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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강좌(7)】 "상을 미리 목표로 하는 것" 信天함석헌
요한복음 7
상을 미리 목표로 하는 것
그거야 말로, 보수(報酬)를, 다른 건 또 세상 건 또 모르겠습니다만, 종교야 말로 보수를 기다리는 생각을 가지면 안 될 거예요. 그건 『바가바드 기타』엔 아주 분명히 말이 돼있습니다. 결과 생각하지 말아야 돼! 그런데 결과 생각을 하게 되면 이름은 아무리 종교적인 거라 하더라도 거기서도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하나님을 믿으면 이러 이렇게 되지’ 그런다면 그건 벌써 하나님을 믿은 것이 아니야! 그 결과 그것 때문에 그런 거지. 그걸 믿은 거지. 그런 의미에서 진리에 대한 태도는 결국은 보수를 생각할 수가 없어.
그런데 이『성경』에 자꾸 거리낌 되는 것은,『성경』은 상(賞)준단 말이야! 하늘나라가면 상을 얻는다는 말이 있어요. 그러니깐 “아이, 그래도 하늘나라 상을 얻지 않습니까?” 그러지. 그건 아까 나, 내 식(式)대로 하면 그럽니다. 그 전에 너무 너무 상 받는다, 벌(罰) 받는다 하는데 거기 붙어 있기 때문에 그 사람들의 마음에 알아듣도록 말을 하려니까 그래. 상이라면 그러게 뭐라 그랬어요? 이 땅위에서 상을 얻는단 말 안하지 않았어요? 하늘나라 가면 상 받는다, 할 걸 하면 상을 준다 그 말이야! 그러니까 아버지하고 이렇게 장사 조건이 아니야. 주거니 받거니 그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길 그저 주었으니 너희가 바치는 것도 그저 바치는 거지. ‘이걸 바치면 무슨 상을 주겠지?’ 본래 마음에 그런 기대하고 나면 그건 거저 바치는 것 아니니깐. 그런 태도가 있는 한은 진리에 못 간다, 그건 기독교만이 아니고 다른 종교도 다 그런 태돕니다.
하여간 이 사람들이 그때 예수님 말씀에 못 알아들어 낙제를 하고 모르는 것은 그 태도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예수님이 강조하신 것이 메시아를 찾는데 내 양(羊)이요, 목자(牧者)요, 이렇게 비유하는 데가, 속에, 여기 근거를 두고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 같이 나와 양이 하나다”, 그 하나 되는 데, 그 하나가 되는 게 겉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인 그 속에 있다고 그 점을 지금은 강조할 필요가 있지 않은가? 시대 따라 다릅습니다마는 지금 이 시대에 있어선 아마 그 점을 강조해야 하지 않을까, 지금 있는 이 폐단에서 벗어나려면.
질문자 : 질문할 수 있습니까?
함석헌 : 예.
질문자 : 보수에 보상에 대해서는 이게 종교가 성립 안 된다, 그렇게 말씀하셨는데요.
함석헌 : 예.
질문자 : 그럼 전 보수적(保守的)인 그런 신앙……
함석헌 : 예~.
질문자 : 성경은 그럼 문자가 되가지고 이제 문자를 그 말 그대로하면 그것은 하늘나라에서 보상하는 그런 게 많이 나오지 않습니까? 호산나 보고 선 한 싸움 싸우고 가는 길 가서.
함석헌 : 예
질문자 : (몇 마디 안 들림) 그 구절을, 그건 신앙을 권장하기 위한 (잘 안들림) 라고 생각해도 될까요?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함석헌 : 아니, 그건 이제 되풀이 하는 말입니다만, 상이라고 그러는 말은 사실은 상은 값으로 주는 건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상이라고 그랬을 것입니다. 이제 삯꾼에게다가 “이만한 일을 했으니깐 이만한 것을 준다”. 장사는 아니라 그 말이에요. 그런 의미로 상이라 그러면 그건 좋아요. 근데 한 결과 무엇이 오기는 오지만 그것은 이것하고 저걸 결부지어 이러 이렇게 했으니까, 이만큼에 그 댓가로 그렇게는 뭐 바울도 그렇게 생각은 아마 안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미리, 미리 또 설혹 그런 것 있다(고) 하더라도 상을 미리 목표로 하면 그건 안 되지 않아요? 그건 뭐 우리 거기까지, 종교까지 안 가고 학문에 있어서도 안 되는데. 학문에 있어서도 벌써 상 받을 생각을 하면 안 되지 않아요? 그 저 스포츠맨쉽(sportsmanship)이라는 거 뭐예요? 상 생각하지 않고 운동하는 건데, 지금은 말도 안 됩니다. 스포츠맨 정신 없어진지 벌써 오래됐습니다마는, 그런 데가 이 세상이 지금 참 비참한데 아니에요? 스포츠에서만은 그걸 그러는 줄 그렇게 알았거든. 그래서 지금 말로 스포츠정신이라고, 스포츠맨쉽이라고 그랬는데, 스포츠야말로 지금 다 미리 미리 장사를 계획하고 약속하고 계약하고 뭐 그러고 하는데 말할 것 있어요?
