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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월 12일 (주현 후 첫 번째 주일, 예수님의 수세일)
요한복음 3:22-36 (세례 요한, 여주동행의 삶을 살다.)
설교자: 김규태 목사(하늘사랑교회)
지금은 하늘나라에 계신 고(故) 이민아 자매님이 있습니다. 이 분은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에게 “절대로 가난해지지 마라. 마음도 영혼도 항상 부유해야 한다. 남보다 나아야 하고 남보다 앞서가야 한다.”는 교육을 받고 자랐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매는 어렸을 때부터 가난하고 비참해지는 것이 가장 싫었다고 합니다. 이분이 10년 동안 미국 캘리포니아 주(州)의 검사로 일하면서, 사건을 한 번 맡으면 잠도 제대로 자지 않고 오직 일에만 집중을 했다고 합니다. 이민아 자매는 남에게 지고 싶지 않아서 엄청난 히스테리를 부리면서까지 일에 집착했는데, 어느 날 한 사건을 맡았다가 재판에서 지게 되었습니다. 배심원들이 ‘무죄!’하고 선고하는 순간, 이민아 자매는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아서 차를 운전하고 한없이 달렸다고 합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집에서 두 시간 거리 되는 곳까지 달렸다고 합니다. 이런 분이 마음이 가난해지고 낮아지는 것을 어떻게 견딜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이민아 자매의 상황을 자꾸 낮게 만드셔서 이 분을 찾아오셨습니다. 광야를 걸으며 마음이 가난해지게 하셔서 결국에는 이민아 자매가 천국을 보고 천국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이민아 자매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당신이 없으면 저는 1초도 못 살아요. 예수님께 딱 붙어 있는 것, 이것이 제게 가장 중요해요. 저는 예수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이혼과 아이의 질병과 죽음, 나 자신의 질병 등으로 내가 예수님께 돌아오기까지 많은 고생을 해야만 했지만, 그것이 생명을 얻는 길이었으니 얼마나 공의롭고 좋은 일인가요?”
-「하늘의 신부」, 이민아(두란노), 「생명의 삶」(두란노), 2020년 1월호. p. 151에서 재인용.
여러분은 이민아 자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려면 우리의 자아가 깨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자아가 깨어지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니 우리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어떤 원로 목사님은 은퇴하신 후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내가 평생 목회하면서 자신의 집을 팔아 바친 교인도 보았고, 자기 땅을 팔아 바친 교인도 보았지만, 자기 성질 뽑아 바친 교인은 한 사람도 보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웃으며 가볍게 들어야 할 말씀 같지만, 참으로 새겨 들어야 할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정말 바쳐야 할 것은 나의 자아입니다. 그래야 예수님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내 안에 분명히 예수님이 계신데 아무 역사를 경험하지 못하는 이유는 내 생각과 고집, 내 성질에 예수님이 치이기 때문입니다.
-유기성,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사람」(규장), 「생명의 삶 플러스」(두란노), 2020년 1월호, p. 83에서 재인용.
우리가 이번 주간에 묵상했던 말씀은 요한복음 2장과 3장이었습니다. 이곳에는 예수님께서 성전을 청결케 하신 이야기, 예수님께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이야기, 예수님께서 율법학자 니고데모를 만난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일들과 말씀을 들으면서 많은 은혜와 감동을 받습니다. 그러니 예수님 당시에 그 일들을 직접 목격한 사람들은 얼마나 더 큰 충격과 감동을 받았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소문을 듣고 예수님 앞에 나아왔습니다. 그 때의 상황을 본문 22절과 23절에는 이렇게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유대 땅으로 가서 거기 함께 유하시며 세례를 베푸시더라. 요한도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세례를 베푸니 거기 물이 많음이라 그러므로 사람들이 와서 세례를 받더라.”
예수님과 세례 요한은 동(同) 시대에, 그것도 서로 멀지 않은 장소에서 유대인들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이 두 분의 사역은 당시 유대인들에게 관심의 대상이 되었고, 자연스럽게 비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세례 요한의 제자 중에 한 사람이 유대인과 더불어 변론이 일어났습니다. 변론의 주제는 정결예식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과연 세례 요한의 세례가 무슨 근거로 사람들에게 정결함을 주는가 하는 문제였던 것 같습니다. 논쟁이 격화되면서, 아마도 유대인은 세례 요한이 주는 세례가 예수님이 주는 세례보다 못하다며 그 권위를 깎아내렸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의 제자는 심기가 불편해졌고, 스승인 세례 요한에게 돌아와 다음과 같이 볼멘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강 저편에 있던 이 곧 선생님이 증언하시던 이가 세례를 베풀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26절).”
