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역사상 가장 억울한 인물 인물중국사, 주왕(紂王)과 달기(妲己)
달기는 유소씨의 딸로 상(商)나라 주왕 자신(子辛)이 아끼는 후궁이다. 미색이 뛰어났고, 주왕이 그녀를 아주 총애했다. 그녀의 말이라면 뭐든지 들어주었고, 정사(政事)를 돌보지 않았으며, 밤낮으로 연회를 베풀고 놀았다. 나중에 주나라 무왕이 제후를 모아서 주왕을 토벌했다. 목야지전(牧野之戰)을 거쳐 일거에 상나라를 멸망시킨다. 주왕은 녹대(鹿臺)로 가서 스스로 자결하고, 달기는 무왕에 붙잡혀 죽었다.
이것이 일반적으로 알려진 달기와 주왕에 관한 내용이다. 그러나 달기는 아주 억울하다. 역대 문인들은 억측과 상상을 동원해서 그녀에게 죄를 하나하나 덧씌웠고, 그녀는 천고제일악녀라는 악명을 등에지게 되었다.
주왕과 달기에 관한 민간의 <<봉신연의>>를 보면, 달기는 천년묵은 여우가 변신한 것이다. 그녀는 여와의 명을 받아 상나라를 망하게 하기 위하여 온 것이고, 주왕도 그래서 괴이하게 변하고 잔인하게 변한 것이라고 한다. 당연히 이런 것은 미신적인 것이고 믿을만한 것이 못된다. 달기라는 미녀가 천년묵은 여우가 바뀐 것이라는 것은 사실일 수가 없다. <<진어>>를 보면, "은나라의 자신(주왕)은 유소를 정벌했다.유소씨의 딸이 달기이다" 이를 보면 달기는 바로 주왕이 유소씨를 정복하고 얻은 '전리품'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유소씨는 구미호를 토템으로 하는 부락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리하여 <<봉신연의>>에서는 달기를 천년묵은 구미호의 화신으로 그린 것이다.
역사의 기재에 의하면 주왕은 황음하였으며, 술을 흘려 못을 만들고, 고기를 걸어 숲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것이 주지육림(酒池肉林)이라는 말의 유래가 되었다. 게다가 주왕은 달기의 말이라면 뭐든지 들어주어서, 달기가 좋아하는 사람은 승진시키고, 달기가 싫어하는 사람은 죽여버리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이리하여 제후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달기는 다시 주왕에게 독한 형벌을 발명하여 제안하는데 바로 포락지법(炮烙之法)이다. 바로 커다란 구리기둥을 옆으로 뉘어놓고, 그 아래에는 숯불을 태운 후에 죄가 있는 자로 하여금 그 구리기둥 위를 걷게 하는 것이다. 벌겋게 단 구리기둥을 걷다가 숯불 속으로 떨어져서 산채로 타죽는 것이다.
이뿐아니라, 주왕에게는 충신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숙부인 비간(比干)이다. 비간은 도저히 그냥 참을 수가 없어 진언한다: "선왕의 법도를 지키지 않고 여인네의 말만 들으니, 화가 곧 닥칠 것이다"라고 한다. 이는 주왕의 아픈 곳을 찔렀고, 매우 화가난다. 그가 요망한 말로써 사람을 현혹시킨다고 하여 처벌하게 된다. 이때 달기는 옆에서 "내가 듣기로 성인은 심장에 일곱 구멍이 있다든데..."라고 하자, 주왕은 바로 그자리에서 비간의 가슴을 열어 심장에 구멍이 있는지를 살펴본다.
