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통신 1/190903]인사 드립니다
이제야 생활칼럼 제목을 바꾸어 첫선을 보입니다. ‘뫼루니통신’ 마지막회를 보니 7월 31일자 19회더군요. 8월 한 달, 삼복더위에 제 생가(生家)인 고향집 본채를 대대적으로 고쳤습니다. 추석연휴가 지나면 사랑채를 고칠 것입니다. 동네 끝집 대문과 도로변 앞 담장을 허무니, 전망이 ‘말할 수도’ 없이 좋습니다. ‘들판 뷰(field view)'와 남쪽 야산의 묵은 소나무군(群)은 아, 아, 우리의 정원(garden)이 되었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져 마냥 행복하기만 합니다. 저의 40년 로망(roman)이 이뤄졌습니다.
그동안 되지 못한 글을 이러저러한 ‘통신(通信)’이라는 이름으로 여러분의 눈을 어지럽혔습니다. 연천(경기도)통신, 오목교(목동)통신, 너더리(판교)통신, 신너더리통신, 뫼루니(판교)통신 등이 그것입니다. 거개 108회로 끝을 맺었지요. 드디어, 마침내 ‘찬샘통신’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인터넷을 깔았거든요. 찬샘은 ‘찰 냉(冷) 샘 천(泉)’으로 제 마을이름입니다. 임실군 오수면(둔남면에서 개칭) 봉천리 냉천마을. 예전엔 마을을 일제의 영향으로 부락(部落)으로 불렸지요. 봉천리는 봉산마을과 냉천마을을 합한 행정지명입니다. 아래 첨부한 글을 읽어보시면 알겠지만, 원님이 지어줬다는 마을이름. 그 찬샘은 복개되어 찾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제 고향마을의 ‘전설(傳說)’을 첨부하는 것으로 ‘찬샘통신 1회’를 대신하겠습니다. 2009년 6월 17일에 썼더군요. 10년만에 제 ‘소원(所願)’이 이루어진 셈이라고나 할까요. 종종 글소식 올리겠습니다. 가을입니다. ‘덜도 더도 말고 딱 이만큼만’ 민족의 명절 추석(秋夕)이 코 앞에 다가왔군요. 우리 친구들, 모두 모두 건강하고 즐거우시기를 빕니다.
우천 최영록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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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티재 아래 내 고향의 전설
어느 시인은 자기 고향의 칠월을 ‘마을의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린다’고 했지만 어찌 시인의 고향만 그러겠는가. 제가 태어나고 스무 살까지 자란 고향 전북 임실의 한 귀퉁이 ‘봉천’하고도 ‘냉천’마을도 전설 한두 개쯤은 있으리라 싶었다. 복분자를 따던 아버지가 갑자기 “넷째야, 우리 동네 내력을 알려주랴”한다. “좋지요. 무슨 전설이 있어요?” “아먼(아무렴). 내가 쬐깐혔을 때 어른들헌티 들은 얘기가 요새 불쑥 생각이 났다” “그게 뭔데요?” “동네 이름이 왜 냉천(冷泉)이냐먼 지금은 시암(우물)을 시멘트로 덮어버렸지만 그 물이 무척 찼다. 어느날 원님이 지나다 목을 추기면서 냉천이라고 했다지. 진안군에 풍혈(風穴)이 있는 곳도 마을이름이 냉천이야” “그거야 그렇지요.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김이 모락모락 날 정도로 따수었어요. 여름에는 들에 갔다오면서 등멱을 자주 하고 겨울에는 냉수마찰도 했는데요. 복개한 것 생각하면 아까워요”