질문자 : 종교라는 건 예수뿐이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 찾는 거다, 그렇게 말씀을 하셨는데, 그렇게 말씀을 하셨는데, 그 『성경』이 물론 이제 문자적으로 읽을 적에 하는 이야기입니다만, ‘인간 자신의 범죄 속에서 하나님을 찾을 수 있었겠는가?’ 하는 것도 문제가 되지만, 하나님이 실상을 보여주셨다는 그런 말씀대로 그 실상이라 하는 것, 형태를 말하는 것 아닙니다만 인간이 하나님을 찾았다기보다는 어떤 의미에선 ‘하나님이 직접 인간에게 보여주신 것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드는데 어떻습니까?
함석헌 : 그러니깐 그건 그래요. 모두는 그대로의 느낌으로 사실 그렇죠. 내가 한 것 아니라 참 이것조차도 하나님이 하셨으니깐 그렇지, 하지만 그러는 생각은 그러한 깨달음에 들어가기 전에도 그래도 뭐 열심으로 찾아보는 마음이 있은 다음에 그렇지. 찾지도 않은 사람보고 말이야. 하나님이 신앙 주셔야 됩니다. 노력해 가지고 안 됩니다. 그걸 믿으란 말이요? 망(亡)하란 말이요?(웃음)
그러니깐 이게 내가 말하기 어려운 게 있다구……. 그것은 자기가 실컷 경험에 들어간 다음에 고마워서, 고마워서 ‘아이 하나님 믿는 것까지도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그건 그래요. 허나, 다른 친구한테 권면하는데 믿는 것조차도 “하나님이 주셔야 됩니다” “구원 얻을 사람 못 얻을 사람 뽑아놓았습니다.” 그럼 그 사람은 ‘나는 그럼 어느 축에 들까?’ 나는 그 생각이 아주 싫은……. 나는 그렇게 해선 안 된다는 사람이야.
질문자 : 제 생각에는 말입니다. …… 이길 것만 같은데 말이죠. 사람에는 어쩜 의식이라는 게 있다는 겁니다. 그럼 이 의식(意識)이라는 건 신체의 구조라든가, 이런 신경의 구조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라는 그런 생각이 드는 때가 있습니다. 영(靈)이나 의식이 어떻게……
함석헌 : 의식은 이 생리(生理)에 붙어있는 거야. 아주 그건 인도사람은 옛날부터 그렇게 얘기해! 그러니깐 소위 의식정도가 이것가지고 안 된다, 제일(第一)의 의식은 뭐냐? 그러면 이제 의식이라는 건 대상 없이는 못하지 않아요? 생각이 안 되지 않아요? 가령 우리 이제 눈, 코, 귀, 이제 안‧이‧비‧설‧신(眼耳鼻舌身), 안‧이‧비‧설‧신에 대해서 색‧성‧향‧미‧촉(色聲香味觸), 색‧눈‧빛 뭐 있잖아요? 그거 없이는 생각을 못하거든. 그런데 그게 없이 생각하게 되는 거길 들어가야 그게 정말 ‘참생각’이라는거야. 이제 요가라는 건 그 공부 하는 거예요. 참선이라는 건 그 공부 하는 거예요.
