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 뱀이 있던 자리 [ 양장 ]
김철순 글/최혜진 그림 | 문학동네 | 2024년 07월 29일
책소개
초록 바람이 불었어
초록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들판을 마구마구 뛰어다녔어
농부 시인 김철순이 정성껏 일군 연초록빛 서정
김철순 시인의 두 번째 동시집 『초록 뱀이 있던 자리』가 출간되었다. 초등학교 4학년 국어 교과서에 수록된 「등 굽은 나무」,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사과의 길」 「냄비」 등으로 동시 독자들을 사로잡은 동시집 『사과의 길』 이후 10년 만이다. 긴 시간 공들인 만큼, 땅을 일구는 농부이자 글을 일구는 시인으로서 세상 만물을 귀하게 대하는 사랑이 더욱 깊고 지극해졌다. “길에서 마주치는 이름 모를 들꽃과 돌멩이와 벌레에게 먼저 다가가 고맙다고 말하며 마음의 온기를 전하는 것, 이것이 시인의 사랑법”이라는 함기석 시인의 말처럼, 자연에 대한 순수한 경탄, 삶을 대하는 아이와 같은 호기심의 바탕에는 사랑이 있다.
시인은 작은 것들에게 먼저 다가가 얼굴을 비빈다. 서로를 서로의 색으로 담뿍 물들인다. “동그란 돌을 주워다가/ 목욕도 시켜 주고/ 로션도 발라” 주며 아끼기도 하고(「멋진 돌을 키우는 법」), 작은 채송화를 두고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힘이” 생기니 “저 꼬맹이에게는/ 심부름 같은 거/ 시키지 말자”고 당부하기도 한다(「채송화」). 시인의 마음은 “덩치 큰 코끼리가/ 스무 마리쯤/ 놀러 온다고 해도 걱정” 없을 만큼 넉넉하기에(「오래된 집」), 모든 존재를 폭넓게 포용할 수 있다. 한여름의 들판처럼 올곧고 푸르른 시정이 독자의 마음을 밝힌다.
글 김철순
1995년 제1회 지용신인문학상에 시 「가뭄」 외 1편이 당선되었고, 201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동시 「사과의 길」 「냄비」가, 경상일보 신춘문예에 동시 「할미꽃」 「고무줄놀이」가 나란히 당선되었습니다. 동시집 『사과의 길』, 시집 『오래된 사과나무 아래서』를 썼습니다.
그림 최예진
대학에서 조소를 전공하고 10년간 디자이너로 일하다가 그림책 세계에 발을 디뎠습니다. 일상 속의 소소한 행복을 많이 많이 그리는 할머니 작가가 되는 게 꿈입니다. 『아빠와 토요일』은 글과 그림을 함께한 첫 책입니다. 두 번째 그림책으로 『엄마가 왜 좋아』, 그린 책으로 『파릇파릇 풀이 자란다』가 있습니다.
출판사 리뷰
풀이 염소를 삼키고 고양이가 멍멍 짖었지
세상의 질서에 균열을 일으키는 극적인 역발상
김철순 시인의 동시에는 눈을 빛내며 슬쩍 웃음 짓는 듯한 장난기가 담겼다. 시인의 천연덕스러운 상상은 현실의 규약을 훌쩍 뛰어넘어 독자를 낯선 곳에 데려다 놓는다. 무엇이든 가능한 시의 세계에는 무한한 상상과 자유가 넘실댄다.
이제 염소는
무서워서 풀밭에
다시는 오지 못할 거야
호랑이처럼 커진 풀들이
어흐흥 입을 쩍 벌리고
염소를 한입에 꿀꺽,
삼켜 버릴지도 모르니까
_「풀밭에서 호랑이가 어흥」 중에서
염소가 마음대로 짓밟고 뜯어먹던 풀은 어느 날엔가 몸집이 점점 커져서 호랑이처럼 된다. 이제 염소가 도리어 풀에게 잡아먹힐까 봐 가까이 가지 못하는 역설적인 상황이 펼쳐진다. 강자와 약자의 구분을 가뿐히 뒤집는 시적 상상이 통쾌하다. 공고하던 질서가 무너져 “세상이 잠깐,/ 고장” 나면 좀 어떠한가(「5교시」). 거기에서부터 또 다른 꿈과 가능성이 시작될 수도 있다.
어디로 갈지는 나중에 생각하고, 일단 출발!
어린이의 갑갑한 마음을 풀어 주는 기운찬 상상
어느 날 아침 고양이는
어떻게 말했었는지 잊어버렸어
어흥, 이었나?
멍멍, 이었나?
찍찍, 이었나?
_「어느 날 아침 고양이는」 중에서
고양이는 하루아침에 제 말소리를 잊어버렸다. “이제 고양이는/ 어떤 말로 울어야 하나?” 고개를 갸우뚱하지만, 나 자신을 잊었으니 이제 ‘나’가 아닌 다른 무언가가 되어 보아도 좋을 것이다. “기존의 말을 잃어버리고 싶은 욕구, 그리하여 어제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어 다른 말을 하고 싶은 욕구”(함기석)는 정해진 대로만 울어야 한다는, 단단한 고정관념을 파괴한다. 고정관념이 사라진 자리에는 어디로든 갈 수 있는 수천 갈래의 길이 뻗어 있다. “어디로 갈지는/ 나중에 생각하고,/ 일단, 출발!”을 외치는 기세가 어린이답고 산뜻하다(「베개」).
