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말라기3장
1. 공의로운 제물을 여호와께 바칠 것이라(1-6)
말라기 선지자가 활동할 당시의 이스라엘 신앙상태는, 하나님의 말씀이나 약속에 대해 별 다른 기대를 가지지도 않았고, 신뢰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의 삶에서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것을 실감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생각이 어떠했는가는 2:17절의 내용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그들은 악인이 잘되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은 악을 행하는 자를 좋게 보시고, 악을 행하는 자에게 기쁨이 되어주신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이런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냉소적인 태도를 가지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 역시 성경에서 하나님의 의에 대해 듣고, 하나님의 사랑과 악을 미워하시는 하나님을 대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 모든 성경의 말씀들을, 세상에서 실감할 수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하나님의 정의도, 공의도, 사랑도, 무엇보다 악을 미워하시는 하나님을, 세상에서 볼 수 없다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일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생각했던 것처럼, 악인이 하나님께 미움을 받는 세상으로 여겨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솔직한 심정으로는 하나님의 정의는 죽었고, 하나님의 존재 역시 알 수 없다고 외치고 싶을지도 모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현실에서 하나님의 일하심과 살아계심을 실감합니까? 혹시 성경 말씀들이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의미를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임을 알아야 합니다.
1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사자를 보내실 것이고, 그 사자는 하나님의 길을 준비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주가 갑자기 그의 성전에 임할 것인데, 언약의 사자로 임하실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길은 심판자로서의 길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실 것인데, 심판 받을 자가 누구인가를 드러내는 일을, 하나님이 보낸 사자가 행한다는 것입니다. 사자가 옴으로써 죄가 무엇인지, 그리고 심판 받을 자가 누구인지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호와의 사자가 오기 전에, 세상은 죄에 대해서, 또 심판 받을 자가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는 뜻이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착각한 것은, 자신들은 하나님의 심판에서 제외되어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까지도, 하나님의 심판에서 제외될 수 없음을 사자를 통해서 드러내신다는 것이, 사자를 보내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 내용은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기 위해 온 세례요한으로 이어집니다. 세례요한은 회개하라고 외쳤습니다. 세상 전부를 악으로 규정하고 외친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은 악이 무엇인가를 전혀 깨닫지를 못합니다. 이러한 세상에 악을 드러내기 위해 주가 오신 것입니다.
2절에 보면 주가 임하시는데, 그 주는 금을 연단하는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이라고 합니다. 불과 잿물은 정화시키는 능력을 말합니다. 금은 불에 의해 녹으면서, 불순물과 순금으로 분리됩니다. 잿물은 옷감의 불순물을 제거합니다. 이처럼 불순물을 제거하는 능력으로 주가 임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불과 잿물로 오시는 주 앞에서, 누구도 ‘나는 정결하다, 나는 더럽지가 않다’는 말을 할 수 없습니다. 모두가 불순물이 가득한 더러운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 같은 사실이 주가 오심으로 드러나게 되는데, 이처럼 악을 드러내시는 일을, 하나님의 정의라고 말합니다. 세상이 생각하는 정의와는 다른 것입니다.
세상이 말하는 정의는 악한 자는 벌 받고, 착한 사람은 복 받고 잘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정의는 악을 악으로 드러내시는 것이고, 하나님의 정의 앞에서는 누구도 ‘세상에 의인은 없다’는 것입니다.
전에는 내가 악인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인정하지도 않았는데, 하나님이 보내신 주,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을 때, 내가 악인이었음을 알게 되고, 무엇을 한다고 해도 의인 될 수 없음을 아는 것이, 하나님의 정의가 바로 세워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이같은 하나님의 정의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오로지 자신들은 잘되고, 이방인은 벌 받고 망하는 것을, 정의로 여겼을 뿐입니다. 그래서 그들 눈에 보이는 현실은 하나님과 상관없이, 인간의 힘으로 잘 살고 있는 것으로 비춰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이해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바르게 전파되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정의가 세워지는 현장임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복음이 전파되는 지금도, 하나님의 정의는 사라지지 않고 계속 세워지고 있는 것입니다.
3절에서 말하는 공의로운 제물은, 하나님의 정의가 세워질 때 가능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을 바친다고 해도, 공의로운 제물이 될 수 없습니다. 공의로운 제물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의로운 제물이 되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른 제물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제물을 바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겠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제물을 바쳐야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자기 죄를 보지 않는 악입니다.
공의로운 제물은 우리의 정성도, 노력도, 우리의 것을 바치는 그 어떤 것도 아닙니다. 공의로운 제물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만 가능합니다.
제물을 바쳐서 복을 받겠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나의 모든 죄를 덮으시고, 나를 깨끗하게 하신다는 믿음으로 주께 나오는 것만이, 공의로운 제물을 바치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은 이 제물을 기뻐하시고, 이 제물을 바치는 그들이 불과 잿물로 연단된, 깨끗한 자로 여김 받는 것입니다.