질문자 : 생각은 아무래도 방해가 되는 대목입니다. 사색(思索)한다든가, 뜻이라든가? 하는 건 역시 물체는 아닌데 말입니다. 물체의 본질이 물체는 역시 물체일 수밖에 없는 데. 그 사람에게 어떤 생각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 안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그걸 바깥에서 온다고 하는 것은 이상합니다만 어쨌든지 인간은 인간이 생각할 수없는 그런…
함석헌 : 근데 고런 점은 이제 우리 근래는 심리학도 발달이 되고 하니깐 이다음에 더 밝혀질 줄 압니다만, 난 뭐 그 점을 분명히 하지만 확신을 가지고 이렇게 말할 뭣이 못됩니다. 자 하지만 이렇게 하면, 고 단계가 많은 것 같은데, 어느 정도가 이제 보통 의식이라고 그러고 또 어딜 들어가야만 그 이제 그런 걸 떠난 참 깊은 생각이라고 하는지. 거기 들어간 분들은 아주 확신을 가지고 말하는 것만은 있어요. 그래서 직관이라고, 뭐 직관이라는 건 중(中) 가운데 물체의 매개를 필요로 하지 않고 보는 자리,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보통 생각이라는 건 내가 직접 물체든지, 물체가 아니라면 과거의 물체에 대해서 얻었던 그 기억이라든지, 내가 안 해도 다른 사람이 한 걸 그런 걸 자료로 가지고 이제 이러지 않아요? 그러니까 가령 이제 보시오! 기도하지? “하나님!”, 하나님이라고 할 때, “하나님” 그럴 땐 무슨 표상이 마음에 있지 않아요? 뭐 할아버지처럼 생각을 한다든지, 예수의 십자가를 생각을 한다든지, 그거 아니면 하나님이라 하는 신(神)자를 생각하든지, 서양말로 갇(God) 이라하는 글자를 생각하든지, 한문 글자든지 진짜 뭐든 생각해요. 그것 없이 하나님이라는 거 생각해본 거 있어요? 뭐, 뭔가요? 뭘로든지 표시하는 건데. 그런 그게 하나님이 될 리 없다 그 말이야. 거기 붙어있는 한, 하나님 자리를 알 리가 없다, 그 말이야.
질문자 : 선생님이 쓴『한국역사』에 보면 말입니다요, “우주는 의지의 소산이다” 그랬는데 선생님은 그 의지를 어떤 것으로 그려보셨습니까?
함석헌 : 그건 이 땅 위에 …, 그런데 이건 우리에게 의지가 있는 걸 보니깐 근본의지가 있을 거다, 난 미루어 그 생각입니다.
그래서 그래요. 그것만은, 그러니까 사람의 이성(理性)이라는 게 이성 그 자체가 직접 진리를, 벌써 인도사람들은 이성 가지곤 안 된다 그래요. 이거 저 쇼펜하우어 같은 사람도 이성 가지곤 안 된다, 그런 사람이거든 그러니깐 그것보다도 감정을 들어 존중하고 그러고도 했는데, 보통 우리 생각을 하면 내 눈으로 봐서 내 귀로 들었다, 그래서 이것이면 될 수 있는지 알지만, 이걸로 될 수 없는 줄은 조금 생각해보면 벌써 알아요.
“하나님이 죽었다”는 소리
그런데 여기 이걸로 된다고 하는 건, 상대 이 세계 이걸 가지고 하는 거지, 아니 그 뭐 우리 진리라고, 참이라하는 그 세계를 말하나요? 그러니깐 적어도 그건 어느 무슨 한 단계를 더 넘어야 된다고 하는, 그게 거기 대해서 힘쓴 사람들은 다 경험한 일 인가봐.
우리 이걸, 내 소위 의식이라고 하는 걸, 이대로 긍정을 안 하는 것부터 해요. 이걸 믿을 수가 없어요. 이걸 대중을 할 수가 없어요. 아주 비근하게 아주 쉽게 실 예를 든다면 말이야 글쎄, 누가 그러질 않아요?