“글고 저 뒷산 중턱쯤 가면 너럭바위 하나가 누워 있는데, 그게 뒤지(뒤주)바위여. 바위 밑에 쌀을 보관해 놓았다는 거시여. 근디 우리집 뒷논에 저 바위 좀 봐라. 저게 등(등불)바위거든. 원래는 그 옆에 그보다 두세 배 큰 바위가 짜란히(나란히) 있었대. 그걸을 일본놈들이 남포로 쪼아갖고 신작로 낼 때 썼나 봐. 글고 동네 입구에 쬐그맣게 서있는 바위 알지? 고게 ‘괴바우’(고양이바위)여. 그 근방을 ‘괴바굴’이라고 허자녀. 동네 뒷산에 엄청나게 크고 늙은 쥐가 한 마리 있었나 봐. 그 쥐가 뒤주바위에 쌀을 다 파먹고 슬금슬금 마을을 향해 밑으로 먹을 것 없나 하고 내려온단 말이지. 그래서 생긴 사자성어가 ‘노서하전’(老鼠下田)이여. 늙은 쥐가 밭으로 내려온다는 뜻이것지. 그러니까 고양이바위가 눈을 부릅뜨고 못내려오게 지키고 있는데, 언제나 등바위가 불을 환하게 밝혀줬다는 거시여. 그리서 마을에 평화와 안녕이 대대로 지켜져 내려왔다는 거시여. 우리논이 괴바우 옆에 있었잖아. 내가 논을 갈다 보면서 실제 봤는데, 괴바우 밑에 큰 송판(松板)이 있었어. ‘수송천년’(水松千年)이라는 말처럼 물 먹은 소나무는 천년을 간다고 허지. 아마도 그 바위 밑이 수렁이었나봐. 그렁개 송판으로 바위를 괴어(받혀) 놓았것지” “야, 이거 굉장한 전설인데요. 근데 마을은 언제부터 생겼대요?” “글씨, 자세히는 몰라도 임진왜란 이후 함양 조씨(순창의 옛 이름인 옥천 조씨라고도 함)하고 진양 하씨가 맨먼저 들어왔다고 혀. 우리는 니 상할아버지가 터를 잡았으니 조씨․하씨 집성촌에 타성받이라고 설움도 많이 받았지. 니 할머니 친정인데도 말이여” “옛날에 저 뒷산 웬젱이에 절도 있었다면서요?” “긍개 지금도 절터는 있자녀. 나도 보지 못했으니 아조 옛날 일이것지” “지금은 몇 세대나 살아요?” “내가 40년 전에 동네일(이장)볼 때는 400명까지도 됐어. 지금은 30가구 50명이나 될까. 우리 동네뿐만 아니라 농촌마을이 다 찌그러들어버렸지”
임실에서 오수로 이어지는, 산중턱을 깎아 만든 신작로(新作路)는 1920년경에 만든 듯 합니다. 10여km 되는 산길이지만 S자 코스가 47개가 있다고 하여 말치재(마흔 일곱)라고 합니다. 봉화산(실제 봉수대가 있어 초딩시절 소풍가던 곳입니다) 밑의 한적한 마을이 제 고향입니다.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 마을이지요. 앞에는 진안과 임실 성수를 거쳐 흐르는 그리 크고 넓지 않은 ‘봉천천(鳳泉川)’이 흘러 소싯적 물고기도 많이 잡고 멱도 감았지요. 제 호 ‘우천’(愚泉)의 ‘천’은 고향마을 이름에서 따온 것입니다. 임실은 해마다 겨울(시한)이면 중앙지 1면에 사진이 한번씩 나올 정도로 눈이 많이 옵니다. 전라북도에서는 무진장(무주-진안-장수) 다음으로 고지대이겠지요.
지금은 팍삭 늙으신 어르신 몇 분이 기억하는 동네 고샅 이름을 읊어봅니다. 동네 뒤 신작로옆 ‘상뚬’(상뜸)에는 노씨․홍씨 등이 살았지요. ‘안뚬’은 동네로 치면 센터입니다. 주로 하씨 못자리판이었고 우물이 있었지요. 우물옆 여자동창이 예쁘장했습니다. ‘새뚬’은 동네 앞부분을 차지했구요. 마을 이름이 유래된 찬샘(冷泉)이 있고 안뚬과 새뚬을 잇는 ‘독다리’(돌다리)가 있었으나 복개되어 버렸습니다. 안뚬과 새뚬을 합쳐 ‘큰동네’라고 불렀습니다. 그 다음 일제때 만든 저수지 뒤로 두 집이 있었는데 그곳을 ‘무네미’라고 불렀습니다. 무네미는 한자로 ‘수유’(水踰), 즉 ‘물 너머’(무너미)를 뜻하겠지요. 서울의 수유리도 같은 뜻일 것입니다. 그곳에는 연안 김씨 서당 훈장선생님의 대나무밭이 병풍처럼 쳐진 아담한 초가집이 있었습니다. 제 장인이 ‘대부’라고 부른 훈장선생님은 학동들에게 주입식 암기교육을 시켰습니다. 제자가 한 명 들어오면 천자문 한 권을 일일이 써서 책으로 매주었습니다. 이웃엔 대처승 한 분이 살았는데 누님뻘인 스님딸이 얼마나 예뻤는지 볼 때마다 가슴이 서늘해지곤 했습니다. 작은 고개를 넘어가면 ‘뒷고래’라는 작은 마을이 나오지만 같은 동네입니다. 그곳에 과수원집이 있어 ‘감 사리(훔치기)’를 나가곤 했습니다. 과수원집 딸도 이뻤습니다. 뒷산에는 대여섯 집이 사는 ‘웬젱이’라는 마을이 있었습니다. 산에서 나무를 한 지게해서 내려오며 땀을 씻던 엄청난 정자나무는 지금 보면 왜 그렇게 작은지요. 마을 앞에는 전라선이 가로질러 갔습니다. 철로는 우리의 놀이터였습니다. 어느 친구는 철로를 따라 몸의 균형을 잡아 십리도 갈 수 있다고 큰소리를 쳤고, 어느 친구는 못을 기차 지나갈 때 철로에 올려놓고 갈아 날카로운 칼을 만들곤 했습니다.
