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자여, 열 번째로 보살의 진실행(眞實行)이란 무엇입니까.
이 보살은 진리의 말을 성취하고 그 말대로 행하고 또 행하는 대로 설법합니다.
보살은 삼세 부처님들의 진실의 말을 배우며 삼세 부처님들의 본성에 들어가 삼세 부처님들의 공덕과 함께 합니다.
보살은 또 다음과 같이 생각합니다.
'일체 중생이 한량없는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을 보고 나는 이것을 구하려고 생각한다. 만약 아직 중생을 구하기 전에 스스로 위없는 최고의 깨달음을 이룬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나는 먼저 보살의 대원을 만족한 후,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위없는 보리와 무여 열반(無餘涅槃)을 얻게 하며 성불케 할 것이다.
왜냐하면 중생은 나에게 의뢰하여 보리심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다. 나 자신이 보리심을 일으켜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온갖 종류의 지혜를 얻게 하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일체 중생 가운데 가장 으뜸이다. 왜냐하면 중생에게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일체의 암흑을 떠나 있다. 왜냐하면 중생의 끝이 없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선을 거두고 있다. 왜냐하면 삼세 부처님들에게 수호되고 생각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보살은 본래의 서원을 버리지 않기 때문에 최고의 지혜에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보살은 일체 중생의 바람에 응하여 교화하고 인도하며 그 본래의 소원에 따라 중생의 소원을 만족시키고 모두 청정케 합니다.
보살은 생각 생각마다 널리 시방의 세계에 유행(遊行)하며, 생각 생각마다 한량없는 부처님 나라에 두루 나아가며 생각 생각마다 한량없는 부처님들을 만나 뵙니다.
보살은 여래의 자재한 신통력을 나타내며, 그 마음은 법계와 허공계와 동등합니다. 그 몸은 한량없어 중생의 바람에 응하여 나타나고, 몸과 마음 모두가 방해를 받는 일이 없으며 의지함이 없습니다.
보살은 자신 가운데 일체 중생, 일체 법과 삼세의 여러 부처님들이 모두 나타나 있습니다.
보살은 중생의 갖가지 생각과 갖가지 욕망과 갖가지의 업보를 알며, 중생의 요구에 응하여 그 몸을 나타내고 중생의 번뇌를 가라앉힙니다.
보살은 대비심에 머물러 부처님의 큰 가르침을 실천하며 적정(寂靜)의 세계를 관찰하고 있습니다. 보살은 또 부처님의 위신력을 얻어 자유자재로 보배로 엮은 그물과 같은[因陀羅綱]법계에 들어 여래의 해탈을 성취하고, 지혜의 큰 바다를 관찰하여 항상 일체 중생을 위해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보살의 진실행입니다."
그때 부처님의 신통력으로 시방의 모든 세계가 여섯 가지로 진동하였으며, 하늘에서 꽃비, 향비, 영락의 비, 보배의 비가 내렸다. 또한 하늘의 광명은 두루 일체를 비추고 하늘의 음악은 스스로 미묘한 울림으로 퍼져나왔다.
그때 수 없는 불국토에서 수 없는 보살들이 와서 저마다 공덕림보살에게 말하였다.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불자여, 그대는 능히 여러 가지 보살의 행을 설법해 주셨습니다. 우리들은 당신과 같은 이름인 공덕림이며 우리들의 국토는 공덕당(功德幢), 우리들의 부처님은 보공덕(普功德)입니다.
불자여, 우리들은 부처님의 신통력을 받고 이 국토에 와서 당신의 설법을 증명합니다."
(<화엄경> 제 17장 십행품(十行品)
- (‘서재영의 불교 기초 교리 강좌’에서)
주님이 나의 빛, 나의 구원이신데,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님이 내 생명의 피난처이신데,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랴?
나의 대적자들, 나의 원수들, 저 악한 자들이, 나를 잡아먹으려고 다가왔다가 비틀거리며 넘어졌구나.
군대가 나를 치려고 에워싸도, 나는 무섭지 않네. 용사들이 나를 공격하려고 일어날지라도, 나는 하나님만 의지하려네.