그 전에 기독교말로 아니고, 열심으로 얼마동안 이렇게 정신통일을 하고 그러면 개안(開眼)이라고 눈을 떠서 이제 하나님 만나 본다는 거야! 하나님 만나 본다는데 제각기 만나봤다고 그러거든. 한 사람은 해봐도 안 되는데, 너는 하나님 보니깐 어떻더냐? 한 녀석은 갓 썼더라고 하고, 한 녀석은 뭐 사모 썼더라고 하고……(웃음), 이제 우리 동양사람이 하면, 갓 썼다고 그럴 터이고, 한국사람이 그럴 터이고, 서양사람이 한다하면 모자를 썼다던지, 그런 게 그 소위 무슨 환상이라고 하는 거. 비젼이라고 그러는 거. 그게 여기, 이게 심리에서, 여기에서 했던 이게 무슨 조작이 돼가지고 그러는 거지, 하나님 자리 그 정신, 그거이 참, 그 자리 갈 리가 없거든. (질문자가 웃으면서, “선생님은 기독교인이 아닌 것 같습니다. 하하……” 목소리와 함께 청중들의 작은 목소리들이 들림)
인제, 그래두요, 그런 점을…. 아, 이봐요! 참 하나님의 그런 점을, 이 세상 지식에 의해서, 혹은 다른 종교에 의해서 그 따위가 아니라고 하는 걸 벗겨버려야 좀 뭐 더 깊은데 들어갈 수가 있지. 그러니까 이, 우리 생각은 그런 따위에 붙어있으니까 쓸데없는 싸움 자꾸 나온단 말이야. 하나님이 죽었다는 소리도 나오고, 그래 죽을 수 있고 살 수 있고……. 난 그래요. 하나님 죽었다는 말은 하나님을, 하나님을 자꾸 살아계신 하나님이라고 그랬으니까 죽는다는 말 나오는 거 당연해! 살아계시긴 뭘 살아 계시냐? 하나님은, 정말 하나님은 살았다고 할 수도 없고 죽었다고 할 수도 없는 자리가 하나님이지, 뭘 살아계신 하나님이냐? 그건 내가 하나님은 살지 않았다고 하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이 살아계셨다는 말은 어디서 나오냐? 우리가 ‘사는 것은 좋고 죽는 것은 싫다’고 하는 생(生)의 애착이 그게 반영이 돼가지고 자꾸 하는 소리라 그 말이야!
이제 예수님이, 이제 아브라함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무슨 이삭의 하나님이니깐, 산 자(者)의 하나님이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고 하는 그 의미를 두고 내가 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건 예수님도 그렇게 하셨을 리 없지만, 보통 우리가 생각할 때 하나님이라 살았다고 그러는 거는 따지고 보면, 내 이 심리를 분석을 해보면, ‘내가 죽기는 싫고 살기만 좋다’고 하는 그것 때문에 나오는 생각이거든. 그러니까 죽었다는 말 나오거든 “살았으면 죽는 거야” 할 건 당연한 거지. (잠깐 말씀을 멈춤)
그래 난 자꾸 그래요. 내 하나님은, 나 믿는 하나님은 이렇게 메쳐도 안 넘어지고, 저렇게 메쳐도 안 넘어진다, 그런 데에 안 붙어있거든. 상관없는 뭐죠!
왜 인간의 모습대로 하나님을 그리느냐?
근데 이제 아까 그 얘기 합시다. 그 의지라고 하는 그 얘기를 (하면). 인제 나는 그 얘기를, 이제 포이에르바하의『기독교의 본질』이라고 하는 걸 읽다가, 포이에르바하의 『기독교의 본질』은 지금도 많이 인용되는 얘깁니다만, 그 사람 그랬거든. “하나님이 자기 모습대로 인간을 만들었다고 그러지만, 사실 말하면 인간이 자기 모습대로 하나님을 만들었다.” 그 옳거든! “철학적으로 말하면 그걸 어디 긍정하겠소?” 그랬거든! 그러니 웬고 하니. 그러니깐 글쎄, “흑인은 하나님을 그린다면 깜둥이를 그릴 터이요, 백인은 흰백인종을 그릴 터이요, 황인종은 노란 하나님을 그릴 거다”,(웃음) 왜 그런고 하니, 인간이, 그러니까 산 하나님은 이름이 하나님이지, 그 하나님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보기도 하고, 노하기도 하고, 눈물도 흘리고, 그래서 인격신(人格神)이라고 그러지 않아요? 인격신이라는 건 나와 친밀감이 있어서 내 문제를 다 대답을 해준다고 하는 데가 좋긴 좋지만, 철학적으로 생각하면 그건 너무도 빈약한 하나님이란 말야! 왜 그런고 하니, 인간을 조금 더 크게 했을 뿐이지, 그것도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뭐 노(怒)하기도 하고, “거 무슨 하나님이냐?” (웃음 띤 목소리로) 그렇게 말할 때에 할 대답이 없거든.