이렇게 말하는 제자에게서 여러분은 일종의 불평이나 비교의식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자기 스승이 다른 스승보다 못하다는 비난을 받았을 때 느끼는 그런 부정적인 감정 말입니다.
여러분은 살면서 이런 부정적인 감정을 느낄 때가 언제였습니까? 저도 이런 비슷한 감정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최근에 몇 분과 대화를 하다가 한 분이 어떤 목사님의 리더십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다른 한 분이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아마, 그 목사님은 조그마한 규모의 개척교회를 목회하다가 큰 교회에 부임했기 때문에 그렇게 독단적으로 행동할 거예요.”
제가 이 이야기를 듣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 이야기가 그만 제 귀에 들리고 말았습니다. 듣지 말아야 할 말을 들으면 물로 귀를 씻어내는 사극(史劇)의 한 왕처럼, 저도 그 자리에서 물로 제 귀를 씻어내고 싶었습니다. 저는 이야기의 대상이 되고 있는 목사님이 어떤 분인지도 모르고, 저와 교단도 다르기 때문에 저의 관심을 끌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그분의 리더십 가운데 독단적인 부분이 있더라도 구지 그 원인을 작은 규모의 개척목회만 해 보았기 때문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엄연한 오해이자, 편견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만일 그분의 리더십에 부정적인 면이 있더라도 그것은 그분의 개인적인 특성일 뿐이지, 결코 교회의 규모의 문제가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제 주변에는 저와 같이 작은 규모의 목회를 하면서도 긍정적인 리더십을 가지고 계신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또 작은 규모의 교회를 목회하면서 배우는 소중한 경험들도 있습니다. 물론 저는 이러한 편견이 대부분의 성도들이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경우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저와 같은 작은 교회의 목회자가 느끼는 흔한 경험은 비교의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와 비슷한 나이의 목회자이거나, 비슷한 시기에 신학을 공부했을 경우, 어느 정도 사역의 규모를 가지고 비교하거나, 비교를 당하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때에는 솔직히 저도 마음이 불편해집니다.
아마 스승인 세례 요한에게 찾아가 불평하는 제자의 경우가 그런 경우가 아닐까요? “사람들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선생님, 큰일 났어요. 지금 이러고 있다가는 그나마 있던 손님들마저도 다 빼앗길지 몰라요. 더욱 분발하셔야겠어요.” 제가 조금 각색을 했습니다만, 이와 비슷한 뉘앙스입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그것은 진실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게로 몰려든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세례 요한에게 찾아와 세례를 받은 사람들도 있었기 때문입니다(23절).
자, 이제 우리의 관심은 이러한 불평이나 비교의식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맞추어져야 합니다. 과연 세례 요한은 이 문제를 어떻게 극복했을까요? 또 여러분은 앞으로 겪게 될 문제들에 대해서 어떤 대책을 가지고 계십니까?
먼저 세례 요한이 이 문제를 어떻게 극복했는지 우리 다함께 28절을 읽겠습니다.
“내가 말한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언할 자는 너희니라.”
세례 요한은 이미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분명히 말한 바 있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니며, 그리스도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말하였습니다. 언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까?
요한복음 1장에서, 예루살렘에 있던 유대인들은 세례 요한에게 사람을 보내 “네가 누구냐?”라는 질문을 세 번씩이나 던졌습니다(요 1:19,21,22). 그 때 세례 요한은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요 1:20).”고 분명히 대답했습니다. 오히려 세례 요한은 선지자 이사야의 말을 인용해 “나는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왜 세례 요한은 자신을 가리켜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표현했을까요? ‘외치는 소리’는 사람들에게 들려지기 위한 것입니다. 그것이 목적입니다. 그러나 ‘외치는 소리’는 사람들에게 들려진 후에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맙니다. 그것이 특징입니다. 세례 요한이 자신을 가리켜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표현한 것은 자신의 사명이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알리는 것에 있음을 나타낸 말입니다. 또 세례 요한은 자신의 사명을 다한 뒤에는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처럼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사라져버려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오직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일만을 자신의 사명으로 여기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 사명을 이루는데 있어서 더욱 겸손한 자세로 사역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장 27절에서, 세례 요한은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하기 못하겠노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과연 신발 끈을 누가 풀어 줍니까? 주인입니까? 종입니까? 종입니다. 세례 요한 자신은 그리스도의 신발 끈을 풀기에도 부족한 종이라는 겸손한 자세로 사역하였습니다. 비록 자신은 물로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지만, 자기 뒤에 오시는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 것이라며 더욱 겸손한 자세로 사역하였던 것입니다.
