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세상의 모든 시조 : 전정희 시인 ♣ -2020년 3월 5일 목요일-
살구꽃이 필 때
누가 담벼락을 살며시 넘어다본다
달도 지고 삽살개도 깜빡 졸고 있을 때
가시나 발소릴 벗어들고 월장하고 있는가베
빗소리
누가 창 밖에서 모스를 타전한다
돈돈돈 돈줘 돈돈 돈돈 줘돈 쩌쩌쩌
쯧쯧쯧 풀리지 않는 암호 같은 발신음
물에도 때가 있다
유리잔에 물을 담아 양파를 길러보면 파랗게 가라앉는 물때를 볼 수 있다 그렇게 맑은 물에도 때가 숨어 있었을까
고인 물은 썩는다고 말들을 하겠지만 물은 썩으면서 양파를 키워내고 물때를 가라앉히고 때를 버리고 물이 된다
물속에 돌을 던지면 파문이 일어난다고? 바다는 출렁이며 제 몸을 헹궈내고 저 세상 때를 지우고 고기들을 풀어 놓네
흐르는 개울에도 이끼가 들러붙고 가라앉은 낙엽들은 물고기 집이 되고 한 세상 흘러가다가 흐려지는 물의 내력
고구마 촉이 터지듯
베란다 한 구석에 먹다가 남겨뒀던 겨울이 지나도록 잊고 지낸 고구마 몇 개 새순이 툭툭 불거졌다 물 한 모금 먹지 않고
네게로 가는 길이 천지사방 막혔는데 견딜 수 없었나 보다 뾰루지 같은 촉이 터졌다 흙속에 닿기도 전에, 그대에게 가기도 전에
봄이 찾아오는 길 어디에도 없건마는 꽃씨들은 제 껍질을 깨물어 촉이 트고 천지에 봄기운 터져 견딜 수 없이 터져
멸치를 끓이며
풀어주랴, 추적대는 장맛비에 젖어가는 무거운 가장의 어깨 헛헛한 시린 속을 간간한 멸치국물로 따뜻하게 풀어주랴
동해가 통째로 빠진 작은 그 몸뚱어리 비릿한 갯내음이 마디마디 배어있는 비등점 열탕을 넘어 해체되는 살 냄새
뼛속까지 우려내랴, 끓을수록 가벼운 몸 함께 했던 시간들을 하나하나 불러내어 몸속에 갇힌 바다를 다시 빠져 나온다
♠ 나누기 ♠
전정희 시인은 경남 의령 출생으로 199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으로 등단했습니다. 시조집『물에도 때가 있다』『자작나무에게』『백두산 가마타고 오르는 슬픈 얼굴』등이 있습니다. 시조선집『자작나무에게』에 수록된 다섯 편을 소개합니다.
단시조「살구꽃이 필 때」는 퍽 흥미진진한 시편입니다. 살구꽃이 피는 것을 두고 누가 담벼락을 살며시 넘어다본다, 라는 동화적인 발상은 단번에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정말 누가 넘어다볼까, 하는 호기심이 발동합니다. 달도 이미 지고 삽살개도 깜빡 졸고 있을 때이군요. 화자는 더욱 흥미진진하게 가시나 발소리를 벗어들고 월장하고 있는가베, 라고 능청을 떱니다. 있는가베, 라는 시어가 능청에 의미를 더합니다. 곧 살구꽃이 필 것입니다. 살구꽃 핀 마을은 어디나 고향 같은 정경과 함께 「살구꽃이 필 때」를 오래 기억하고 싶군요.
「빗소리」는 빗소리에 대한 탁월한 의미 부여입니다. 누가 창 밖에서 모스를 타전한다, 라고 하면서 특이한 경청을 보입니다. 돈돈돈 돈줘 돈돈 돈돈 줘돈 쩌쩌쩌, 라는 몇 가지 신호음이 눈길을 끕니다. 모스는 점과 선을 배합하여 문자ㆍ기호를 나타내는 전신 부호이지요. 미국의 발명가 모스가 고안한 것으로 특히 무선 전신ㆍ섬광 신호 따위에 쓰입니다. 빗소리를 모스 부호로 인식하고 있는 것 자체가 새로운 착상입니다. 화자는 빗소리를 두고 쯧쯧쯧 풀리지 않는 암호 같은 발신음이라고 말하면서 우리 삶 가운데 무언가 잘 풀리지 않는 문제를 상기시킵니다. 이렇듯 빗소리는 또 다른 의미로 우리의 감성을 잔잔히 일깨우고 있군요.