5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점치는 자, 간음하는 자, 거짓 맹세하는 자, 과부와 고아를 압제하고, 나그네를 억울하게 하며,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자들을 심판하신다고 합니다.
이처럼 심판에 해당되는 자는, 말씀을 통해서 자신의 악함을 돌아보지 않고, 다만 자신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자기 욕망에만 매어 살면서도, 그것을 악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풍요가 곧 복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말라기 선지자는 이런 사고방식의 세상을 향해 말씀을 외칩니다. 누구도 관심 두지 않고, 외면할 말씀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선지자가 어떤 말을 해도, 그들은 그들이 해오던 대로의 신앙만을 고집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현실을 더 의지할 것입니다. 이러한 그들이 무엇을 하고 바친다고 해도, 공의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공의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을 떠나서는 무엇을 한다고 해도 의가 되지 못하고, 하나님께 기쁨이 될 수도 없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지금 여러분이 마음을 두어야 할 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현실이 되면, 잘 살고 못사는 것이 말씀 안에서는 중요한 문제가 아님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일하시지 않는 세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자기 백성으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삶을 살아가도록 일하십니다. 우리의 죄를 보게 하시면서, 예수님을 떠나 살 수 없는 우리의 실상을 잊지 않게 하십니다. 공의로운 제물은 이러한 성도에게만 가능합니다.
2.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 하였나이까?(7-12)
현대 교회에서 본문의 내용은,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는 뜻과는 전혀 상관없이, 철저하게 왜곡되어 가르쳐지고 있습니다.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십일조를 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는 것이고, 그것은 곧 하나님의 저주를 받는 죄라고 하면서, 거의 협박 수준의 말로 사용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하나님은 십일조를 철저히 하라는 의미로,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을 이해하자면, 먼저 십일조의 의미부터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십일조 규례를 세우신 것은, 기업을 분배받지 못한 레위인의 생계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압제 받고 소외된 자들의 구제에 사용하기 위함입니다.
민 18:24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레위인에게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신 것이 아니라, 십일조를 기업으로 주셨습니다.
따라서 기업이 없는 레위인이나, 약자에 속하는 자들의 생존 여부는, 이스라엘의 십일조에 달린 것이 됩니다. 이스라엘이 십일조를 게을리 한다면, 그것은 곧 레위인이나 약자의 생존에 위험이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레위인에게는 십일조를 기업으로 주셨을까요? 그것은 그들이 하는 일과 연관이 있습니다. 레위인은 회막에서 봉사하면서, 이스라엘의 죄를 담당하는 일을 합니다.
이스라엘은 회막에 나아가 제사하면서 죄를 용서받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회막에 나아갈 수가 없고, 오직 레위인이 이스라엘을 대신해 회막에서 봉사하고 제사함으로써, 이스라엘의 모든 죄를 담당하는 일을 하도록 규정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레위인은, 자신들의 죄를 위해서는 없으면 안되는 존귀한 존재입니다. 레위인의 생존이 이스라엘에게는 중요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레위인이 존귀한 자로 대접받는 것은 어떨 때이며, 그것은 무엇으로 증거되는 것입니까?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께 회개하고자 한다면, 레위인을 존귀하게 여길 것입니다. 그리고 십일조를 철저히 함으로써, 레위인의 생존에 아무런 문제가 없게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죄에 대해 잊고 산다면, 자연히 레위인의 존재 또한 희미해질 수밖에 없고, 그것은 십일조에 대한 소홀로 이어질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이 십일조를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죄와 회개를 팽개쳤다는 것이고, 죄와 회개를 팽개쳤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 또한 잊었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 14:28-29절을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매 삼년마다, 레위인과 고아 과부, 곧 사회적 약자를 위한 십일조의 규례를 세우셨습니다. 약자는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노예로 생활하던 본래적 모습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시고, 그 땅을 기업으로 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 들어올 자격이 없는 존재들입니다. 원망과 불평으로 일삼은 것이 그들이었고, 약속의 땅에 대한 소망보다는, 현재의 삶의 풍요를 더 원한 그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들이 가나안 땅에 거하고, 그 땅을 기업을 받아 누리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입니다. 그래서 그 무엇도 나의 것이라고 할 수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은혜를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해, 십일조의 규례를 세우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를 잊었습니다. 광야에서의 이스라엘처럼, 현재 삶의 풍요에 마음을 두었을 뿐입니다. 오로지 생존 문제에만 마음을 쏟았기 때문에, 자연히 십일조에 대해 소홀해진 것입니다.