또 세례 요한은 말로만 그리스도를 증언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의 삶으로 그리스도를 증거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장 35절 이하에서, 세례 요한은 자신을 따르던 두 제자들과 함께 서 있다가,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보고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증언하였습니다. 이 증언을 들었던 세례 요한의 두 제자들은 세례 요한을 떠나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그 두 제자 가운데 한 명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였습니다. 안드레는 처음에는 세례 요한의 제자였으나, 세례 요한의 증언을 계기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된 것입니다. 또 안드레는 자신의 형제였던 베드로를 예수님께 이끌었고, 베드로는 예수제자 공동체의 리더가 되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을 따르던 제자들이 하나, 둘씩 자신을 떠나 예수님에게로 모여드는 것을 보아야만 했습니다. 심지어 세례 요한이 세례를 베푸는 것보다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세례를 베푸는 것이 더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급기야 세례 요한은 유대인과 변론했던 자신의 제자의 불평까지 들어야만 했습니다.
외적인 사역에 위기가 닥쳐오고, 다른 사역자와의 비교의식이 내면에서 고개를 들 때처럼 고통스러운 때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위기의 때야말로 사역자의 자세를 가다듬을 수 있는 좋은 기회의 때입니다.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요 3:27).”
세례 요한에게 있어서 자신의 뜻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바로 선 세례 요한의 마음속에는 충만한 기쁨이 존재했습니다.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만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에 대한 기쁨이었습니다.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요 3:29).”
여기서 말하는 신부는 이스라엘을 가리키고, 신랑은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는 세례 요한 자신을 가리킵니다. 세례 요한은 결혼식의 주인공이 아니라 들러리로 서 있습니다. 국어사전에서 들러리는 신랑이나 신부를 식장으로 인도하고 거들어 주는 사람이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물론 결혼식장에서 가장 큰 기쁨을 누리는 사람은 결혼 당사자인 신랑과 신부일 것입니다. 그러나 비록 들러리는 결혼 당사자는 아니지만, 신랑과 신부를 도와 결혼식이 원만하게 치러지는 것만으로도 기쁨을 누립니다. 이것이 세례 요한의 영성이었습니다. 소위 ‘들러리의 영성’, ‘2등 영성’인 것입니다.
‘들러리의 영성’, ‘2등 영성’을 소유한 자는 이러한 상황이 오히려 더욱 그리스도를 증언하기에 좋은 상황이 됩니다. 내가 죽을 때 그리스도가 사는 것이고, 내가 깨어질 때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스승인 세례 요한을 찾아가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라고 불평했던 제자는 아직도 깨어지지 않은 자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세상적인 성공의 가치관이라는 딱딱한 껍데기에 둘려 쌓여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잘 알지 못하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스승인 세례 요한은 이 때를 기회로 삼았습니다. 자신이 약할 때가 그리스도를 증거하기에 가장 좋은 때로 여겼습니다. 세례 요한은 제자들 앞에서 다시 한 번 그리스도를 증거합니다. 과연 세례 요한이 증언하는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우리 한 음성으로 35절과 36절을 읽겠습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의 손에 주셨으니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세례 요한의 증거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로부터 오시는 이(31절)”요, “하나님이 보내신 이(34절)”요,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시는 “하나님의 아들(36절)”이십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의 삶으로 그리스도를 증거하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어떻게 알았을까요?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기 위해 세례 요한에게 나오셨을 때, 세례 요한은 이전에 한 번도 예수님을 만나본 적이 없었습니다. 31절과 33절에서, 세례 요한이 반복적으로 고백하는 내용은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였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세례 요한은 이전에 한 번도 본 적이 없던 예수님을 가리켜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 1:29).”라고 증언하였습니다. 어떻게 세례 요한은 자신도 잘 알지 못했던 예수님을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수많은 대중들 앞에서 증언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세례 요한이 여주동행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여주동행(与主同行)이 무엇입니까? 주님과 더불어 동행하는 삶입니다. 구체적으로 세례 요한은 어떻게 여주동행하였나요?