사서에 의하면 그는 구후와 악후의 두 신하를 한면은 칼로 다져 육장(肉醬)을 만들고, 한명은 육포(肉乾)를 만들었다고 되어 있다. 또다른 신하인 서백창(西伯昌, 주문왕 희창)은 원래 '포락'의 형을 내리려고 하였는데, 희창은 총명하여 바로 죄를 인정하고 주왕에게 미녀와 기이한 물건과 좋은 말 그리고 자기의 영지인 낙서지방을 바쳐서 겨우 풀려났다. 나중에 신하들은 미친척 할 수 있는 사람은 미친 척하고, 바보인척 할 수 있는 사람은 바보인 척 하고, 반란에 가담할 사람은 반란에 가담하고, 유배갈 사람은 유배를 갔다. 이리하여 서창백의 아들인 주무왕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상나라는 바로 무너지게 된 것이다. 주왕은 죽으면서도 가장 멋진 옷을 입고, 가장 멋진 악세사리를 달고, 스스로 녹대에서 불에 타 죽었다. 달기는 더 불행했다. 목이 잘린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녀의 잘린 목은 깃대 위에 꽂혀서 천하사람들에게 보여지게 되었다.
한마디로 주왕과 달기는 악인의 요소는 모두 갖추고 있는 것이며,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악행을 저지른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그들이 정말 그렇게 나쁜 사람이었을까?
역사서는 정사이건 야사이건 모두 달기는 사갈미인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런 이야기는 너무나 많이 알려져 있고,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이다. 문제는 과연 역사적 진실도 그러할까라는 점이다.
먼저 주왕(紂王)에 대하여 얘기해보자. 역사서에는 그를 폭군으로 그리고 있다. 그렇지만 이런 이미지는 그의 진정한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일찌기 춘추시대초기에 자공(子貢)은 공자와 주왕에 대하여 토론하면서, 후세사람들이 고의로 주왕에게 죄를 뒤집어씌웠다고 불평한 바 있다. 자공의 말이 이치에 틀린 말이 아니다. 주나라는 상나라를 대체했고, 이기면 왕이요, 지면 도적인 것이 역사의 철칙이다. 역사는 항상 승리자에 의하여 쓰여진다. 승리자가 뭐라고 하면 그것이 바로 역사가 되는 것이다. 주왕조는 자신의 통치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이전의 상왕조에 대하여 여러가지 폄하하는 선전을 하였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주나라의 성립 자체의 근거를 상실하게 되기 때문이다.
춘추시대에 알려진 주왕의 죄상은 "비간이 간언하는데 죽였다"는 정도였다. 전국시대가 되자, 비간이 죽은 방법에 대하여도 여러가지 살이 붙게 된다. 굴원은 비간을 물에 빠트려 익사시켰다고 하였고, 여불위의 문객은 그가 심장이 도려내어져 죽었다고 하였다. 한나라때의 사마천은 <<사기>>를 쓰면서 다시 더 생동감있게 묘사했다. 즉, 주왕이 비간의 심장을 도려낸 것은 달기의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라는 것이다. 즉, "성인"의 심장은 정말 구멍이 일곱개 있는지 보고 싶었던 것이라는 것이다. 진(晋)나라가 되자 황보밀은 그 자신이 의사인 관계로 주왕이 달기의 종용하에 임신한 부녀를 해부해서 태아의 모습을 살폈다고까지 적었다. 주왕이 나쁘기는 했더라도 이 정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후세의 사람들이 자기의 호불호 기준에 따라 가공하고 덧붙였이면서 와전되었다.