주님, 나에게 단 하나의 소원이 있습니다. 나는 오직 그 하나만 구하겠습니다. 그것은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살면서 주님의 자비로우신 모습을 보는 것과, 성전에서 주님과 의논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재난의 날이 오면, 주님의 초막 속에 나를 숨겨 주시고, 주님의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감추시며, 반석 위에 나를 올려서 높여 주실 것이니,
그 때에 나는 나를 에워싼 저 원수들을 내려다보면서, 머리를 높이 치켜들겠다. 주님의 장막에서 환성을 올리며 제물을 바치고, 노래하며 주님을 찬양하겠다.
내가 주님을 애타게 부를 때에, 들어 주십시오. 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응답하여 주십시오.
주님께서 나더러 "내게 와서 예배하여라" 하셨을 때 "주님, 내가 가서 예배하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으니,
주님의 얼굴을 내게 숨기지 말아 주십시오. 주님의 종에게 노하지 마십시오. 나를 물리치지 말아 주십시오. 주님은 나의 도움이십니다. 나를 버리지 마시고, 외면하지 말아 주십시오. 주님은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나의 아버지와 나의 어머니는 나를 버려도, 주님은 나를 돌보아 주십니다.
주님, 주님의 길을 나에게 가르쳐 주십시오. 내 원수들이 엿보고 있으니, 나를 안전한 길로 인도하여 주십시오.
그들이 거짓으로 증언하며, 폭력을 휘둘러서 나에게 대항해 오니, 내 목숨을 내 원수의 뜻에 내맡기지 마십시오.
이 세상에 머무는 내 한 생애에, 내가 주님의 은덕을 입을 것을 나는 확실히 믿는다.
너는 주님을 기다려라. 강하고 담대하게 주님을 기다려라.
오늘도 화엄경에서 "나는 일체 중생 가운데 가장 으뜸이다. 왜냐하면 중생에게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다."를 보자.
자뻑으로 살던 내가 요즘 많이 위축이 되었다. 내가 말하는 지식이 정말 내가 터득한 것이냐에 대한 자기 점검 때문이다. 글쓰기 수업을 할 때는 내 경험이 녹아 있어 감정을 듬뿍 실어 강하게 말했는데, 숲 이야기를 할 때는 아직도 스스로에게 야박하게 군다. 정말 내가 이 말을 해도 되나, 하는 심정이다. 숲 이야기를 하고 싶어 미칠 지경이 되는 순간이 되기까지의 홀로 공부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흐르다 보니 순식간에 숲해설을 하게 된 과정이 내게 자신감 부족으로 나타나는 것 같다. 실제로 너무 많은 것을 모르고도 있다.
글쓰기는 자기 삶의 기록이다. 사는 만큼 언어로 옮기면 된다. 많은 지식이 필요 없다. 열심히 자신의 삶을 성찰해내면 된다. 아주 간단한 구조이다.
하지만 숲해설은 많은 지식을 요구한다. 특히 내가 자주 접하지 못하는 이과 공부를 많이 해야 한다. 합리적 의심을 갖고 책을 보고 유튜브를 보고 주위 사람들에게 묻기도 하는데, 여전히 내 머리에서 순탄하게 돌아가지 않는다. 더 큰 문제는 며칠 지나면 까맣게 잊는다. 여러 모로 난감하다.
그래도 살아야 하니 열심히 해보자. 내가 가장 으뜸이라는 자세로, 자뻑의 시건방진 태도로 또 달려가 보자. 파이팅!
다음으로 “그때 부처님의 신통력으로 시방의 모든 세계가 여섯 가지로 진동하였으며, 하늘에서 꽃비, 향비, 영락의 비, 보배의 비가 내렸다.”를 보자.
이 문장을 이렇게 바꿔 써보자.
“그때 부처님의 신통력으로 모든 것은 정지하였다. 텅 빈 공간이 적막으로 내려앉았다.”
직접 갖지는 못해도 주변 장치를 통해 정신세계를 표현하려는 것, 이는 소유가 우리를 즐겁게 한다는 본능과 일치한다. 그래서 나의 <나무수상록-소유냐 존재냐>은 잠시 중단되고 있다. 무소유는 연결을 끊는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존재 이유로 성립되지 못한다. 인식의 세계에서만 무소유는 있을 뿐이다. 그러면서 욕구를 품는다. 짧은 문장 즉 시로 내 생각을 만들어가는 일에 몰입하려 한다. 재미있을 것 같다.