이것이 말라기 선지자 당시 이스라엘의 실상이었음을 생각한다면, 십일조에 대한 말씀은, 십일조를 하지 않는 것에 대한 책망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상실된 채 살아가는, 이스라엘을 책망하시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선지자가 말한 하나님의 것은 무엇일까요? 8절을 보면, 선지자는 십일조와 봉헌물을 하나님의 것으로 말합니다. 하지만 선지자가 말한 십일조와 봉헌물은, 재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앞서 말한 대로 십일조의 정신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시고, 죄를 용서하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 어떤 재물을 바친다고 해도, 이 정신이 상실되어 있다면, 그것은 진정한 십일조와 봉헌물이 될 수 없습니다.
곧 십일조와 봉헌물을 재물로만 이해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담겨져서 하나님께 바쳐지는 모든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십일조와 봉헌물의 진정한 의미는, 하나님의 은혜와 죄 용서로 기뻐하고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나오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재물을 원한 것이 아니라, 십일조라는 규례를 통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정결한 제물의 희생으로 이루어지는, 죄 용서에 감사하는 참된 이스라엘을 받고 싶으신 것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만이 하나님의 것으로 인정되는, 하나님의 소유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였다는 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용서의 은혜와 사랑을 받았으면서,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는 하나님의 것인 이스라엘로 나오지 않고, 오로지 자신을 위해 살아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붙들려서, 하나님이 주인 되어 계시는 내가 하나님께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의 주인이 되어서, 내 뜻대로 되지 않은 일에 불평하고, 뭔가를 바치면서도 복을 기대하는 그것을,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 하는 것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주를 더럽게 하는 것이고, 괴롭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들의 악한 행실에 대해 무지했을 뿐입니다.
이스라엘은 회막이 있고, 레위인을 있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생각하지 않고, 항상 현실의 삶에만 마음을 두었습니다. 그래서 풍요롭지 못하고, 어려움으로 인한 고통이 지속되는 현실에서는, 하나님의 사랑도 없는 것으로 간주했습니다.
회막을 세우시고 레위인을 있게 하신 것이, 이미 이스라엘을 이방인과 구별하신 사랑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회막과 레위인의 존재는, 죄를 용서 받을 수 있는 유일한 통로입니다. 이방인에게는 없는 죄 용서의 통로가, 이스라엘에 있다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이 그들을 구별하시고 사랑하신다는 증거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죄 용서의 유일한 통로이신 그리스도가 계시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증표가 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에서의 삶의 풍요에 매임으로써, 이같은 사랑이 사랑으로 여겨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에게서 하나님의 사랑도 은혜도 찾지 못하고, 원망과 불평으로 일삼으면서, 자신의 복을 위해 하나님을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괴롭히고, 주의 이름을 더럽히는 것임을 알지 못한 채 말입니다.
성도가 확증할 수 있는 사랑과 은혜의 현장은 십자가입니다. 우리 죄를 대신해서 피 흘리신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온전히 드러납니다. 이 은혜와 사랑을 가볍게 여기지 마십시오. 성도는 예수님으로 생명을 얻은 자입니다. 이 생명으로 감사하며 하나님께 나오는 그가 하나님의 것인 십일조와 봉헌물입니다.
3. 무슨 말로 주를 대적하였나이까?(13-18)
사람은 자기 입장을 버리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여전히 자기 입장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 반발하기 십상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나 하시는 일이, 자기에게 유리한 것이 아니라, 불리한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말라기 선지자의 말에 대한, 이스라엘의 반응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잘못된 모습에 대해 지적하는 선지자의 말에 대해 ‘어떻게’라는 말로 일관합니다.
본문에서도 선지자는, 이스라엘이 완악한 말로 하나님을 대적하였으면서도, ‘무슨 말로 대적하였나이까’라며, 자신들의 정당함을 주장하는 것을 책망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대적한 적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앞에서는 하나님을 괴롭게 하지도 않았고,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지도 않았고, 주의 이름을 멸시하지도, 더럽게 하지도 않았음을 주장하는 이스라엘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들은 이처럼 자신들의 정당함을 주장함으로써, 현재 자신들의 어려운 삶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자신들을 사랑하지 않은 결과로 돌리려고 합니다. 자신들은 하나님을 바르게 신앙하고 섬기는데, 하나님은 사랑하지 않으신다고 함으로써, 모든 잘못이 하나님께 있는 것으로 돌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말씀을 통해서, 그들은 하나님을 멸시하고, 그 이름을 더럽히며,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는 자들에 지나지 않았음이 드러났습니다. 결국 그들은 어떤 고통에서도, 할 말이 없는 죄인들이었을 뿐입니다.