주왕의 가장 유명한 "주지육림", "포락"의 전설에 대하여도, 주나라때의 문헌에는 전혀 기록이 없다. 춘추시대에도 없다. 그런데, 갑자기 전국시대가 되면서 한비자가 아주 구체적으로 언급하기 시작한다. "옛날에 주왕이 상아젓가락을 썼다 그러자, 기자가 두려워했다. 상아젓가락을 쓴다면 흙으로 만든 그릇에 먹을 수 없을 것이니, 반드시 서각 옥과 같은 잔을 쓸 것이다. 상아젓가락, 옥그릇에 보통 야채요리를 담지는 않을 것이니, 반드시 진귀한 고기를 찾을 것이다. 진귀한 고기를 먹으면 띠집에서 간단한 옷을 입으려고 하지 않을 것이고, 비단 옷에 구중궁궐을 지으려 할 것이며, 고대광실을 지을 것이다. 오년이 지나자, 주왕은 육포(肉圃)를 만들고, 포락을 두고, 조구(糟丘)에 올랐으며, 주지(酒池)에 임하였다. 주왕은 결국 멸망했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한비자는 말더듬이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글은 아주 뛰어나다. 이처럼 상상력이 풍부한 글이 바로 그 예이다. 당시의 "제자백가"는 모두 말재주가 뛰어나고, 자기의 주장을 팔아먹고, 자기의 견해를 입증하기 위하여 문자를 과장하고 억지로 끼워맞추는 경우가 많았다. 사마천은 아주 신중하게 글을 썼지만, 한비자의 "주지육림"을 기초로, 다시 "남녀가 발가벗고 그 사이를 뛰어다녔다"고 아주 합리적으로 상상한 내용을 덧붙였다. 당연히 그보다 이전에도 이미 주지의 면적에 대하여 삼천여명분이 된다는 등 과장을 했다. 이러한 상상력은 그저 "광적이다"는 말로밖에 더 할 말이 없을 정도이다.
아마도 그들이 보기에 어차피 주왕은 좋은 사람이 아니니까. 그를 아무리 더 음탕하게 묘사하고, 황당하게 묘사하여도 무방하다고 생각했을지는 모르겠다. 역사의 또 다른 목적이 바로 후세인들에게 경계하게 하는 것이니까. 그래서 그들은 상상력과 윤색을 통하여 이처럼 대담하게 묘사한 것이다. 예를 들어 사마천이후의 사학자인 유향은 주왕의 녹대면적에 대하여 크기가 3리이고, 높이가 천척(千尺)이다라고 적었다. 진나라의 황보밀은 더 심해서 아예 녹대의 높이를 10배나 올려버렸다. 높이가 천장(千丈)이라고 하였다.
동시에 달기의 요사스러움과 독랄함에 대한 묘사도 점차 업그레이드되었다. <<상서>>에서 주왕을 토벌할 때 "부인의 발을 듣는다"로부터 시작해서 <<국어>>에서는 "달기가 총애를 받아서...은이 망했다"라고 적었고, <<여씨춘추>>에 와서는 "상나라 왕은 크게 어지러워서 주색에 빠졌다. 달기가 정치를 하니 상과 벌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그래도 이 정도까지는 그다지 크게 과장한 것은 아니고 어느 정도 합리적인 상상력의 수준 범위내이다. 나중이 되고, 시간이 흐르면서, 상상력은 더욱 풍부해졌다. 기록들도 보다 구체적으로 되어 갔다. 나중에 나온 <<봉신연의>>에 이르러서는 역사학자가 아니므로 아무 생각없이, 역대문인들이 제공했던 단서들을 가지고 더욱 심하게 적게 되었다. 그리하여 천고악녀라는 악명을 그녀는 얻게 된 것이다.
이에 대하여 이렇게 묻지 않을 수 없다. 달기의 거의 변태적인 행위는 비록 후세의 두찬(杜纂)이라고 하더라도, 우리는 왜 그렇게 즐겁게 그렇게 기꺼이 온갖 악명을 그녀에게 덧붙이려고 했던 것일까?
왜 주왕과 달기에 대한 묘사는 이렇게 극악하게 되었을까?
주왕 본인에 대하여부터 얘기해보자. <<사기. 은본기>>에 보면, 주왕은 "자질이 뛰어나고 말을 잘하였으며, 민첩했고, 보고 듣는 것이 모두 빨랐다. 재주와 힘이 남달랐으며, 손으로 맹수를 잡았다" 이러한 기록을 보면 주왕은 용기와 지혜를 모두 갖추고, 문무를 겸비한 대장부로 보인다. 아쉽게도 이처럼 남보다 뛰어난 재능을 타고 났으므로 스스로 교만했고, 다른 사람의 견해를 듣지 않았다. 다른 자들이 모두 자기보다 못하다는 자만감이 커졌다.