「물에도 때가 있다」는 호흡이 긴 시조입니다. 아주 맑은 물에 무슨 때가 있을까 싶어도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종종 물때를 봅니다. 희한하다 싶어도 물에도 때가 있어 사물의 바깥쪽에 흔적을 남깁니다. 유리잔에 물을 담아 양파를 길러보면 파랗게 가라앉는 물때를 볼 수가 있지요. 어쩜 그렇게 맑은 물에도 때가 숨어 있었을까 의심스럽기까지 합니다. 고인 물은 썩는다고 말들을 하지만 물은 썩으면서 양파를 키워냅니다. 물때를 가라앉히고 때를 버리고 물이 됩니다. 물속에 돌을 던지면 파문이 일어나지요. 바다가 출렁이며 제 몸을 헹궈내고 저 세상 때를 지우고 고기들을 풀어 놓는 것에서 그 뜻을 찾을 수 있겠습니다. 흐르는 개울에도 이끼가 들러붙고 가라앉은 낙엽들은 물고기의 집이 되지요. 한 세상 흘러가다가 흐려지는 물의 내력은 그러합니다. 물에도 때가 있다는 것을 이렇게 시로 명징하게 증명해 보이는 시인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고구마 촉이 터지듯」는 생명의 신비와 내밀한 기운을 육화하고 있군요. 베란다 한 구석에 먹다가 남겨뒀던, 겨울이 지나도록 잊고 지낸 고구마 몇 개가 새순이 툭툭 불거졌습니다. 겨우내 방치해 두어서 물 한 모금 먹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화자는 그 사실을 지켜보면서 네게로 가는 길이 천지사방 막혔는데 견딜 수 없어서 뾰루지 같은 촉이 터졌다고 말합니다. 흙속에 닿기도 전에, 그대에게 가기도 전에 그런 사태가 일어난 것이지요. 봄이 찾아오는 길 어디에도 없지만 꽃씨들은 제 껍질을 깨물어 촉이 트고 천지에 봄기운이 터지고 또 견딜 수 없이 터져서 결국은 봄이 봄답게 만화방창 눈부시게 꽃필 것을 예견하는 시편이군요.
「멸치를 끓이며」는 시인의 초기 작품입니다. 이 작품을 발표하면서 문단의 주목을 받았던 것을 기억합니다. 뛰어난 감성으로 남달리 치열한 생명의 노래를 불렀기 때문이지요. 첫 마디가 인상적입니다. 풀어주랴, 추적대는 장맛비에 젖어가는 무거운 가장의 어깨 헛헛한 시린 속을 간간한 멸치국물로 따뜻하게 풀어주랴, 라는 언술이 그렇습니다. 멸치국물이 능히 시린 속을 다스려 줄 것이라는 믿음이 가는 첫수입니다. 멸치는 동해가 통째로 빠진 작은 몸뚱어리로 비릿한 갯내음이 마디마디 배어있어 비등점 열탕을 넘어 해체되는 살 냄새가 후각을 따뜻하게 자극합니다. 그래서 뼛속까지 우려내려고 합니다. 끓을수록 가벼운 몸을 위하여 함께 했던 시간들을 하나하나 불러내어 몸속에 갇힌 바다를 다시 빠져 나옵니다. 온몸을 던진 멸치의 다함없는 헌신입니다. 이렇듯 「멸치를 끓이며」는 생명의 노래, 회복의 찬가입니다.
전정희 시인의 시편들은 이채롭습니다. 삶의 맨 밑바닥까지 내려가서 건져 올린 밀도 높은 사유로 빚어졌습니다. 곁에 두고 애송하시기를 권합니다. 새로운 기운을 공급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천지에 봄기운이 견딜 수 없이 터지는 때입니다.
2020년 3월 5일 <세모시> 이정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