지(대둔산 동쪽)와 그 남쪽 외일양리에서 게릴라 100명을 격퇴한다. 17일부터는 제18전투경찰대대(차일혁 경감)와 대둔산 일대를 공격하고 사단 공병대대는 원등산과 운암산으로 도주한 게릴라 250여 명을 추격하였다.
4월 19일 금산지구전투를 종료한 사단은 5월 4일 지휘소를 시산리(국사봉 북쪽 5km)에 설치하고 제10연대 제1대대, 사단 공병대대, 제1경비대대(대위 강차완), 제18전투경찰대가 투입되어 국사봉 장군봉, 내장산, 전북도당 유격대 사령부가 있다는 호문산과 여분산, 백학산 등에서 410명의 게릴라를 사살하고 573명을 생포하였다고 기록된다.
5월 10일부터는 부안지구 전투사령부를 설치하고 백련리 변산 주변에서 87명을 사살하고 17명을 생포하고 임무를 종료한다.
제8사단은 4월 15일부터 5월 15일까지 1개월 동안 호남지구 공비토벌 작전에서 사살 535명, 생포 624명의 전과를 올린 반면 전사 12명, 부상 21명의 피해를 입었다.
이 무렵 중공군의 계속적인 압박(중공군 4월공세와 5월공세)으로 전선 상황이 긴박함에 따라 사단은 명에 의거 5월 19일 충북 제천으로 이동한 후 전선에 투입되었다. 따라서 공비들은 다시 산속에 은거한 채 활동하기에 용이한 녹음기를 기다리며 재편성의 시간적 여유를 확보하게 되었다.
나. 태백산지역 소탕전
(1) 개요
태백산지구 게릴라 토벌작전은 '51. 2. 13일부터 4월 8일까지 국군 제2사단이 태백산지역에서 북한군 제10사단 패잔병과 남파 유격대를 섬멸한 작전이다
태백산지구 공비들은 '50. 12월 말부터 동부 산악지형을 따라 침투한 인민군 제10사단 패잔병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들은 '51. 1월 중순 태백산맥을 연하는 안동, 의성까지 남하하였으나 아군의 공격으로 퇴로가 차단되어 철수가 불가하게 되자 주변 산악지역에 거점을 확보하고 게릴라부대로 전환하였다.
이들은 이미 남한 후방에서 행동 중인 남부군, 경북도당의 안동 영덕, 영주, 봉화군당 유격대 등과 합세하여 태백산, 일월산, 속리산을 위시하여 형제봉 보현산, 동대산을 연하는 산악 일대에서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이에 따라 국군은 지난 중공군의 신정공세에서 피해를 입고 미 제10군단의 예비가 되어 풍기에서 정비 중인 국군 제2사단을 육본 직할로 전환시켜 2월 13일 안동으로 이동시켰다.
제2사단은 육군 전방 지휘소로부터 제5, 6, 7경비대대, 국민방위군 제1사단 제1연대, 전투경찰 2개 대대를 배속받아 1개월 동안 영천-포항, 영천-안동, 안동-영덕간의 주보급로를 확보하면서 보현산 일대의 적 제10사단의 잔적을 소탕하게 된다.
(2) 작전 경과
사단장 함병선 준장은 2월 16일 제31연대 안동-영주-단양 간의 주보급로를 경비하고 제17, 제32연대는 보현산 일대의 공비를 소탕하도록 했다. 3월 1일 제31연대가 일월산 남쪽의 장갈령을 차단하여 새벽에 북상 중인 적 1,500여 명을 기습하여 많은 피해를 주었다. 이 무렵 보현산 일대의 제17, 32연대도 일원산 남쪽으로 이동하여 적을 포위하여 400명과 800명으로 나누어 이 일대를 통과하려했던 이들을 일월산-통고산으로 추격하여 사살 460명, 포로 40명을 획득하였다. 반면 사단은 일월산 소탕작전을 지휘하던 제31연대장 박노규 대령과 제3대대장 이오렬 중령이 전사하는 등 전사 4명 부상 25명의 손실을 입는다
인민군 제10사단이 분산하여 도주 함으로서 이 일대의 공비토벌 작전이 일단락되는 듯하였으나 북한이 3월 초순에 유격전에 능숙한 11,700여 명으로 편성한 제1지대와 제3지대를 다시 이곳에 남파하였다.