철로 옆에 또 서너 가구의 집이 있는 곳이 ‘외얏물’이었습니다. 그곳에는 봉천간이역 역장네가 살았는데, 역장은 상두잡이로 상여 나갈 때 방울을 울리며 북망가(北忘歌)를 잘 불렀습니다. 역장은 타고난 바람둥이여서 부인이 서너 명 된다고 했습니다. 기억나는 것은 세 번째 부인이라던가 세 쌍동이를 낳아 ‘삼태성’이라고 불렀습니다. 저보다 두세 살 어려 초딩을 같이 다녔습니다.
집이 있는 곳들의 이름으로 상뚬, 안뚬, 새뚬, 뒷고래, 무네미, 외얏물, 원젱이가 있지만, 밭들이 있는 곳의 이름도 여럿 있었습니다. 도롱굴, 뒷뻔데기, 반답, 중뫼, 여시박굴, 모데기 등이 그것입니다. 마을 앞에는 큰 정자나무 두 그루 밑에 그림같은 ‘모종’(모정․茅亭)이 지어있어 김매는 농사꾼들의 휴식터가 되었습니다. 정자나무는 당연히 그네를 만드는 등 아이들의 최고의 놀이터였습니다. 1년에 한번 백중(百種)때 ‘동네갈이’를 하곤 했지요. 지금으로 치면 반상회가 될까요. 그때마다 어른들은 거나하게 취해 삿대질을 하며 싸움을 하곤 했지요. 왜 가난하고 조금씩 슬픈 사람들은 먹잘 것도 없으면서 툭하면 싸움을 하곤 할까요. 저는 대학시절 방학만 되면 이 모종에서 책을 쌓아놓고 읽었습니다. 사통팔달 바람과 친구가 되어 놀다가 잠이 오면 자고 배가 고플 때쯤이면 아버지가 고함을 쳐 불렀습니다. 너무나 그리운 그때는 다시 오지 않겠지요. 미당 서정주는 ‘질마재 신화’란 탁월한 시집을 내었지만, 저라고 어디 ‘말티재신화’ 내지 말라는 법이 있습니까?
사람 사는 동네면 다 그렇겠지만, 우리 동네도 역시 일어날 수 있는 온갖 희로애락이 다 있었습니다. 간통으로 치부되는 불륜도 있고(불쌍하게 여자만 동네에서 쫓겨나거나, 쌀 열 가마로 불문에 부친 경우도 있었답니다), 좀도둑질하다 소도둑이 된 선배가 있었는가 하면, 불알 두 쪽 맨몸으로 뛰쳐나가 대처에서 크게 성공했다는 친구도 있었습니다. 빨갱이가족이라고 연좌제에 시달린 자식들은 술을 탐닉하기도 했답니다. 처녀총각이 눈이 맞고 배가 맞아 야밤에 담봇짐을 싼 커플도 있었고, 상피(먼 친척간의 사귐)가 붙었어도 어쩔 수 없이 현실을 인정한 커플도 있었습니다. 고등학교때 말썽쟁이였던 어느 형님은 경상도땅에 가 경찰이 되었는데, 고향을 아예 외면하기도 했습니다. 평생 머슴을 살면서 한 집안을 떡허니 일으켜세운 자수성가 농사꾼도 있었구요. 구십도로 허리 굽어진 할머니는 땅만 보고 걸어 번번이 길을 잘못 들곤 했습니다. 어느 할아버지는 평생 신발을 신어본 적이 없는 분도 있었습니다. 땅강아지를 보기만 하면 정력제라며 입안에 털어넣던 몬도가네형님은 지금은 어디에서 사시는지요.
남의 집은 대학생 한 명도 가르치기 어려운데, 총생 일곱을 다 가르친 ‘굳센’ 부모님이 살고 계시는 고향 ‘봉천’은 어린 날의 전설이자 신화에 다름 아닙니다. 눈만 오면 가고 싶고, 산 위에 올라 5천여 마지기가 널려 있는 ‘봉천들’을 바라보며 판소리가락 비스므레한 것을 실컷 쏟아내고 싶은 고향, 지금은 소방도로 역할을 할뿐인 말치재 신작로 길을 따라 임실까지도 걷고 싶은 고향, 그 곳이 어찌 차마 꿈엔들 잊혀지겠습니까. 고향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이 가난해지는 것이라고 믿기에 저는 늘 고향을 그리워 했습니다. 살면서 최소한 마음만큼은 가난하면 안되겠다는 생각으로 말이죠. ‘말티재 신화’를 위하여 건배를 하면서도 늘 외로웠습니다. 허허로웠습니다. 내 마음 속의 ‘고래 한 마리’는 어디에서 펄떡펄떡 살아 숨쉬고 있는지요? 그곳에 가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