이게, 적어도 지적으로 생각할 때(는) 절대라, 절대라구 하는 지경을 생각하는 사람한테는 만족이 안 된다, 그 말이야. 그러니까 사람의 이제 생각이 감정에 있고, 감성에 만족도 돼야 하지만, 또 지성에 만족도 돼야 하지 않아요? 근데 사람의 정도 낮을 땐 감성에 만족되기만 하면 좋아. 그러니깐, “아이구 우리 하나님! 만물의 여호와다!” 뭐 “이제 바다를 뭐, 뭐처럼 하시고 물리치고…”, 그게 감성의 만족이거든.
하지만 조금 사람이 이제 지적(知的)으로 깊이 생각하면 뭐냐? 그게 다 우스워 뵌단 말야. 하나님이 뭐 부족해서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느냐?, 하나님이 천지보다 더 크시는데 뭐 안타까워서 사람이 지은 절에 있겠냐? 그런 건 다 깊이 생각해서, 그 사람의 하나님이 훨씬 더 높고 크지 말이야. 우리 인격신이라고 그러면, 그런 생각 할 새 없이 우리의 모든 사정을 알아주는 이, 그저 우리와 같이 짐을 지는 이, 눈물을 닦아주시는 이, 그럭하면 좋아하지만, 그건 그 면에 만족되는 데도 있지만, 이자 얘기대로 우리의 지성이라는 건 많은 걸 지향하건대, 근대(近代) 사람은 더구나 그 점을 자꾸 지향하는데 거기 만족이 안 되니깐 이 사람들한테 유치한 것 같아 미신같이 뵈인단 말야!
그러니깐 그 점을 뭘 열어줄려고 그래야 할 거 아니에요? 하니(까) 그런 점을 생각하면, “하나님이 자기 모습대로 인간을 만들었다”고 그러지만 그런 거 아니라 지금 생각하면 “인간이 자기 모습대로 하나님을 그리고 있다”, 그래 내가 그걸 뒤집어요.
“그건 그렇다! 그렇게 말할 수 있지만 그러나 한 번 더 생각하자! 네가 도대체 왜 네 모습대로 만을 그리길 왜 그리느냐? 그 버릇은 어디에 있냐?”
그러니까 생각이 내가 잘나서, 생각을 내가 하자고 해 하는 것 아니라, 도대체 내게 생각이라는 거 있을 땐 내가 있기 전부터 나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생각을, 이 우주전체에 근본 생각이 있어! 그러니깐 거기서 나라는 거 나왔지 내가 생각을 해 낸 거 아니거든.
그런 의미에서 다시 한 번 뒤집으면, 하나님의 모습대로 이게 나온 거, 하나님의 모습 이것만 아니지. 산도 하나님의 모습을 드러내고, 바다도 모습을 드러내고, 별도 모습을 드러내지만 그 중의 우리들의 마음에 이 지성으로, 감정으로, 이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은, 헌데 제일 알기 쉽게 가장 높은 걸로 계시되는 게, 이 사람의 인간의 형……, 인격적으로 그러니깐, 우리는 인격적으로 돼 있는 거니까니, 우리가 최고의 체험이라면 인격적인 체험이 제일 최고의 체험일 겁니다.
시간 공간을 말할 수 없는 자리
그러니깐, 말로 하면야, 이제 지성의 만족을 하기 위해하면, 간디의 말대로 “하나님은 전능한 이 이니깐, 이런 모양으로 체험이 되고 저런 모양으로……”, 인격신으로도 체험이 됐지만, 또 다신적(多神的)으로, 범신적으로도 체험이 된다, 그럴 뿐만 아니라, 그는 무신론자(無神論者)의 무신론까지도 될 수 있을 거다, 그렇게까지(웃으면서) 그거 재미있는 말 아니요? 그렇게까지도 될 수도 있는, 그러니까 무신론자라 하는 사람들이 말을 무신이라고 그러지만 도리어 뒤집어 생각을 하면 아주 하나님에 대해 지레 철저한 생각 있기 때문에 무신론을 말해! “하나님은 없다” 그러지만, “없다” 하는 말로써 하나님 계신 걸 아주 굉장히 긍정을 하고 있는 태도 아니냐 그말이야, 그렇게 볼 수 있지 않아요?