이들은 후일 판명된 바에 의하면 적 제1, 3지대는 '50. 11월 초에 맹산에서 인민군 직할 3개 여단으로(2,500명)으로 창설된 후 11월 동부전선의 인님군 제2군단의 엄호하에 양구-인제-오대산으로 침투 중에 정선 북쪽에서 제2여단이 괴멸되어 제1, 3여단으로 재편성하였다. 읻ㄹ은 단대호를 조선 인민군유격대 제1, 3지대로 개칭하여 주앙당의 직접 통제하에 팔공산에 거점을 확보할 목적으로 침투하였다.
이에 따라 육군은 3월 14일 봉화군 소천면 일대의 인민군 제10사단의 추격임무는 제1군단에 배속 중인 국군 제9사단에 인계하고 제2사단이 제1, 3지대 격멸에 주력하게 된다.
사단장은 20일 제17연대는 통고산 일대의 적 제1지대를, 제32연대는 양구동에서 적 제3지대를 격멸하고, 제31연대는 안동-영주-풍기-단양 간의 도로를 경계하도록 명령하였다.
제17연대는 태백산에서 오미산을 경유하여 남하하는 적 400여 명을 발견하여 통고산, 오미산, 석포리일대에서 정밀 탐색하였고, 이 적을 추격하여 정선 동쪽 고양산까지 추격하여 26일 고양산과 낙동리 일대에서 제1지대 주력을 격멸하였다.
적 3지대 격멸에 나선 제32연대는 18일 새벽 배속된 제7경비대대가 영양 남서쪽 양구동 일대 정찰 중에 808고지에서 적 제3지대를 발견하여 대대장 강영훈 소령은 야간 공격으로 적 25명을 사살하고 7명을 포로로 하였다.
연대장은 제1대대를 신령, 제3대대는 군위를 경계토록 하고 제2대대는 삼의동으로 이동하여 격멸토록 하였다. 적은 제7경비대에 기습을 당하여 남쪽의 포도산으로 잠입하였다. 연대가 이들을 추격하는 동안 배속된 국민 방위군 제3연대도명동산을 공격하여 제3지대 참모장과 제1중대장을 사살하였다.
이들은 명동산 남족에서 350명으로 재편성하여 구양동 서쪽의 주산으로 이동하였다. 이로써 이들은 대구 팔공산 점령을 포기하고 금장산-통고산으로 북상 철수 하는 것으로 판단되었다.
연대는 국민방위군 제3연대, 제7경비 대대와 주산의 공비들을 격멸하는 작전을 전개하였으며 적은 150여 명으로 통고산-오미산-연화산을 따라 북상도주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제1단계 작전을 종료하였다.
이 후 사단은 3월 30일부터 4월 8일까지 제17연대를 주축으로 제2단계 작전을 전개하여 통고산 북쪽의 평전 지구에서 120병을 사살, 36명을 포로로 하고 작전을 종료 하였다.
3. 유해발굴 위한 탐사 및 탐문 결과
가. 회문산과 불갑산, 장흥 유치면 공비토벌 숫자의 진실성여부
유치면(511명, 123명 사살), 회문산(429명 사살) : 405페이지), 불갑산 350명 섬멸, 제11사단이 '51.1.1~4.6까지 6,921명 사살
나. 정선 고양산에서 사살됐다는 제주도 4.3사건의 주범 간첩 김달삼의 진실공방
다. 일월산과 통고산, 주산의 전투 흔적
------------
라. 원등산 일대의 전투 흔적
마. 국군 제8사단의 공비토벌 작전간 전사 12명의 허구
화순 이양초등학교 뒷산의 국군 전사
제8사단은 4월 15일부터 5월 15일까지 1개월 동안 호남지구 공비토벌 작전에서 사살 535명, 생포 624명의 전과를 올린 반면 전사 12명, 부상 21명의 피해를 입었다
바. 국군 제11사단의 오명
제11사단은 '50. 10. 4일부터 실시한 공비토벌 임무를 4월 6일자로 제8사단에 인계하고 전방으로 투입된다. 기간동안 공비 사살 1,950명(추정), 생포 및 귀순 2,178명이고 전사는 531명, 실종 85명, 부상 843명이었다.
세칭 거창사건도 동 작전기간 중에 일어났다. '51. 2. 10~11일 간에 거창 신원에서 제9연대 제3대대가 신원지서의 협조를 받아 공비들과 내통했다고 판단되는 주민들을 집단으로 처형한 사건이다. 이에 관련된 지휘자들은 국회조사단의 현지 조사를 통하여 의법 처리 되었다
아. 진실규명 범국민위원회의 민간인 피해 현황에 왜 북한군이나 지역 프락치에의한 피해 현황이 별로 조사되지 않은 이윤ㄴ 무엇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