할 수 없이 침대를 타고
노를 저어 바다로 나아갔어
이럴 땐 도망가는 수밖에
바다에는 갈매기가 끼룩끼룩
물고기 떼가 나를 따라오고
고래가 저 먼 데서 손을 흔들었어
바닷물이 튀어 옷이 축축했지만
찝찝하지 않았어
정말 신이 났어
_「11살인 내가 오줌을 싸고 말았어, 말이 돼?」 중에서
실수로 오줌을 싸고 만 어린이(「11살인 내가 오줌을 싸고 말았어, 말이 돼?」), 엄마의 잔소리와 허세가 “혹시/ 뻥, 아닐까?” 의심스러운 어린이(「뻥치기 엄마」), “낫 놓고/ ㄱ자도 모른다고/ 할머니는 그러는데” 대체 낫이란 게 무언지 알 수 없는 어린이들은 답답한 현실을 뒤집을 몽상과 상상의 세계로 떠난다(「ㄱ자 놓고 낫을 모르겠다고요」). 그곳에서 실컷 놀고는 또다시 “한 걸음/ 한 걸음/ 또박또박” 일상을 걸어갈 힘을 얻는다(「내 동생은 1학년」).
없는 뱀이 더 무섭다 없는 뱀이 더 오래 산다
부재하기에 더 선명해지는 존재감
시인은 “햇빛을/ 한 가닥/ 한 가닥”(「심심한 고양이」) 세는 예민한 감각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심상히 지나칠 무언가의 기척을 알아챈다. 없는 자리를 더 유심히 보는 시인이기에, 마음 한구석의 빈자리는 더더욱 또렷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자꾸 눈길이 간다
스르르륵 소리도 난다
혀도 날름날름거린다
없는 뱀이 더 무섭다
없는 뱀이 더 오래 산다
_「초록 뱀이 있던 자리」 전문
이곳은 비어 있기에 더 신경 쓰이고, 무엇으로도 다시 채울 수 없다. 바로 사랑이 머물렀던 자리이다. 20년 전 어느 날, 시인의 곁에 문득 찾아와서 오래 머물다 떠나간 강아지, 은비가 남긴 자리. 시인은 여전히 없는 은비를 느끼고, 없는 은비를 부른다. 은비는 시인에게 돌보아 주어야 할 아이이기도, 항상 함께하는 친구이기도, 삶을 살아가는 방식을 알려 주는 선생님이기도 하였다. 그런 존재를 잃은 시인의 슬픔이 얼마나 클지 짐작하기 어렵다.
은비는 나에게 너무나 많은 걸 가르쳐 주었어요. 그러니까 사랑하는 법을요. 세상의 모든 나무들, 새들, 나비들, 고양이들, 눈사람들, 풀들, 무지개들, 구름들……. 이름을 다 불러 주진 못하지만 이 세상을 함께하는 모든 것들과 친구가 되었어요. 나랑 같이 살아 줘서 고맙다, 고맙다, 마음속으로 얘기해요._김철순 ‘시인의 말’에서
하지만 시인은 그저 슬픔에만 머물러 있지 않는다. “슬픔의 경험을 통해 시인은 자신을 더 깊이 바라보고 자연과 세계를 다시 생각한다.”(함기석) 무서워하던 길고양이들에게 먹이를 주고, 길을 가다 쪼그리고 앉아 풀꽃을 살피며 시를 쓴다. 세상에 대한 더 폭넓은 이해와 사랑으로 쓰여진 동시들이 『초록 뱀이 있던 자리』에 차곡차곡 모였다.
노란 꽃 등불처럼 다정하고
통통통 배불뚝이 수박처럼 재미있는 일러스트
최혜진 화가의 다정하고 편안한 그림은 독자가 『초록 뱀이 있던 자리』를 조금 더 가까이 두고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다. 화가는 시인에게 어른의 원숙한 지혜와 어린아이의 천진한 동심이 공존함을 알아채고, 두 이미지가 시집 안에서 조화롭게 표현될 수 있도록 고민하였다. 그 덕분에 시 한 편 한 편마다 꼭 어울리는 그림들이 다채롭게 실렸다. 통통 튀는 듯한 재치 있는 움직임, 시적 정서를 차분하게 전하는 풍경들이 “아카시아꽃 향기에/ 푹, 절여진/ 봄밤”(「봄밤」)처럼 시의 세계에 독자를 푹 잠기게 한다.
추천평
김철순 시인은 작은 풀꽃 한 포기도 사람과 동등한 위치에 놓고 바라본다. 이런 수평적 자리 배치는 세상 모든 존재들에 대한 시인의 사랑과 관심을 보여 준다.
- 함기석 (시인)
* 출처 : 예스24 <https://www.yes24.com/Product/Goods/129602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