그러니까 말 가지고 말에 거리껴 그럴 것 없어요. 영원히 그건, 이제 그저 그 점에는, 이제 영원히 신비입니다. 간디가 언제 그 말 했지? “선악(善惡)의 뿌리가 뭐냐?” “악의 근본이 왜 있냐?” “그런 문제 너 해결 못한다.” 인간으로써는 (그것을) 해결 못하는 거고, “인간은 ‘선이 뭐냐?’ ‘악이 뭐냐?’ 판단해 알 수는 있으니깐, 너는 악을 폐하고 선을 했으면 그만이지, ‘악의 근본이 어디에 있냐?’ 그건 거기까지는 모른다.” 그건 좋은 말이에요, 그렇다구 또 전혀 생각을 안 해도 안 되고,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야지.
질문자 : 한 가지 뭐 물어보겠습니다. 유물주의(唯物主義)로 묻습니다. 뭐 다른 거 의논할 것도 아니고.
함석헌 : 예, 예.
질문자 : 그 시간이 더 가면 그리스도라 던지 재림(再臨) 문제 같은 거, 시간이나 공간에다 그 제한을 받지 말고, 내 마음, 내 내적(內的)인 내 마음에 이루어진 일이 아니냐? 말하자면, 객관에 대한 그 변증임을 이제 전혀 내 주관적인 요소인데, 내적이란 여기 맘이 치중을 한다든지……
함석헌 : 예, 예.
질문자 : 거기 대해서, 가령 뭐 예수님이 재림하신다고 하는 것은 어떻다든지, 그런 것도 어떻게 연결, 통합이 되는지요?
함석헌 : 이제 그런 걸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다시 온다” 이러지 않았어요? “내가 다시 온다” 그게 무슨 말일까? 그래 이제 그걸, 물론 그랬으니깐 우리가 그건 생각을 하고, 내가 누군데 그랬겠지만, 또 바울 서한에 말들은 “이제 천사들이 나팔소리와 함께 구름을 타고 오신다” 그래. 그러니 지금은 글자 그대로 구름을 타고 그렇게 생각하면 벌써 올 수 없어지지 않았어요? 지금도 그렇게 믿게, 또 그걸 고대로 믿어지면, 난 믿으라고 그래요, “믿는 것 좋다”고 그래요. (한 단어가 정확하게 들리지 않음) 못 믿어지게 된 사람 다음에 그걸 “아유, 내 억지로 그럴라고 고민 하지 마! 안 믿어져도 괜찮아!, 이제 이 과학 지식을 안본 할머니, 할머니들이 이제 죽으면, 이제 동네에서 죽은…(한 구절을 잘 알아들을 수 없음), 그대로 좋다고, 그대로 믿으라고 그래요, 좋아요, 그래! 그게 무슨, 문구(文句)가 무엇이 되든 상관이 없어요. 그런 지식이, 그걸 알기 때문에 그걸로 발표가 되지만, 중요한건 그 믿는 이 마음의 태도, 여기에 있지, 그 말대로는 아니니까, 아니니까. 우리 철학을 하는 사람에 말에, 그 말이, 인격이 그 걸로는 다 발표가 될라면 그러니깐, 그 말을 통하면 그 뒤에 오는 ‘그리스도를 만난다면 어디로 가 만날까?’ 구름을 타고 온다고 그래! 구름을 타고 온다고 해서 나가면 어디로 가서 만나면 그럼 모를까? 그런 생각을 보면 알 수 있지 않아요? 그러니까 자연히 말을 하게 되면, 또 이렇게 이제 철학적인 그런 태도에서는 시간 공간을 말할 수 없는 자리에 있지. 그 전에, 예수님 오시기 전에 메시아라는 건 그랬지요. 그건 이 세상적인… 그런 메시아니깐 그랬는데, 예수님의 일생은 더구나 그렇게 생각 안 해요. 시간 공간이 어디 있어요?
질문자 : 예수님이 가령 구름을 타고 오신다든지 현재의 심판문제, 여기에 대한 구체적인 문제는 그저 우리의 상상적인 것이라, 현재도 내 주관적인, 내가 영생 한다, 이렇게만 그걸 다 해석을 할 수 있겠는가?
함석헌 : 그런데 예수님이…….
질문자 : (한 마디들을 수 없음)
함석헌 : 이제 우리 믿음이라는 데는, 믿음이 어떤지, 믿음이, 여기 이 보이는 이 세상 같은 건 아니야요.
이 세상에 뭐 어느 그런 거 아니니깐, 이제 영(靈)의 세계, 정신의 세계, 그건 말로 할 수가 없는 지경(地境)입니다. 말로 할 수 없는 건데, 또 말로 하는 수밖에 없어요. 말로 하는 수밖에 없으니깐 천생 빌어다 할 밖에.