동시에 그는 술을 좋아했고, 여색을 밝혔다. 군왕으로써, 영웅으로써, 그리고 남자로써, 이 정도의 결점은 큰 결점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는 절대 후세인들이 과장하는 것처럼 황음무도하지 않았다. 상나라 사람들은 술을 좋아했고, 식사를 하면서 술을 곁들이며, 여러명이 같이 모여 술을 마시는 것이 당시의 기풍이었다. 출토되는 기물을 보더라도, 상나라후기의 술을 마시는 도구가 확실히 늘어났다. 이는 사회에 술마시는 것이 아주 유행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이것은 중대한 사회문제라고 볼 수는 있을 것이지만, 그렇다고 망국에 이를 정도라고 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리고, 상나라시대의 형벌이 과중했다고 한다는 것은 객관성과 공정성을 잃은 것이다. 모든 시대에는 그 때마다의 특징이 있는 법이고, 우리가 현대의 문명사회를 기준으로 그들에게 그 수준을 요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상서. 대우막>>의 기재에 의하면 하나라때 이미 "오형(五刑)" 제도가 있고, "하대(夏臺)"감옥이 있었다고 한다. 목을 자르는 외에, 삶거나, 육장으로 만들거나, 차열(車裂), 요참(腰斬), 교살(絞殺), 소사(燒死), 기시(棄市), 멸족(滅族)등의 잔혹한 형벌이 있었다. 즉, 이런 형벌은 상나라 주왕이 독창적으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당시의 형벌에 대하여 <<한비자>>를 보면, "은(상)나라의 법은 공로에 재를 뿌리는 자는 손을 잘랐다"는 것이 있다. 이는 언듯 보기에 경한 죄에 중한 벌을 과하는 것같다. 당시 자공은 죄는 경한데 벌은 중한 것같아서 공자에게 가서 물었다. 그러나 공자는 이런 형벌을 제정한 사람은 치국의 도리를 아는 자라고 하였다. 만일 재를 뿌릴 때 지나가는 사람이 있으면 그는 얼굴에 먼지를 뒤집어쓰게 되고, 그 사람은 반드시 크게 화를 낼 것이고, 싸우게 될 것이다. 싸우게 되면 당시 법률로는 삼족을 멸하는 죄였다. 그래서 재를 길에 뿌리는 것이 가벼운 것같지만 실제로는 중한 죄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러한 중형도 다 이치에 맞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리하여, <<상서. 강곡>>에서는 "은나라의 벌은 체계가 잡혀 있었다"라고 칭찬하였던 것이다. 이는 결국 상나라의 형벌이 지금의 기준으로는 야만적이지만, 당시의 사회배경에 부합하는 점이 있고, 합리적인 점이 있다는 것이다.
그는 잔인무도한 임금이 아니었는데 왜 실패한 것일까?
사료를 분석해보면, 가능성이 가장 큰 것은 주무왕이 일으킨 정변의 성공은 우연과 투기에 의한 것이라고 보는 편이 합당하다는 것이다. 당시 주왕은 비간을 죽이고 기자를 가두었다. 이는 아마도 정치적인 견해가 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미자(微子, 주왕의 친형)에 대하여는 전혀 대비하지 않았다. 나중에 미자가 자기의 형제와 국가를 배신하고, 주무왕을 끌어들일 줄은 생각도 못했을 것이다. 모택동 주석이 이 당시의 역사를 읽고는 "미자가 가장 나쁜 놈이다"라고 말한 것이 이해가 된다.
주왕은 아주 능력있는 군주였다. 당시 상나라는 강대한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의 부대는 선진적인 청동기병기와 갑옷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에게는 코끼리부대와 같은 특수부대도 있었다. 고서에 의하면 "상나라 사람들은 코끼리를 다루어 동이를 짓밟았다"는 기록이 있다. 그의 부대는 가히 천하무적이라고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당시 그에게는 두 명의 적수가 있었는데, 하나는 서쪽의 주방국(周方國)이고 다른 하나는 동쪽의 이인(夷人) 부락이었다. 주왕은 일찌기 산서 여성에서 주문왕과 악전을 벌인 적이 있고, 문왕을 일패도지하게 만들었다(문왕이 포로로 잡혀서 갖힌 것이 아마도 이 전투에서일 것이다), 만일 동이에서 온 군사인 강태공이 동이국의 난을 획책하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주문왕은 곱게 살아서 풀려날 수 없었을 것이다.