첫째로,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에 이끌려 살았습니다.
요한복음 1장 33절 이하에서, 세례 요한은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베풀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세례 요한은 이전에 한 번도 예수님을 만나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례 요한을 불러 그리스도에게 세례를 베풀라는 지시의 말씀을 내리셨습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의 경험이나 감정에 얽매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얽매였기에 예수 그리스도에게 세례를 베풀 수 있었던 것입니다.
둘째로, 세례 요한은 성령에 이끌려 살았습니다.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노라 하니라.”
세례 요한은 성령에 이끌려 살았습니다. 세례 요한은 성령께서 비둘기 같이 예수님 위에 내려오는 것을 보고는 그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는 분인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세례 요한은 담대히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증언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도 세례 요한과 같이 매일의 삶 속에서 말씀과 성령에 이끌려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여주동행의 삶을 살아갈 때 우리의 입술과 삶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로 증거 될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매일의 삶 속에서 말씀과 성령으로 여주동행하게 될 때, 열등감과 비교의식을 심어주는 세상적인 가치관으로부터 자유하게 될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여주동행의 삶을 통해 기쁨이 충만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우리들교회를 담임하시는 김양재 목사님이 다음과 같은 글을 썼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다니면서 직분 타령을 합니다. 직분이 없어서 쓰임 받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정말 많습니다. 그런데 제가 처음 QT모임을 시작했을 때, 제 직분은 서리 집사였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이 전할 말씀을 주시니까, 당시 담임 목사님의 요청으로 교회 내에서 QT 모임을 인도하게 되었습니다. 쟁쟁하신 목사님들 앞에서 QT 강의를 하고, 해외 유학생들에게 말씀을 전하는 KOSTA 집회에도 여러 번 초청받았습니다.
지금도 저는 외적으로는 그냥 할머니입니다. 하나님이 왜 저를 쓰시는지, 왜 교회를 부흥케 하시는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냉난방이 안 되고, 간판도 없이 학교 체육관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주변에 아파트 단지가 있는 것도 아니고, 관공서와 회사 건물 밖에 없었습니다. 안 될 조건만 다 갖추었는데도 하나님은 저를 일꾼으로 사용해 주셨습니다. 제 힘으로 된 것이 하나도 없고, 하나님이 언제 가져가셔도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자기가 가진 것을 남과 비교할 필요가 없습니다. 직분이 없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기뻐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인정을 못 받아도 말씀의 궤 옆에 있는 것이 최고 복입니다. 야단을 맞고 핍박을 당하고 자리에서 밀려나는 일이 있어도 포기하지 마십시오. 도리어 그것 때문에 더 하나님께 가까이 가십시오. 말씀을 늘 가까이 하고 그대로 순종하면 반드시 하나님이 써 주십니다.
-김양재, 「말씀이 들리는 그 한 사람」(두란노), 「생명의 삶」(두란노), 2020년 1월호, p. 71에서 재인용.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이 땅에서 기쁨이 충만한 삶을 누릴 수 있을까요?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이기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데 왜 당신은 그 모양, 그 꼴로 계속 살아가려고 해요?”라며 당신에게 끊임없이 압력을 가할 때, 그 때에도 여러분이 흔들리지 않고 기쁨이 충만한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예수님 때문에 잠시 기쁨과 평안을 누리다가도, 물질과 명예와 성공이라는 세상적인 가치관들 앞에서 우리의 기쁨은 온데 간데도 없이 사라져버리고, 자조하며 주저앉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세례 요한처럼 여주동행하십시오! 날마다 말씀을 묵상하고, 성령의 불이 타오르게 하십시오.
저와 여러분은 우리의 기쁨의 근원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알아가고, 세상에 더욱 힘 있게 증거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인도 가운데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어떠한 핍박과 유혹이 우리에게 몰려와도 저와 여러분은 말씀과 성령 안에 더욱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말씀과 성령 안에 더 깊이 거할수록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나에게 주신 사명이 무엇인지 더욱 새롭게 깨달아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저와 여러분의 삶 속에서 기쁨으로 충만한 삶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