한 사람의 신앙의 방해를 미치고 싶지 않다
가령 이제 우리 지금 하나님이라, 시대를 따라서 하나님을 그려봐도 그 모양이 다르지 않아요? 가령 오늘날 이제 나이 많은 할아버지라든지, 수염이 하얗다든지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도, 또 지금은 그것과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잖아요? 그건 하나님 자체에 있는게 아니라, 우리들의 경우에다, 말로 할 수 없는 지경임을 말로 표시하기 때문에, 그래 이 종교에는 자꾸 그런 요새 말로 합니다만, 심볼(symbol)을 자꾸 쓰지 않아요? 뭐 그렇게 써서하는 그거 없이 말할 수가 없어요. 하나님을, 이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그러잖아요? 아버지라는 것도 심볼, 심볼이거든. 그러니깐 비유라 해도 좋고, 비유지. 아버지라는 것은 아버지와 아들이요. 모양은 여기 있는 거지, 여기 있는 거지. 정신의 나라에 그런 거 있을 리가 없어요. 그런데 정신의 나라 것을 말하라니깐 그럴 밖에 할 수가 없지 않아요?
그러니깐 예수님이 “야! 너가 잘못 알아들었다. 하늘나라에는 시집도 안가고 장가도 안 간다.” 그런 점이 그 뭘 비유해 말할 때 아내가 남편의 관계에 한다든지 아버지와 아들관계를 말을 해야 하긴 해야지만 그 점이 하늘나라 가서도 물질계 모양으로 이런 관계가 있다는 게 아니라, 그 거기 지방에, 거기 지경에, 어느 지경을 있는 거기에, 여기에 이렇게 우리 마음에 느껴! “아!……” 이럭허구 할라니깐 이제 그 말을 하는 거지. 가령 우리 사람에게 있어서도 시(詩)는 그렇지 않아요? 시는 직접 그 물체에 관계없지 않아요? 물체, 그걸 위해서, 가령 저기 꽃이 가령 뭐 웃는다든지, 새가 뭐 그런 게. 그거 꽃이나 새를 말하는 것 아니라, 내 이 마음에 오는 심정을 말하는 건데, 그걸, 그걸 빌어서 하잖아요? 그것과 마찬가지예요.
그런데 종교의 세계는 더구나 그렇지 않아요? 그런 건 뭐 그저 저 어린애들 보고 하는 초보 같은 말입니다마는 아직도 그런 데가, 이제 성경을 읽는데 그런데 붙잡혀 있었어요. 그럭하면 자꾸 맞지 않는 부분이 나오지 않아요? 여기 말로,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고 나오고. 그러니깐 그런 면을 극복하기 위해서 이제, 이렇게 젊은 사람들에게 그걸 말을 좀 해 줄 필요가 있어요. 그럭하지 않으면 설령 말에 겉에 거리끼워서 속 뜻은 모르고 말하잖아요?
그러니 지금은 거의 그랬으니깐 어떤 분이 그래서, 나 여기 나와서, 이런데서 말하기 대단히 꺼렸습니다. 그런데 자꾸 그런 날보고 나오자고 그래서 나오긴 나왔습니다만 한 사람의 신앙의 방해를 절대 미치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 나, 나이 많은 할머니한테 가서 “할머니 뭐 천당 있는 줄 아시오?” 그런 말 나 절대 안하거든. 그러지 말라고 그럽니다. 할머니는 고대로 가만히 둬두라고, 고스란히 천당 가면, 면류관 받을 줄 알고 믿다 가면 좋아요.
질문자 : 잘못 믿어지면 어떡합니까?
함석헌 : 예? 예?
질문자 : (웃으면서) 잘못 믿어진다면 고쳐야지요?
함석헌 : 아~니, 잘 잘못이 어디에 있냐? 그러면, 잘 잘못이 이렇게 해서 이 마음에 이 태도에 여기에 있지.
가령 이 보시오! 이제 그 전에 천문학에 지구 중심이고 하늘이 돌아간다고 할 때에는 그건 하나님이 여기 저 우주의 중심을 지구로, 대신 여기 인간을 만물의 영장으로 되고 그랬다, 생각해 좋았거든. 그렇지만 천문학이 발달돼서 태양 중심으로 하고 지구가 돌아간다고 하는 날에 오늘날 그 생각 안해도 괜찮아요. 그것은 기독교 진리와는 상관이 없는 거예요. 없는 건데, 기독교 진리를 표명을 하는데 그걸 빌어오는 건 좋아! 그러니깐 그때 벌써.