잠시 쉰 다음 주왕은 병사를 일으켜 동이를 공격했다. 이리하여 동부의 위협을 제거하고자 했던 것이다. 우세한 병력을 가지고 상나라군대는 추풍낙엽처럼 동이를 쓸었고, 장강하류까지 진격했으며 많은 동이부락을 복속시켰고, 수천수만의 동이인들을 포로로 잡았으며 대승을 거두었다. <<좌전>>에 기록된 시기를 보면 그는 아마도 이 동이를 정벌하는 전쟁의 와중에 유소씨부락에서 달기를 얻었을 것이다.
청나라때의 한 사람이 주왕에게 뒤집어씌워진 거의 백가지에 이르는 악행에 대하여 하나하나 고증을 해본 적이 있다. 그러면서 그는 점점 주왕의 소위 죄악이라는 것이 역사적으로 문인들의 윤색을 거치면서 점차 증가하였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역사적으로 주왕에 대한 기록을 믿을 수 없는 것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이유때문이다.
첫째, 정치적 필요. 주무왕은 주왕을 멸한 후, 정치적인 구호가 필요했다. 반드시 주왕을 추악한 인물로 이미지메이킹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가 반란을 일으킨 것에 명분이 없게 되기 때문이다. 중상, 모략, 유언비어등등을 만들어내야 했다. 이는 정치투쟁의 수단이며, 정치적인 필요에 의한 것이다. 적수를 마귀로 만들고, 추악하게 만들지 않으면 대중의 믿음과 지지를 끌어낼 수 없기때문이다.
둘째, 투쟁책략. "여자가 화근이다"라는 것은 주무왕의 정치구호였다. 달기를 공격하는 것은 바로 적의 수뇌를 공격하는 것이다. 닭을 가리키지만 실제는 개를 욕하는 것이다. 이것도 중국과 외국의 역사적인 투쟁수단으로 많이 애용된 것이다. 일개 국가의 군주가 어찌 한 여인이 시키는대로 할 것인가. 그것은 불가능하다. 이런 선전은 극단적으로 주왕을 깍아내리는 것이고, 주왕에 대한 백성들의 위망을 폄하하는 것이다. 이것도 정치적인 필요에 의한 것이다.
셋째, 유언비어로 무기를 삼다. 말이라는 것이 전해지다보면 살이 붙고, 전혀 다른 내용으로 바뀌게 된다. 이런 일은 자주 발생한다. 최근에 혁명당시 인물들의 회고록이나 전기와 같은 것이 유행하였다. 한번은 어느 혁명간부가 자신에 대해 쓴 글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는 분노해서 그 글을 쓴 기자를 불러 물었다. "나는 체포된 적은 있지만, 중간에 도망쳤다. 적들에 붙잡혀서 고문을 당한 적은 없다. 그리고 나는 국민당의 여간첩과 연애한 적도 없다. 그런데 왜 그렇게 썼는가?" 그러자 그 기자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모두 그렇게 말하니, 절대 틀림없을 겁니다. 아마도 어르신께서 기억을 못하시는 거겠지요. 분명히 적에게 붙잡혀 고문당했을 것이고, 예쁜 여간첩이 당신과 사랑을 나누었을 겁니다. 그렇지만 미인계에 ;빠지지는 않은 것이지요." 그 노간부도 이런 기자에게 아무 말도 더 할 수 없었다고 한다. 개인의 역사에 대하여 본인이 아니라고 부정해도 소용이 없다. 이렇게 본다면, 주왕이 지금까지 살아 있다고 하더라도, 자기의 역사에 대하여 뭐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