성도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명확히 해야 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누구도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는, 정당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선지자가 지적하는 것처럼,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우리 역시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일 뿐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실체라는 것이 인정된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하시는 어떤 일에 대해서도, 반발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일컫습니다. 죄인이라는 것은 멸망이 마땅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죄인이라고 하면서, 바라는 것은 편한 인생입니다. 원하는 것이 모두 이뤄지기를 기대합니다. 이것은 멸망이 당연한 죄인에게, 어울리지 않는 생각입니다.
죄인에게 주어질 것은 형벌밖에 없습니다. 형벌이 저와 여러분께 마땅한 하나님의 일인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않는다면, 예수님을 보내셔서 우리를 죄에서 건지신 하나님이야 말로, 사랑의 하나님이시며, 긍휼과 은총으로 우리에게 함께 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과연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여러분은 자신이 하나님을 대적한다고 생각합니까? 아마 이스라엘처럼 ‘나는 하나님을 대적한 적이 없다’고 부인할 것입니다. 그래서 현재의 삶에 대해 불만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임을 말씀합니다. 과연 무엇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일까요?
14-15절을 보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고,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고 슬프게 행한 모든 것이, 아무 유익이 없다고 합니다. 슬프게 행한 것이라는 말은, 금식하고 회개한 것을 말합니다. 곧 하나님을 섬기고 명령을 지키며, 금식하고 회개까지 했는데도 유익이 없다는 것은, 삶의 형편이 나아진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이 바라보는 세상 현실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는 아무 유익이 없고, 오히려 악인이 더 번성합니다. 그런 현실을 보며 교만한 자가 더 복을 받고, 악인이 더 번성하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화를 면한다며, 불만을 토로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완악한 말입니다.
교만한 자가 더 복을 받는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누리는 복의 가치를, 교만한 자가 누리는 세상의 것보다, 더 못한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언약을 주시고, 생명으로 인도하십니다. 이처럼 언약의 하나님으로 함께 하시는 것이, 이스라엘의 복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교만한 자가 누리는 번성을 더 큰 복으로 바라보며, 하나님에 대해 반발합니다, 이처럼 긍휼의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보다, 세상의 번성을 더 큰 복으로 여기는 것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불만이 없습니까? 우리는 모이면 십자가 은혜를 말합니다. 이 은혜는 독생자 아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십자가에 피 흘려 죽게 하심으로써, 죄에 갇힌 우리를 건지신, 긍휼과 자비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은혜는 세상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복입니다. 이 복을 세상의 번성과 비교하면서, 믿음의 유익을 따지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됩니다.
세상에서의 번성은 하나님의 은혜와는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번성한다고 해도, 구원의 능력은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멸망으로 끝나는 운명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도는 이 운명에서 건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이 우리를 건지셨습니다. 이 무조건 적인 은혜에 속한 자로 부름 받은 것을, 세상의 번성보다 못한 것으로 평가하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대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일 뿐입니다. 말로 생각으로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외적으로 어떤 행함이 있다고 해도, 그 행함이 자신에게 어떤 유익으로 다가오기를 기대하면서, 유익이 없다고 여겨지면 신앙생활에 시큰둥해지는 것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도 헛되고 유익이 없다는 것은, 자신을 위해 하나님을 섬겼다는 뜻이 됩니다. 금식하고 회개하는 것, 역시 자기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자기를 위해 하는 모든 것들이, 불만을 낳게 되고, 결국 하나님에 대한 대적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문제는, 단순히 하나님을 대적한 것에 있지 않습니다. 15절에 보면 이스라엘은 이방인을, 교만하고 악을 행하고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로 여깁니다. 따라서 이방인은 복을 받지 말아야 하고, 번성하지도 말고, 화를 당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반면에 자기들에 대해서는 14절의 내용대로, 하나님을 섬기고 명령을 지키며, 금식하고 회개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복을 받고 번성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그들의 생각과는 전혀 반대로 드러나기 때문에, 아무 유익이 없다는 불만과 함께,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문제는 자신들을 의인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복을 받고 번성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방인의 번성에 화가 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 의인은 없습니다. 다만 의인으로 여김 받는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그들은 자기 죄를 알게 됨으로써, 하나님의 긍휼만을 바라고 엎드리는 자들입니다. 이들만이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십자가의 의를 믿게 되는 것입니다. 이들이 하나님의 기준에서 진정한 의인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문제는, 하나님에 대해 반발하고 불만을 가진 것이라기보다는, 자신들을 의인으로 여긴 것에 있습니다. 자신들 역시 의인이 아니라 이방인과 다르지 않은 죄인이었음을 알았다면, 이방인의 번성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죄인 된 자를 구원하시는, 긍휼과 사랑을 바라보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 안에서는, 복의 의미가 달라집니다. 세상에서의 번성이 복이 아니라, 진정한 복으로 오신 그리스도께 속한 자가 되었다는 것이, 복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도에게 불만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