‘대통령’도 없어질 거다
지금도 마찬가지지요. 우리 지식에 나가는 정도를 따라서 고쳐, 고쳐 빌어 쓸 말이지 말이야. 아니, 아니, 『요한복음』에서 볼 때 그때는 전쟁할 때 말 타고 하던 시대니깐, “내가 보니깐 하늘에서 붉은 말이 흰 말이 내려오더라” 그러지. 요새 세례 요한이 계시 받는다면 “제트기 나오더라” “ 미그기 나오더라” (웃음) 뭐 하러 애들이 말 타고 싸우는 것 보지도 못했는데, 붉은말 나오고 흰말 나오고 그게 무슨, 이다음에 다 넌센스에요. 노인네가 무슨 말하는지 모릅니다. 이제 붉은말이 왜 붉은말이.
지금까지도 이제 상기까지도 노예제도가 있으니깐 종이 주인 노릇이 돼 있어서 그렇지, 종이 뭐냐? 주인이 뭐냐? 종, 노예제도가 다 없어져 이대로 가는데, 주님이 뭔지나 뜻을 알 수 있는지 아세요? 주님이라 안 그럴 거예요. 지금까지는 그 이상 다른 일 뭐이 없으니까 그래도 좋고 하지만 말이야.
그럼, 이제는 노예제도 때 제일 존경하는 일이 종이 주인한테 대해서 “주인님!” 그러고 하지 “주님이 무슨 소리냐?” 그 글자가 뭔가 하니 그 사회 제도에서 빌어온 거예요. 임금이 제일 높던 시대니깐 “만왕(萬王)의 왕이다” 그러지 말예요. 지금은 대통령은 “대통령이다?” 대통령은 무슨 대통령. 이다음엔 그것도 없어지겠는 데 그런가, 안 그런가 보시오! 그러니 이런 건 인간 세계에, 우리 사는 인간 세계에 좋은 점이 이런 데가 있고, 나쁜 놈들은 옥에 가둬 놓고, 그러니깐 그저 “잘한 놈은 천당에 간다” “못한 놈은 지옥에 간다” 그랬지. 인간 사회에 만일 지옥이 없어진다면 그것 가지고 발표를 못하게 될 거예요. 뭐 구체, 실제로 없어진 날이 온다는 것 아니라, 우리가 그런 날이 오길 목표로 하는 거지만 말아야. 그러니깐 우리 이, 이게 이 인간 세상에 있기 때문에 그걸 빌어가지고 발표해. 그러니깐 그것과는 구별해. 그 발표는 그걸로 됐지만 속에 말하는 건 거 무어냐? 그 쪽을 자꾸 더듬어 보도록. 말 뒤가 뭔가 그걸, 말에 붙어 있으면 안돼요.
근데 “말에 붙어있는 건 누가 그러냐?” 하면 우리 이성이 안 그러고 감정이 그러거든. 감정이 좋은 때도 있지만 그땐 감정이 손해야! 감정은 한번 생긴다면, 이성은 가르쳐 주면 지식은 얼마든지 사용해. 저번에도 저 하여간 대왕린가 가니까 그럽디다. “아, 거 문둥이 지금 다 전염 안 되는 줄 압니다” “미감아 걔들 거 환자가 아닌 줄도 압니다” “약을 쓰면 낫는 줄도 압니다” “그렇지만 그거 가능한 같이 앉는 거…… ” 이게 지식으론 알지만, “그렇지만” 그건 감정이거든. 그럴 때에는 감정을 억누르고라도 이겨야지 어떻게 해요?
질문자 : 저 바깥사람들은, 신앙생활 하지 않는 사람들은 선생님더러 기독교인이라고 그러고 기독교인들은 선생님을 기독교인이라고 안 그러는데…….
함석헌 : 그건 뭐
질문자 : (웃음소리와 함께) 그럴 땐 상심(傷心)이 안 되세요?
함석헌 : 그건 난 상관이 없어요. 난 누구 무서운…, 기독교인이라 하거나 말거나 그건 상관이 없어요. 그건 상관이 없어요. (녹음7, 30: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