오늘 시편에서 “나의 아버지와 나의 어머니는 나를 버려도, 주님은 나를 돌보아 주십니다.”를 보자.
강렬한 문장이다. 실제로 부모가 아이들을 버리는 일들이 있으니 이 문장은 많은 사람들을 사로잡을 것 같다. 외롭고 힘들 때 기댈 수 있는 문장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존재에게 최선을 다해 기도를 하는가 보다. 그 원리 구조는 무엇일까? 의심은 믿음을 꺾는다. 그냥 믿어라.
<식물의 죽살이>에 나오는 글이다.
[염분이 많은 토양에서 자라는 식물 대부분은 물을 충분히 주어도 시든다. 염분이 많은 토양은 물의 함량이 뿌리보다 적기 때문에 물이 뿌리에서 토양 쪽으로 나간다. 많은 양의 물이 세포에서 나가면 액포가 수축하고 세포막은 세포벽으로부터 떨어지게 되는데, 이 현상을 원형질분리(plasmolysis)라고 부른다. 원형질분리 현상이 오래 지속되면 세포는 죽는다. 그렇지만 해초나 바닷가 소금이 많은 사막에 적응된 속씨식물은 원형질분리 없이 잘 살 수 있다. 그런 식물은 외부보다 더 높은 농도의 염분을 체내에 지님으로써 물을 계속 세포 안으로 들어오게 하는 것이다.]
기어코 산다는 것에는 천편일률적인 시스템은 자리잡을 수 없다.
<꽃은 알고 있다>에 나오는 글이다.
[스트리키닌은 스트리크노스 속 나무와 관목을 통해 우리에게 잘 알려진 알칼로이드 독소로 이 식물들은 인도 남부가 원산지다. 강력한 신경 독인 스트리키닌은 애거서 크리스티 같은 작가들이 살인 미스터리에 활용한 독으로 유명해졌다. 오늘날의 살인 사건에서는 명백한 독물로 간주된다. 하지만 미나리아재비과의 델피니옴, 모란, 매발톱꽃처럼 치명적인 알칼로이드를 조직에 축적하는 식물들 역시 그렇다. 2009년 런던 서부에서 라크히비르 카우르 싱이라는 여성은 남자 친구가 더 젊은 여성과 만나 자기를 버렸다는 이유로 카레에 미라아재비과 식물인 바꽃을 넣은 사간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아름다운 보라색 꽃을 피우는 이 식물은 모든 부분에서 독성이 강한대, 그 효과 가운데 하나는 운동 기능 약화로 마비를 일으켜 결국 심장과 폐의 기능을 방해한다. 그런 이유로 이 식물은 스트리키닌과 마찬가지로 아주 예전부터 살인에 사용되었으며, 카레를 먹은 피해자는 구토를 하고 나서 시력을 잃고 팔다리를 쓰지 못하게 되었으며 병원에 도착한 지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아 사망했다.
바꽃속 안에는 200여 종의 식물이 있다. 이 식물은 다양한 방식으로 사용되었는데 고대 로마시대에는 범죄자와 적을 죽이는 데 쓰였고 중세에는 전쟁 때 화살촉에 발라 적군을 독살하는 데 쓰였다.]
꽃은 아름답지만 꽃이 스스로를 보호하는 물질은 위험하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보자.
[또 어떤 날에는 바다가 창문 밑부분에만 그려져 나머지 다른 부분은 수평선 띠로 서로를 밀쳐 내는 수많은 구름들이 가득했으므로 유리창은 마치 화가의 구상, 또는 그의 특징적인 기법으로 그려진 ‘구름 습작’을 보여 주는 듯했다.]
상상의 묘사들이 기막히다.
헤세의 <싯다르타>를 보자.
[카마스와미는 그에게 자기 사업 이야기를 해주었고, 그에게 상품과 광고를 보여주었으며, 상품의 특색을 나타내는 갖가지 상표를 보여주었다.]
세상에 공짜 밥은 없다.
오늘도 게송으로 마무리하자.
오늘 하루도 긴 시간이 남았다.
더워서 그런가.
오늘 하루는 짧을 것 같다.
마음을 고쳐먹어 보았다.
오늘 하루라 생각하지 말고
그저 흐른다고 생각하고
몸과 마음을 거기에 얹어 흘러가자